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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94권, 선조 30년 11월 21일 무신 2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속오군의 과중한 부담, 운용상 미비점 등을 보완토록 하다

병조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 군병의 군역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너무 고달프기 때문에, 국가가 법제를 설립하여 한 명의 군병에게 몇 명의 방첩(幫貼)286) 을 주어서 보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고도 오히려 1년을 쉬게 하고 두어 달 입번(立番)시키는 것은 민력(民力)에게 여유를 주어서 고갈되게 하지 말자는 의도에서인데 오늘날 속오군(束伍軍)은 이러하지 않아, 안으로 방첩의 보조는 없고 밖으로 본역(本役)만 고달픕니다. 밭이랑 농사일을 하던 백성을 몰아다 사람 수를 따져 병적(兵籍)에 편입시켜 억지로 군병이라 부르며 일시의 급한 사태를 구제하려고 하는데, 그중에는 더러 공사천(公私賤)·잡장(雜匠) 및 정군(正軍) 등이 한편으로는 본역(本役)에 응하면서 한편으로는 속오군에 와 소속된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속오군이 된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각기 그의 본관(本官)에서 더러 넉넉하게 구호하고 잡역을 감해 주기도 하므로 그들의 마음에도 국가에 일이 있으면 우리들이 당연히 전수(戰守)에 쓰여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지만 상하번(上下番)으로 돌려가며 끝없는 부림을 받을 줄을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몰아다 정군(正軍)의 예에 따라 교대로 상경시켜 관역(官役)에 응하게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병조의 관원이 한 사람뿐이 아닌만큼, 그 중에는 반드시 한 가닥의 이성(理性)을 남들과 똑같이 타고 나서, 가엽게 여겨 차마 그렇게 못하는 자도 있겠지만, 대체로 혼암하고 못나서 갈팡질팡하다 보니 백성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은 채, 간사한 관리로 하여금 농간을 부려 폐단을 일으키게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계사(啓辭)를 보니, 자상하고 가련히 여기시는 뜻이 절절합니다. 의당 삼가 받들어 시행하여야겠으나, 그 사이에 사세가 부득이하여 제대로 시행하지 못할 바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재차 번거롭게 여쭈는 바입니다.

평시 본조가 상번(上番)의 기병(騎兵)이 3천 7백여 명이고, 취재군(取才軍) 및 제색군(諸色軍)이 있어서 모두 번마다 6천여 명에 이른다고는 하나, 팔번(八番)만은 다른 번에 비하여 조금 적습니다. 6천의 군병으로도 중국 사신이 올 적이면 오히려 하번(下番)을 징발하였는데 오늘날 중국 장수가 서울에 머물고 있는 자가 부지기수인데 토목 일과 풀베는 일까지 시키는 이는 사신이 왔을 때도 없었던 일입니다. 지난날 징발한 것이 8∼9천 명이 아니라, 1만 2천여 명이었고, 그때는 마침 중국의 대병(大兵)이 잇따라 입성(入城)하였기 때문에 각처의 방자(房子)·역군(役軍)을 요구하는 즉시 응해 주었던 것인데, 징병을 막 파하자 명장이 더왔으므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명장의 차비군(差備軍)이 5백 90여 명에, 각처의 수직군(守直軍)이 3백 70여 명이며, 동작부교(銅雀浮橋)·경복궁(景福宮)·용산(龍山)·서교(西郊)·동교(東郊) 등처의 적초(積草) 수직군 및 날마다 명장이 입성함에 따라 도감(都監)에서 소첩(小帖)을 가지고 요구하는 방자도 한 첩(帖)에 요구하는 수효가 많게는 수십 명, 적어도 십여 명을 밑돌지 않고 있습니다. 본조의 관원이 좌우로 요구를 받아서 겨우 서압(署押)만 하다보니, 그 사이 간리(奸吏)들의 작폐도 참으로 계사(啓辭)의 내용과 같습니다. 오늘날 속오군이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자가 9백 80명이지만 원래 상번한 군병은 겨우 수 백 명이고, 지금 필요로 하는 수효는 되풀이해서 헤아려본다면 1천 6백 명이 아니고서는 모양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변사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강구, 지휘하도록 한 뒤에 받들어 시행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94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40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특수군(特殊軍) / 외교(外交) / 신분(身分)

  • [註 286]
    방첩(幫貼) : 보인(保人)을 가리킴.

○兵曹啓曰: "我國軍兵之役, 比他人尤苦, 故國家設法立制, 一人爲兵, 給幇貼數人, 以爲之助, 而猶使一年休息, 數朔立番者, 所以休民力而不欲渴(之)〔乏〕 也。 今束伍則不然, 內無幇貼之助, 外則本役之苦, 驅南畝耒耜之民, 計口(徧)〔編〕 籍, 强號爲兵, 以救一時之急。 其中或有公私賤、雜匠及正軍等, 一邊應其本役, 一邊來隷束伍, 而猶不以束伍爲苦者, 各其本官, 或加優恤, 略除雜役, 其心亦以爲國家有事, 則吾等當爲戰守之用, 而至於輪番上下, 以應無窮之役, 則渠等平日之意, 亦萬萬未嘗到此。 一朝猝然驅策, 爲正軍之例, 交替上京, 以應官役, 其心怨苦, 理所必至。 而本曹之官, 非止一員, 其中或必有秉彝之端, 與人同稟, 而愍然有所不忍者, 蓋緣昏庸顚錯, 不念民隱, 但使奸吏, 操弄作弊, 而尙不能覺。 伏見啓辭, 慈祥惻怛之意, 溢於言外。 所當惕然奉行, 而其間事勢不得已有所不能者, 不得不再煩陳稟。 平時本曹上番騎兵, 雖曰三千七百餘名, 有取才軍及諸色軍, 竝每番至六千餘名, 而唯八番, 比他番差小耳。 以六千之軍, 至於天使時, 則猶(懲)〔徵〕 下番。 今天將之留京者幾人, 而至於土木之役, 刈草之事, 天使時所無也。 頃日所徵, 非八九千名, 乃一萬二千餘名, 而其時適天朝大兵, 陸續入城, 故各處房子、役軍, 隨責隨應, 徵兵旣罷, 天將加來, 以至於今, 天將差備軍五百九十餘名, 各處守直三百七十餘名, 至於銅雀浮橋、景福宮龍山、西ㆍ東郊等處, 積草守直, 及逐日天將入城, 自都監持小帖, 責出房子者, 一帖所責, 多者數十, 少不下十餘。 本曹之官, 左右被責, 僅成署押, 其間奸吏之作弊, 誠如啓辭之意。 今束伍留京者, 九百八十六, 而元上番軍, 僅數百名, 今以應用之數, 反覆參商, 則非一千六百名, 不能成形。 更令備邊司, 從長講究指揮, 然後奉行何如?" 傳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61책 94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340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특수군(特殊軍) / 외교(外交)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