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들이 황정욱의 일과 무과 출신자를 선발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
묘시(卯時)정각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갔다.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 특진관 이증(李增), 동지사 노직(盧稷), 특진관 이충원(李忠元), 참찬관 윤담무(尹覃茂)·우준민(禹俊民), 장령(掌令) 유몽인(柳夢寅), 헌납(獻納) 이필형(李必亨), 검토관 정혹(鄭㷤), 가주서 최충원(崔忠元), 기사관 이유홍(李惟弘)·허균(許筠)이 입시하였다. 】 상이 《주역(周易)》을 강했는데, 관괘(觀卦)의 서괘(序卦)로부터 시작하여 ‘위관야(爲觀也)’까지 하였다. 참찬관 윤담무가 【중후하고 엄격했으며 부박한 의논에 동요되지 않았다. 】 아뢰기를,
"모든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려고 손을 씻기 전까지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지녔다가도 이미 제사를 올린 뒤에는 성의가 조금 줄어들게 됩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거동을 바르게 하기를 처음 손 씻을 때처럼 한다면 아랫사람들이 모두 그 성의를 다하여 엄숙하게 우러러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제사를 가지고 말을 했을까? 이는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가 없다."
하자, 정혹이【근후하고 성실하여 팔계(八溪)016) 의 기풍이 거의 실추되지 않았다. 】 아뢰기를,
"임금의 시청언동(視廳言動)은 천하의 법도가 되어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가벼이 할수 없으니 마치 제사지내기 전 그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하는 일은 하늘의 사시(四時)와 같아서 그 교화는 자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히 아랫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니 말을 하지 않더라도 믿게 되고 하는 일 없이 그대로 두어도 교화되는데 하필 신(神)에게 가탁한 뒤에 전달되겠는가. 송(宋)나라의 어떤 사람이 이 말을 가탁하여 자기 임금에게 아뢴 일이 있다."
하니, 윤담무가 아뢰기를,
"왕흠약(王欽若)이 천서(天書)017) 를 지을 때의 일입니다."
하고, 정혹은 아뢰기를,
"그러므로 손석(孫奭)이 ‘하늘이 어떻게 말을 하는가.’하였는데, 대개 흠약의 말을 꺾는 말이었습니다. 어찌 지극히 신령한 하늘을 가탁하여 천신(天神)이 하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장령 유몽인(柳夢寅), 헌납 이필형(李必亨)이 아뢰기를,
"신들이 황정욱(黃廷彧)의 죄상을 논계(論啓)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전하께서 아득히 못 들은 척하십니다. 황정욱의 죄상은 상께서도 한없이 흉악하다는 사실을 밝게 아시면서 매양 훈구(勳舊)의 신하라고만 말씀하시는데, 그는 임금과 나라를 저버리고 원수인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스스로 훈구로서의 의리를 끊은 것인만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英靈)들께서도 주멸(誅滅)하려 하실 것입니다. 하찮은 공은 채록(採錄)할 것이 없습니다. 대의(大義)가 이미 없어졌으며 삼강(三綱)이 무너졌으니, 오늘날 형벌의 도를 잃을 뿐 아니라 후세 만대에 반드시 한없는 비평을 받을 것입니다. 목을 자르지 않고 안치하여 목숨을 마치게 하는 것도 그 죄악에 비하면 실로 너그러운 은전(恩典)인데, 어찌 감히 일개 여인의 호소에 의해 완전히 석방하여 전리(田里)에서 노후(老後)를 마치기를 아무 죄도 없는 자처럼 하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론은 오래 될 수록 더욱 울분해 하니 속히 공론(公論)을 따르시어 그 죄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담무(尹覃茂)가 아뢰기를,
"황정욱의 죄상은 양사에서만 논집(論執)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국의 공론입니다. 천지 간에 목숨을 부지하여 지금까지 안치된 것도 곧 국가가 훈구를 대우하는 도리에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어찌 반드시 전리로 되돌려 보낸 뒤에라야 훈구를 대우하는 체모를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이필형(李必亨)은 아뢰기를,
"상께서는 매양 연로하여 곧 죽으려 한다고 하교하시나 진실로 무거운 죄를 졌다면 비록 이미 죽었더라도 일으켜 주멸해야 할 터인데 어찌 죽게 되었다 하여 용서해 줄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따를 만하다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이미 죄를 입었고 목숨이 또한 다하려 하니 어찌 너무 심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필형이 아뢰기를,
"난리 이후에 무과로 사람을 많이 뽑아 적지 않은데 출신자(出身者)가 간혹 자기 이름자도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 이들로 수령을 삼거나 백관으로 삼으면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강경(講經)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 것은 그 본의가 있습니다. 지금 실시하려는 과거에 강경을 시행하게 하소서. 문자를 아는 인재를 뽑아 관직을 맡겨 쓴다면 국가에서 과거를 설치한 본의가 헛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옳다. 다만 비상 시국에 무용(武勇)이 있는 인물을 잃게 될까 두렵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해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필형이 아뢰기를,
"국사(國史)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임진년 이전에 산실(散失)된 것은 말할 것도 못 되지만 그 뒤의 역사 기록 역시 정리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중국군이 평양(平壤)을 회복한 일은 막대한 공적인데도 또한 민멸되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신도 일찍이 사관(史官)의 직임에 있으면서 그 당시 사관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여 승전(承傳)을 받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사관이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도 하고, 혹은 외방(外方)에 있기도 하며 직임 또한 각각의 업무가 있어서 지금까지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그 당시의 사관들을 춘추관(春秋館)에 모아 수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은 아뢰기를,
사신은 논한다. 넓은 도량은 하해(河海)와 같고 굳은 지조는 높은 산악과 같으니, 그는 나라의 주석(柱石)이라 할 만하다. 집에 있어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자신의 몸가짐은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갖추어 기록할 겨를이 없으므로 단지 그 중요한 점만 들었다.
"서경(西京)의 승첩은 비단 역사책에 그 영광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길 뿐만 아니라 돌에 새겨 만세토록 알려야 하니 속히 수정함이 진실로 옳습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우준민(禹俊民)은 【일을 볼 때 잘 살피기는 하나 대본(大本)이 바르지 않다. 】 아뢰기를,
"신은 예방(禮房)이 되어 임진 이후의 《일기》를 6월과 7월 이외에는 모두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사와 감사(監事)는 보지 못하였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사책(史冊)을 보지 못하고 당상관(堂上官)만이 보았기 때문에 전혀 들어 알지 못합니다."
하고, 윤담무는 아뢰기를,
"《일기》의 포폄(褒貶)은 그때 그때 써서 들이는데 임진년과 계사년간에는 포폄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수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유몽인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수령으로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백성들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평상시라면 그만이지만 난리 때는 더욱 사람을 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 본도에서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그 도의 수령을 제수하는데 그 사람이 비록 한때의 공로는 있다 하더라도 혹 식견이 없거나 글을 모르므로 인읍(隣邑)에 제수되고 나면 일도(一道)만 그를 가벼이 취급할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업신여겨서 호령 또한 시행되지 않고 백성들만 침탈하니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제수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수령에 합당한 자라면 제수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 합당한지의 여부를 헤아려서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필형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봉화(烽火)를 설치한 데는 목적이 있고, 병법(兵法)에도 ‘봉수(烽燧)와 척후(斥候)를 신중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큰 적이 바다를 건너왔는데 봉화는 전과 같이 위급을 알리는 일이 없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어도 여기서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근래 모든 일이 해이한데 봉수가 더욱 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봉수의 폐단은 경장(更張)하기가 쉽지 않다. 비록 봉수의 사졸에게 군령을 시행한다 해도 일이 되지가 않아 내 생각에 매양 혁파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하였다. 모든 봉대(烽臺)가 산정에 있기 때문에 운무(雲霧)와 분별할 수 없는 것이지 봉졸(烽卒)이 태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계미년 북변(北變) 때에도 이와 같았기 때문에 속히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故) 정승 정유길(鄭惟吉)의 말에 ‘변방의 경보(警報)가 있으면 봉화를 올리지 않고, 없으면 봉화를 올린다.’고 했으니, 옛날부터 그랬던 것이다. 중국의 봉수 제도는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자, 동지 노직(盧稷)이 【재주와 식견이 다같이 원대하여 난형 난제(難兄難弟)라고 할 만하였다. 】 아뢰기를,
"중원 변방에는 5리마다 연대(烟臺) 하나가 있는데 혹 2개소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직선으로 한 줄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종횡으로 뒤섞어서 설치했기 때문에 마치 바둑돌을 늘어 놓은 것 같습니다. 한번 위급한 경보가 있으면 군마(軍馬)가 즉시 함께 출동합니다. 그러므로 봉화가 오르는 것을 병력 출동의 때로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봉수는 전의 제도를 고칠 수 없을까?"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출신(出身)으로 가서 지키게 하려 해도 봉대가 매우 많으므로 두루 보낼 수 없습니다. 만약 파발군(擺撥軍)을 세운다면 합당할 듯합니다. 계미년에 신이 병방 승지(兵房承旨)로 있을 때 빨리 달려 보고해 보았는데 비록 그렇게 속히 전달하지는 못했으나 봉화보다는 나았습니다. 제주(濟州)는 지방이 멀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봉화로 위급을 알리면 목사(牧使)는 때맞추어 군사를 출동시켜 바다에 나가는데, 다만 구름이 끼는 것이 염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화(江華) 역시 이와 같이 봉화를 만들 수 있겠는가? 강화는 주위가 제주에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제주가 조금 큽니다."
하고, 노직은 아뢰기를,
"여주(驪州) 이하 강가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작은 둔덕을 만들고 그 위에 장대를 세워, 밤에는 등을 달아 서로 응하게 하고 낮에는 깃발을 올려 서로 보이게 하였는데, 급보가 있을 때는 신속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대를 높이 세우면 판별하기 쉬울 것이다. 강 연안에 몇 개소나 해 놓았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여울의 모래톱이나 산모퉁이 수풀이 우거진 곳의 서로 바라다 보이는 지역에는 모두 설치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각 고을 및 산성의 제반 사정은 어떠한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광주(廣州)의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주위가 포백척(布帛尺)으로 1만 7천 4백여 척인데 외부는 험난하고 안은 깊숙하며 능선이 매우 길어 갑자기 포위할 수 없습니다. 남쪽은 약간 평지이고 다른 곳은 모두 암석이어서 기어오르기가 불가능합니다. 이곳이 바로 온조(溫祚)의 옛 도읍지로서 다른 성에 비하여 더욱 크고 일찍부터 거주민도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터가 있는가? 그 안에는 우물이 있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돌을 다듬어 만들었으나 퇴락한 것이 3분의 2는 되며 남쪽은 험하지 않은데 또 곡성(曲城)을 쌓았습니다. 가운데는 큰 개울이 있으며, 우물은 모두 6개소이고, 수답이 거의 십여 석(石)지기나 되며, 좋은 밭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이 있던 자리도 있는가? 성(城)의 역사(役事)는 이미 시작했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동문(東門)·남문·수구문(水口門)의 세 문이 있는데 모두 이미 수리했으나 성은 공사가 매우 거창합니다. 체찰사가 당초 광주(廣州)에서 군사 훈련을 하고 그 군사들을 모아 돌을 운반해 터를 닦으려고 하였으나 보리 파종기가 되어 농사를 폐할 염려가 많았기 때문에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들으니 용진진(龍津鎭)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던데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전에 있던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로 변응성(邊應星)이 지키던 곳인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지금은 허수(許售)가 진장(鎭將)입니다. 군량과 병기는 모두 갖추어져 있고, 그 군사는 모두 강원·황해·평안도 등지의 승려들로서 지금은 반수가 환속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환속한 자가 얼마나 되며, 군량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거의 1백여 인에 이르는데, 화포(火砲)와 활쏘기에도 모두 숙달되었습니다. 군량은 도체찰사가 어물과 소금을 가지고 곡식을 바꾸어 오고, 허수는 안흥량(安興梁)에 있을 때에도 둔전(屯田)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 배로 운반해 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파사성(婆娑城)은 기계(機械)와 군량이 다 준비되었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대포와 소통(小筒)은 황해도로부터 왔으나 그 나머지 활이나 화살 등도 역시 자못 갖추어졌고 군량은 거의 3천 석에 이릅니다. 단지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독성(禿城)에는 수원(水原)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행할 때 성을 지키는 절차 등을 모두 연습시켰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용진·파사성·독성에서 모두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틀리지 않던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비록 경성 도감(都監)의 군사 훈련만은 못해도 자못 법도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독성의 견고하기는 어떠하던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들으니 하삼도(下三道)에는 이렇게 험하고 견고한 성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수원은 인구가 많아 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안성(安城)에도 서운 산성(瑞雲山城)이 있는데 크고 견고합니다. 고을 사람들이 무한 산성(無限山城)에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성을 쌓아 지키려고 합니다. 다만 대로(大路)를 방어하기에 너무 멀고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므로 하지 못합니다. 무한 산성은 독성만은 못합니다. 또 앞에 굽어 볼 수 있는 산이 있는데 방어사 변양걸(邊良傑)이 독성 위에 흙을 쌓아 위를 평평하게 한 뒤에 집을 세우고 창을 뚫어 내려다 보게 하였습니다. 석거(石車)와 포군(砲軍)은 모두 그 속에 들어가고 성 밖에는 목책(木柵)을 세워 틈 사이로 적을 쏘도록 하였는데 다만 물이 부족하여 날씨가 가물 때에는 군사들이 머물 수 없습니다. 죽산(竹山)에 산성이 있는데 산에 사각(四角)이 있는 것이 마치 천연적인 성의 포루(抱樓)와 같아 간망(看望)하기에 매우 좋습니다. 역시 수축하여 충주(忠州)로 통하는 직로(直路)를 제압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거의 1만여 명에 이르는데 1백 인 중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거의 50∼60명 꼴이 되므로 이들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군인들은 한 사람이 오만가지 일을 담당하니 그 고생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수군(水軍)은 더욱 고생이 많으니 1년에 4교대로 번을 서는데 당사자와 봉족(奉足) 3인이 번갈아 가면서 역을 맡으므로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70∼80세가 되어도 나이가 많다고 해서 군역을 면제시키지 않고 죽으면 자손으로 배정하는데 병조에서도 분간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정(閑丁)으로 충원한다면 늙은이들을 면제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이 수군 대장의 직임에 제수되었으나 선척과 군정(軍丁)이 아직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군사는 강변 사람들을 권유하여 잠정적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선척은 개인의 배를 모아 그 숫자를 장부에 적어 놓았으나 이것으로 위급한 사태에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신은 강화(江華) 군졸로 격군(格軍)을 삼으려 하는데 바다로 나가면 수군이 되고 육지에 오르면 방어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중원(中原) 통주(通州)의 강 어구에 있는 각 관아에서는 각각 배를 갖추고 있다가 위급한 경우에는 각기 자기 물건들을 싣고 갑니다. 우리 나라의 물자와 인력으로는 두루 제작하기는 어렵겠으나 육조 아문(六曹衙門)의 경우에는 각각 1척씩 준비하여 위급한 경우에 대비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또 파사성(婆娑城)과 용진(龍津) 사이에 부용성(芙蓉城)이 있는데 흙으로 쌓아서 망대(望臺)로 삼으려 합니다. 사궁성(舍弓城)이 또 양근군(楊根郡)에 있는데, 서쪽 성이 매우 험준하므로 사람들이 들어가 지키면서 피란의 계책을 세우려 합니다. 군 남쪽에 남산이 있고, 산에는 모래가 깔린 여울이 있는데 이곳을 높이 막으면 여주(驪州)와 충주(忠州)에서 오는 적이 반드시 마음대로 파사·용진 밖으로 침투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물력(物力)이 궁핍하기 때문에 미처 수축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느 고을을 순찰하고 돌아왔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신이 도체찰사와 광주(廣州)·용진·양주(楊州)·여주·파사성을 지나 신은 먼저 이천(利川)·죽산·안성·양성(陽城)으로 향했다가 수원의 습진처(習陣處)로 모였고 체찰사는 여주로부터 양지(陽智)·용인·진위(振威)를 경유했는데 신은 수군의 일 때문에 먼저 경성으로 돌아오고, 체찰사는 그대로 남양(南陽)·안산(安山)으로 향했다가 입성(入城)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찰(體察)에게 무슨 병이 생겼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감기가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양 사이에는 해방처(海防處)가 있는데 어떠한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그곳은 바로 비파관(琵琶串)입니다. 모래사장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형국인데 물을 끌어대어 막으면 백성들이 피란할 수 있겠지만 방어하면서 지킬 곳은 못 된다고 합니다. 신이 수원에 있을 때 체찰 부사(體察副使) 한효순(韓孝純)이 【성실하고 도량이 있었다. 영남의 방백(方伯)이 되어서는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다. 】 말하기를 ‘바다로 내보내는 병선(兵船)을 먼저 1백 척을 보냈다. 식량 실은 배와 협선(夾船)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데 대략 2백여 척이 된다.’하고, 또 ‘배 한 척에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이 1백 30인이니, 1백 척이면 1만 명은 실을 수 있는데 지금부터 8월까지의 식량이 거의 3만여 석이나 되어 갑자기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직접 와서 상달(上達)하려 하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전라도 해변의 전세(田稅)를 충청도의 어염(魚鹽)으로 무역한 쌀과 바꾸어서 수군의 군량에 충당할까 해서입니다."
하고,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해변의 전세는 수량이 적은데 호조의 경비가 부족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군이 또 굶주릴 것이니 일이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호조 역시 극도로 고민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뽑을 때 충청도는 어째서 소요했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미리 수괄(收括)하지 않고 임시하여 징집해서 보내자 군사들이 모두 도망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전 2결(結)마다 군사 1명을 내었는데 결주(結主)는 쌀로 군정(軍丁)을 바꾸어 보내고 군사가 도중에 도망하면 그 결주에게 다시 징발했습니다. 한 차례 번(番)이 도망가는데 정미(正米)가 16석이니 백성들이 어떻게 동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광악(李光岳)이 거느리고 간 1백 50명의 군사 중 전쟁터에 이른 자는 단 30명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사들의 심리상태로 어찌 위급한 경우에 쓰임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토호(土豪)나 품관(品官)들이 장정(壯丁)들을 많이 숨기고 있는데 수령들이 만약 잘 조처한다면 모두 수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정탐인과 김응서(金應瑞)의 장계 내용이 각기 달라 지금 수군이 바다로 나가면서도 아직 적정(賊情)이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행장(行長) 등이 기필코 수군을 격파하려고 했다면 하필 바다로 나오기를 간절하게 청한 뒤에야 간계(奸計)를 부리겠는가. 지금 복병이 요격(邀擊)하는 사태도 없으니 행장은 처음 청정(淸正)을 바다로 나오게 하려다가 계획대로 되지 않자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만약 한 척의 배를 격파함으로써 죄를 면하고 공을 바랄 계책을 세웠다면 남원(南原) 일로에 충돌하여 분탕질하면서 잡은 것이 어찌 배 한 척의 1백여 급(級)뿐이겠는가. 지금 움직이지 않으니 청정과 틈이 벌어졌다는 말은 지금 와서 더욱 믿을 수 있다. 또 청정이 바다로 나와 싸우지 않으니, 우리 수군을 꺼리는 것을 역시 알 수 있다."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행장이 청정을 도모하려고 우리 나라와 힘을 다하는 것 같으나 끝내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노직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에서 지금 병선 40여 척을 건조(建造)하고 있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만 중국이 구원해 주기를 믿을 뿐이다. 지금은 중국군이 나온다는 소식 또한 없는데 전해 들은 소식은 어떠한가?"
하니, 특진관(特進官) 이충원(李忠元)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오구령(吳九齡)을 【순무(巡撫)의 차관(差官)이다. 】 만났는데 그의 말이 총독(總督)과 순무의 청병하는 이자(移咨)가 이달 3일에 이미 병부(兵部)에 들어갔는데 경략(經略)은 의견이 화합하지 않아 두 차례나 사직서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병부에서 전혀 출병하려는 형적이 없으니 염려됩니다."
하고, 노직은 아뢰기를,
"자문(咨文)에도 역시 ‘청정이 비록 오더라도 꼭 죽일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석성(石星)이 미봉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충원은 아뢰기를,
"지난번 복수군(復讐軍)은 상께서도 마음을 다하시어 왕자·부마(駙馬)및 종성(宗姓) 자손과 외손까지도 모두 입참(入參)케 하시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머리를 쳐들고 감격해 합니다. 비록 17세의 부인도 군중에서 물을 길어다 주기를 원하니, 진실로 측은히 여기시는 교서를 내려 사방에 고유(告諭)하신다면 반드시 흥기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승전을 받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전을 받드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은 전쟁터로 몰아내는 일에 가까울 뿐이다." 하였다. 특진관 이증(李增)이 【훈구의 재상으로서 임금을 따르지 않았으니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 아뢰기를,
"신 역시 자식을 잃었기 때문에 군중(軍中)에 참여했으나 군사 수가 차지 않고 장수로 정해진 사람도 없어 비록 전쟁터로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객병(客兵)은 전쟁터에서 쓸 데가 없었습니다. 친수(親讎)가 있는 사람 중에 장수의 재능이 있는 사람을 얻어서 통솔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덕형(李德馨)은 【일찍이 문병(文柄)을 맡았고, 오래도록 병조에 있었으나 재능은 미치지 못했다. 】 ‘유응수(柳應秀)가 꾀와 사려(思慮)가 있으며, 또 북쪽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복수를 하려고 하니 장차 세력을 합하여 쓰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초관(哨官)중에 친수가 있어 복수군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초(哨)중에서 친수가 있는 자가 있으면 뽑아내어 하나의 초를 만들고 초관은 유비(柳斐)·원신(元愼) 등을 【두 사람은 모두 친수가 있다. 】 장수로 삼아 거느리고 가게 하는 것이 또한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응수(柳應秀)는 장수로 삼을 만하고, 초군의 복수군 또한 모아서 한 부대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노직이 아뢰기를,
"난리가 일어난 뒤에 적을 토벌하다가 죽은 자로 원호(元豪)만한 【충성스럽고 용맹한 기개와 굳세고 매서운 절의는 실로 쉽게 얻을 수 없었다. 】 자가 없습니다. 여주(驪州) 후미포(後尾浦)의 적을 원호가 모두 섬멸했습니다."
하고, 정혹(鄭㷤)은 아뢰기를,
"원호는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는데 강원도에서는 지금까지 ‘원호가 만약 있었다면 적이 감히 강원도에서 함부로 날뛰지 못했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군공(軍功) 장계가 중로에서 없어져서 지금까지 논공(論功)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호는 포장(褒奬)하고 추증(追贈)했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에 증직했습니다."
하였다. 우준민(禹俊民)이 아뢰기를,
"신이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느라 황주(黃州)에 갔었는데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모두 폐하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체직시켜 제대로 하게 해야 하겠다."
하였다. 우준민이 아뢰기를,
"작년에 신이 황해도를 안찰(按察)하면서 무재(武才)를 시험보일 때 사수(射手)는 편철전(片鐵箭) 각 1순(巡)에 20분(分), 포수(砲手)는 9발(發)에 6중(中), 살수(殺手)는 상등(上等) 이상인 경우는 계문(啓聞)하여 상을 주고, 그 이하는 쌀로 상을 주기로 했는데, 이제 들으니 지금까지 상격(賞格)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하니, 마음이 매우 서운합니다. 해당 관아로 하여금 사목(事目)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물어보라. 상격은 이미 다 마련했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했다."
하였다. 윤담무(尹覃茂)가 아뢰기를,
"교서관(校書館)의 관원이 모두 결원인데, 충원하지 않아서 교정(校正)하는 일이 말이 아닙니다. 궐원을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8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66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건설(建設) / 무역(貿易)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풍속-예속(禮俗)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사상-불교(佛敎) / 농업-전제(田制) / 공업-수공업품(手工業品)
○丙戌/卯正, 上御別殿。 【領事金應南、特進官李增、同知事盧稷、特進官李忠元、參贊官尹覃茂ㆍ禹俊民、掌令柳夢寅、獻納李必亨、檢討官鄭㷤、假注書崔忠元、記事官李惟弘ㆍ許筠入侍】 上講《周易》, 自《觀》序卦止爲觀也, 參贊官尹覃茂 【方重簡嚴, 不撓浮議。】 曰: "凡人將祭, 盥手之前, 誠孚于中, 旣薦之後, 則誠意小衰。 居上者當正其表儀, 如始盥之初, 則在下之人, 皆盡其孚誠, 顒然瞻仰之。" 上曰: "何以祭祀言之? 是必有意, 然不可知也。" 鄭㷤 【謹厚勤實, 八溪家風, 庶乎不墜。】 曰: "人君視動, 爲天下法。 一毫不可自輕, 如祭盥手之前, 方盡其精誠, 故以此言之。" 上曰: "聖人所爲, 如天之四時, 其化無迹可尋, 自然爲下民之觀感。 其不言而信, 無爲而化, 何必托神而後傳乎? 宋有人, 以此言托稱於其君。" 尹覃茂曰: "王欽若造天書時事也。" 鄭㷤曰: "故孫奭以爲天何言哉, 蓋折欽若之言也。 豈可以天之至神, 假托爲天神下敎之也?" 掌令柳夢寅、獻納李必亨曰: "臣等以黃廷彧罪狀, 論啓累日, 天聽逾邈。 廷彧之罪, 自上已燭其窮兇極惡, 每以勳舊爲言。 渠之負君忘國, 屈膝讎虜, 自絶勳舊之義者, 祖宗在天之靈, 亦欲誅之, 微功不足採也。 大義已滅, 三綱攸斁, 非徒失刑於今日, 萬世必有無窮之譏。 得保首領, 安置畢命, 於其罪惡, 固爲寬典。 豈敢以一女子之訴, 全然放釋, 終老田里, 若無罪者然乎? 物情逾久而逾鬱, 請速從公論, 以明其罪, 如何?" 尹覃茂曰: "廷彧罪狀, 非兩司獨執之論, 乃一國公共之論。 其假息覆載間, 安置到今, 乃國家待勳舊之恩, 於斯至矣。 豈必以歸處田里, 然後爲待勳舊之得體乎?" 李必亨曰: "自上每以年老將死爲敎, 苟有極罪, 雖骨委九原, 亦當起而誅之, 豈可以將死貰之乎?" 上曰: "可從則不從之乎? 旣已蒙罪, 命又將盡, 豈可已甚乎? 棄之可也。" 李必亨曰: "亂離以後, 多取武科, 人不爲少, 而出身者, 或不知其名。 以此爲臨民之官, 百執事之役, 決難堪任。 自古講經試取, 其意有在。 今將設科, 請令講經, 得識字之人, 以委官守而用之, 則國家設科之意, 亦不爲虛矣。" 上曰: "此言是也, 但非常時, 恐失武勇之士。 令該曹議處之。" 李必亨曰: "國史最重, 壬辰以前, 散失者不足言, 其後史記,不修者亦多。 如天兵克復平壤之事, 莫大盛烈, 而亦泯不書。 臣曾忝史職, 請推其時史官, 至奉承傳。 史官或爲外任, 或在外方, 職任亦各有務, 至今未修。 請其時史官, 會于春秋館, 修正何如?" 領事金應南
【史臣曰: "寬弘之量, 河海不能擅其大, 堅峙之操, 喬岳不能喩其固, 可謂屹然邦家之柱石也。 其孝悌家居, 淸儉律身。 不暇備記, 只論其大者。"】
曰: "西京之捷, 非但垂光於簡冊, 可以勒石告萬代。 從速修正, 誠爲是矣。" 參贊官禹俊民 【莅事雖察, 大本不正。】 曰: "臣爲禮房, 壬辰以後日記, 六月七月之外, 竝不修正矣。" 上曰: "領、監事不見乎?" 金應南曰: "近來不見史冊, 堂上只見之, 故全不聞知。" 尹覃茂曰: "日記褒貶, 臨時書納, 而壬辰、癸巳年間, 不爲褒貶, 故如是不爲修正矣。" 柳夢寅曰: "民生休戚, 在於守令, 守令不得其人, 則民不聊生。 平日則已, 亂離尤甚, 不可不擇人。 近來本道, 有軍功人, 例授其道守令。 其人雖有一時之功, 或無識, 或不知文, 及除隣邑, 則非徒一道輕之, 民亦侮慢, 號令亦不得行, 侵漁割剝, 其弊不貲。 今後勿爲宜當。" 上曰: "如可合守令者爲之, 亦無不可。 可合與否, 量爲之可也。" 李必亨曰: "國家設烽火, 意有存焉。 兵法亦有謹烽燧遠斥候之言。 今則大賊渡海, 烽火則依舊無報急之事, 萬一有急, 在此難知。 近來百事懈弛, 烽燧尤甚。" 上曰: "我國烽燧之弊, 未易更張。 雖行軍令於烽燧, 士卒事不可爲。 予意每欲革罷而不得矣。 凡烽臺在山頂, 故雲霧難辨, 非烽卒頑慢之所致也。" 金應南曰: "癸未北變, 如是, 故不得猝傳耳。" 上曰: "故政丞鄭惟吉有言, 有邊警則烽不擧, 無則擧烽。 此自古然矣。 天朝烽燧之制, 未知如何。" 同知事盧稷 【材識俱遠, 亦可謂難弟。】 曰: "中原邊防, 五里一烟臺, 或設二處。 非但一帶直設, 而錯置縱橫, 如布碁子。 一有警急, 軍馬卽時俱動, 故以烽擧燧燔, 爲行兵之期矣。" 上曰: "我國烽燧, 不可改前制乎?" 金應南曰: "欲以出身往守, 烽臺甚多, 不得遍送。 若立撥軍則似當。 癸未, 臣爲兵房承旨, 急走以報, 則雖未速傳, 亦逾於烽火矣。 濟州則地方不遠, 故專以烽火報急, 牧使臨時行軍下海, 只以雲暗爲懼矣。" 上曰: "江華亦可依此爲烽火乎? 江華周回, 比濟州如何?" 金應南曰: "濟州稍大。" 盧稷曰: "驪州以下江上, 都體察使設小垜立竿, 夜則懸燈相應, 晝則擧旗相示, 脫有急報, 可以速傳。" 上曰: "立竿高則易辨矣。 沿江幾處耶?" 盧稷曰: "沙觜臨灘及山角蔽虧, 可以相望之地, 皆設矣。" 上曰: "京畿各邑及山城諸事何如耶?" 盧稷曰: "廣州 南漢山城周回, 以布帛尺, 一萬七千四百餘尺, 外險內奧, 山根甚遠, 賊不可猝圍。 南面稍平, 他處皆石, 不可攀上。 此乃(溫詐)〔溫祚〕 故都, 比諸城尤大, 民曾有居者。" 上曰: "有城基乎? 中有井泉乎?" 盧稷曰: "石面鍊造, 頹落者三分之二, 南面不險, 又築曲城矣。 中有大川, 井凡六處, 而水田基亦幾十石許, 良田不知其幾矣。" 上曰: "有門基乎? 城已始役乎?" 盧稷曰: "有東門、南門、水口三門, 皆已修造, 城則功役甚鉅。 體察使初欲習陣于廣州, 因聚其軍, 移石開基, 以種牟之時, 廢農必多, 故不得爲之矣。" 上曰: "聞龍津鎭, 移在他處, 在何地耶?" 盧稷曰: "猶在前處。" 上曰: "卽邊應星所守之處乎?" 盧稷曰: "然。 今則許售爲鎭將, 糧、機皆俱。 其軍則皆是江原、黃海、平安等道僧人, 今半還俗矣。" 上曰: "還幾何? 軍糧出於何地耶?" 盧稷曰: "幾至百人, 而火砲、弓矢, 亦皆習熟, 軍糧, 都體察使, 以魚、鹽貿穀, 而許售在安興梁時, 亦作屯田, 今將船運而來。" 上曰: "婆娑城, 器械、軍糧皆備乎?" 盧稷曰: "大砲、小筒, 自黃海道來, 其餘弓矢等物, 亦頗不備, 軍糧幾至三千石矣。 人情但以水乏, 不欲入矣。 禿城則水原皆願入矣。" 上曰: "巡行時守城節次, 皆爲習之乎?" 盧稷曰: "龍津 婆娑 城、禿城皆爲之。" 上曰: "不齟齬乎?" 盧稷曰: "雖不如京城都監之習陣, 亦頗有法矣。" 上曰: "禿城之堅若何?" 盧稷曰: "聞下三道, 無如此堅險云矣。 但水原人衆, 不可盡入矣。 安城亦有瑞雲山城, 大且堅固, 郡人不欲入無限山城, 故欲築而守之。 但以拒大路甚遠, 物力不足, 故不爲矣。 無限山城, 不如禿城, 且有(附)〔俯〕 臨之山。 防禦使邊良傑, 築土禿城上, 平塡作家, 穿窓俯制, 石車砲軍, 皆入其中, 而城外立木柵, 以隙射賊, 但水乏天旱, 則軍不可留矣。 竹山有山城, 山有四角, 若天城砲樓, 看之甚好, 亦欲修築, 以制忠州直路矣。" 上曰: "京畿軍額幾何乎?" 盧稷曰: "幾至萬人。 百人中能射, 幾五六十人, 可以使用。 但以軍人, 一當百役, 其苦難勝, 而水軍尤苦。 一年四番立防, 以當身及奉足三人輪往, 爲役最苦, 故年至七八十, 未爲老除, 死則以子支定之, 兵曹亦不分揀。 若以閑丁充差, 則老者自可除矣。 且臣受舟師大將之任, 而船隻、軍丁, 尙未完備。 軍則勸諭江邊人, 暫爲束伍, 船則聚私船, 置簿其數, 不可以此, 爲緩急之用。 臣欲以江華軍卒, 爲格軍, 下海則爲水軍, 上陸則爲防守似當。 中原通州江口各司, 各具船隻, 有急則各載其物以去。 我國物力, 不可編造, 如六曹衙門, 各備一隻, 以待緩急亦可矣。 且婆娑、龍津之間, 有芙蓉城, 欲築以土, 爲候望之地。 舍弓城又在楊根郡, 西城甚險絶, 故人欲入守, 爲避亂計。 郡南有南山, 山有沙灘高扼, 此則呂、忠來賊, 必不得任意透出於婆、龍之外。 只以物力乏絶, 故未及修築耳。" 上曰: "卿巡到何邑而回耶?" 盧稷曰: "臣與都體察使, 歷廣州、龍津、楊州、驪州、婆娑城, 臣先向利川、竹山、安城、陽城, 會于水原習陣處, 體察自驪州, 經陽智、龍仁、振威, 而臣先以舟師事回京, 體察仍向南陽、安山而入城。" 上曰: "體察作何病耶?" 盧稷曰: "感寒矣。" 上曰: "南陽間有海防處, 如何?" 盧稷曰: "此乃琵琶串, 沙岸斗入海中, 引水絶之則民可避亂, 非防守之處云矣。 臣在水原, 見體察副使韓孝純, 【謹實有量。 爲嶺方伯, 盡心國事。】 言: ‘兵船下海者, 先送一百隻, 糧船夾船, 不在此限, 大約二百餘隻云, 一舟, 射手、格軍一百三十人, 百隻載一萬名, 自今至八月糧, 幾三萬餘石, 恐未易猝辦云’ 矣。" 上曰: "以何事而欲來親達耶?" 盧稷曰: "欲以全羅海邊田稅, 換忠淸道魚鹽貿易米, 以補水軍糧餉矣。" 金應南曰: "海邊田稅數少, 且戶曹以經費不足爲慮耳。" 上曰: "如此不爲, 則舟師亦餒, 事不可說。" 金應南曰: "戶曹亦悶極矣。" 上曰: "抄軍之時, 忠淸道何以騷擾乎?" 盧稷曰: "不爲預括, 臨時起送, 軍皆逃匿, 故不得以二結, 立軍一名, 結主以米易軍〔送〕 之, 在途而逃, 則還徵其主。 一番散正米十六石, 民安得不動乎? 以是不得集事矣。 李光岳所領軍一百五十, 比至戰所, 則只有三十名。 以此軍心, 詎望其緩急之用乎? 且鄕豪、品官, 多匿壯軍。 守令若善置, 則可以盡括矣。" 金應南曰: "偵探人及金應瑞狀啓, 所言各殊, 今番舟師之下海, 尙未知賊情之如何耳。" 上曰: "行長等必欲破舟師, 何必苦請下海, 然後可行奸計? 今無伏兵邀截之事, 行長初必欲淸正下海, 而旣不得如計, 故中止不行耳。 若以破一船, 爲免罪邀功之計, 南原一路, 衝突焚掠, 所獲豈止一船百餘級? 今則不動, 與淸正相隔之言, 至此而愈信矣。 且淸正不下海與戰, 憚我舟師, 亦可知矣。" 盧稷曰: "行長欲圖淸正, 故與我國爲盡力狀, 其終必不可保無事矣。" 上曰: "然矣。" 盧稷曰: "李舜臣於閑山島, 方造兵船四十餘隻, 而未畢云矣。" 上曰: "只恃天朝之拯救, 今則天兵出來消息亦無。 傳聞如何?" 特進官李忠元曰: "臣昨見吳九齡。 【巡撫差官。】 言: ‘摠督撫院請兵移咨, 今月初三日已入兵部, 而經略以議不合, 再度呈辭’ 矣。" 金應南曰: "兵部了無出兵之形, 可慮。" 盧稷曰: "咨文亦曰: ‘淸正雖來, 不必厮殺。’ 此石星欲爲彌縫矣。" 李忠元曰: "頃日復讐軍, 自上亦爲盡心, 令王子、駙馬及宗姓子支、外孫, 皆令參入, 一國臣民, 擧首感激, 雖至十七歲婦人, 亦願擔水軍中。 誠下惻怛敎書, 諭告四方, 必有興起而從者。 請捧承傳何如?" 上曰: "不可捧承傳。 此則近於驅迫耳。" 特進官李增 【勳宰, 不從君, 餘何足觀?】 曰: "臣亦以亡子之故, 參於軍中, 軍額未充定, 將無人, 雖有願赴戰所者, 客兵無用於戰陣。 欲得有親讎之人, 有將才者以領之。 李德馨 【早典文柄, 久居本兵, 而材式不逮。】 則以爲: ‘柳應秀有計慮, 且領北兵南下, 欲爲復讐, 將以合勢用之’ 云矣。" 金應南曰: "都監哨官有親讎者, 欲入復讐軍, 臣以爲不可。 移置其哨中有讐者, 抄出爲一哨, 哨官如柳斐、元愼 【二人皆有親讐。】 等, 爲將以率去, 亦可。" 上曰: "柳應秀可用爲將, 而哨軍復讎, 亦可聚爲一隊矣。" 盧稷曰: "亂後討賊而死者, 無如元豪。 【忠勇之氣, 剛烈之節, 誠不易得。】 驪州 後尾浦之賊, 《豪》盡滅之。" 鄭㷤曰: "豪兼江原助防將。 江原至今〔言〕 曰: ‘豪若在, 賊不敢肆於江原’ 云, 而軍功狀啓, 沒於中路, 至今未論其功矣。" 上曰: "元豪褒奬, 追贈乎?" 金應南曰: "贈兵曹判書矣。" 禹俊民曰: "臣以天使餞慰, 往黃州, 兵使朴晋病不視事, 凡鍊兵等事, 專廢不爲矣。" 上曰: "然則當遞察爲之。" 禹俊民曰: "上年, 臣以巡按在黃海道, 試(材)〔才〕 , 射手片鐵箭各一巡二十分, 砲手九發六中, 殺手上等以上, 啓聞賞論, 其以下賞以米斗。 今聞賞格, 至今未行, 心甚缺然。 請令該司, 依事目施行。" 上曰: "問于該曹, 賞格今已磨鍊, 不及行矣。" 尹覃茂曰: "館官員盡乏未充, 校正之事, 不成模樣。 請出闕員何如?" 上曰: "依行。"
- 【태백산사고본】 54책 8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66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건설(建設) / 무역(貿易)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풍속-예속(禮俗)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사상-불교(佛敎) / 농업-전제(田制) / 공업-수공업품(手工業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