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지중추부사 유응수를 인견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첨지중추부사 유응수(柳應秀)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거느린 북병(北兵)은 한꺼번에 떠나는가? 군장(軍裝)과 군마(軍馬)는 모두 갖추었는가?"
하니, 유응수가 아뢰기를,
"탕패한 후여서 군장과 전마를 갖추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마를 주려고 하나 태복시(太僕寺)에 전마가 없으니 두루 주기가 어려울 듯하다. 또 군장은 어떠한가?"
하니, 유응수가 아뢰기를,
"군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기도 하고, 본관(本官)에서 주기도 하였는데, 서울에 들어온 뒤에는 병조 판서가 주기도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태시킨 자나 데리고 가는 자나 모두 정병(精兵)들인가? 출전 경험이 많은 자들인가?"
하니, 아뢰기를,
"모두 정벌에 나갔던 자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적과 싸울 때 적의 소위는 어떠했는가?"
하니, 아뢰기를,
"왜적은 오직 죽음만 있을 뿐 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이 진대유(秦大猷)의 미움을 받았는데, 진대유가 말하기를, 신의 부모가 있는 곳에 도적이 야습을 해 일가(一家)를 격살하여 모두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원수를 갚고자 하였는데, 그때는 군기(軍器)가 없어 몽둥이를 들고 군사를 일으키니 수삼일 내에 따라 일어난 자가 3백여 명에까지 이르러 적 몇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뒤에는 함흥(咸興)의 적이 내침하여 싸울 때에 신이 군사를 궤향(饋餉)한 후에 군중에게 죽음이 있을 뿐 저 적들과 함께 살 수는 없다고 신칙하고 즉시 전진(戰陣)으로 나아가 맞아 싸운 지 반나절이 되자, 군사들이 모두가 신이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음을 알고 모두 다투어 죽기를 기약하니, 적은 드디어 버티지 못하고 다 도망하고 말았는데 그날 신은 철환 몇 개를 맞았습니다. 그후부터 신은 어렵지 않음을 알고, 모두 다섯 군데에서 서로 싸웠는데 적은 모두 도망하였고 신은 30여명을 포획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함흥에서 태어났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의 할아버지가 서울 사람인데, 함흥에서 장가들어 그대로 눌러 살았습니다. 신의 아비와 신이 모두 함흥에 살아 드디어 함흥의 세가(世家)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출신(出身)하였는가?"
하니, 아뢰기를,
"갑신년에 요행히 과목(科目)에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병을 더 뽑으면 재주 있는 자를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백 명이 채 안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많은 적을 만나면 당해내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신뿐만 아니라 여러 장수가 협력해야 할 것이니, 어찌 북병이라 하여 신에게만 일임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일찍이 병조(兵曹)에 삼아창(三丫鎗)제도를 고했는데, 어떤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이미 도형(圖形)을 만들어 병조에 보냈습니다. 임진 왜란 초기에 사용하여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그걸 어디서 얻어 사용했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북쪽 백성들이 모두 사용하는 것인데, 다른 기계는 없고 단지 이 물건으로 도적을 방비합니다. 또 긴 몽둥이로 마구 휘두르면 적들도 두려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일찍이 몇 곳의 변장(邊將)을 지냈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은 경인년에 풍산 만호(豊山萬戶)를 지냈는데 오랑캐 마산덕(馬山德)의 난을 만나 싸워 공이 있었기 때문에 장계(狀啓)되어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고, 임진년에는 영건 만호(永建萬戶)가 되었고, 후에 군공으로 삼수 군수(三水郡守)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나이가 몇인가?"
하니, 아뢰기를,
"무오생입니다. 다만 신이 거느린 북병(北兵)들이 늠료(廩料)를 받아 살아가는데, 기력이 쇠약하니 제대로 쓰이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남쪽에 가거든 힘써 적을 토벌하라. 대장부가 이런 시대에 태어나서 큰 공을 세워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후세에 이름을 남겨야 하니, 더욱 힘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5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사법-치안(治安) / 인물(人物)
○乙卯/巳時, 上引見僉知中樞府事柳應秀。 上曰: "爾所領北兵, 一時齊去耶? 軍裝戰馬, 皆俱耶?" 應秀曰: "蕩破之後, 軍裝戰馬, 多有未備者。" 上曰: "欲給戰馬而太僕無戰馬, 似難遍給。 且軍裝何如?" 應秀曰: "軍裝或自持, 或本官給之, 入京之後, 則兵曹判書亦給之。" 上曰: "或汰去, 或帶去者, 皆是精兵耶? 多經征戰者乎?" 曰: "皆經戰伐者也。 上曰: "前日與賊相戰, 賊之所爲何如?" 曰: "倭只有有死無生之心, 是以難耳。 臣爲秦大猷所忤。 大猷言,臣父母之所在處, 盜賊夜襲擊殺, 一家皆爲淪沒。 臣以此欲爲報讐, 時無軍器, 無以爲器械, 以木椎起兵, 數三日內, 民之應起者, 多至三百餘名, 捕得若干人。 厥後咸興賊來,邀相戰, 臣饋餉軍士之後, 申飭軍中, 有死而已, 不可與此賊俱生。 卽進戰陣, 迎戰半日, 軍士皆知臣無退走之意, 皆爭效死, 賊遂不支, 皆退去。 是日身被鐵丸數瘡, 臣厥後知不難。 凡五地相戰, 賊皆退去, 臣捕獲三十餘。" 上曰: "爾生於咸興者乎?" 曰: "臣大父, 京人, 娶婦咸興, 仍居焉。 臣父臣身, 皆居咸興, 遂爲咸興世家。" 上曰: "爾出身乎?" 曰: "甲申年, 僥倖科目。" 上曰: "北兵加抄出, 則易得才技者乎?" 曰: "當可得矣。" 上曰: "爾率不滿百之兵, 卒遇劇賊, 則何以當之?" 曰: "不然。 非但臣也, 必有諸將協力。 豈有諉之北兵, 而委於臣哉?" 上曰: "爾之曾告兵曹, 三丫鎗制度何如?" 曰: "臣已爲圖形, 付之兵曹。 壬辰亂初用之, 得效故云云耳。" 上曰: "爾從何得而用之?" 曰: "非臣所創, 北民皆得用之。 無他器械, 只以此物, 爲備盜也。 且以長杖, 橫行亂打, 則賊亦恐怖。" 上曰: "爾曾經幾處邊將?" 曰: "臣庚寅年, 爲豊山萬戶, 遇叛胡 馬山德兵, 戰比有功, 故因狀啓, 除宣傳官; 壬辰, 拜永建萬戶後, 以軍功爲三水郡守。" 上曰: "爾年幾何?" 曰: "戊午生也。 但臣所率北兵, 受料資生, 氣力轉疲, 恐不堪爲用也。" 上曰: "爾去南中, 戮力討賊。 大丈夫生此時, 立大功勞, 上以報國, 下以垂名後世。 更爲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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