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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96권, 선조 31년 1월 5일 신묘 2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예조 판서 심희수가 백사림의 도망죄에 대해 그 전투사실을 아뢰다

예조 판서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지난해 11월 경상 감사의 치계 한 통을 비변사에 계하하셨는데, 바로 황석 산성(黃石山城)이 함락될 때에 충렬(忠烈)을 지키다 전사한 사람들과 성을 넘어서 도망쳐 살아난 자들에 대해 조사한 공사(公事)였습니다. 본사(本司)에서 점목(粘目)을 마련할 즈음에 요관(僚官) 허성(許筬)이 주관하여 초안(草案)을 반 이상 작성하고서 끝내 완료하지 못하고 중지하였습니다. 그후 허성이 병 때문에 사진(仕進)하지 못하여 며칠을 그대로 방치해 두어 열흘의 기한을 넘기게 되자, 여러 요속(僚屬)들이 신에게 촉탁하여 결말을 짓게 하였습니다.

신이 곽준(郭䞭) 부자와 조종도(趙宗道)를 정상(旌賞)하는 일에 대해서는 허성의 원문을 근거로 약간 고쳐서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백사림(白士霖)을 죄주기를 청하는 한 건에 이르러서는 군율(軍律)의 중전(重典)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독단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날 사진(仕進)한 동료들에게 두루 물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사림이 도망쳐 구차하게 살아난 것은 진실로 통분스러운 일이지만, 그때는 성이 이미 거의 함락된 때이므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서 그가 시종 사수(死守)했더라도 황석 산성을 보전할 리가 전혀 없었으니, 애초부터 성을 지키지 않아 패하게 된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본도(本道)에서 이미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명하였으니, 지금 기필코 중죄(重罪)로 추론(追論)할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부경(赴京)하였다가 돌아온 지 겨우 4∼5일밖에 되지 않아 가을 이후 변란이 난 뒤의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또 당초 황석 산성에서 성을 지키던 실상을 몰랐습니다. 이에 단지 동료들의 의논을 듣고서 범범하게 ‘백의종군하여 스스로의 죄를 보상하라.’는 것으로 공사를 만들어 입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실로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관(禮官)이 되어 좌기(坐起)하고서야 그 공사에 대해서 아뢴 대로 하라는 것으로 계하(啓下)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판 김우웅(金宇顒)이 우상 이원익(李元翼)의 말이라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절의(節義)를 표창하여 장려함은 법에 당연한 것이다. 백사림은 범한 죄가 무거우니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허성과 함께 그를 잡아다가 국문할 것으로 비변사에서 의정(議定)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러니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 나에게 와서 품(稟)한 뒤에 결론을 얻고서 입계했어야 하는데 끝내는 방과(放過)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놀랍고 두려워 즉시 이원익에게 고하니, 원익이 웃으면서 ‘당초 내가 허 참의(許參議)와 함께 정탈(定奪)하였는데, 끝내는 판서의 손에서 계초(啓草)가 완성될 줄은 몰랐다. 지난날 백사림을 추천한 사람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고 황석 산성에서 수비를 그르친 실상을 자세히 아는 것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사림김해(金海)의 이민(吏民)으로서 적에게 붙은 자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더불어 몰래 도망칠 계책을 꾸며 끝내 혼자만 살아났기 때문에 온 성의 사람들이 모두 분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 죄는 결단코 백의종군하여 스스로 죄를 보상하도록 하는 것에서 그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신은 평소 사림의 얼굴도 모르고 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태양이 위에 있는데 어떻게 터럭만큼이라도 그를 두호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경솔하게 다른 사람이 초안한 것을 결말지었으니 공사가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낭청(郞廳)들을 잘 신칙하지 못하여 대신에게 품해야 할 것을 빠뜨림으로써 이와 같이 막중한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만약 김우옹이 우연히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신은 그 연유를 들을 길이 없어서 중죄를 지은 백사림으로 하여금 끝내 법망을 빠져나가게 하였을 것이니 국가의 형벌을 그르치게 한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59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군사(軍事)

○禮曹判書沈喜壽啓曰: "上年十一月, 慶尙監司馳啓一道, 啓下備邊司, 乃黃石山城陷沒時, 死忠死烈人及(乘)〔棄〕 城偸生人査覈公事也。 本司粘目磨鍊之際, 僚官許筬次知, 起草過半, 終未完了而罷。 厥後許筬, 病不仕進, 淹置數日, 將過旬日之限, 諸僚屬臣結末。 臣於郭䞭父子及趙宗道旌賞之事, 就許筬原稿中, 略加竄改爲文, 而至於白士霖請罪一款, 係是軍律重典, 不敢擅便, 廣詢其日仕進同僚, 則皆以爲: ‘士霖, 遁走苟活, 誠爲痛憤, 而其時城已垂陷, 事無可爲, 雖使終始死守, 萬無保全黃石之理, 與初不守城, 以致僨敗者有間。 本道已令白衣從軍, 今不必追論以重罪云。’ 臣於是時, 赴京回還, 僅四五日, 全未諳秋來變亂以後事例, 且不知當初黃石守城之狀, 只聽僚議, 泛然以戴罪自效, 成公事入啓, 而矇然忘却, 實不知發落之如何。 及爲禮官, 坐堂見其公事, 以依允啓下, (與)〔而〕 參判金宇顒, 稱右相李元翼之言, 謂臣曰: ‘褒奬節義, 〔於〕 法當然, 白士霖, 罪犯深重, 不可容貸, 故我與許筬, 定議於備邊司, 以拿鞫蒙準。 所當具由, 來稟於我, 然後歸一入啓, 而終乃放過至此, 殊爲未便云。’ 臣聞來驚惕, 卽詣李元翼處告之, 則元翼笑曰: ‘當初我與許叅議定奪, 不知終歸於判書手而成 啓草也。 在前推薦白士霖者, 莫過於我, 而詳知黃石失守事狀, 亦莫過於我。 士霖深得金海吏民附賊者之心, 相與密謀逃遁, 竟乃獨全, 一城之人, 莫不痛惋。 其罪決不至於白衣自效而已’ 云。 臣平生不識士霖面目, 又不知其何許人, 天日在上, 豈容一毫護他, 而其不能詳察, 率爾結末於他人起草公事, 已爲非矣。 不善申飭郞廳, 以致闕稟於大臣, 有此顚錯莫重之事。 倘非金宇顒之偶然言及, 臣無由得聞, 而身負重罪之白士霖, 終或至於甘心網漏, 其爲國家失刑, 當如何哉?" 上曰: "勿待罪。"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59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