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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7권, 선조 30년 4월 9일 기사 2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도사 영국윤을 맞이하고 조선의 둔전 설치 상정 등을 요청하다

미시에 상이 관포(冠袍)를 갖추고 문안에 설치된 막차(幕次)에 나아가 도사(都司) 영국윤(寗國胤)을 기다렸다가 상은 서쪽 계단으로, 도사는 동쪽 계단으로 나아가 서로 읍양(揖讓)하고 올라가서 상이 교배례(交拜禮)를 행하여 마쳤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우리 나라의 일로 해서 여러 차례 왕래를 하느라 노고가 많소이다."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저희의 왕래가 귀방(貴邦)에 소란을 끼친 것도 많습니다."

하였다. 상과 도사가 동서로 갈라 앉았다. 【상은 서쪽에 앉고 도사는 동쪽에 앉았다. 】 상이 말하기를,

"손 경략(孫經略)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기거(起居)는 어떠하오?."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손 군문(孫軍門)은 지금 밀운(密雲)에 있는데 몸은 편안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다례(茶禮)를 거행하겠소이다."

하니, 도사가 명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상이 드디어 도사와 다례를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제 자문(咨文)을 보건대, 중국이 우리를 위하여 시종 구원하여 주겠다고 하니, 황은이 망극하오이다."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양 포정(楊布政)이 3월 19일에 계모의 상을 당하여 22일에 떠났는데, 제가 18일 해주위(海州衛)로 뒤쫓아가서 26일 사령(沙嶺)에 도착하였습니다. 손 군문양 포정이 상을 당한 것을 알지 못하고 이자(移咨)하여 먼저 조선에 군무(軍務)를 경략하라고 하였습니다. 양 포정은 ‘내가 조선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가려고 한 것인데, 지금 이렇게 되었다. 조선의 모든 일에 대해 말로만 서로 전했을 뿐 마침내 결단을 내린 것은 없다. 이를테면 둔전(屯田)의 일도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으니 그대가 다시 가서 잘 헤아려 조처하라.’ 하였습니다. 때문에 제가 손 군문에게 미처 가지 못한 채 야불수(夜不收)가 가지고 온 자문을 저희들이 또 가지고 왔습니다.

듣건대, 왜적도 남변(南邊)에다 둔전을 두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군량이 넉넉할 것 같으면 천병(天兵)은 둔전을 둘 필요가 없겠으나, 지금 당장 군량이 떨어져 걱정을 하고 있으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천병이 나와서 둔전을 경작한다면 왜적이 듣고 또한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을 듯합니다. 조정의 의논이 대부분 ‘전에 조선을 구원할 적에 인마가 매우 많이 죽었으니 이번에도 매양 구원할 수 없고 압록강이나 지키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유독 황상 및 각로(閣老) 장위(張位)·조지고(趙志皐)가 ‘조선은 2백 년 동안 사대(事大)를 흠이 없게 하였으니 이번에도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재차 구원하러 나온 것입니다. 의논할 일들을 속히 상정(詳定)한다면 저희가 급히 돌아가 양 포정에게 여쭙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오억령(吳億齡)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저들이 돌아온 것은 필시 양 포정의 분부를 받고 나의 결정을 듣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억령이 그렇다고 하였다. 【억령이 이때 도승지였다. 】 상이 또 억령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손 군문은 만나보지 못할 것 같지 않은가?"

하니, 억령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도사에게 말하기를,

"대인이 손 군문에게 가지 않은 채 되돌아왔다면 어디에 있을 적에 손 군문이 이 자문을 부쳐 보냈소이까?"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제가 사령(沙嶺)에 도착하였을 때 손 군문양 포정에게 보내어 직접 귀국에 전하라고 하였으나 양 포정이 오지 못하기 때문에 저에게 부쳐 보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양 포정이 이미 상중(喪中)에 있는데 그러면서도 이 일을 관장하겠는가? 이는 매우 수상하다."

하니, 어전 통사(御前通事) 심우승(沈友勝) 【이때 호조 참의에로 입시하였다. 】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법도가 본디 그러합니다. 상을 당하여 가는 자도 반드시 조정에 고별을 하고 성지(聖旨)에 의한 윤허를 받은 뒤에 떠나기 때문에 이번에 포정사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도사에게 답하기를,

"말한 일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알려 주리다."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그 자문에 성을 쌓는 일은 부산(釜山)에까지도 쌓기를 원한다고 하였지만 적이 바야흐로 둔거(屯據)하고 있으니 형세상 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중신(重臣)들과 의논하여야 될 것입니다. 저는 길을 나선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속히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자(回咨)는 모쪼록 속히 완결하여 주시고 또 저에게 그 초고(草稿)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이다."

하였다. 도사가 말하기를,

"양 포정이 먼저 번에 가져온 지도가 별로 자세하지 않다면서 다시 더 자세한 지도를 가져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로(水路)로는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며칠이면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또 배가 다니는 곳 중에 적이 모르게 배를 숨길 만한 곳이 있습니까? 군무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절대로 신중과 비밀을 기하여야 하는데, 전번 파발의 보고 중에 중국 군대의 대장은 아무개이며 병마는 얼마라는 것을 왜노가 모두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조정에서 듣고 매우 놀라와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지도는 다시 그려 보내겠소이다. 그밖의 일도 말한대로 하겠소이다."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둔전 설치 및 병마가 많이 나온다는 등의 일이라면 적에게 전파되어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좌상(座上)에서 도사와 술을 들고나서 도사에게 말하기를,

"양 포정이 갈린 뒤에 누가 그 임무를 대임하겠으며, 또 남북의 군병은 과연 언제 강을 건너겠소이까?"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제가 올 적에 포정의 대임(代任)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동 찰원(遼東察院)에서 도어사(都御史)에게 행문(行文)한 것을 도어사가 다시 손 군문에게 ‘양 포정은 왜적의 정세를 익히 알므로 앞으로 기복(起復)시켜야 한다.’고 품고(稟告)하였습니다. 양 포정조선을 위하여 온갖 힘을 다 기울인다는 내용으로 귀국에서도 손 군문에게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양 총병(楊總兵)은 4일에 강을 건널 것이고 오 유격(吳遊擊)은 지난달 26일에 산해관을 나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도사와 다시 한 잔을 든 뒤에 좌승지 이덕열(李德悅)에게 명하여 예물 단자(禮物單子)를 주니, 도사가 말하기를,

"저의 왕래 때문에 폐가 매우 많은데 또 이 물품을 받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그러니 단자만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는 과인의 하찮은 성의이니, 뿌리치지 말기 바라오."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여러 차례 명하시니 감히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도사가 물러가기를 고하자, 상이 대내(大內)로 들어왔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8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8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과학-지학(地學)

○未時, 上具冠袍, 出御門內幕次, 候都司國胤。 上由西階, 都司由阼階, 相與揖讓升, 上行交拜禮訖。 上曰: "大人以小邦事, 累度往來, 勤勞多矣。" 都司曰: "俺之往來,貽貴邦擾害亦多。" 上與都司, 分坐東西。 【上坐西, 都司坐東。】 上曰: "孫經略今在何處, 起居何如?" 都司曰: "孫軍門時在密雲, 身則平安。" 上曰: "請行茶禮。" 都司曰: "唯命。" 上遂與都司, 行茶禮。 上曰: "今見咨文, 則天朝爲小邦, 終始拯濟, 皇恩罔極。" 都司曰: "楊布政三月十九日, 遭繼母喪, 二十二日離發, 俺十八日追及於海州衛, 二十六日到沙嶺孫軍門不知楊布政丁憂, 移咨使之前往朝鮮, 經理軍務。 布政以爲: ‘俺知朝鮮事情, 故亦欲往之, 而今至於此矣。 朝鮮凡事, 只以言語相傳而已, 終無決斷。 如屯田事, 亦無結末, 爾可再往, 取其料理’ 云, 故俺未及到孫軍門, 而夜不收所齎來咨文, 俺亦取來矣。 聞倭賊, 亦屯田於南邊云。 朝鮮糧餉若敷, 則天兵屯田, 不須爲之, 今者方患乏糧, 不可已也。 若天兵出來而爲屯田, 則賊聞之, 亦或有畏戢之心矣。 廷議多以爲: ‘前救朝鮮時, 人馬死傷甚衆。 今不可每救, 只可防守鴨綠而已。’ 獨皇上及閣老閣老志皐以爲: ‘朝鮮二百年來, 事大無愆, 今不可不救云’, 故有此再救之擧。 所議等事, 須速詳定, 則俺當急還, 追及楊布政而告之也。" 上顧謂吳億齡曰: "彼人回來者, 必是因楊布政分付, 聽我決斷之言而去也。" 億齡曰: "然矣。" 【億齡, 時爲都承旨。】 上又顧謂億齡曰: "孫軍門則似不得相見矣。" 億齡曰: "然矣。" 上謂都司曰: "大人未及軍門而回來, 在何地時, 軍門送付此咨耶?" 都司曰: "俺到沙嶺時, 孫軍門送于楊布政, 使之親傳于貴邦, 而布政未來, 故付俺而送之矣。" 上顧謂侍臣曰: "楊布政旣已在喪, 而猶管此事耶? 此甚殊常。" 御前通事沈友勝 【時以戶曹參議入侍。】 啓曰: "天朝法度, 本如是矣。 聞喪而去者, 亦必朝辭, 蒙聖旨允許而後行, 故今布政亦然耳。" 上答都司曰: "所言之事, 當議諸臣而報之。" 都司曰: "其咨文中, 有築城之事, 至欲於釜山, 亦爲築之, 而賊方屯據, 勢不能矣。 然可與重臣議之。 俺之在途已久, 深願快還。 其回咨, 須速完給, 且示其稿於俺, 可也。" 上曰: "當依命。" 都司曰: "布政以爲前來地圖, 不甚詳備, 更要仔細畫來。 且水路, 自釜山鴨綠江, 當幾日可達, 而行船之處, 有可藏舟, 使賊不知之地乎? 大抵凡干軍務, 切宜愼密, 頃者擺撥之報, 有謂朝之軍, 大將則某, 兵馬則若干, 倭奴無不知之云, 故朝廷聞之, 甚爲驚駭矣。" 上答都司曰: "地圖則當更畫呈, 其他亦唯命。" 都司曰: "如屯田及兵馬多來等事, 則雖傳播之, 流入賊中, 亦無妨矣。" 上與都司, 遂於座上行酒, 上謂都司曰: "楊布政遞後, 誰代其任耶? 且南北兵, 果於何日渡江耶?" 都司曰: "俺來時, 布政之代不出矣。 遼東察院, 行文都御史, 都御史轉稟孫軍門以爲: ‘楊布政熟諳情, 將宜起復云。’ 爺爲朝鮮, 萬分盡力, 貴國亦以起復, 通咨於軍門, 何如? 且楊總兵, 初四日過江, 吳遊擊去月二十六日出關矣。" 上與都司更進一酌後, 上命左承旨李德悅, 進呈禮單, 則都司曰: "俺之往來, 擾害甚多, 又受此物, 甚不當。 故只領單子耳。" 上曰: "此是寡人微誠, 敢望勿却。" 都司曰: "累命故敢從。" 都司告退, 上還入大內。


  • 【태백산사고본】 55책 8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8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과학-지학(地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