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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9권, 선조 30년 6월 10일 기사 1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도체찰사 이원익이 수륙 양군의 전투 계획을 말하다

도체찰사 우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치계(馳啓)하기를,

"중국의 남·북(南北) 군사가 속속 나와 그 성위(聲威)가 미침에 적들이 반드시 공포를 느끼고 있을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곧바로 진격하지 않고 오랫동안 둔수(屯守)하기만 하면 우리 나라 백성들이 피폐해지고 재물이 탕갈되어 장차 제풀에 무너질 형세가 될 것이니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대적이 건너오기 전에 한 번 군사들을 총집결해 결전해보고 싶으나 우리와 저들의 힘을 헤아려 보건대 크게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역시 군사를 내어 책(柵)을 공격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밤낮으로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오는 적을 막아 죽이는 것은 오직 수군(水軍)만을 믿고 있는데, 근일에는 수군이 한 번도 해양(海洋)에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세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매우 염려됩니다.

이제 권율과 숙의(熟議)하여 경상 좌우도(慶尙左右道) 및 중도(中道) 세 곳의 변진(邊陣)에서 각기 정예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나누어 진둔(進屯)해 밖으로 나오는 왜적을 차단케 하는 동시에 적들이 만약 군사를 많이 내어 침범해 오면 역시 진퇴하여 무찌르면서 뒤에 있는 주진(主陣)이 응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주진이 다 나아가 둔칠 수 없었던 이유는 양도(糧道)가 이어질 수 없어 일이 모두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육지에서 군사를 뽑아 진둔케 하면 필시 저 적들을 피곤케 할 이치가 없고 반드시 수군을 이용하여야만 일이 혹시라도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 배 37척을 건조하는 한편 격군(格軍)을 충원하는 문제는 제석 산성(帝錫山城)에 부방(赴防)하게 되어 있는 군사 5천 명 중에서 우선 덜어내어 가려뽑아서 들여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신의 종사관(從事官) 남이공(南以恭)으로 하여금 한산도(閑山島)로 달려가 신구(新舊)의 전선(戰船)을 모두 합쳐 절반은 한산도(閑山島) 등에 머물러 있고 반은 운도(雲島) 등처의 해양에 출몰하게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정박(停泊)할 곳이 없기는 하지만 번갈아 교체하면서 끊임없이 왕래하면 형세상 반드시 피차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골포(安骨浦) 등처에 왜적이 있지만 본진의 선박으로 배후(背後)를 도모할 계책을 세울 수 있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이 있더라도 해양의 선박으로 즉시 처치케 할 수 있으므로,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 등 각 장수와 상세히 의논하여 시행하라고 남이공에게 지시하여 보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일마다 기회를 잃어 왔기에 마음 속으로 우려가 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병가(兵家)의 기회는 순간에 결단하여야 하니 그 진퇴의 완급은 주장(主將)이 어떻게 임기(臨機)하여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조정에서도 할 수 있는 한 요제(遙制)해 줘야 합니다. 경상 좌우도와 중도(中道) 세 곳의 변진(邊陣)은 경주(慶州)·부산(富山)·공산(公山)의 세 산성을 말하는 듯싶습니다만 그 세 곳은 적진과 매우 멀어서 군사들이 출입하면서 공격하기에는 편리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렇다고 온 진이 다 진둔(進屯)하면 양도(糧道)가 이어지지 못할 것이니, 이 또한 그런 걱정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형세를 보아가며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해로(海路)를 차단하는 일은 전부터 힘써 왔는데도 그 계책이 아직 한 번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다시 지휘하고 약속하여 나아갈 때를 보아 나아감으로써 기회를 잃지 말라는 일로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8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4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己巳/都體察使右議政李元翼馳啓曰: "天朝南北之兵, 陸續出來, 聲威所及, 賊必恐怖, 誠非偶然。 但念不卽進勦, 而屯守多時, 則我國民疲財竭, 將有自盡之形, 極爲痛迫。 欲趁大賊未渡之前, 擬一悉衆決戰, 而度己量彼, 大可虞者存焉。 都元帥權慄, 亦以擧兵攻柵, 爲決不可爲, 日夜思量, 未得善策。 截殺來賊, 唯恃舟師, 而近日水兵, 未曾一出海洋。 雖事勢致然, 亦甚悶慮。 今與權慄熟議, 慶尙左右及中道三處邊陣, 各令抄率精銳, 分運進屯, 截斷出外之, 彼若擧衆來犯, 則亦可進退勦殺, 而在後主陣爲之援。 其不能擧主陣而進屯者, 糧道不繼事, 皆不便矣。 但以陸地抄兵之進屯, 必無困疲彼賊之理, 必用舟師, 事或可濟, 故新造船三十七隻充格, 則帝錫山城應赴括軍五千名, 爲先除出抄發入送。 令臣從事官南以恭, 馳進閑山島, 新舊戰船幷力合勢, 半留閑山等處, 半出沒雲等處海洋。 雖無停泊持久之所, 而輪回交遞, 往來不絶, 則必有彼此相値之勢。 雖有安骨等處之, 而本陣之船, 可以爲背後之計, 雖有過海之賊, 而海洋之船, 可及於目前之擧, 故與統制使元均等各將, 詳議施行事, 指授以送, 而我國凡事, 每失機會, 竊伏憂慮事。" 啓下備邊司。 備邊司回啓曰: "兵家機會, 決於斯須。 其進退緩急, 當在主將臨機處置之如何, 然朝廷所能遙制。 慶尙左、右、中道三處邊鎭, 似指慶州富山公山山城三處而言也, 但三處, 去賊陣甚遠, 兵之出入攻勦, 勢恐難便。 擧陣進屯, 糧道不繼, 亦不可謂無此憂。 要在觀勢善處矣。 海路要截事, 自前致力, 而其計尙未一効, 誠爲可慨。 更爲指揮約束, 見可而進, 毋失機會事, 行移何如?" 啓依允。


  • 【태백산사고본】 57책 8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4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