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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86권, 선조 30년 3월 30일 경신 1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도원수 권율의 장계

도원수 권율(權慄) 【사람됨이 침착 진중하고 도량(度量)이 넓으며 용모에 위엄이 있었다.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관인(寬仁)하니 사졸(士卒)들이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독왕 산성(禿旺山城)을 진수(鎭守)하자 경기(京畿) 백성들이 기대를 모았고 행주(幸州)의 대첩(大捷)으로 중국까지 이름이 났으니 옛날 유장(儒將)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그러나 거칠고 방탕하여 술에 빠져 장군의 책무(責務)를 버렸으니, 이는 대개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같다. 】 장계(狀啓)하기를,

"경상 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치보(馳報)에 ‘왜(倭)의 서계(書契)를 올려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그 서계의 내용을 수록하였는데, 첫번째 서계에는,

"일전에 뵙고서 대화를 나눈 정의(情誼)를 마음속에 새겨 잊지 못하던 중에 내리신 선물을 받고 하례(賀禮)하여 마지않습니다. 일찍이 주신 표피(豹皮)를 받고서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 마음이 편치 않던 즈음에 다시 호피(虎皮)를 내리시니 괴로운 마음 헤아릴 수 없어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되돌려 보낼까도 생각하였으나 서울에 가면 쓸 곳이 적지 않을 것 같아 염치불고하고 받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정성(正成)과 한 배를 타고서 돌아갑니다. 아, 귀국(貴國)은 예의 만을 고수(固守)하고 천시(天時)는 돌아보지 않아 사례차(謝禮次) 왕자를 일본으로 보내려 하지 않으므로 만사가 이미 끝나버렸으니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불원간에 반드시 자웅(雌雄)을 결정하는 한 판의 전쟁이 있을 것이 분명하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그러나 노후(老朽)가 비록 원수 나라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조선 조정(朝廷)을 받들어 대궐에서 여러 번 선수(宣垂)081) 하시는 잔을 받았고 벼슬이 금대(金帶)를 두르고 옥잠(玉簪)을 다는 데까지 이른 은택을 입었으니, 일이 아무리 우리 나라의 법에 저촉이 된다 하더라도 어찌 구은(舊恩)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일본 국왕이 왕자가 와서 사례하지 않더라도 강화하려 하여 왕자가 오지 않는 대신 다른 조건으로 바꿀 것을 묻는다면 노후는 조선 조정의 동의를 얻지는 못하지만 세세(歲稅) 약간 종수(種數)로써 답하여 일을 완정(完定)하고서 돌아오려 하니, 족하(足下)께서는 살펴주소서. 이 노후의 만일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위기가 닥칠 것이니 모든 병무(兵務)를 거행하여 날로 새롭게 조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주사(周師)가 전선(戰船)을 거느리고서 순찰하다가 거제도(巨濟島)에 정박(定泊)하여, 나무를 베는 일본인을 구검(拘檢)하기도 하고 행장(行裝)을 빼앗기도 한다 하니, 좀도둑 같은 이런 짓은 한갓 분풀이로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즉시 그곳에 나아가 있는 주사를 불러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서 정박하게 하고 구검한 사람들도 방송(放送)하고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또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심 노야(沈老爺)를 근경(近境)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본의 대소 인원은 모두 심 노야의 말과 글을 믿고 있는데, 만약 심 노야가 북경(北京)으로 돌아간다면 강화의 논의를 주도하여 말할 사람이 없어 계획이 허술해질 것이니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죄송하게도 일본 사람들은 선물을 좋아하니, 전에 청하였던 매[鷹子] 10여 가(架)를 여러 부(府)나 군(郡)에서 구하여 보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때문에 경쾌선(輕快船)을 뒤에 남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매의 값은 세소(世蘇)로 하여금 일일이 다 보내드리도록 하였으니, 굽어살피소서. 바빠서 일일이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하고, 또 3월 15일에 보내온 풍신조신(豊臣調信)의 글에는,

"일본 풍신조신이 서명(署名)하여 조선 김 병마 절도사(金兵馬節度使) 족하(足下)께 품고(稟告)합니다. 전일 족하와 더불어 거제도 안에서는 재목(材木)을 베어가도 좋다는 약속을 정하였기 때문에 수로(水路)로 가서 재목을 베어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우리 진중(陣中) 오도선(五島船) 1척에 수인(水人) 15명이 타고서 거제도에 가서 나무를 베어 돌아올때 조선 주사(丹師)가 배를 탈취하였는데 그배가 지금 어디에 가서 있는지 알수 없고, 또 김해(金海) 진중의 대선(大船) 1척에 수인 32명이 타고서 나무를 베러 갔을 때 수인을 다 살해하고 배까지 빼앗았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이는 큰 일을 진행하는 데 하자만 될 뿐입니다.

김해의 장수들이 매우 노하여 이를 갈면서 수륙(水陸)에서 일전(一戰)하여 설치(雪恥)하고 원수를 갚겠다는 뜻을 가졌으나 내가 억지로 참으라고 장수들을 타일렀습니다. 우리의 선박을 탈취하고 수인을 죽인 것은 모두 김 절도(金節度)의 서신을 받고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 어찌 족하께서는 그렇게도 불신(不信) 불충(不忠)하십니까. 속담에 ‘호리(毫釐)의 차이가 천리로 어그러진다.’고 하였으니, 만약 사람을 죽이고 배를 탈취하는 등의 작은 이익만을 일삼아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한다면 족하가 일본에는 불신이 되고 조선에는 불충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만약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일본의 병갑(兵甲)이 거제도에 주둔하여 산성(山城)을 쌓고서 재목을 베다 쓸 것이니 족하는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는 조선이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이지 일본이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는 요 첨지(要僉知)082) 가 직접 말씀드릴 것이니, 밝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고, 정유년 3월 17일 풍신행장(豊臣行長)이 서명(署名)하여 송운(松雲)청정(淸正) 사이에 있었던 문답의 내용을 적어 보낸 글에는,

"3월 9일 송운고령현(高靈縣)으로 가서 ‘송운구화봉(九華峯)으로 들어가서 병을 조리(調理)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대상관(大上官)083) 이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려왔다.’는 선성(先聲)을 청정의 진중(陳中)으로 들여보내고서, 18일 적중(賊中)으로 들어가니, 청정이 글로 묻기를 ‘6년 전에 심 유격(沈遊擊)소서비(小西飛)태합전하(太閤殿下)084) 께 아뢰기를 「왕자 형제를 돌려보내주면 조선 국왕이 바다를 건너와 귀복(歸服)하여 예를 펼 것이다. 」라고 하였기 때문에 왜병의 공격을 중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국왕이 바다를 건너오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왕자 형제 중에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와서 치사(致謝)하지 않으니, 이는 은혜를 잊은 것이 아닌가. 이것은 조선 국왕이 거짓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대명(大明)이 그렇게 시킨 것인가, 또 행장심 유격이 한 짓인가? 이점을 태합께서 듣고자 하는 바이다.’ 하였습니다.

송운이 답하기를 ‘조선이 일본과 교린(交隣)하여 강화(講和) 수호(修好)한 것이 2백여 년이 되었는데 하루 저녁에 일본이 명분없는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산하(山河)를 짓밟고 우리의 인민을 학살하였으며 우리의 종사(宗祀)를 폐허로 만들고 또 우리의 왕자를 사로잡아 갔으니, 신자(臣子)의 정에 어찌 종사를 안정시키고 왕자의 귀환(歸還)을 바라지 않겠는가. 성명(聖明)께서도 개인적인 생각으로야 어찌 장군에게 치사(致謝)하실 뜻이 없었겠는가마는 당시 중국의 장관(將官)들이 조야(朝野)에 가득한데 어느 겨를에 수치를 잊고 치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하물며 왕자의 거취(去就) 때문에 임금이 바다를 건너가서 치사할 리가 있겠는가.’ 하니, 청정이 글로 묻기를 ‘조선이 일본과 교린한 지가 2백 년이라 하나, 일본은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대마도와 서로 통신(通信)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일본과 서로 통신하였다면 어찌 일본이 이처럼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답하기를 ‘지난 경인년에 우리 나라의 사신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이 일본에 가서 통신하였고 관백(關白)을 만나보고 글까지 받아왔는데, 이것도 대마도가 한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관백이 한 것인데 장군은 어찌 잘 살펴보지도 않고서 다른 사람에게 죄를 돌림이 이처럼 심한가.’ 하니, 청정이 글로 묻기를 ‘만일 일본과 교린 통신했다면 5년 전에 일본이 대명(大明)을 치려 할 때 조선을 선구(先驅)로 삼고 길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크게 거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교린의 통호(通好)인가.’ 하자, 송운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서 본래부터 군신 부자의 도리가 있었는데, 대명의 속국(屬國)이 된 뒤부터는 군신의 의리가 정해져서 성심으로 사대(事大)하여 천지가 뒤엎어진다 하더라도 변할 수 없는데 어찌 일본과 함께 대명을 공격하는 대역 무도한 짓을 하겠는가. 이는 신하가 임금을 배반함이요 자식이 아비를 배반하는 것이니 천지 사이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9일 적이 또 글로 묻기를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의 미곡(米穀)과 재물을 탐하여 일본 사신을 사칭(詐稱)하였으나, 일본이 통일(統一)되지 않았기 때문에 먼 섬 사람들이 계획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태합전하(太閤殿下)께서 60여 주(州)를 통일하였으니 대마도 사람의 사모(詐謀)를 태합전하께 보고하면 저 대마도 사람은 반드시 주륙(誅戮)을 당할 것이다. 심 유격소서비(小西飛)가 서로 모의(謀議)하는 일은 무슨 일인가?’ 하니, 송운이 답하기를 ‘다만 그대 나라의 관백을 봉하여 왕으로 삼는다는 말만을 들었을 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하자, 적이 또 써서 보이기를 ‘이것은 바로 조선의 일인대 송운이 어찌 모르겠는가.’ 하기에, 송운이 답하기를 ‘심 노야(沈老爺)행장(行長)이 논의한 것을 내가 어찌 알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오늘 나와 상관(上官)이 서로 상의한 일을 저들이 어찌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적이 말하기를 ‘국왕이 송운에게 이야기하지 않던가?’ 하니, 송운이 답하기를 ‘심 노야행장이 서로 상의한 일을 우리 성명(聖明)께서 어찌 나에게 말씀하시겠는가. 또 마찬가지로 오늘 나와 상관이 상의한 일을 우리 성명께서 또 어찌 심 유격평행장에게 말씀하시겠는가. 만약 군왕(君王)이 피차에 누설시킨다면 무슨 일이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오늘 송운과 우리 상관이 상의한 일을 심 노야가 모르더라도 일이 성사될 수 있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심 노야가 모른다 하더라도 상관의 말이 공평한 것이라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만약 공평하지 못하다면 심 노야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좋고 나쁘고 간에 국왕이 심 노야의 뜻을 어길 수 없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하니, 답하기를 ‘심 노야는 중국의 장사(將士)로서 또 책사(冊使)의 명을 받아 우리 두 나라 사이를 조화시키고자 하고 있으니 성불성(成不成) 간에 모든 일을 끝내 품고(稟告)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또 심 유격경주(慶州)로 오게 해서 우리와 서로 만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중국 장사를 내가 어찌 가라 오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심 노야를 알현하게 되면 이 말을 전하여 노야의 속 뜻을 알아보겠다.’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대사(大師)가 내려올 때 조정의 상관(上官)들이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보내던가?’ 하니, 답하기를 ‘내가 산중에서 장군이 나를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서 내려올 때 잠시 서울에 들렀으나 더러는 만났고 더러는 만나지 않고 내려왔다. 그러나 상관의 말을 다 기억하고 가면 갖추어 조정에 고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적이 말하기를 ‘당신네 조정의 대부(大夫)들은 좋지 않다. 당신이 내려온다는 기별을 들었으면 모든 상관들이 함께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보내야 할 것인데, 산중에서 내려와 서울에 들렀는데도 더러는 만나고 더러는 만나지 않았다 하니, 당신네 나라 조정의 일을 알 만하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는 해외(海外)의 원수(怨讐)이고 나는 방외(方外)의 미록(麋鹿)085) 이니, 미록의 몸으로 원수의 집에 가는데 어찌 조정이 모두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보겠는가.’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소서비(小西飛)심 노야가 함께 강화(講和)를 도모하였으나 끝내 성사가 되지 않았다고 하니, 사실인가?’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이 관백(關白)을 봉하여 왕으로 삼은 뒤에도 관백이 정삭(正朔)을 받들지 않고 자못 불공(不恭)한 일이 많았다는 말만을 들었을 뿐이다. 중국에서 관백을 왕으로 봉하고자 한 것은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함이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적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5년 전 4월에 조선 경성(京城)에서 심 유격평행장이 화평(和平)을 약속할 때 왕자 형제를 송환(送還)하면 국왕이 일본에 건너와서 치사(致辭)하고 조선의 팔도(八道)도 끊어서 일본에 귀속시킨다고 하였다. 이 말을 태합(太閤)께 아뢰었기 때문에 왜병이 경성에서 모두 남하(南下)하여 이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를 돌려보내고서 태합께서 5년 전부터 작년 8월까지 군대의 출동을 중지시키고 기다렸다. 그러나 국왕이 바다를 건너와서 치사하지 않았고 또 땅을 끊어 일본에 귀속시키지도 않았으며 또 왕자 형제 중에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와 치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낮은 직위에 있는 신하만을 보내어 치사하는 체하였으므로 태합이 크게 노하여 사자(使者)를 대면하지 않았다.’하니, 답하기를, ‘5년 전 일본 군대가 경성에서 나갈 때 왕자를 송환해주면 국왕이 친히 일본으로 건너가서 치사한다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으며, 조선의 땅을 끊어서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말이 또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가? 심 노야에게서 나왔는가, 아니면 행장의 입에서 나왔는가? 이 때 일본이 비록 백명의 왕자를 잡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군왕이 바다를 건너가서 치사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청정에게 은혜를 입었는데 청정과 더불어 일을 모의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일을 모의하니 이것이 어찌 그대 나라의 잘못이 아닌가. 대명이 그렇게 시킨 것인가?’ 하니, 답하기를 ‘다른 사람과 모의하는 것은 우리 나라가 은혜를 저버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 또 명나라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심 유격평행장이 4년 전에 약속한 일은 우리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논의하는 것은 조선지(朝鮮紙)에 써서 날인하자.’ 하니, 답하기를 ‘우리의 말을 공론(公論)으로 정할 수 없다. 성불성(成不成)은 하늘에 달렸고 가불가(可不可)는 우리 조정과 장군에 달렸다.’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우리와 강화하지 않으면 왜병이 무수히 바다를 건너와서 조선을 소각하여 초토화하기를 산으로 계란을 누르고 비로 티끌을 쓸어내듯이 할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병가(兵家)의 승패는 실로 기필하기 어려운 것이니 멸망의 화가 어느 쪽에 있을지 모른다. 그대 나라의 군대가 아무리 많이 건너온다 하더라도 중국군과 우리의 병마(兵馬)가 어찌 바다를 건너온 그대들의 군대만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태합의 속뜻은 왕자 두 사람 중에 임해군(臨海君) 한 사람만이라도 건너오기를 바라니 만약 바다를 건너와서 예의를 차린다면 즉시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 대사가 돌아가거든 조정에 고하고 위로 국왕께 진달하여 임해군을 보내게 하라.’ 하니, 답하기를, ‘왕자가 도해(渡海)하는 일은 형세로는 어렵지 않지만 의리로는 매우 불가하다. 왕자의 한 몸으로만 말한다면 도해하여 태합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도 무방하지만 종사(宗社)로써 말하면 왕자를 군부(君父)의 원수에게 보내어 예의를 차리게 할 수 없으니 절대로 보낼 수 없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왕자가 천자의 명이 아니면 중국 조정에 입조(入朝)도 할 수 없는데 어찌 바다를 건너가서 원수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8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8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종친(宗親) / 사상-불교(佛敎) / 농업-임업(林業)

  • [註 081]
    선수(宣垂) : 임금이 내림.
  • [註 082]
    요 첨지(要僉知) : 요시라(要時羅).
  • [註 083]
    대상관(大上官) : 청정을 가리킴.
  • [註 084]
    태합전하(太閤殿下) : 풍신수길(豊臣秀吉).
  • [註 085]
    미록(麋鹿) : 천한 사람이라는 자기의 겸칭.

○庚申/都元帥權慄 【沈重量洪, 顧眄有威。 御下寬仁, 士卒屬心。 禿城之鎭, 畿民係望, 幸州之捷, 名聞華夏, 有古儒將之風焉。 然麤浪酗酒, 怠棄注意之責, 蓋無望焉。】 狀啓:

慶尙兵使金應瑞馳報內, 書契上送。 "謹伏以頃日拜話之情, 銘心未忘之中, 承審淸儀, 多賀不措。 曾惠豹皮, 一謝一愧, 中情未安之際, 復垂虎皮, 慘不能測, 白汗交流。 欲將還呈, 而赴京所要不細, 掩然伏受。 與正成今朝共帆而歸矣。 嗚呼! 貴國固守禮儀, 不顧天時, 以王子不肯涉海, 已矣奚及? 以(早至)〔至早〕 晩, 必決雌雄, 灼然無疑, 蓋可惜也。 然老朽雖云讎國之人, 世世承朝, 龍樓鳳殿之下, 累受宣垂之酌, 至於腰金頂玉之澤, 事雖涉於土憲, 豈意忽於舊恩乎? 說或日本國王, 雖非王子之進, 欲爲和親, 遍問他易之條, 則老也雖不得朝廷之議, 以歲稅若干種數爲答, 欲定事完仰料而歸矣。 足下省察焉。 此老朽萬一之計, 如不得事, 則必有危機。 凡擧兵務, 日新措置, 爲希爲希。 且舟師相率領戰船, 巡泊于巨濟島, 日本斫木之人, 或以拘擒, 或奪行裝云。 如此鼠竊狗偸之事, 則徒憤無益。 卽招其所, 回泊本處, 放送拘人, 以待老回何如? 且復沈老爺啓請朝廷, 請留近境何如? 日本大小之人, 俱信此府之言與書也。 若赴任北京, 則人之無舌, 籌策虛疎, 更望勿忽勿忽。 又悚日本國爲人, 以面皮爲悅, 前請鷹子十餘架, 求諸府郡以送何如? 以此輕快船, 在後企待。 其之價物, 以世蘇一一付上, 伏惟曲察。 忙不一一, 只玆不宣。"三月十又五日, 日本 豐臣調信着名, 稟朝鮮兵馬金節度使足下。 "先日與足下, 巨濟島中取材木之事, 堅定約束, 故使水路而斫取材木耳。 曩日我陣中五島船一隻, 水人十五名取來還來之際, 專船剽奪, 不知其所去。 又金海陣中大船一隻, 水人三十二名斫伐材木之時, 專船殺其人, 奪其船,豈有道理乎? 是大事之玼瑕耳。 金海將奮怒切齒, 欲戰水陸, 雪恥報仇之志, 然小的諭金海將曰: 願可强忍哉’, 一聞金節度之書信而然耳。 何乃足下不信不忠乎? 諺云: ‘毫釐之差, 千里以謬。’ 若殺人剽船爲小利, 而大事不成, 則是足下, 爲日本之不信, 亦可爲朝鮮之不忠耳。 自此以後, 若不守信, 則日本兵甲, 屯居巨濟島, 築山城而斫取材木耳。 願足下, 無怨無怨。 是朝鮮之失信, 非日本之失信耳。 餘事, 皆付於要僉知之口說耳。 伏惟亮察之。" 丁酉三月十七日, 豐臣行長着名, 松雲淸正問答。 "三月初九日, 就高靈縣, 於淸正陣, 先聲入送曰: ‘松雲曾入九華峯, 方欲調病, 適聞大上官, 要與相見, 罔晝夜下來。’ 十八日入賊中, 淸正書問曰: ‘六年之前, 沈遊擊小西飛, 奏大閤殿下曰: 「放還王子兄弟, 則朝鮮國王渡海歸服, 而可伸一禮」 云, 故頃止兵矣。 國王未渡海則已也, 王子兄弟內一人, 猶未渡海而致謝, 是不亦忘恩乎? 是朝鮮國王之僞乎? 大明使之然乎? 行長沈遊擊之所爲耶? 此大閤之所欲聞者也。’ 松雲曰: ‘朝鮮日本交隣, 而講信修睦, 二百年于玆。 一夕, 日本動無名之兵, 踐踏我山河, 蹙殺我人民, 丘墟我宗社, 又擒我王子, 於臣子之情, 豈不欲安宗社而還王子也, 於聖明之志, 豈無爲將軍致謝之私念哉? 然而當是時也, 天朝將官, 遍滿朝野, 奚暇忘恥而致謝乎? 況豈以王子去就, 有君臣渡海之理乎?’ 淸正書問曰: ‘朝鮮日本交隣, 二百餘年云, 而日本則不知, 必與對馬島, 相通信乎? 若與日本相通, 則何日本不知之至此甚耶?’ 答曰: ‘往在庚寅, 我國使臣黃允吉金誠一等, 往日本通信, 見關白受書而來, 此亦對馬之所爲耶? 余知關白之所爲也。 何將軍不察, 而歸罪於別人, 至此誤耶?’ 淸正書問曰: ‘若與日本, 交隣通信, 則五年前將伐大明之時, 以朝鮮爲先驅, 而亦欲借路矣, 竝不從而大逆。 是豈交隣通好耶?’ 答曰: ‘我國, 禮義之邦, 自有君臣父子, 而後爲屬大明之國, 君臣義定, 誠心事大, 雖天地覆墜而不易也。 何可與日本同伐大明, 作大逆無道乎? 是臣叛君, 子叛父, 天地之間, 寧有是理乎?’ 九日賊又書問曰: ‘對馬島人貪朝鮮米穀、財物, 詐稱日本之使, 而日本不得一統, 故遠島之人作謀之事, 全不知也。 今大閤殿下, 一統六十餘州, 對馬人詐謀之事, 若聞于大閤殿下, 則彼必爲誅戮也。 沈遊擊小西飛, 與之相謀者, 是何事也?’ 松雲答曰: ‘只聞封爾國關白爲王, 其他則不知也。’ 賊書示曰: ‘是乃朝鮮之事, 松雲何不知乎?’ 松雲答曰: ‘老、行長之所論, 余豈能知也? 今日我與上官密相議事, 彼何以知之?’ 賊曰: ‘國王不語松雲乎?’ 答示曰: ‘沈老行長相議事, 我聖明豈與松雲語哉? 今日我與上官相議事, 我聖明又何與沈遊擊平行長語之哉? 君王若於彼此漏洩, 則有何可事?’ 賊曰: ‘今日松雲, 與我上官相謀之事, 老雖不知, 可得以調乎?’ 答曰: ‘老雖不知, 上官所言公, 則云何不成? 若不公, 則雖爺, 奈爾何哉?’ 賊曰: ‘曾聞國王, 善惡間不能違爺之志, 是否?’ 答曰: ‘是。 爺天朝將士, 而又受分付冊使之命, 使之調戢兩國, 凡事成不成間, 及至於終, 不得不稟而決也。’ 賊曰: ‘然則又使爺, 到慶州而得相見否?’ 答曰: ‘天朝將士, 吾焉能使之往來哉? 然吾將進謁, 傳達此意, 欲探老爺所存微意也。’ 賊曰: ‘大師當下來之時, 朝廷上官等, 各相見語送乎?’ 答曰: ‘我之來時, 自山中聞將軍, 要與相見, 暫過京城, 或見或不見而來也。 我若盡知上官所言而去, 備告朝廷也。’ 賊曰: ‘爾朝廷大夫不好。 聞爾下來之奇, 衆上官等, 僉來語送, 可也。 自山中過京城, 或見或不見焉, 則爾國朝廷之事, 可知矣。’ 答曰: ‘爾是海外讎人, 我爲方外麋鹿, 以麋鹿之身, 投讎人之家, 豈有朝廷僉來語送也?’ 賊曰: "小西飛老, 同謀和事, 而竟不聞成事云, 是否?’ 答曰: "爾豈不知也? 吾未詳焉。 但聞天朝封關白爲王後, 關白不奉正朔, 頗有不恭之狀。 天朝欲以爾封王, 庶得解紛息爭也。’ 賊默然不語。 賊曰: ‘五年前四月, 於朝鮮京城, 沈遊擊平行長約和平之時, 還王子兄弟, 則國王渡日本致謝云。 是亦奏大閤也, 割朝鮮八道, 屬于日本云, 而亦奏大閤也。 故兵悉自京城南下, 居此海岸而竢之。 又放還王子, 而大閤亦自五年前, 至去年八月, 止兵竢之也。 雖然, 國王不渡海而致謝也, 亦不割地而屬日本也。 又王子兄弟中, 一人未渡海也, 只送卑職之臣, 似是致謝也, 故大閤大怒, 不對使者也。’ 答曰: ‘五年前, 日本軍兵出京城時, 王子放送, 則國王親渡致謝之說, 出何人之口, 割朝鮮之地, 屬日本之說, 又出何人之口也? 出於爺耶? 作於行長耶? 日本當是時, 雖擒百王子而不還, 豈有君王渡海致謝之理乎?’ 賊曰: ‘爾國於淸正有恩, 而不與淸正謀事, 却與別人謀事, 是非爾國之誤乎? 大明使之然乎?’ 答曰: ‘與別人議者, 非我國負恩而然, 亦非大明使然也。 但沈遊擊, 與平行長約束於四年之前, 非我等所敢知也。 賊曰: ‘此後所論, 則宜以朝鮮紙, 書而印之。’ 答曰: ‘非可以我等之言, 定公論。 成不成在天, 可不可, 在我朝廷與將軍也。’ 賊曰: ‘不與講和, 則兵漫漫渡海來也, 而燒却朝鮮, 卽成焦土, 似山壓卵, 如篲揭塵也。’ 答曰: "兵家勝敗, 實所難期, 滅亡之禍, 不知在誰邊也。 爾兵雖漫漫渡海, 天朝大兵及我國兵馬, 豈不如渡海之兵乎?’ 賊曰: "大閤奧意者, 王子二人中, 只要臨海君一人渡海, 伸禮於大閤殿下, 則卽見天下大平也。 大師歸而告朝廷, 上達國王, 使之來也。’ 答曰: ‘王子渡海事, 勢似不難, 而義則甚不可也。 以王子一身論之, 則雖渡海而伸禮於大閤之前, 亦似無妨, 以宗社論之, 則不可以王子, 送禮於君父讎之家。 決不可送也。 況我國王子, 非天子之命, 則入覲天朝, 猶且不爲。 其可渡海而見讎家之面目乎。"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八十六


  • 【태백산사고본】 54책 8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8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종친(宗親) / 사상-불교(佛敎) / 농업-임업(林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