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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94권, 선조 30년 11월 10일 정유 5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제독 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게 하다

제독 총병부(提督摠兵府)에 이자(移咨)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적의 정세가 긴급한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본년 10월 28일에 접수한 흠차 제독 남북 수륙 관병 어왜 총병관 후군 제독 부도독 동지(欽差提督南北水陸官兵禦倭摠兵官後軍提督府都督同知) 마(麻)280) 의 자문에 ‘흠차 총독 경략 군무 병부 상서(欽差摠督經略軍務兵部尙書) 형(邢)281)헌패(憲牌)282) 에 「조선한산도(閑山島)의 수비가 무너져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된 뒤부터 해국(該國) 남쪽의 병장(兵將)들은 모두 제각기 산속으로 도피하고, 오직 북쪽으로 평양(平壤) 일대의 군병뿐이다. 」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왜적은 서생포(西生浦)에서부터 부산(釜山)·안골포(安骨浦) 등까지 경상좌우도의 연해 요해지를 마음대로 점거하여 둔거지(屯居地)가 서로 연이었고, 수로는 또 죽도(竹島)·천성(天城)·가덕(加德) 등까지도 적의 군거지가 있어 여러 곳의 적들이 한창 진격하여 나올 적에는 수륙의 형세가 다 같이 급했습니다. 소방의 배신(陪臣)들은 적은 군병으로나마 곳곳에서 차단하여 성윤문·고언백·권응수 등은 경주(慶州) 등 지역에 주둔하여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곧장 조령(鳥嶺)으로 진격할 것에 대비하고, 김응서(金應瑞) 등은 의령(宜寧)에 있으면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서쪽으로 운봉(雲峯) 길을 침범할 것을 막고, 원균(元均) 등은 수병(水兵)으로 해로(海路)를 차단하여 죽도·가덕도의 적을 막는 등, 7∼8백 리 사이에 수미(首尾)를 서로 연결하여 이른바 방비하지 않은 곳이 없고 군사를 두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산도의 수비가 무너지자 서생포·부산포·안골포 등지의 적이 수없이 분산되어 돌격하므로, 성윤문·고언백·권응수·박명현(朴名賢)·이시언 등이 각기 거느리고 있는 군병으로 곳곳에서 추격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아 대세를 꺾지 못하였습니다. 적이 곧장 남원으로 치달아 몰아붙이던 7∼8일 경에는 경상좌우도의 병장(兵將)이 미처 구원을 가기도 전에 남원이 벌써 함락되어 적이 드디어 깊숙이 들어와 충청(忠淸)으로 향하였습니다.

당직(當職)이 사태가 매우 다급함을 알고 배신 도순찰사 권율(權慄)을 격문으로 불러서 경상도 등지에서 군병을 거느리고 있는 각 배신들을 모두 조발(調發)하여 조령을 따라 충청도 청주(淸州)·공주(公州)의 사이로 질러 나가서 적의 선봉을 차단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벌써 커졌고 게다가 각 배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병은 다 같이 낭패하고 쫓겨 달아나던 다음이어서 싸움마다 패배를 당하고 도망쳐 흩어진 자도 태반이나 되어 군세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고언백은 원래 거느린 군병이 1백 명, 이시언은 원래 거느린 군병이 1천 5백 명, 박명현은 원래 거느린 군병이 6백 명, 김응서는 원래 거느린 군병이 2천 1백 명이었으나, 이상 각 장수가 거느린 군병 중 전사하거나 도망친 자를 제외한 나머지 군병으로는 절대 허약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중국군이 대세를 몰고 앞에서 진격함을 힘입어 적병이 점차 후퇴하므로, 이에 소방의 여러 장수들이 소식을 듣고 일어나 다시 소집을 하니 부곡(部曲)에 흩어졌던 군병도 차츰 돌아오게 되어, 적이 향한 곳을 따라 길을 나누어 섬멸 또는 포로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적이 전라도충청도를 침범할 적에 길을 셋으로 나누어 깊숙이 들어왔다가 물러나 돌아갈 적에도 길을 나누어 분산해서 침략하였기 때문에 여러 장수들이 더러는 돌아가는 길목에 복병을 배치하고 더러는 야음을 타고 기습하는 등, 모두 제 위치에서 저대로 싸워서 참획(斬獲)은 퍽 많았으나 합세하여 큰 승리를 거두지는 못 하였습니다. 조사한 바, 본년 9월 이후로는 날짜와 시기는 맞지 않으나 경상좌도 병사 성윤문(成允文)의흥(義興)·경주(慶州) 일대에서 적과 싸워 연거푸 23급(級)을 베었고, 김응서(金應瑞)운봉(雲峯)·합천(陜川) 일대에서 싸워 전후 1백 19급을 베었고, 고언백(高彦伯)은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수일(李守一)·별장 문신언(文愼言) 등과 함께 성주 등지에서 싸워 21급을 베었고, 이시언(李時彦)은 방어사 박명현(朴名賢)과 함께 청주 등지에서 싸워 1백 66급을 베었는데, 이들 각 장수는 모두 도 순찰사 권율의 절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각 해당 배신이 거느리고 있는 군병은 금방 집결하여 금방 싸우곤 하였기 때문에, 날마다 줄어든 수효를 분명히 파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배신 권율에게 지시하여 성윤문 등 이하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는 군병의 수효를 속히 조사할 것과, 적이 이른 지방마다 중국군과 잘 협력하여 싸우거나 수비하도록 책려할 것도 지시하였으며, 그 중 미처 소집하지 못한 군병은 각기 당초에 거느렸던 수효를 조사하여 법령대로 소집해 아울러 치계(馳啓)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근래 또 배신 겸 삼도 수군 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金億秋)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海南縣)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水使) 김억추,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우보(羽葆)283) 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청라장(靑羅帳)284) 을 두르고서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鹿島萬戶) 송여종(宋汝宗)·영등 만호(永登萬戶)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는데, 진중(陣中)에 투항해온 왜적이 홍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하였다. 노획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금의(錦衣)·칠함(漆函)·칠목기(漆木器)와 장창(長槍) 두 자루다.’ 하였는데, 이미 절차대로 자보(咨報)하고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앞서의 연유에 따르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격장 서(徐)가 거느리고 있는 수병이 이미 강화도에 도착하여 충청을 거쳐 전라도 우수영(右水營) 앞바다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남쪽 바다는 적이 통행하는 해로입니다. 만약 중국의 수군이 기회를 보아 전진한다면, 소방의 수군도 그 성세에 의지해 점차 소집을 하여 한산도 일로(一路)의 수복을 기도하여 적굴의 소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다 귀원(貴院) 및 총독 군문이 승전 계획을 세우고 소방 사람들을 고무시켜 스스로 힘써 떨치고 일어나서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도록 하는 데에 달렸습니다. 이에 따른 계획·독촉·소집·훈련 등의 일은 의당 귀자문의 내용에 따라 밤낮으로 각별히 힘써 감히 태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배신 도순찰사 권율이 각 배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병의 현재 수효 및 방어하고 있는 지방과 진영의 장소를 조사, 치계하기를 기다려 재차 갖추 써서 자보(咨報)하겠다는 사유들은 이미 회자(回咨)하였고, 이제 앞서의 연유를 접수하고 자복(咨復)할 연유를 참조하여 갖추 조사하여 자복함이 마땅할 것이기에 이렇게 회자를 하는 것이니, 조험(照驗)하여 전보(轉報)하십시오. 자문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9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3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註 280] 마(麻) : 마귀(麻貴). [註 281] 형(邢) : 형개(邢玠). [註 282] 헌패(憲牌) : 상급 장관의 명령. [註 283] 우보(羽葆) : 새털로 만든 의장(儀仗)의 일종. [註 284] 청라장(靑羅帳) : 푸른 비단 휘장.

○移咨于提督摠兵府曰:

朝鮮國王爲緊急情事。 本年十月二十八日, 準欽差提督南北水陸官兵禦摠兵官後軍提督府都督同知咨前事, 蒙欽差總督經略軍務兵部尙書憲牌照得, 朝鮮閑山失守, 南原城陷之後, 該國南半兵將, 皆各逃避山隅, 惟自北一帶平壤等道之兵云云。 倭賊西生浦, 以及釜山安骨等浦, 橫據慶尙左右道沿海要害, 列屯相望, 水路則又有竹島天城加德等處賊屯, 方其諸處之賊, 發以進搶也, 水陸之勢俱急。 小邦陪臣, 以些小軍兵, 隨處把截, 成允文高彦伯權應銖等, 分住慶州等處, 以備淸正直犯鳥嶺之勢; 金應瑞等在宜寧, 以防行長西犯雲峯之路; 元均等以水兵, 把截海路, 以遏竹島加德之賊, 首尾相連七八百里, 所謂無處不備, 故無處不置。 及閑山失守, 而西生釜山安骨之賊, 漫散衝突, 成允文高彦伯權應銖朴名賢李時言等, 各以所率之兵, 隨處追擊, 而衆寡不敵, 强弱懸殊, 不得挫其大勢。 及賊直犯南原之勢迅疾, 在七八日之間, 慶尙左右道兵將未及赴援, 南原已失, 而賊遂深入, 直向忠淸。 當職知事甚急, 檄召陪臣都巡察使權慄, 着令盡調慶尙等道各該領兵陪臣, 由鳥嶺, 經出忠淸道淸州公州之間, 期以遮遏賊鋒, 而賊勢旣大, 兼又各該陪臣所領軍兵, 俱於狼狽奔走之餘, 每戰輒北, 逃散太半, 不能成軍。 高彦伯原領軍兵一百員名, 李時言原領軍兵一千五百員名, 朴名賢原領軍兵六百員名, 金應瑞原領軍兵二千一百員名, 所據各將所領之兵, 除戰死潰散外, 其餘軍兵, 十分寡弱。 幸賴天兵, 以大勢盪擊於前, 賊兵漸次退北。 於是小邦諸將, 聞風而起, 頗復召聚, 部曲散軍, 亦稍還集, 得以隨賊所向, 分道勦捕。 蓋賊犯全羅忠淸也, 分三路深入, 及其退還, 亦分路散掠, 故諸將或設伏歸路, 或乘夜掩襲, 皆自戰其地, 頗有斬獲, 而未能合勢大捷。 査照自本年九月以後, 日期不等, 有慶尙左兵使成允文, 與賊戰於義興慶州之間, 連斬二十三級; 金應瑞戰於雲峯陜川之間, 前後所斬, 共一百一十九級; 高彦伯, 與星州牧使李守一、別將文愼言等, 戰於星州等處, 斬二十一級; 李時彦, 與防禦使朴名賢, 戰於淸州等處, 斬一百六十六級, 而各將皆受都巡察使權慄節制。 爲緣各該陪臣所領之兵, 旋聚旋戰, 逐日折損, 未有的數可據。 已經行令陪臣權慄, 作速査明成允文等以下將領所率軍兵見數及責令隨賊所至地方, 要與天兵, 協力戰守, 其未及召集之兵, 各査當初所領數目, 設法召集, 倂馳啓。 近又據陪臣兼三道水軍統制使李舜臣馳啓, 閑山島潰敗以後, 兵船、器械散失殆盡。 臣與全羅右道水軍節度使金億秋等, 收拾戰船一十三隻, 哨探船三十二隻, 於海南縣海路, 要口把截, 而有戰船一百三十餘隻, 從梨津浦前洋向來, 臣督水使金億秋、助防將裵興立巨濟縣令安衛等, 各整兵船, 於珍島 碧波亭前洋, 與賊交鋒, 冒死力戰, 以大砲, 撞破賊船二十餘隻, 射殺甚多, 賊衆漂溺海中, 斬首八級。 賊船中有大船一隻, 建羽葆紅旗, 圍靑羅帳, 指揮諸賊, 圍把我船, 有鹿島萬戶宋汝宗永登萬戶丁應斗, 繼至力戰, 又破賊船一十一隻, 賊大挫, 餘賊遠退。 有陣中投降倭, 指紅旗賊船, 認是安骨賊將馬多時。 獲賊物畫文衣、錦衣、漆函、漆木器、長(搶)〔槍〕 二柄等因, 已經節次, 咨報査驗外。 今據前因照得, 自閑山陷敗之後, 迤南水路, 賊船縱橫, 衝突可虞, 卽目小邦水兵, 幸得少捷, 稍挫賊鋒, 因此賊船, 不得進入西海。 且照遊擊所領水兵, 已到江華, 歷忠淸, 以及全羅右水營前洋, 係是通行海路。 若天朝舟師, 相機前進, 則小邦水兵, 亦得憑藉聲勢, 漸次召集, 以圖收復閑山一路, 而望其掃蕩賊窟, 此皆貴院及摠督軍門, 運籌制勝及皷舞小邦之人, 使之勉强自振, 死中求生。 其設法、催促、召集、訓鍊等事, 當遵依咨會事理, 日夜刻勵, 不敢怠緩。 竢陪臣都巡察使權慄査明, 各該陪臣所領軍兵見目及防守地方, 竝下營處所馳啓, 再行備(云)〔由〕 咨報等因, 已經備由回咨去後, 今準前因爲照, 所據咨復緣由, 擬合備査咨復, 爲此合行回咨, 請照驗, 轉報施行。 須至咨者。


  • 【태백산사고본】 61책 9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3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