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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96권, 선조 31년 1월 3일 기축 1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군문 도감에서 적군과 아군의 대치 상황 등 전황을 보고하다

군문 도감(軍門都監)이 아뢰었다.

"제독(提督)의 차관에게 물어보니 ‘23일과 24일 양일간 교전(交戰)한 뒤에 곧 도산(島山) 성 아래로 진격하였다. 성은 모두 네 겹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外城)은 주위가 산아래에까지 닿아 있고 흙으로 쌓은 것이 낮아서 우리 병사들이 공격하여 열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세 겹 성은 석축(石築)으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위에 방옥(房屋)을 잇달아 설치하였는데 그 방옥이 성밖에까지 걸쳐 나와 있어서, 그들은 우리를 굽어보면서 총을 빗발처럼 쏘아댈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아래에서 성중의 형세를 전혀 살필 수가 없는데다가 또 쏟아지는 총탄 아래에 가까이 갈 수도 없어서 우리 군사는 부득이 탄환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둔치고 있었다. 경리와 도독은 성의 북쪽에 주둔하였고 고책(高策)은 동쪽에 주둔하였으며, 오유충(吳惟忠)은 남쪽에 주둔하였고 이방춘(李芳春)은 서쪽에 주둔하고 있다. 이여매(李如梅)파새(擺賽)는 강변에서 서생포의 왜적을 차단하고 조승훈(祖承訓)파귀(頗貴)부산(釜山)의 왜적을 차단하고 있다. 성이 험고하여 격파하기 어려워서 이런 상태로 진격하면 우리 병사들이 많이 손상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날 그들을 포위한 상태로 주둔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성중에는 양식이 적고 물이 고갈되어 오래지 않아 저절로 무너질 것이니, 우리 병사들의 군량이 부족하지 않다면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다. 성의 주위가 겨우 2∼3리에 지나지 않고 그 속에 1만 명의 왜적이 있는데 부산의 왜적은 아직 와서 구원하려는 형적이 없고 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은 매일 수로(水路)를 따라 출몰하지만 우리 병사들에게 차단당하여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하루에 두세 차례나 하고 있다. 청정이 포위 속에 있다는 사실은 투항한 왜적들과 조선 여인들이 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59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己丑/軍門都監啓曰: "提督差官處問之, 言: ‘二十三四兩日交戰之後, 卽進兵道山城下。 城凡四重, 外城周遭於山下, 土築低微, 我兵得以(改)〔攻〕 開。 其內三城, 石築堅固, 城上列置房屋, 其屋跨出城外, 彼得以俯瞰制我, 放丸如雨, 我從其下, 旣不能察見城中形勢, 又不得近於銃丸之下, 我兵不得已屯於丸所不到之處。 經理、都督屯於城北, 高策屯於東, 吳惟忠屯於南, 李芳春屯於西。 李如梅擺賽把截西生賊於江邊, 祖承訓頗貴把截釜山之賊, 而城固難破。 如此進則恐我兵多傷, 故欲圍屯累日, 以待其自斃。 大槪城中, 糧少水渴, 不久將自盡, 苟我兵不乏糧餉, 則城陷必矣。 城周僅二三里, 其中可有萬, 而賊時無來援之形, 西生賊逐日從水路出來, 而爲我兵所攔阻, 來而復去, 一日二三次。 淸正在圍中之事, 投降子及朝鮮女人, 皆言之云。"


    • 【태백산사고본】 62책 9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59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