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명초하여 인견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명초하여 인견하였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이르기를,
"주문사(奏聞使)를 차견(差遣)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대지(大旨)이다. 중국이 간세(奸細)한 무리에게 기만을 당해서 성지(聖旨)에도 사신을 보내라는 말이 있다. 저 적들은 전에 보낸 우리 사신의 벼슬이 아주 비미(卑微)하다고 핑계하지만 이는 다만 우리 나라를 삼키기 위한 계책이요 중국의 뜻을 엿보려는 것이지, 사실은 사신의 직질(職秩)의 고하에 있지 않다. 전일 주문한 자문에는 단지 나라가 급박하다는 뜻과 적이 날뛰고 있는 상황만 언급했고, 이런 사정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마땅히 적들의 뜻은 우리 나라를 삼키기 위한 것에 있고 사신의 직질의 고하에 있지 않다는 것으로 한편의 요지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국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여길 것이다.
또 내가 전혀 듣지 못했었는데 이제 비변사의 초기(草記)를 보니, 임소조(林小鳥) 【본래 중국 사람으로 일찍이 일본에 투항한 자이다. 】 등이 소서문(小西門)밖에 머물고 있었는데 양사(楊使)가 거느리고 중국으로 갔다 하니, 매우 놀랍다. 자문을 보건대 ‘성지(聖旨)를 받드니 양방형(楊方亨)이 왜인을 데리고 들어오라.’고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그 일이다. 저 적들이 이미 중국의 책봉(冊封)을 받고도 사신을 보내 사은(謝恩)은 하지 않고 단지 미복(微服)으로 양 책사를 따라 함께 제도(帝都)로 들어갔으니 사은사(謝恩使)라고 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이런 뜻으로 주문(奏文)하면 중국에서도 반드시 심유경(沈惟敬)의 무리가 말을 꾸며 협잡을 부린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시 속인 일이 있더라도 이 주문이 들어가면 중국에서도 반드시 의심하기를 ‘일본 사신이 조선을 거쳐 들어와 사은했다면 조선에서 어찌 모르겠는가.’ 할 것이니, 여기에서 그 정상이 탄로나 형적을 숨기지 못할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내지(內地)처럼 본 것은 예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원수의 뜰에 사신을 보낸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번에는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비록 미혹(迷惑)하나 어찌 저 왜적이 원수임을 모르겠는가. 만약 예의로 말한다면 황신(黃愼)이 간 것은 예의이고 성지(聖旨)를 받들어 사신을 보내는 것은 예의가 없다는 것인가. 내 뜻으로는 크게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만약 성지를 어겼다하여 불행한 일이라도 있게 되면 어떻게 결말을 짓겠는가. 이번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의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내 생각에는 사신을 차출하여 행장을 꾸려 준비하는 것만 못하다. 성제(聖帝)께서 두 나라를 화해시키려고 힘쓰시니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성지(聖旨)가 이곳에 도착하면 즉시 당보(塘報)해야 합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막지 못할 걱정이 있을까 싶습니다. 반드시 주문(奏聞)해야 합니다."
하고, 유영경(柳永慶)은 아뢰기를,
"비록 성지를 받든다고 하나 사실은 병부(兵部)의 제본(題本)입니다. 설사 성지를 받들더라도 땅을 할양하고 칭신(稱臣)하라 한다면 어찌 일일이 다 응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기회를 보아가며 보내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성(石星)은 좋지 못한 사람이어서 권간(權奸)이라 해야 마땅하다. 처음에는 우리 나라 일을 위해 힘써 준 것은 좋으나 그가 성총(聖聰)을 속인 일은 매우 무상(無狀)하다. 이번 주문 내용에 모름지기 권협(權悏)이 가는 일과 이번에 논한 두 조항을 언급해야 한다. 다른 일은 성지를 기다린 뒤에 해야 한다."
하고, 이덕형에게 이르기를,
"두 조항에 대해 아는가? 하나는 보내는 사신의 직질이 낮은 것을 트집잡는 말이고, 하나는 중국의 은전(恩典)이 망극한데도 사신을 보내 사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고, 이덕형에게 거듭 명하기를,
"지금 빨리 먼저 나가 기초(起草)하라." 【대개 이덕형이 이때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은 것이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농사가 반드시 지난해보다 못할 것이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자구(自救)하기에 겨를이 없다."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이후에는 힘껏 수군울 조치해야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신이 지난번 호서(湖西)에 있을 적에 마침 원균(元均)을 만났습니다. 원균이 말하기를 ‘왜적을 무서워할 게 무엇인가?’ 하기에 신은 처음 듣고는 망령되다 여겼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수군을 믿고 그런 말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김신국(金藎國)이 【김신국이 군기 선유관(軍機宣諭官)으로 이원익(李元翼)에게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 돌아왔는데 신이 물었더니, 김신국이 말하길 ‘도체찰사 역시 수군을 믿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추(倭酋)는 【행장(行長)을 말한다. 행장이 김응서(金應瑞)에게 청정(淸正)을 도모할 계책을 일러주었는데, 유성룡(柳成龍) 등이 적의 말을 경솔히 듣다가 그들의 계책에 빠질까 싶다며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다. 】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 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지금 장계를 보니, 행장 역시 조선의 일은 매번 이렇다고 조롱까지 하였으니, 우리 나라는 행장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閑山島)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 【한산도의 장수는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었다. 】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은 왜구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나가 싸우기에 싫증을 낸 것입니다. 임진년 정운(鄭運)이 죽을 때에도 절영도(絶影島)에서 배를 운행하다 적의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고, 이산해는 아뢰기를,
"이순신은 정운과 원균이 없음으로 해서 그렇게 체류한 것입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정운은 이 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대개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 정언신(鄭彦信)이 항상 정운의 사람됨을 칭찬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제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시위할 약속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하고, 상이 한참동안 차탄(嗟歎)하고는 길게 한숨지으며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왜적은 만세토록 잊지 못할 원수여서 밤낮으로 복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심유경(沈惟敬)은 분쟁(紛爭)을 푸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고 있으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극진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친히 접견하지 않았으니 그의 마음이 서운할까 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사(沈使)는 천자를 속였으니, 이는 천하의 도적이므로 천하가 함께 성토(聲討)해야 한다. 천자를 기만한 죄는 덮어둘 수가 없는데, 다만 천자가 그 간사함을 통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가서 영접하지 못한 것은 병이 있어서였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심사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판 간흉입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임금은 마땅히 천하의 도량을 가져야 합니다."
하고, 이산해는 아뢰기를,
"인심을 책려하고 수군을 정돈하여 장래를 도모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하고, 정탁은 아뢰기를,
"심사의 접대는 반드시 극진하게 해야 합니다. 어찌 그가 부덕(不德)하다 하여 왕인(王人)을 박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심유경의 왕래로 인부와 말이 피폐하게 되었으니 천하의 죄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유경이 어찌 인부와 말을 피폐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죄인이 되겠는가. 군부(君父)를 속이고 조정을 농락한 것이 그의 죄이다. 그래서 중국의 급사중(給事中)이 말하기를 ‘동봉(東封)하는 날 심유경은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중국 사람들 역시 매우 미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갑오년 사이에 사람들 모두가 석성(石星)의 화상(畫像)을 걸어놓고 생사(生祀)를 지냈습니다만 신은 홀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신의 말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하교하신 대로 먼저 사신을 의주로 보내 성지(聖旨)가 동쪽에 반포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들어가 주문(奏聞)해서 다시 성지를 받든 뒤에 서서히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본에 사신을 보내도 실제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한결같이 보낼 수 없다는 뜻으로 주문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긴다. 중국에서 만약 ‘천자(天子)의 사신도 왜적이 철수하기 전에 일본으로 들여보내는데, 너희 나라만 유독 철수하기 전에는 들여보내지 않을 수 있는가.’ 한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나는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사신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무익하다는 뜻을 주문하고 그뒤에 처리하기 곤란한 일이 있게 되면 다시 중국에 주문하는 것이 무방하다. 내가 일찍이 깊이 염려한 것은 중국에서 반드시 대신(大臣)과 왕자(王子)를 보내라고 하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배신(陪臣)을 보내라고 조서(詔書)하였으니 역시 크게 관계된 일이 아니다. 보내서 방해로울 게 무엇인가. 지나간 일로 보건대, 황윤길(黃允吉)은 ‘적병이 곧 뒤따라 올 것이다.’ 하였는데, 그 당시 만약 보내지 말자는 의논을 받아들였다면 어찌 뒷날의 의논이 없었겠는가. 지금 만약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가 청정이 나올 경우 사람들이 반드시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성지(聖旨)에 조선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일본이 즉시 철수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상께서 이런 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되지 않아 청정(淸正)이 재침함으로써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고 말았다. 이때 보내서는 안 된다고 힘껏 주장한 자는 김응남뿐이었다. 】
하자, 좌우가 모두 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심유경은 적의 진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성지에는 두 나라 일이 끝난 뒤에 들어오라는 말이 있었다."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이 그의 차관(差官)의 말을 들어보니, 아직껏 진퇴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문도(陸文韜)의 일은 우리 나라에서 참으로 잘 처리하여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행여 그 계책에 빠지면 반드시 처리하기 힘든 일이 있을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의논이 저해되는 것이 많아서 쉽게 군사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걱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즉시 군사를 출발시키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내려갈 때, 중국군을 청하여 오면 지공(支供)할 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조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비록 경상도에서 적을 토벌하지 않더라도 만약 중국군이 온다면 인심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것이고 불칙한 사람이 간사한 모의를 꾀하더라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전라도(全羅道)는 인심이 매우 잘못되고 있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전라도 유생(儒生)들이 과거에 응하려 하지 않으니 인심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이 그러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어찌 간궤(奸軌)한 자가 없겠는가. 중국군이 오면 반드시 의지하여 괜찮을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전라도 사대부들은 현저한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유념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실 공(功)이 많은 도(道)이니 그 말이 옳다. 지난번 전교에 ‘급하지 않은 공부(貢賦)는 감해 주어 일분(一分)의 역(役)이라도 감하라’ 하였는데 이것이 급히 해야할 일이다. 호조(戶曹)에서 살펴 하라. 충청도와 전라도는 매우 염려된다. 임금이 이런 생각을 두어서는 마땅하지 않지만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좌상(左相)도 이것을 걱정하는구나." 【전라도 사대부(士大夫)들이 좋은 벼슬을 얻지 못했다는 말을 가리킨다. 】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포수(砲手)와 화전(火箭) 등의 일은 모두 말단의 일입니다. 대저 가정에서 부자(父子) 사이에도 다 통하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군부(君父) 사이겠습니까. 위에서 어찌 다 통촉하시겠습니까. 모름지기 백성들을 돌보시고 인재를 거두어 쓰소서. 계사년 환도(還都)하던 날, 상께서 옥식(玉食)을 감생(減省)하시고 굶주린 백성을 모아 구제하시니 백성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어가(御駕)를 따라 돌아왔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신은 지금 상의 마음이 전과 같지 않으신가 염려됩니다. 땅이 비록 좁기는 하지만 수천 리의 땅인데 어찌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체읍(涕泣)하면서 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 공물을 다 체찰사에게 붙이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지지(紙地)·유둔(油芚) 등은 구할 길이 없으니 감손(減損)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지지 수종(數種)만을 호중(湖中)에 책임지우고 기타 공물은 감하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청정의 글 가운데 ‘조선에 사신을 보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글로 보면 사람을 보낸 것 같은데 다만 거느린 군사들이 지금 바야흐로 벌목(伐木)하여 영책(營柵)을 수리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 군사가 엄습할까 두려워 그런말을 한 것입니다. 근래 그들 형세를 보면 바야흐로 소굴을 수리하고 있으나 2백척에 실은 군량이 쉬 동이 날 것입니다. 청정이 만약 임진년 때처럼 곧바로 달려온다면 이는 하책(下策)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하책이라 하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임진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조금만 전쟁을 알았다면 반드시 적이 무인지경처럼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맞다. 부산의 적이 곧바로 전라도로 향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나 만약 우리 나라 백성의 의복으로 변장하고 경기(輕騎)수천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경성(京城)에 박두한다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신이 보는 바로는 이 적들은 용병(用兵)에 능합니다. 이 적들이 ‘완전한 행군을 할 것이다.’ 하며, 갈 곳이 있으면 반드시 기치를 세우고 비록 협로(峽路)라 하더라도 먼저 한 사람을 보내 살핀 연후에 올 것입니다. 신이 대동강(大同江)에 있을 때 보니 적 한 명이 먼저 오고 몇 사람이 또 와서 형세를 정탐한 뒤에야 들어왔습니다. 이 적들이 단지 수천 수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유성룡의 말을 반드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경외(京外)에 수어(守禦)할 만한 곳이 없는데 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수천 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 적들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지 이미 6년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군량과 군사의 수를 알 수가 없으니 저 적의 꾀는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근래 우리 나라의 일을 보면 장수는 많고 병졸은 적어서 호령이 여러 곳에서 나와 성사(成事)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산해도(山海圖)를 탑전(搨前)에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황해 감사의 말에, 우리 나라 해자(垓子)는 매우 좋지 못하고 중국의 성호(城壕)제도가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중국의 해자는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포루(砲樓)의 제도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은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자 합니다. 남한 산성 역시 좋다고 하는데 신이 가서 본 후에 정하겠습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산성이 가장 좋습니다. 근방에 사는 백성들은 마땅히 들어가 지켜야 하지만 수삼일 정(程)되는 곳에 사는 백성도 역시 들어가 지켜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민심이 매우 요동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사(沈使)가 공주(公州)에 있다고 하는데 두 나라의 일이 끝난 후에 들어오라는 것으로 중국 조정에서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었다면 적의 진영에 도로 들어갔는가? 어디에 있는가?"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이미 성지를 받들었으니 반드시 그곳에 있으면서 처리할 것입니다. 신이 어제 장언지(張彦池)가 등사한 병부(兵部)의 소첩(小帖)을 보았으므로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묻는 바는 병부에서 보낸 본초(本草)를 보고자 해서이다. 어제 본 것은 바로 조보(朝報)를 등사한 것 같았다."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오종도(吳宗道)가 달려가 장언지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두 사람이 마주 앉아 그 소첩을 등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신이 보기를 청하여 써서 입계한 것입니다. 인신(印信)공문은 후에 당도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사가 만일 병부의 소첩(小帖)을 본다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마땅히 그 이자(移咨)를 받들고 행장이 있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그럴 것이다. 수길(秀吉)이 만약 이번에도 듣지 않는다면 나중의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석 상서(石尙書)가 육문도(陸文韜)의 일을 온당치 않다고 하자 그 사람이 반드시 석 상서를 잡고자 하는데, 중국 조정에서도 역시 논의가 많다고 하니 때 맞추어 병사를 조발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섭 유격(葉遊擊)이 들어간 것도 역시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원익(李元翼)이 남하할 때에 하삼도(下三道)는 매우 탕패(蕩敗)하여 비록 중국군이 나오더라도 접대할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나오면 비단 적을 토벌할 뿐만 아니라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다. 지금 양호(兩湖)지방의 인심이 궤산(潰散)되었다고 하니 매우 근심된다. 무뢰배들이 서로 모여 도적질을 하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중국군이 만약 나온다면 거의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라(全羅) 한 도가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공(內供)을 조달하고 경비를 대느라 민력(民力)이 탕갈되어 이산함이 많을 것이라 하며, 충청도 역시 그렇다고 합니다. 이 두 도에 하서하여 위유(慰諭)하고 전라 감사로 하여금 인재를 뽑아 보내라고 해야 합니다. 최상중(崔尙重)을 수령으로 삼았으니, 정설(鄭渫)과 변이중(邊以中)도 역시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삼 명을 거두어 쓰는 것이야 어찌 중요하겠는가.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을 일분이라도 감해준다면 괜찮을 것이다. 양호의 일이 매우 염려된다. 역당(逆黨)과 외얼(外孼)들 가운데 어찌 무뢰배들이 없겠는가."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이 근심하는 것은 포루(砲樓)나 수전(水戰)·화전(火箭)에 있지 않고 인심을 진정시킬 수 없는 데 있습니다. 상께서 아래 백성들을 무휼(撫恤)하기를 잊지 마시고 양남 사람들도 마땅히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호남 사람을 거두어 쓸 것을 일찍이 전교하셨습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판서에게 달렸는데 신들은 문견이 넓지 못하고 빈자리도 적어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직접 들었으니 마땅히 거두어 써야 한다. 그리고 군공이 있는 사람, 납속한 사람도 써야 한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전라도의 인심이 궤산하면 호령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우상(右相)이 전에 말했는데 대신들도 들었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또 3∼4개의 큰 진(陣)을 만들면 적을 토벌하지 못하더라도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할 수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84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52면
- 【분류】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외교-명(明)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甲寅/巳時, 上命招大臣及備邊司有司堂上引見。 上御別殿謂曰: "奏聞使差遣最好。 遣使日本者, 大旨矣。 天朝見欺奸細之徒, 聖旨亦有遣使之言。 彼賊之前遣我使官極卑微爲諉, 此特以爲呑噬小邦之計, 而窺中國之志也, 其實, 不在於使臣職秩高下也。 前日奏咨中, 只及一國急迫之意, 彼賊陸梁之形而已, 不及此一款事情, 故如是矣。 宜將此賊之意, 在於呑噬小邦, 而不在於使臣之職秩高下云者, 卽一篇大旨也。 然則天朝, 亦必以爲然矣。 且予專闕聞之, 今見備邊司草記, 以林小鳥 【以中原人, 而曾投日本者也。】 等, 小西門外留駐, 而楊使率向中原, 極爲駭愕。 卽見咨文中, 奉聖旨云, 楊方亨一同倭子入來, 則果然此事也。 彼賊旣受天朝冊封, 而不遣使謝恩, 而只以微服隨楊使, 偕入帝都, 名曰謝恩使者, 不可謂必無是理。 須以此意奏聞, 則天朝必知中間惟敬輩脩飾奸詐也。" 應南曰: "必然矣。" 上曰: "設或有行詐之事, 此奏聞入去, 則天朝亦必疑之, 曰: ‘日本使臣, 由朝鮮道來謝, 則朝鮮何以不知之?’ 於是其情狀敗露, 不得遁其形迹矣。" 應南曰: "中朝以我國, 視猶內服者, 爲禮義之邦也。 今若遣使讎庭, 不亦恥乎? 不可遣也。" 上怒曰: "此則不可不遣。 予雖迷惑, 豈不知彼賊之爲可讎也? 若以禮義云, 則黃愼之去, 爲禮義, 而奉聖旨而遣使者, 爲無禮義乎? 予意大不然。 若違聖旨而如有不幸, 則何以結末? 今此遣使, 何干義理? 予意莫如差出使臣, 裝(速)〔束〕 待之而已。 聖帝以兩國和解爲務, 不可不遣。" 應南曰: "聖旨到此, 則卽爲(搪)〔塘〕 報可也。 此路一開, 恐有難防之患, 必奏聞後已。" 永慶曰: "雖奉聖旨, 實兵部題本也。 設使奉聖旨, 有云割地稱臣, 則其可一一應之?" 德馨曰: "相機送之便。" 上曰: "石星不好底人也, 謂之權奸宜矣。 初爲我國事, 勠力爲之則善矣, 其爲欺蔽聖聰之事, 極爲無狀矣。 今此奏聞中, 須及權悏行及此云云二條可矣。 他餘事, 可待聖旨後爲之。" 因傳于德馨曰: "二條知之乎? 一曰, 遣使卑微, 執以爲辭, 一曰, 天朝恩典罔極, 而不爲遣使來謝之意及之, 申命德馨, 今遽先出起草。" 【蓋德馨爲大提學, 故有是敎。】 上曰: "今年耕種, 必不如前年。 我國人民, 自救不暇。" 山海曰: "邇來力措舟師, 乃可有恃。 臣頃在湖西, 適逢元均, 均云: ‘倭子何懼之有?’ 臣初聞以爲妄, 及今見之, 信乎恃舟師而發是言也。 今此金藎國 【藎國, 以軍機宣諭官, 下去于李元翼處而回也。】 之還, 臣問之則藎國言: ‘都體察使, 亦恃舟師矣。’" 上曰: "倭酋 【行長也。 行長使金應瑞, 指示可圖淸正之計, 而柳成龍等, 以輕信賊說, 恐墜計中, 不許輕動, 故有是事。】 如示諸掌而指敎之, 我國不能爲之, 我國誠天下庸劣國也。 今見狀啓, 行酋亦言朝鮮之事, 每每如此, 嘲戲至此, 我國劣於行長遠矣。 閑山之將安臥而不知, 何以爲之?" 【閑山將, 卽統制使李舜臣也。】 斗壽曰: "舜臣非畏倭寇, 實厭出戰。 壬辰年鄭雲之死也, 由絶影而行舟, 中賊大砲而死。" 山海曰: "舜臣以鄭雲、元均之不在, 有是逗留之事。" 應南曰: "鄭雲以舜臣不爲進戰, 將斬之。 舜臣恐怖, 不獲已强戰。 水戰之捷, 蓋鄭雲激而成之。 鄭彦信, 常稱鄭雲之爲人。" 上曰: "今者舜臣豈望擒馘淸正之首哉? 只揚舲耀武, 沿洄洋路, 而終不得爲, 誠可歎也。 今見都體察狀啓, 耀兵約束, 旣已俱矣。" 上嗟歎良久, 喟然言曰: "我國已矣。 奈何奈何?" 斗壽曰: "倭賊, 萬世不忘之讐, 日夜思報可也。 沈惟敬以解紛息爭, 爲己任, 豈有他意? 須極盡待接可也。 今者不爲親接, 則臣恐其心, 頗有缺然。" 上曰: "沈使欺罔天子, 是天下之賊, 天下之所共討。 欺天子之罪, 自不可掩, 但天子, 特未燭其奸耳。 然予之不爲出接, 爲有疾也。" 永慶曰: "沈使以中原見之, 眞賣國之奸矣。" 斗壽曰: "人君當以天下之量, 爲之。" 山海曰: "策勵人心, 修整舟師, 以圖將來, 今日之急務也。" 鄭琢曰: "接待沈使, 必須曲盡爲之。 豈以其不德, 而薄接王人乎? 然惟敬之往來, 夫馬凋瘵, 天下之罪人。" 上曰: "沈惟敬豈可以凋瘵夫馬之故, 爲天下之罪人? 欺君父、弄朝廷, 是其罪也。 是以, 中朝給事中有言曰: ‘東封之日, 沈惟敬從何處應起?’ 中朝之人, 亦甚惡之, 可知矣。" 永慶曰: "甲午年間, 人皆以爲畫像石星, 以生祀之, 而臣獨以爲誤天下大事, 果如臣言。 今依下敎, 先遣使臣於義州, 以待聖旨之東頒, 卽入奏聞, 更奉聖旨, 然後徐議遣使也。" 上曰: "然。" 成龍、應南曰: "遣使日本, 實無益也, 一面以不可遣之意, 奏聞無妨。" 上曰: "吾意不可不遣。 天朝若曰: ‘天子使臣, 亦於倭賊未撤之前, 入送日本。 爾國獨於未撤之前, 不可入送耶’, 何辭以答? 予非遣使乞和, 一邊遣使, 一邊以無益之意奏聞, 而厥後有難處之事, 更奏天朝, 亦無妨也。 予之所嘗深慮者, 天朝必令遣大臣、王子, 而今有遣陪臣之詔, 亦非大段關係事, 遣之何妨? 以往事見之, 頃見黃允吉, 而賊兵接迹而來。 當時若聽勿遣之議, 豈無後論? 今如不遣使臣, 而淸正出來, 則人必以爲不遣使之故, 何以爲之?" 【時聖旨云: "朝鮮遣使日本, 日本卽爲撤回。" 故上有是命, 而不數日, 淸正再航, 而其議遂寢。 其時力主不可遣者, 金應南等而已。】 左右皆不答。 上曰: "沈惟敬欲還向賊營乎? 聖旨有待兩國事完後, 入來之語耳。" 命元曰: "臣見其差官言, 時未進退云矣。" 上曰: "陸文鞱事, 我國誠善處之。 萬或墮其計中, 必有難處。" 應南曰: "以議論多梗, 未易發兵, 極以爲悶。" 上曰: "中朝不卽發兵者則奈何?" 成龍曰: "元翼下去時, 請天兵來, 無以支供, 自我國可以調兵云矣。" 上曰: "天兵雖不於慶尙而討賊, 天兵若來, 則非徒人心藉以爲依歸, 如有不測之人, 萠孽奸謀, 必有畏憚。 全羅一道, 人心極爲誤矣。" 應南曰: "全羅儒生, 不肯赴擧, 人心可知。" 上曰: "人心如此, 我國之人, 豈無奸(軌)〔宄〕 者乎? 天朝之兵, 來則必以爲依。" 應南曰: "全羅士夫, 不得蒙顯仕。 須留念。" 上曰: "實則有功之道, 其言宜矣。 前者傳敎, 貢賦之不急可減, 以蠲一分之役, 此急務也。 戶曹察而爲之。 忠淸、全羅, 極可慮也。 人君不宜有此意思, 亦不可不慮。 左相亦以此爲憂。" 【指全羅士夫不得顯仕之意也。】 應南曰: "如砲手如火箭等事, 皆末務也。 凡人於家人父子, 不能盡達, 況君父乎? 自上安得盡燭? 必須顧念百姓, 收用人才。 其在癸巳還都之日, 自上減省玉食, 會集飢民, 齊民感泣, 隨駕而歸, 在廷諸臣, 無不感激。 臣恐今之上心, 不如前也。 地雖褊小, 卽數千里之地, 豈可忽也?" 因涕泣拜之。 上曰: "全羅貢物, 予欲悉付體察, 何如?" 金睟曰: "如紙地、油芚, 無路得之, 不得減損矣。" 上曰: "然則只紙地數種, 責之湖中, 其他貢物, 減之可也。" 上曰: "淸正之書, 遣使朝鮮之語何也?" 成龍曰: "以書見之, 則似爲遣人, 而但所率之軍, 今方伐木, 修築營柵, 而恐我軍掩襲而有此言也。 近觀其勢, 則方修窟穴, 而二百隻所載軍糧, 必易盡乏。 淸正若如壬辰年直走以來, 則下策矣。" 上曰: "何云下策乎?" 成龍曰: "壬辰年我國之人, 暫若知兵, 則必不能如入無人之境矣。" 上曰: "此言是矣, 釜山之賊, 若以直向全羅道聲言, 而變着我國衣服, 率輕騎數千, 直到京城, 則何可知也?" 成龍曰: "此則不然。 小臣見此賊, 善用兵矣。 此賊言, 十全行兵, 有出去處, 則必樹旗麾, 而雖於峽路, 必先送一人而覘之, 然後卽來也。 臣在大同江, 見其一人先來, 數人又來, 偵探形勢, 然後入來矣。 此賊只率數千百來, 萬無其理矣。" 應南曰: "此成龍之言, 必不信也。 此時京外, 無可守禦處, 如此之患, 安保其必無也。" 成龍曰: "此則不然。 只率數千而來, 則必不爲矣。" 成龍曰: "此賊來寇我國, 今已六年, 而不得見其軍糧及軍數。 彼賊之謀, 固難測矣。 近見我國之事, 將多卒少, 令出多門, 不得成事矣。" 以《山海圖》, 獻于榻前。 上曰: "黃海監司言: ‘我國垓子, 甚爲不好。 中原城壕之制, 似好矣。’" 成龍曰: ‘中原垓子, 深不可測矣。" 上曰: "此乃砲樓之制乎?" 成龍曰: "是矣。 水原 禿城, 人皆欲入。 南漢山城, 亦好云, 臣當往見以定矣。" 斗壽曰: "山城最好。 傍近居民, 則所當入守, 而至於數三日程, 民人亦令入守云, 故極爲搖動云矣。" 上曰: "沈使在公州云, 而待兩國事完入來事, 天朝已爲奉聖旨, 則還入賊營乎? 在於何處乎?" 命元曰: "已奉聖旨, 則必在其處而處置矣。 臣昨見張彦池謄出兵部小帖以啓矣。" 上曰: "予之所問, 欲見兵部所送本草而已。 昨日所見, 乃如朝報謄書也。" 命元曰: "臣昨見吳宗道馳去, 到彦池下處, 則兩人對坐, 謄書其小帖, 故臣亦請見而書入矣。 印信公文, 隨後當來云矣。" 上曰: "沈使若見兵部小帖, 則必不來矣。" 應南曰: "似當奉其移咨, 往行長處也。" 上曰: "似當如是。 秀吉今又不聽, 則厥終之事, 何以處之? 石尙書以陸文韜事, 爲未便云。 此人必欲捉石尙書者也。 天朝亦多論議云, 恐不得趁速調兵也。" 應南曰: "葉遊擊之入往, 亦爲此事云矣。" 上曰: "若然則不可說也。" 成龍曰: "李元翼南下時, 言下三道極爲蕩敗, 天兵雖出來, 而無接濟之路云矣。" 上曰: "天兵之出來, 非但討滅兇賊也, 亦可鎭服人心也。 目今兩湖人心潰散云, 此甚可憂。 無賴之徒, 相聚爲賊, 安保其必無也? 天兵若出來, 則庶可鎭定也。" 成龍曰: "全羅一道, 自壬辰變初, 至于今日, 內供調度, 外資經費, 民力蕩竭, 將多離散云, 忠淸亦然。 此兩道, 下書慰諭, 令全羅監司, 甄拔人才以送, 可矣。 崔尙重則爲守令矣, 鄭渫、邊以中, 亦當收用矣。" 上曰: "收用數三人, 豈至緊關乎? 貢賦、徭役, 若減一分則可矣。 兩湖之事, 極可慮也。 逆黨外孽之中, 豈無無賴之徒乎?" 應南曰: "臣之所悶, 不在於砲樓、水戰、火箭也, 而在於人心之不得鎭定也。 自上撫恤下民, 念念不忘, 兩南之人, 亦當收用矣。" 廷馨曰: "湖南人收用事, 曾已傳敎矣, 用人則在於判書, 而臣等聞見不博, 窠闕亦少, 不得爲之矣。" 上曰: "今已親聽, 所當收用, 而軍功納粟之人, 亦當用之也。" 上曰: "全羅道人心潰散, 難爲號令之意, 右相前已言之矣。 大臣亦聞之乎?" 應南曰: "元翼言之矣。 且三四大陣爲之, 則雖未討賊, 而亦當把截賊路云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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