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병사 이시언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의 공초
충청 병사 이시언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福田勘介)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아비는 전 국왕의 장수였는데 관백(關伯)이 찬탈할 때 피살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를 혐오하여 쫓아내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청정을 따라 전라도로 향했습니다. 당초에는 남원을 치기로 약속하고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갔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평수개(平秀介)·도진(島津)과 함께 중로(中路)로 경유해서 먼저 남원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청정은 장정(長政)과 함께 굽은 길로 경유했기 때문에 미처 이르지 못했고, 관백의 별차(別差)는 수로(水路)로 경유해 와서 모였습니다. 수로로 온 장수인 가등좌마조(加藤左馬助)·동등여우위문(東藤與右衛門)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비전 재상(備前宰相)인 평수개가 2만 명을 거느리고 용조사(龍造寺)가 1만을 거느렸으며, 중로로 온 장수로는 소서섭진수(小西攝津守)인 행장이 1만을 거느리고 도진이 5천을 거느렸으며, 굽은 길로 온 장수로는 가등주계전(加籐主計殿)인 청정이 8천을 거느리고 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인 장정(長政)이 5천을 거느리고 장종아부(長宗我部)가 3천을 거느리고 모리중납언(毛利中納言)이 3만을 거느렸으며, 부산에 머물고 있는 장수 금오(金吾)의 군사가 1만 4∼5천이 되고, 서생포에 머물고 있는 장수 천야좌경 대부(淺野左京大夫)의 군사가 5천입니다. 남원이 무너진 뒤에 전주가 그 소문을 듣고 따라서 흩어지니 행장이 들어가서 분탕질하였습니다.
당초에 행장과 청정의 뜻은 세 길로 나누어 직접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무찔러 죽이고 10월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 등의 소굴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3일 길밖에 안 되는데 곧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습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였으며,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까지 침범하려 하고 있습니다. 10월 안으로 청정은 울산에 새로운 진지를 만들 것이며 올해와 내년 사이에 다시 출동할 뜻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백의 명령이 있으면 출동할지도 모릅니다. 대개 지방을 조금씩 침식하여 항복하는 자는 부려먹고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서 토지와 인민(人民)이 점점 그들의 소유가 되면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정과 행장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은 행장이 평양에서 패배한 일을 청정이 늘 말하고 행장은 강화를 하려고 하는데 청정은 불가하다 하므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당초 강화할 때 행장이 속여서 말하기를 ‘천조에서 장차 일본의 소원대로 해 줄 것이다.’ 하였으므로 허락했는데, 봉사(封使)가 돌아간 후에 다만 봉왕(封王)한다는 일만 있었을 뿐이고 실지의 이익이 없으므로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강화를 하고자 하면 반드시 실지의 일을 가지고 청정에게 말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직산(稷山)의 싸움에서 갑비수(甲斐守)의 군대가 많이 죽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다 합니다마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사로잡혔으니 항복한 왜인과 같이 대해 주면 죽도록 힘쓰겠습니다. 칼이나 창 쓰는 재주와 포 쏘는 기술은 남의 모범이 되지는 못하지만 몸을 방어할 수는 있습니다. 그 중에도 조총의 묘기는 잘 압니다."
- 【태백산사고본】 60책 9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06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왜(倭) / 인물(人物)
○忠淸兵使李時言所擒倭子福田勘介供招曰: "父爲前國王將帥, 關白(纂)〔簒〕 立時被殺。 以此嫌我逐之, 遂屬淸正。 有軍百餘, 始自西生浦, 隨淸正向全羅。 當初, 約攻南原, 水陸俱進, 行長與平秀介、島津, 由中路, 先到南原, 獨專攻陷; 淸正與長政, 由枉路, 故未及來到; 關白別差, 由水路而來會。 水路之將加藤左馬助、東藤與右衛門, 各領一萬, (備前)〔肥前〕 宰相所謂平秀家領兵二萬, 龍造寺領兵一萬, 中路之將小西攝津守所謂行長領兵一萬, 嶋津領兵五千, 枉道之將加藤主計殿所謂淸正領兵八千, 黑田甲斐守所謂長政領兵五千, 長宗我部領兵三千, 毛利中納言領兵三萬, 釜山留住之將金吾兵一萬四五千, 西生浦留住之將淺野左京大夫兵五千。 南原旣破之後, 全州聞風先潰, 故行長入空焚蕩。 當初行長、淸正之意, 欲分三道, 直衝京城, 關白遣人傳令, 勿犯京城, 限九月, 隨其所到處厮殺, 十月內還來西生浦、釜山等窟穴云。 故到京城三日程, 旋卽還歸, 全羅道亦無留住之意。 勿論老少男女, 能步者擄去, 不能步者盡殺, 以朝鮮所擄之人, 送于日本, 代爲耕作, 以日本耕作之人, 換替爲兵, 年年侵犯, 仍向上國矣。 十月內, 淸正作新陣于蔚山, 而今、明年似無更動之意。 然關白有令, 則難保其必無。 大槪蠶食地方, 降者役使之, 拒者盡殺焉, 以土地、人民, 漸爲其有, 則其志可遂云。 淸正、行長, 相爲矛盾者, 行長見敗於平壤之事, 淸正常言之, 且行長欲爲講和, 而淸正則不可, 故以此不相得。 當初講和之時, 行長誣言: ‘天朝將依日本所願’, 故姑許之, 及其封使之歸, 但有封王之事, 而無實利, 故終不成矣。 雖欲講和, 必(似)〔以〕 實事, 言于淸正, 然後可以成矣。 且稷山之戰, 甲斐守之軍多死, 恥而隱諱云, 而不知其詳也。 我旣被擄, 當如降倭, 將効死矣。 用劍、用槍、放砲等技, 雖未可爲人師, 而自可防身。 其中得鳥銃之妙矣。"
- 【태백산사고본】 60책 9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306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왜(倭)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