제독 접반사 장운익이 전투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다
정유년 12월 25일 성첩(成帖)한 제독의 접반사 장운익(張雲翼)의 치계에,
"이달 16일 우승지가 성첩(成帖)한 유지(有旨)에 ‘상께서 남하(南下)하시려고 한 계획이 군문(軍門)의 저지로 부득이하여 중지됨에 따라 군대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니, 일로(一路)의 파발을 신명(申明)시켜 군중(軍中)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소식을 매일 치계하라.’ 하였는데, 이를 25일 신시(申時)에 신이 울산 서낭당 앞 기슭에서 받았습니다.
제독의 거동과 군문의 소식은 이미 12차례나 치계했는데 필시 도중에서 체류되었을 것입니다. 어젯밤 경리와 제독이 적의 소굴 맞은 편 봉우리에서 묵었고 각 병영의 군사와 말들은 다 야영(野營)하였으며 밤새도록 포를 쏘았습니다. 오늘 아침 또 남병(南兵)과 우리 아군들로 하여금 토굴을 공격하여 성을 무너뜨리고 넘어들어가려 했으나, 청정이 현재 그 속에 있으면서 사면으로 흙담을 쌓았고 탄환이 비오듯 하여 사람이 발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군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고 아군들도 사상자가 많았으며 진 유격(陳遊擊)도 총탄에 맞아 할 수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영(陣營)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경리와 제독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계속 산위에 머물면서 내일 다시 성을 공격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로잡은 왜적 4명과 도망쳐 나온 여인들이 다들 ‘토굴 속에는 양식도 없고 물도 없어 형세상 오래 지탱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다른 곳에서 많은 구원병이 도착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또 저들이 서생포로 도망쳐 들어가면 형세가 더욱 어려워져 섬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매우 걱정됩니다."
하였고, 정유년 12월 27일에 성첩(成貼)한 제독의 접반사 장운익의 치계에는,
"이달 25일 이전의 일은 이미 13차나 치계하였습니다. 26일에는 인마(人馬)를 쉬게 하고 하루의 양식을 방출하였으며, 이어 도원수(都元帥)에게 전령(傳令)을 보내어 아군들로 하여금 나무 방패와 마른 풀을 지고 성 아래로 진격하여 적의 진영을 태우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도원수 권율이 직접 진영에 나아가 독전하면서 영산 현감(靈山縣監) 전제(全悌)와 출신(出身) 1인, 군정(軍丁) 1명을 베어 조리돌리니, 군병들이 감히 진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여 사상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진을 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어제 오후부터 오늘밤까지 비가 멈추지 않아 인마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쳤고 진흙이 무릎이 빠질 정도였습니다. 토굴을 함락시키는 것은 성을 공격하는 것보다 백배나 어려운데 날씨까지 이와 같으니 매우 민망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 나라의 잡혀갔던 어린아이 4명과 여인 2명이 도망쳐 나와서 ‘청정 등 다섯 장수가 아직 성 안에 있는데 군량이 이미 떨어진 데다가 샘물도 없어 밤중에 몰래 성 아래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가지만 졸개들은 마실 수가 없어서 성안에 있는 왜적들이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 남강(藍江)에 정박하고 있던 왜선 30여 척이 비오는 틈을 타서 한꺼번에 전진해와 육지에 오르려고 하자 좌협의 군마(軍馬)가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면서 한참동안 서로 싸웠는데, 이때 경리와 제독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변에 대비하였습니다. 오후에 적선이 물러가 포구 밖에 모여 있었습니다. 경리가 접반사와 도원수를 불러 위로하기를 ‘그대 나라 군사들이 적의 진영을 불태워 함락시키지는 못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공격하여 성세(聲勢)를 도왔으니 매우 기쁘다.’ 하였습니다.
경리와 제독이 산위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적 두 사람이 깃대를 잡고 편지를 가지고 나와 화친을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경리가 통사와 중국인에게 영전(令箭)을 주어 그들을 나오도록 하였고, 또 통사 박대근(朴大根)과 항복한 왜인 월후(越後)를 시켜 성 아래에 가서 적을 초유(招諭)하게 하니, 왜적이 답하기를 ‘싸우고 싶다면 당연히 서로 싸울 것이요, 화친하고 싶다면 한쪽 방면의 포위를 풀어 우리가 성을 나갈 수 있도록 하고 또 장수 한 명을 보내어 화친을 의논하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리와 제독이 산꼭대기에 있으면서 비바람을 무릅쓴 것이 이미 5일째인데 고생스러운 정상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監司) 이용순(李用淳)은 경주(慶州)로 물러가 있으면서 오지도 않기 때문에 모든 지공(支供)과 시초(柴草)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있음은 물론 담당 관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덕형과 함께 간신히 인근의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여 경리와 제독의 음식은 근근이 갖추어 바치고 있으나 삼협(三協) 이하의 장수들은 소금과 장까지 떨어져 다투어 신에게 와서 요구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또 오늘 도망쳐서 돌아온 사람들이 모두들 ‘토굴 속에 있는 왜적들이 현재 높은 사다리를 만들어 새벽에 도망치려 한다.’ 하였으며, 남강에 있는 왜선들도 진퇴(進退)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밤에도 비가 그치지 않자 제독은 밤중에 적과 충돌할 위험이 있을까 걱정하여 삼협의 군병들이 현재 진을 치고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를 비변사에 계하하니,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용순의 행위가 과연 아뢴 대로라면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장계의 사연대로 추고(推考)하소서. 모든 지공에 있어 마음을 다해서 조치하여 부족하거나 미흡한 일이 없게 할 것을 아울러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정유년 12월 27일 성첩(成貼)한 경리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의 치계에,
"어제 적과 싸운 절차(節次)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저녁 때부터 시작하여 내린 비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습니다. 신 덕형이 새벽녘에 경리의 장막 밖에 가서 문안하니, 경리가 제독과 함께 있으면서 도망쳐 나온 피로인(被擄人) 4명을 다방면으로 심문하고 있었습니다. 말하기를 그들이 ‘성중에는 양식이 없고 우물물도 없어 적도(賊徒)들이 혹 탄 쌀을 주어서 먹기도 하며 밤에 비가 오자 홑옷과 종이를 펴서 비에 적셔 가지고 짜서 마시는 자가 많다.’ 하였고, 또 ‘가등청정(加藤淸正) 등이 서생포(西生浦)를 버리고 이곳에 온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경리가 그들의 성명과 거주지를 물은 다음 신 덕형에게 보내어 간호하여 살려주도록 하였습니다. 또 신들에게 ‘어제 조선군들이 나아가 싸워 성세(聲勢)를 도왔으니, 비록 성을 깨뜨리지는 못하였으나 매우 가상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오늘도 포를 쏘고 말을 달려 왜적들로 하여금 계속 조총(鳥銃)을 쏘게 함으로써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또 사면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빨리 밖으로 나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진시(辰時)에 배에 있는 왜적들이 강가로 다가오면서 점차 상류로 향해 오자 경리와 제독이 전령을 보내어 싸움을 독려하였고 또 우리 아군들로 하여금 서둘러 성을 포위하는 형상을 취하도록 하였습니다. 경리와 제독은 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의 토굴 맞은 편에 있는 봉우리로 올라갔고 절병(浙兵)들은 선상(船上)에 있는 왜적들과 한참 동안 크게 싸워는데, 양쪽의 포성(砲聲)이 계속되면서 적이 많은 상처를 입고 퇴각하였습니다.
또 왜적 몇 명이 죽간(竹竿)에 편지를 끼워 깃대를 들고 성에서 내려왔는에 경리가 주인(走人)을 시켜 가져다 보니, 그것은 청정의 부장(副將)이 병사(兵使)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청정은 서생포에 있고 소장(小將) 등이 여기에 있는데, 조선의 장수 한 명을 뽑아 우리와 함께 서생포에 가서 강화를 맺으면 두 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경리가 그들을 즉시 돌려보내면서 효유하기를 ‘청정이 와서 항복한다면 한 성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마땅히 조정에 아뢰어 벼슬을 내리고 후한 상을 주겠다. 중국 조정에서는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아울러 영전(令箭)을 주어 적전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적도(賊徒)들이 영전은 그대로 남겨두고 답변하기를 ‘청정이 서생포에 있다. 남쪽의 길을 약간 열어주면 곧바로 말을 달려가서 이야기하겠다.’ 하였습니다.
경리가 이어 각영의 제장(諸將)을 불러 군무(軍務)를 의논하고 또 신 덕형을 불러 ‘삼협(三拹)의 인마가 모두 지치고 굶주렸으니, 조선군 가운데 쓸 수 없는 자를 뽑아서 보내 풀을 베어 각영에 공급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경리와 제독이 진영에 돌아와 초방(草房)을 짓고 오래 머무를 계책을 세웠는데, 적의 토굴에서의 거리가 겨우 1리 정도입니다.
신시(申時)에 경리가 헌패(憲牌)를 내어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항복한 왜인을 데리고 적진으로 가서 화복(禍福)을 잘 깨우치도록 하고, 통사(通事) 송업남(宋業男)을 시켜 분부하기를 ‘오늘밤 왜적이 간사한 계책을 낼 것이니, 우리 군사의 각영에서는 거듭 조심하여 대비할 것이며, 조선의 병마(兵馬)도 거듭 엄밀하게 신칙하여 잘못된 일이 없도록 하라. 김응서는 항복한 왜인을 데리고 밤새 순라를 돌면서 성을 나온 왜적들을 초유(招諭)해서 데려 오라.’ 하였습니다.
또 계속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심문하니 ‘청정과 그 아들이 다른 왜장(倭將)들과 함께 모두 성중에 있다.’ 하였으니, 왜적들이 청정이 서생포에 있다고 한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또 경리가 수고하는 모습은 말로 다할 수 없는데, 문안하려 오는 사신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으니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60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호구-이동(移動) / 재정-국용(國用)
○丁酉十二月二十五日, 成貼提督接伴使張雲翼馳啓: "本月十六日右承旨成貼有旨內, 自上南下之計, 爲軍門所沮, 不獲已而停之, 軍前消息, 一向昧昧, 一路擺撥, 更爲申明, 凡在軍中大小消息, 逐日馳啓事, 二十五日申時, 臣在蔚山城隍堂前麓祗受矣。 提督擧動及軍門消息, 已爲十二度馳 啓, 而必致中路遲滯。 昨夜經理、提督, 宿於賊窟對峯, 各營兵馬, 皆爲野營, 終夜放砲。 今朝又使南兵及我國兵, 進薄土窟, 欲毁城踰入, 而淸正方在其中, 土壁四面, 鐵丸如雨, 人不得接足。 唐兵死傷數百, 我國軍人, 亦多死傷, 陳遊擊又中鐵丸, 不得已領兵還營。 經理、提督不勝憤恨, 仍宿山上, 明日又爲攻城之計, 而今日生擒倭四名及走回女人等皆言: ‘土窟中無糧無水, 勢難支久云云。’ 只恐他處援兵多至。 又慮走入西生浦, 則形勢尤難, 未易蕩滅, 是用極爲悶慮。" 丁酉十二月二十七日成貼提督接伴使張雲翼馳 啓: "本月二十五日以前事, 則已爲十三度馳啓矣。 二十六日休歇人馬, 放一日糧, 仍傳令于都元帥, 使我國兵馬, 負木防牌及柴草, 進薄城下, 欲焚賊營。 都元帥權慄, 親自臨陣督戰, 斬靈山縣監全悌及出身一人、軍丁一名以徇, 軍兵不敢不進, 而但賊丸如雨, 死傷極多, 不得已退陣。 且自昨日午後, 至今夜, 雨下不止, 人馬飢凍, 泥濘沒膝。 土窟之陷, 百倍攻城, 而天時如此, 極爲悶慮。 今朝我國被擄兒童四名、女人二名出來言: ‘淸正等五將, 時在城中, 而軍糧已盡, 且無井泉, 夜間潛汲城下井水, 而卒倭則不得飮之, 城中賊衆, 日夜憂悶云云。’ 當日早朝, 藍江浮泊倭船三十餘隻, 乘雨一時前來, 將欲下陸, 左協軍馬放砲鼓譟, 相戰移時, 經理、提督領軍結陣於山上待變, 而午後賊船退去, 作綜於外浦。 經理招接伴使、都元帥, 慰之曰: ‘爾國之軍, 雖不得焚陷賊營, 冒死攻城, 以助聲勢, 極爲可嘉云云。’ 經理、提督山上結陣之時, 倭賊二人, 持旗齎書, 欲爲請和云云。 經理使通事及唐人, 給令箭, 使之出來, 又使通事朴大根及降倭 越後, 招諭於城下, 則倭賊答曰: ‘欲戰則當相戰, 欲和則開一邊, 使之山城, 且遣一將官, 則當議和事云云。’ 且經理、提督, 露處山頂, 觸冒風雨, 已五日, 艱苦之狀有不可言, 而監司李用淳退在慶州, 不爲跟來, 凡百支供、柴草, 不成模樣, 竝定官亦不定送。 臣與李德馨, 艱苦分定於隣近各官, 經理、提督盤膳, 僅得備進, 而三協以下將官, 鹽醬亦絶, 爭來求覓於臣, 事極未安。 且今日走回人等皆言: ‘窟中諸賊, 方造高梯, 欲爲宵遁云’, 而藍江船隻, 進退無常。 雨勢夜猶未止, 提督恐有夜中衝突之患, 三協軍兵方爲結陣待變事。" 啓下備邊司, 回啓曰: "李用淳所爲之事, 果如狀啓, 則極爲駭愕。 以狀啓內辭緣推考, 而凡干支待, 盡心措置, 俾無欠闕未安之事, 竝爲行移何如?" 丁酉十二月二十七日成貼經理接伴使李德馨、都元帥權慄馳啓: "昨日接戰節次, 則已爲馳啓矣。 自夕時爲始下雨, 達夜不霽。 臣德馨平明, 進候經理帳幕外, 經理與提督同立, 得逃出被擄人四名盤問, 說稱: ‘城中無糧無井水, 賊徒或喫收拾燒米, 夜來下雨, 多以單衣紙帳濡雨而取汁飮之。’ 且言: ‘淸正等以棄西生而來此, 深恨云云。’ 經理問其姓名、居住, 送于臣德馨, 使之看護收活。 又謂臣等曰: ‘昨日朝鮮進戰, 以助聲勢, 雖不能攻城, 頗爲可嘉。’ 今日亦放砲馳馬, 使賊連放鳥銃, 不得休息, 又四面呼出被擄人, 使之速爲出來。 辰時船上之賊, 前迫江岸, 漸向上流, 經理與提督, 傳令督戰, 又令本國兵, 急速作圍城之狀。 經理、提督則率標下兵, 上賊窟對峯, 浙兵與船上之賊, 大戰良久, 兩邊砲響連結, 賊多中傷却退。 又倭賊數人, 於竹竿揷書, 執旗下城, 經理走人取看, 則乃淸正副將送于兵使者, 而說稱: ‘淸正在西生, 小將等在此, 差朝鮮一將, 同我往西生講好, 則兩國之人, 不至多死云云。’ 經理卽還送而諭之曰: ‘淸正若來降, 則不(當)〔啻〕 一城之人竝免死, 當奏除官厚賞。 天朝決不負信義云云。’ 竝與令箭送賊中。 賊徒留令箭, 答說: ‘淸正在西生浦。 少開南面一路, 則卽速馳去前說云云。’ 經理仍招各營諸將, 商議軍事, 又招臣德馨謂曰: ‘三協人馬, 俱困餒, 朝鮮兵無用者, 除出刈草以給各營云云。’ 經理、提督還于下營處, 構草房爲住宿之計, 距賊窟僅一里許。 申時, 經理出憲牌, 令金應瑞, 帶降倭送于賊中, 開諭禍福, 令通事宋業男分付曰: ‘今夜虜賊有奸計, 我兵各營申勑以待, 朝鮮兵馬, 亦申嚴安派, 使無違悞。 說與金應瑞, 帶降倭, 終夜巡邏, 倭賊出城者, 招諭以來云云。’ 又連得被擄人盤問, 則淸正及其子, 與他倭將, 俱在城中云, 賊之說在西生浦者, 乃是訛言。 且經理勞苦之狀, 有難盡言, 而問安使臣, 尙不來到, 至爲未安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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