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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89권, 선조 30년 6월 14일 계유 6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요시라가 전라·충청·경상·제주를 침략할 계획과 목적 등을 알리다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하기를,

"이달 6일에 요시라(要時羅)의령(宜寧)으로 나와 신을 만나자고 하기에, 신이 7일에 산성(山城)에서 내려가 그가 온 까닭을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습니다. ‘평조신(平調臣)이 2일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그가 기별(奇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조신이 일본에 돌아갔더니, 관백(關白)이 이르기를 「조선이 왕자를 보내는가?」 하였다. 조신이 답하기를 「왕자는 결코 오게 할 수 없다. 」 하니, 관백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무슨 일을 가지고 강화(講和)하는가?」 하였다. 조신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세폐(歲幣)를 보내 통호(通好)해 오면 성사시킬 수 있다. 」 하니, 관백이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여겼다가 후일에 다시 묻기를 「조선에서 네가 와서 한 말을 이미 허락하였는가?」 하였다. 조신조선에서 기꺼이 따를 것인지의 여부를 몰라 혹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사실대로 대답하니, 관백이 즉시 크게 노하면서 「이처럼 부실(不實)한 일을 가지고서 진영을 버리고 나에게 와서 묻느냐? 너의 죄는 참(斬)해야 마땅하다. 」 하고는 즉시 제장으로 하여금 속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하였다.’

‘제장을 모아놓고 관백이 약속하기를 「조선이 매번 이처럼 나를 속이고 있으니 내가 분함을 참지 못하겠다. 조선이 그래도 믿고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전라·충청 두 도가 아직 온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8월 1일에 곧바로 전라도 등지로 들어가 곡식을 베어 군량을 삼고 산성을 격파할 것이며 보장할 만한 형세가 있거든 두 도에 유둔하면서 이어 제주도를 치라. 만약 불가하거든 군사를 돌려 고성(固城)에서 서생포(西生浦)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이어 둔을 치고서 조선에서 강화를 애걸할 때까지 대기하라. 행장(行長)고성, 의지(義智)는 거제, 죽도(竹島)의 왜는 창원(昌原)죽도부산(釜山), 다른 왜장은 기장(機張), 안골포(安骨浦)의 왜는 가덕도(加德島), 가덕도의 왜와 청정(淸正)서생포, 이런 식으로 8개 지역에 나누어 둔거하고, 그 나머지는 다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라. 조선이 끝내 강화를 애걸하지 않으면 가까운 곳이나 5∼6일 거리되는 지역을 수시로 침략하여 기필코 강화하도록 하라. 산성이 있는 곳이면 비록 다 죽더라도 공격해 깨뜨려야 하니, 너희는 죽을 힘을 다하라.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처자(妻子)를 모두 죽이겠다. 」고 하였다.’

조신이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여 말하기를 「조선이 지금은 예전과 달리 정예 군사가 되었고 또 수군이 있어 매우 불편한 형세이다. 」 하니, 관백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네가 이토록 계책이 없으니, 대사를 어찌 이루겠느냐. 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을 짓밟으면 수군의 형세도 저절로 무너질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조선의 군마(軍馬)가 조금 강해졌다 해도 말할 것이 못된다. 」 하였다. 조신이 또 말하기를, 「중국 군사가 대거 들어와 이미 전라도에 도착했으니, 이 역시 어려운 형세이다. 」 하니, 관백이 이르기를, 「계사년198) 에도 중국의 대군이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진주(晉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중국 군사가 나왔다 해도 어찌 나가 싸우지 못하겠는가. 너의 이런 말은 조선을 옹호하여 하는 말에 불과하다. 모든 일은 장수들이 임시(臨時)하여 하기에 달렸다. 전투하는 일은 실로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니, 깊이 들어갈 만하면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겠으면 그만두어라. 」 하였다. 조신이 더 이상 도모할 말이 없어 잠자코 물러나왔는데, 6월 그믐께나 7월 초에 대병(大兵)이 한꺼번에 바다를 건널 것이라고 하였다.’

평행장(平行長)이 나 요시라에게 말하기를 「관백의 뜻은 전투를 하지 않고도 조선 지방을 빼앗으려는 것인데, 조선이 기꺼이 강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군사의 위력을 보여 강화를 하려는 것이다. 이번의 이 거사에서는 바로 전라도를 범하고 연해로 군사를 돌릴 것이다. 군사를 출동하는 즈음에 청정(淸正)의 무리는 경주(慶州)나 혹은 밀양(密陽)·대구(大丘)를 경유하는 길을 택해 전라도로 향할 것이고, 나는 의령(宜寧)·진주(晉州)의 길을 경유할 것이다. 통과하는 곳의 산성(山城)에 노약자는 상도(上道)로 이송하고 장정을 뽑아 들어가 지키며 응전하게 하는 한편, 경사우도에서부터 전라도까지 청야(淸野)하고 새 곡식을 베어버리고 기다리면, 우리들이 가더라도 들에는 약탈할 곡식이 없고 갖고 있는 양식도 없게 될 것이니, 전라도 한 경내를 모두 분탕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바로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 사람들이 형세상 곧 낭패하게 될 것인데 이렇게 된 연유를 관백에게 고하게 되면 관백은 반드시 그 계책을 이루지 못할 줄을 알고 예전대로 통호(通好)하라는 말이 없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뜻을 병사(兵使)에게 고하여 미리 청야(淸野)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가 한 말을 반드시 거짓이라고 여길 것이나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전일 진주의 일도 미리 알렸었는데 내 말을 믿지 않다가 마침내 패하여 함락당했으니,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 이번 이 일은 진주의 일과 다름이 없는데, 살아남은 백성들을 어찌 차마 적의 수중에 다 죽이겠는가. 산성 또한 어찌할 수 없다. 왜인들이 항상 조선의 산성에는 미녀와 보물이 많이 있다면서 침을 흘린지 오래이다. 만약 성을 공격해 깨뜨려서 얻는 이득이 많으면 다시 탐욕스런 마음이 생겨 더욱 힘껏 공격하겠지만 산성을 함락시켜도 얻는 이득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여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백의 말이 한 번 떨어진 이상 다 죽더라도 반드시 공파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성 하나가 함락되고 보면 조선 사람들의 혼백이 분궤(奔潰)될 뿐만 아니라 실로 일본 사람으로 하여금 승승장구하여 이(利)를 쫓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처럼 이득을 보고 나면 그대로 전라도에 머물면서 반드시 잠식(蠶食)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때에는 조선에서 강화를 청하더라도 관백에게 더욱 교만한 마음이 생겨 반드시 이루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워 끝없는 욕심을 채우고자 할 것이니, 관백이 자청(自請)했을 때 응하는 것만 못하다. 군량(軍糧)·군기(軍器)·우마(牛馬)·노약자는 모두 해도(海島)로 옮기거나 깊숙이 감추고, 여염에는 한 되의 곡식도 없게 하라. 가려 뽑은 장정들을 전투시킬 순 없다 하더라도 왜병이 머물고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어 싸우기도 하고 야습하기도 하는 등 이런 식으로 대항하면 일본 역시 꺼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일본 제장(諸將)들이 걱정하는 것은 군량이 군핍(窘乏)한 것인데, 만약 양식을 댈 길이 없으면 10여 일이 못되어 도로 물러갈 것이다. 경상도 변방은 힘껏 농사를 지어 벼가 매우 잘 되었는데, 베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도적에게 양식을 대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한 말을 허위라고 여기지 말라. 근일에 신병(新兵)이 나오면 나는 마산포(馬山浦)로 진을 옮길 것이다. 나와 죽도(竹島)의 왜는 마음을 같이 하여 7월 이전에는 비록 병졸 하나라도 도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는 청정과 한 무리이니 우리들이 금단할 수 없다. 전투하기로 정해진 이상 가까운 시일 내에 안골포의 왜적들이 밤을 틈타 함안(咸安)·진주(晉州)·진해(鎭海)·고성(固城)의 지경에서 도발할 것이 분명하니, 그곳의 백성들을 미리 옮겨야 한다. 농사를 지어 놓았어도 끝내 먹지 못할 것이다. 사냥하거나 도발해 오는 왜는 복병으로 잡아 죽여도 관계없다. 좌도(左道) 역시 그런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인데 요해처(要害處)를 차단하고 역시 잡아 죽이는 것이 무방하다. 나는 군사를 출동시키는 날이라도 숨김없이 모두 통지할 것인데 이런 뜻을 조선에서는 헤아려서 처리해야 한다. 이런 말이 만약 적의 진영에 들어가 관백에게 알려지면 우리 집은 반드시 멸족(滅族)되고 말 것이니, 반드시 비밀을 지키라. 조선에서 이런 기밀을 알고도 응하지 않아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이익을 보게 하면 병화(兵禍)가 10년을 끌어도 끝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나도 마음이 아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 하였다.’

이상이 요시라가 신에게 전해준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요시라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뒤에 나올 군사가 15만, 이곳의 왜군이 3만, 합계 18만이다. 3∼4만 명은 진영에 유둔할 것이고 그 나머지 군사는 깊숙이 들어가는데 잇대어 진영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10월 그믐께면 연해(沿海)의 진으로 돌아올 것인데 이후에도 강화할 단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행장의 말이나 내 말이 일을 겪고나면 징험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미 싸울 기약이 정해졌으니 출입하기가 곤란한 형편이다. 그러나 대병(大兵)이 바다를 건너오면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나와 알려줄 계획이며, 비록 진중에 있더라도 저들의 정상을 통고해 주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전라도 깊숙이 들어가고나면 병사(兵使)가 먼 경상도에 있게 되어 통고할 길이 없게 되니, 이것이 염려된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종식시킬 방책을 강구하고 싶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너희들이 백만 군사를 내보내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병기(兵器)가 훌륭히 갖춰져 있고 사졸(士卒)도 용맹스러우며 성곽도 견고하고 중국 군사가 대거 이르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짓밟아 버릴 수 있다.’ 하였더니, 답하기를, ‘만약 그렇게 되면 일본 사람들이 이기지 못하겠다고 핑계대고 다시 본토(本土)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싫어하겠는가. 조선의 수군은 이미 정돈되었는가? 지금쯤은 출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왜인들이 교활하게 속여 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와서 하는 말을 계달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 사유를 갖추어 치계합니다. 평행장이 보낸 글 1통은 도체찰사에게 보냈습니다. 이미 싸우기로 결정된 것은 분명한데 안골포의 왜가 도발할 것이라는 말도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신이 거느리고 있는 전사와 군관·항왜(降倭) 및 진영 옆에 있는 별장(別將) 문신언(文愼言)·한명련(韓明璉)에게도 알려 힘을 합쳐 복병해서 잡아죽일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89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46면
  • 【분류】
    외교-왜(倭) / 왕실-종친(宗親) / 농업-농작(農作)

慶尙右兵使金應瑞馳啓曰: "本月初六日, 要時羅出來宜寧, 求見臣, 臣七日, 自山城下去, 問其來由, 則答曰: ‘平調信初二日, 來到釜山奇別內, 調信入歸, 則關白云: 「朝鮮王子送否?」 調信答曰: 「王子決不可致。」 關白曰: 「然則以何事講和乎?」 調信曰: 「若以歲幣大臣, 通好則事可成矣。」 關白初以爲然, 後日更問曰: 「朝鮮已許汝來言乎?」 調信未知朝鮮之肯從, 恐有後患, 以實答之, 關白卽大怒曰: 「如此不實之事, 棄陣來問於我? 汝罪當斬。」 卽令諸將, 速爲渡海。 會諸將約束曰: 「朝鮮每此欺我, 吾不忍忿。 朝鮮所恃而不聽我言者, 全羅忠淸二道尙完故也。 汝等八月初一日, 直入全羅等地, 刈穀爲糧, 擊破山城, 有可保之勢, 留屯二道, 仍擊濟州。 不可則還兵, 自固城西生浦, 相連屯結, 以待朝鮮之乞和。 行長則屯據固城, 義智 巨濟, 竹島 昌原竹島釜山, 他將 機張, 安骨 加德, 加德 淸正 西生浦, 八處分屯, 其餘還入其國, 朝鮮終不乞和, 或不餘日程, 或五六日程, 侵掠無常, 期於取和。 有山城處, 雖盡死, 不得不攻破, 汝等戮力爲之。 如不從我言, 當盡殺汝等之妻子云云。」 調信力陳不可曰: 「朝鮮今則兵之利鈍, 不如前日, 且有舟師, 勢甚不便。」 關白張目叱之曰: 「汝無謀至此, 大事何成? 蹙踏慶尙全羅忠淸等道, 則舟師勢將自盡, 何可懼也? 朝鮮之士馬稍强, 亦不足道也。」 調信又曰: 「天兵大至, 已到全羅道, 此亦勢難。」 關白曰: 「癸巳年, 天朝大兵, 雖在近處, 晋州尙可攻陷。 天兵雖至, 豈不得進戰? 汝之此言, 不過護朝鮮而發也。 都在諸將, 臨時觀爲之。 戰鬪之事, 實難遙度。 可爲則深入, 不可則否。」 調信更無所圖之辭, 默然而退。 六月晦時、七月之初, 大兵一時渡海矣云云。 平行長與我曰: 「關白之意, 非戰鬪, 欲奪朝鮮之地方也, 朝鮮不肯相和, 故欲示兵威而取和也。 今此之擧, 只犯全羅而還兵。 沿海動兵之際, 淸正之類, 由慶州密陽大丘作路, 向全羅, 我則由宜寧晋州之路。 所過山城, 老弱移送上道, 抄出丁壯, 入守應戰, 自慶尙右道, 至全羅道淸野, 芟刈新穀以待之, 則我等雖去, 野無所掠, 軍無見糧, 全羅一境, 雖未盡焚蕩, 卽爲回兵。 日本之人, 勢將狼狽。 此由告諸關白, 則關白必以爲, 不售其計, 亦不無依前通好之言。 此意告諸兵使道, 預爲淸野如何? 我之所言, 必以爲詐, 而我則以誠言之。 前日晋州事, 亦爲預通, 不信我言, 終至敗陷, 有何益哉? 今此之事, 無異晋州之時, 餘存之民, 何忍驅殺賊手乎? 山城亦不可爲也。 倭人常言, 朝鮮山城, 美女、寶物多入, 流涎已久。 若得攻破, 得利甚多, 則更生貪欲之心, 攻之愈力, 攻破山城而無所得利, 則不必力攻矣。 關白之令一出, 則雖盡死, 必爲攻破而後已。 一城見敗, 則非但朝鮮之人, 禠魄奔潰, 實使日本之人, 乘勝逐利也。 如此而見利, 則仍留全羅, 必有蠶食之計矣。 此時朝鮮, 雖請和好, 關白益生驕心, 必發難成之說, 欲充無厭之欲。 莫如待關白之自請, 然後應之可也。 軍糧、軍器、牛馬、老弱, 盡須移海島, 或藏深僻之處, 閭閻無一升之(轂)〔穀〕 , 抄擇丁壯, 雖未能當戰, 兵所住處現形, 或相戰, 或夜擊, 如此拒之, 日本亦不無忌憚矣。 今之日本諸將所可患者, 糧資之窘乏, 若無因糧之路, 則不過十餘日而還退矣。 慶尙邊地, 務爲農作, 禾穀甚盛, 芟刈可也。 若不如是, 則乃爲盜賊給糧資也。 我之所言, 勿以虛僞視之。 近日新兵出來, 則我當移陣于馬山浦。 我與竹島 , 將同心, 七月之前, 雖卒, 使不得竊發, 而安骨加德則與淸正同心, 我等不得禁斷。 戰鬪已定, 近間安骨, 必乘夜竊發於咸安晋州鎭海固城之境也, 此處人民, 預先移置。 雖作農事, 終不得食。 畋獵及竊發之, 伏兵勦捕無妨。 左道亦不無其弊, 遮絶要害之處, 亦爲勦捕無妨。 我則雖發兵之日, 悉通無隱, 如此之意, 朝鮮量處爲之。 此言若流入賊中, 轉聞關白, 則我之滅族必矣, 望須秘密。 朝鮮不知此機而應之, 使日本之人見利, 則兵禍雖十年之久, 解去無期。 如此之言, 我亦痛心而發也」 云云。’ 要時羅自意言曰: ‘後來之兵十五萬, 在此之三萬, 幷十八萬, 而三四萬, 留屯陣所, 其餘懸軍深入, 不爲連營。 十月晦間則還鎭于沿海, 此後亦不無講和之端。 行長之言, 我之所言, 事過之後可驗矣。 今則已定戰期, 出入勢難。 然大兵渡海, 則冒死一出, 進告爲計, 雖在陣中, 欲爲通告彼中之情狀, 而我等深入全羅之後, 兵使遠在慶尙, 無緣通告, 此可慮也。 我等欲因某事, 而解兵之計也云云。’臣答曰: ‘汝等雖百萬之衆出來, 今則不畏也。 兵器利精, 士卒拳勇, 深溝高壘, 天兵大至, 一朝可以盡踏。’ 答曰: 若然則日本之人, 諉以不勝, 還向本土, 豈可厭乎? 朝鮮舟師, 已爲整齊否? 此時則出戰無妨云云。’ 倭人詐黠之言, 不可盡信, 其所來言, 不可不達, 故具由馳啓事。 平行長通書一道則都體察使處輸送矣。 戰期已定無疑, 安骨浦 竊發之言, 亦不無其理。 臣所率戰士軍官、降倭及在陣傍別將文愼言韓明璉處, 亦爲知委, 同力伏兵, 勦殺計料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57책 89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46면
  • 【분류】
    외교-왜(倭) / 왕실-종친(宗親) / 농업-농작(農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