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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93권, 선조 30년 10월 22일 기묘 6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경리 접반사 이덕형이 구례에서 획득한 왜적의 연락 문서 내용을 보고하다

경리 접반사 이덕형이 아뢰기를,

"오늘 정오에 급보가 들어왔는데, 그 말에 의하면 ‘중국 병마가 구례 남쪽 30리까지 진입해가니 왜적 수십 명이 흰 깃발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조선 남녀(男女) 2백여 명을 장막 속에 가두어 두고 면화(綿花)와 화곡(禾穀)을 거두어 2백여 간이나 쌓아 놓았기에 탐색하던 군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전진하니 왜적이 산으로 달아났다. 조선 사람을 불러내니 나온 자가 60여 명이었고 그 나머지는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총(鳥銃) 등 물건을 뺏고 또 면사첩(免死帖)을 회수했는데 이는 바로 왜인들이 만든 것이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왜적에게 침략하지 말라고 애걸한 것과 왜적들 사이의 통서(通書) 한 장을 경리가 기고(旗皷)를 시켜 내보였습니다. 그 왜적의 서신은 바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소장(小將)이 관하에 내린 문서로서 관계된 일은 다섯 가지였으니 ‘마음을 써서 싸울 것, 백성을 불러서 타이를 것, 들에 벼를 거두어 들일 것, 소와 말을 굳게 지킬 것, 지역을 골라 병영을 정하고 흩어지거나 사로잡히지 말 것.’ 등의 일인데 그 아래에 두 장수가 서명을 하였습니다. 면사첩에는 ‘행장의 병영에서 부역을 하니 죽이지 말라…….’ 하고, 그들의 이름을 써 넣었는데 모양이 요패(腰牌)와 같았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통서는 곡성(谷城)순천(順天) 부근의 주민들이 한 것으로 보이는데, 끝머리에 ‘여생인 등은 아룁니다[餘生人等白活]’라고 쓰고 성명은 쓰지 않았습니다. 이봉양(李逢陽)이 경리의 분부를 가지고 나와서 말하기를 ‘초탐 차관(哨探差官)262) 이 내일 너희 측으로 가서 광양(光陽) 등 지역의 도로와 적정(賊情)을 자세히 아는 사람을 정밀히 선택해서 오게 할 것이다. 또한 사로잡혀 간 사람들을 너희 나라가 용서해 주지 않고 죽이므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하니, 이제 언문을 섞어서 타이르는 글을 만들어 화살에 묶어 적진으로 쏘아 보내면 저들도 반드시 생각이 바뀌어 나오게 될 것이다. 이 글도 내일 바로 써서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0책 93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23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호구-이동(移動)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262]
    초탐 차관(哨探差官) : 정탐을 위해 임시 차출한 관리.

○經理接伴使李德馨啓曰: "當日午時有撥報入來, 說稱: ‘哨探天兵馬得, 進入求禮南三十里許, 有倭賊數十人, 竪白旗坐纛, 朝鮮男婦二百餘人在鋪幕, 收綿花、禾穀, 堆積二百餘間, 哨探軍兵, 吶喊前進, 倭賊向山跑走。 招諭朝鮮人, 出來者六十餘人, 其餘不肯回來。 奪得鳥銃等物, 而又得免死帖, 乃倭賊所爲也。’ 且我國人乞勿侵於倭賊事及倭賊處通書一張, 經理令旗鼓出示之。 其書, 乃行長小將, 下帖于其管下, 而計關五件, 寫說: ‘用心戰鬪; 招諭人民; (收獲)〔收穫〕 田禾; 堅守牛馬; 擇地下營, 勿爲散走被禽等事。’ 而其下兩將著押, 其免死帖, 則書行長營下, 仰役勿殺云云, 而塡其名, 如腰牌形。 我國人通書, 則似是谷城順天隣境居民等所爲, 而末端書餘生人等白活, 沒有書姓名。 李逢陽將經理分付, 出說: ‘哨探差官, 明日發去, 爾國詳知光陽等處道路及賊情人, 精擇前來。 且被擄人, 爾國不饒而殺死, 故不肯出來, 今宜雜以鄕談, 作招諭文字, 約諸矢射于賊陣, 則彼必動念出來。 此文, 亦趁明日書呈云矣。" 傳曰: "知道。 依啓。"


  • 【태백산사고본】 60책 93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23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호구-이동(移動)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