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 2월 23일 갑신 3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도원수 권율의 치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치보(馳報)에 ‘10일은 일기가 온화했다. 저와 통제사(統制使)·경상 우수사가 일시에 전선(戰船) 63척을 거느리고 해뜰 무렵에 장문포(長門浦)에서 배를 띄워 미시(未時)에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니 왜적이 창황히 수선떨며 병력 3백여 명을 내어 저항하려고 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수군(水軍)이 절영도(絶影島)로 후퇴하여 정박하자 왜적들도 저희들 진으로 도로 들어갔다. 날이 어둡자 요시라(要時羅)가 배를 타고 나와서 행장(行長)의 뜻으로 말하기를 「즉시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의 말이 있을까 두려워서 즉시 사람을 보내지 못했다. 」 하고, 또 행장의 말을 비밀히 전하기를 「내가 미리 여러 진의 왜장들에게 허세를 부려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 오랫동안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용병술(用兵術)에 익숙해 있고 많은 전함(戰艦)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길는지는 알 수 없다. 청정(淸正)이 바다를 건너온 뒤에 잠시 그 군사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이로 인하여 분노하였다. 이달 8·9·10일 간에는 수군이 기필코 부산 앞바다에 나가 정박하고 양도(糧道)를 끊으려 할텐데 이후 우리들의 형세가 낭패할 것이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또 들으니 수군의 숫자가 거의 1천여 척에 이른다고 한다. 각진에서는 십분 자세히 살펴서 관하의 왜인을 단속, 제멋대로 행동하여 조선의 노여움을 도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지금 수군을 보니 그 숫자가 매우 적고 보기에 엄숙하지도 못하여 내가 퍼뜨린 말이 결국 거짓으로 돌아가 내심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지금 이 계책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니다. 청정이 처음 관백(關白)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에 결연히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은 이미 일본에게 죽임을 당해 남은 병졸이 거의 없으니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나간다면 어찌 왕자(王子)만 와서 사죄하겠는가. 땅 역시 점령해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니 나의 조처가 어찌 행장과 같겠는가. 』 하였다. 관백이 청정의 말을 믿고 드디어 약속을 어겼으니 매우 통분하다. 하루 이틀 안에 전함을 더 모아 성대한 위세를 보인다면 정성(正成) 등이 청정을 책하기를 『네가 조선을 재차 침범하는 문제에 대해 관백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왔으니 스스로 책임지고서 속히 격퇴하라. 』고 한다면 그는 싸우려고 바다로 내려올 것이니, 이때에 덮쳐 공격함이 무방할 것이다. 그후부터는 일본인들이 조선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니, 이번의 거사를 심상하게 여기지 말라. 」 하였다. 또 말하기를 「병사(兵使)께서 4∼5일 동안 머무신다면 행장·정성 등이 한 번 나아가 뵐 것이라고 했으니 요시라도 그때 정성행장을 따라올 것이다. 」 하고 심 유격(沈遊擊)의 친서 유첩(諭帖)을 돌려 보였다.

‘대개 먼 도의 수군이 당시 일제히 도착하지 않아 모일 기약이 없고 형세도 미치지 못했는데 외로운 군사로 적이 있는 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실로 좋은 계책이 아니었다. 비록 청정을 유인해낸다고 하더라도 근일 바람이 불순하고, 서생포(西生浦)앞바다는 동해에 접해 있어 파도가 아주 험한데 외로운 배가 돌아와 정박하기는 형세상 어려울 것이므로 수군이 다 모인 뒤에 도모하려고 통제사와 같이 의논하여 12일에 배를 돌렸다. 가덕도(加德島) 동쪽 바다에 도착하여 정박했는데 왜적이 숨어서 엿보고 있다가 초동(樵童) 1명을 쳐서 죽이고 5명을 잡아갔다. 통제사가 저에게 말하기를 「가덕도의 왜적이 우리 초동을 죽였으니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하였는데, 저의 생각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배를 전진시키자 적들은 스스로 대적하기 어려움을 알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방포(放砲)하였다.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가 타고 있는 배를 몰아, 제가 거느리고 있던 항왜(降倭) 17명을 옮겨 태워 적진 앞으로 돌진하여 대포를 무수히 발사하자 왜적 10여 명이 보이는 곳에서 곧장 거꾸러져 죽었으며 우수 역시 왜적 1명을 사살하고 날이 저물 때에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 돌아와 변을 대비하였다.

‘다음 14일 미시(未時)에 요시라(要時羅)안골포로부터 배를 타고 진친 곳까지 와서 말하기를 「오늘 청정(淸正)죽도(竹島)·안골포의 왜장 및 행장·정성(正成) 등이 안골포에 모여 서로 의논하였다. 『조선 수군들이 이같이 횡행하니 공격할 수 있으면 공격하고 공격할 수 없을 경우에는 치지 말자. 』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의 명령이 되돌아 올 때까지 충돌하지 말 것으로 맹약문(盟約文)에 서명하여 관백에게 입송(入送)하고 명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자는 참하자. 』 하였다. 이에 다른 나머지 장수들이 서명하기를 『중국 조정의 회답이 올 때까지 거제(巨濟)·칠원(漆原)·창원(昌原)·진해(鎭海)·함안(咸安)·진주(晉州)·고성(固城)·사천(泗川) 경계를 범하지 말기로 맹약한다. 이후부터 혹 사냥한다고 하면서 무고하게 깊이 들어가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도 무방하다. 』고 했다. 청정은 처음에는 서명을 하지 않고 묻기를 『조선의 전선(戰船)은 배 한 척에 몇 명의 병력을 실을 수 있는가?』 하니, 정성(正成) 등이 『내가 출입하는 자들로부터 상세히 들었는데, 배 한 척에 실을 수 있는 인원은 노군(櫓軍) 1백 50명, 사수(射手) 1백명, 화포군(火砲軍) 60명이라고 한다. 』 하자, 청정이 『그렇다면 가볍게 침범할 수 없겠다. 』 하면서 즉시 서명했다. 그러니 이후부터 중국 조정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충돌할 리가 만무하다. 조선 역시 병력이 있으니 이번에 수군이 진격할 능력이 어찌 없겠는가. 가덕도(加德島)의 왜장 역시 행장에게 와서 말하기를 『어제 상호간에 교전이 있을 때 군관(軍官) 6명과 졸왜(卒倭) 8명이 탄환을 맞아 즉사하고, 총알을 맞았으나 죽지 않은 자 17명이 지금 고통을 받으며 누워 있는데 생사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애통하고 참혹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고 하자, 정성과 행장 등이 답하기를 『이것은 너희들이 스스로 불러온 화이다. 무엇 때문에 먼저 침범하여 노여움을 촉발했는가? 잡아온 조선인을 속히 돌려보내라. 』고 하니, 즉시 보내 준다고 하였다. 」 라고 했다. 통제사 처소에서 요시라(要時羅)가 다시 들어올 때 데리고 오도록 깨우치자, 마땅히 데리고 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또 비밀히 말하기를 「지금 청정죽도(竹島)·안골포(安骨浦)·가덕도의 왜장들과 함께 모의하기를 『3월 초승에 호남과 영남 두 도를 먼저 공격한다면 조선이 왕자를 입송(入送)하는 것도 반드시 꺼리지 않을 것인데 이 계책이 어떤가?』 하니, 여러 왜장들은 모두들 찬성했으나 정성·행장 등만 불가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백방으로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정지시킬 계책이 없다. 병사께서 행장에게 서장(書狀)을 쓰고 서명 날인하여 보낸다면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보이고 관백(關白)에게 들여보내 그 계책을 방지하려 한다. 」하기에, 「어떤 내용으로 서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가?」 하고 대답했더니, 그는 답하기를 「서장은 『이번에 배를 거느리고 여기 온 것은 특별히 다른 생각은 없다. 일찍이 중국 사신이 회정(回程)할 때에 관백의 서계(書契)를 보니, 천조가 조처할 때까지는 전쟁을 조금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러 일본군 진영의 낙오된 군사들이 자주 내지에 들어가서 혹 마을의 부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고 혹은 인민을 살해하기도 하는 등 침범이 무상하다. 이는 곧 여러 왜장들의 명령으로 관백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니 지극히 놀랍다. 중국 조정의 조처하는 회답이 있기까지는 이같이 소란하게 하는 일은 금지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때문에 배를 거느리고 여기에 이르러 연유를 묻는 것일 뿐이다. 』 라는 내용으로 하라. 」하였다. 이렇게 서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저들을 붙들어 매어두는 데 관계가 있으므로 그의 원에 따라 만들어 주었다. 저의 전선의 수가 단약(單弱)하여 서생포(西生浦)로 진격하여 정박할 수도 없고, 이미 청정이 출전할 의도도 없으니 여기 있더라도 아무 유익함이 없을 것이므로 15∼16일에 진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지나온 왜진을 탐문했더니 성터는 고치고 모든 장비는 전일의 배나 되어 나아가 치기가 어렵다. 부산(釜山)에는 왜적의 무리가 7천여 명이나 되고, 가옥의 숫자는 1천여 좌(座)이며 배의 척 수는 대소선을 합하여 모두 70여 척이다. 안골포(安骨浦)의 왜적 수는 1천여 명, 가옥 수는 2백여좌, 선척 수는 40여 척이고, 가덕도(加德島)는 왜적 수가 5백여 명, 가옥 수는 1백여 조, 선척 수는 20여 척이었으며, 죽도(竹島)는 강의 어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조사해 볼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수군 장수들의 보고는 지금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이번의 보고와 육지 정탐인(偵探人)들의 보고 사연과 크게 다르니 매우 해괴합니다. 만호(萬戶)가 탔던 배의 실화(失火) 연유 및 2척의 사후선(伺候船)을 빼앗기고 사람들이 잡혀간 사실 등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으니 아마 숨기는 듯싶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자세히 기록하여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8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65면
  •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외교-왜(倭)

○都元帥權慄馳啓曰: "慶尙右兵使金應瑞馳報內, 初十日日氣調和, 兵使與統制使、慶尙右水使, 一時領戰船六十三隻, 平明自長門浦發船, 未時到泊釜山前洋, 則倭賊蒼黃奔走, 出兵三百餘名, 以爲防拒之狀。 日暮時, 舟師退泊絶影島, 等還入其陣。 日昏, 要時羅乘船出來, 以行長之意言曰: ‘卽欲遣人問安, 而恐有傍言, 未卽送人。’ 又爲密言曰: ‘行長預爲虛張於諸陣將曰: 「朝鮮今則久在兵革之間, 熟諳用兵之術, 多備戰艦, 取勝未可知也。 淸正渡海之後, 姑縱其兵, 輒殺人物, 朝鮮因此發憤。 今月初八九十日間, 舟師丁寧進泊釜山前洋, 欲爲遮絶糧道。 此後則我等勢將狼狽, 豈不憂患哉? 又聞舟師之數, 幾至千餘隻云。 各陣十分詳察, 斂其管下倭人, 使不得恣行, 以挑朝鮮之怒。」 而今見舟師, 其數極少, 所見不嚴, 我之播說, 竟歸虛地, 心自有愧。 今之此計, 無他事也。 淸正初爲受命關白時, 決言曰: 「朝鮮之人, 旣被日本殘害, 戰卒已盡無餘, 我率兵復出, 則豈特王子來謝乎? 地方亦可奪占, 吾之處置, 豈可與行長同乎?」 關白信聽淸正之言, 遂至反約, 心切痛憤。 一二日內, 加聚戰艦, 以示盛威, 則正成等責淸正曰: 「汝更犯朝鮮之事, 關白前快言而來, 自可當之, 斯速擊退。」 云云, 則渠欲相戰, 必下海, 此時掩擊無妨。 此後則日本之人不得輕侮朝鮮, 今此之擧, 勿爲尋常’ 云云。 又曰: ‘兵使留四五日, 則行長正成等, 一晉面謁’ 云云, 追來正成行長了, 沈遊擊親書諭帖傳示。 大槪遠道舟師, 時未齊到, 聚會無期, 勢未及此, 擧孤軍久在賊所, 實非良策。 雖欲誘出淸正, 近日風勢不順, 西生前洋, 相接東海, 波濤極險, 孤船回泊勢難。 舟師畢集後, 圖謀次統制使同議, 十二日回船, 到泊加德東洋, 則倭賊隱伏窺伺, 樵童一名斫殺, 五名擄去。 統制使與兵使曰: ‘加德, 殺我樵童, 不可不問罪’ 云, 兵使之意亦然, 故更爲進船, 則自知難敵, 據險放砲。 安骨萬戶禹壽所騎船疾快, 移載兵使所率降倭十七名, 冒入賊陣前, 多放砲丸, 倭賊十餘名, 所見處, 卽爲顚死, 萬戶禹壽, 亦射殺一賊, 進退出入, 日暮時, 還到永登前洋待變次。 十四日未時, 要時羅安骨浦乘船, 來到結陣處曰: ‘當日淸正, 竹島安骨 將, 與行長正成等, 聚會安骨浦相議曰: 「朝鮮舟師, 如是橫行, 可擊則擊之, 不可擊則不擊。」 諸將曰: 「天朝命令回下間, 勿爲衝突事, 誓文着名, 入送關白前, 不從命, 任自進退者, 斬之」 云。 他餘將名, 天朝回答間, 勿犯巨濟漆原昌原鎭海咸安晋州固城泗川之境事, 亦爲定約。 此後或稱畋獵, 無故深入者, 捕捉無妨。 淸正初不着名, 問曰: 「朝鮮戰船, 一船所載之兵幾何?」 正成等答曰: 「我因出入者詳聞, 則一船容載, 櫓軍一百五十名, 射手一百名, 火砲軍六十名」 云, 淸正答曰: 「然則不可輕犯」, 卽爲着名。 自此之後, 天朝命令間, 萬無衝犯之理。 朝鮮亦有兵力之狀, 今此舟師之進, 豈不有力哉? 加德 將亦來言行長曰: 「昨日相爲放砲時, 我軍官六名、卒八名, 逢丸卽死, 中而不死者十七名, 時方臥痛, 生死難知, 不勝痛慘」 云, 正成行長等答曰: 「此汝自取之禍。 何事前犯觸怒耶? 被擄朝鮮人, 斯速還送」 云云, 則卽爲出送云。’ 統制使處, 傳通要時羅還入時刷還事開諭, 則宜寧率去事, 丁寧說道。 又爲密言曰: ‘今則淸正, 竹島安骨加德等同謀曰: 「三月初生間, 湖、嶺兩道先擊, 則朝鮮王子入送, 必不厭之。 此計如何?」 云, 諸將皆以爲可, 只正成行長等, 以不可答之。 然百爾思之, 頓無停止之術。 兵使行長了書狀, 正字踏印以送, 則周示諸處後, 入送關白處, 欲遏其計。’ 答曰: ‘以何言成給耶?’ 答曰: ‘今此領船到此, 別無他意。 曾於天使回程時, 得見關白書契, 則天朝處置之間, 小無鬪戰之詞, 而日本諸陣零浮之軍, 頻聚內地, 或掠村女, 或殺民人, 侵犯無常, 此乃諸將之令, 則不有其關白之令, 極爲駭怪。 然自天朝回答處置之間, 如此擾亂之事, 禁斷如何? 以此領船到此, 問由而已。’ 以此成給, 羈縻有關, 依其願成給。 兵使船數孤單, 不得進泊西生, 旣無淸正出戰之意, 在此無益, 十五六日間, 還陣計料。 所經陣探見, 則城基改備, 諸具倍前, 進拍勢難。 釜山衆僅七千餘名, 家數千餘座, 船數大中小竝七十餘隻; 安骨浦 數一千餘名, 家數二百餘座, 船數四十餘隻; 加德數僅五百餘名, 家數百餘座, 船數二十餘隻; 竹島則江口隔遠, 未得探見事馳報矣。 舟師諸將, 所報時未得見, 今此之報, 與陸地偵探人告目辭緣, 大相不同, 極爲駭怪。 萬戶所乘之船, 失火緣由及伺候船二隻被奪人物擄去之事, 專不擧論, 似若隱諱。 如此曲折, 詳細記錄更報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54책 8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65면
  •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