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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83권, 선조 29년 12월 29일 신묘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총독 경략 군문에 보낸 자문

총독 경략 군문(總督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이 남병(南兵)을 시급히 징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와서 구원해 줄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본년 12월 21일 책사(冊使)를 수행한 배신(陪臣) 황신(黃愼)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전일 일본에 있을 때, 적장 평조신(平調信)이 신에게 말하기를 「관백이 이미 청정장정(長政) 등 네 사람으로 하여금 선봉을 삼아 천사(天使)가 돌아갈 때를 기다렸다가 차례로 바다를 건너 기장(機張) 등 옛 진영에 나누어 점거하게 하고, 대군(大軍)은 명년 2월경에 한꺼번에 가서 시살(厮殺)하려 한다. 」 하였다. 신이 낭고야(浪古耶)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적장 장정은 이미 풍전주(豊前州)로부터 이곳에 도착한 사실을 알았고, 또한 적장 청정비후주(肥後州)에 있으면서 싸울 만한 무리를 모집하며 장차 바다를 건널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또 왜서(倭書) 한 장을 얻어 보았는데 그 내용에는 「고려수번장(高麗戍番將)으로 부산포는 소서진주수(小西津州守), 서생포는 하산주계수(賀散主計守), 죽도(竹島)는 갈도가하수(鍻嶋加賀守), 가덕(加德)도진병고(島津兵庫), 안골포(安骨浦)는 일번(一番)에 삼이기(森伊紀), 이번(二番)에 흑전갑비수(黑田甲非守)이다. 」는 등의 글자가 있었으므로, 원서(原書)를 가지고 귀국하여 바친다.’ 하였고, 그 다음 본월 25일 책사 사후(冊使伺候)인 배신(陪臣) 이항복(李恒福)·이광정(李光庭) 등의 치계(馳啓)에 의하면 ‘통사(通事) 박의검(朴義儉)의 비보(飛報)에 「본월 17일 초경에 책사(冊使) 두 분이 대마도로부터 부산에 와서 머물렀다. 」하였으며, 또 박의검의 비보에 「책사 두 분이 본월 21일에 각기 진영에서 떠났다. 」고 했다.’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본년 11월 책사를 수행한 배신 황신박홍장(朴弘長) 등이 차례로 치계(馳啓)하여 모두 긴급한 적의 실정을 말하기에 이미 사유를 갖추어 군문 무원(軍門撫院)에 자문을 이송, 우선 3∼4천 병마를 징발하여 경성(京城) 등처를 파수, 성원해 주기를 청하는 한편 또 주본(奏本)을 갖추어 배신 정기원(鄭期遠)을 차출하여 주문을 가지고 속히 가도록 하였는데, 그뒤 본년 12월에 배신 의주진 절제사 황진(黃璡)이 한 치계에 ‘총독 군문이 본국의 자청(咨請)에 따라 우선 요진(遼鎭)의 병마를 징발하여 와서 파수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내가 우리 나라의 지형을 살펴보면 본래 마병(馬兵)에 불편하고 왜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남병(南兵)뿐이기에 즉시 배신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으로 하여금 사유를 갖추어 섭 유격 장군513) 에게 올려서 속히 군문에 알려 병마를 거느리고 잠시 강서(江西)에 주재하는 한편, 별도로 남병 수천 명을 징발하여 와서 파수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전항의 사유를 두고 내가 생각해 보니, 당초에 중국이 잔파된 우리 나라의 힘으로서는 왜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잠시 회유책을 강구하여 우리 나라로 하여금 수년간의 무사한 틈을 이용하여 군사도 훈련하고 군량도 비축하여 후일의 계획을 도모하게 하였는데, 지금 배신 황신의 장계를 보면 적의 정세가 저렇듯 심상치 않고 책사는 이미 부산에서 떠났으며 봄철이 이미 박두하였으니, 왜적이 침략할 화가 조석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방이 텅 비어 있고 군사도 허약하여 적이 만약 날랜 군사를 몰고 와서 곧장 내부를 공격한다면 우리 나라의 힘으로는 도저히 대적하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중국군의 성원을 빌려야 조금이라도 흉악한 왜적의 칼날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형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산림과 수전(水田)이어서 마병(馬兵)에 불편하고, 또 왜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남병일 뿐이라는 것은 이미 경험했던 사실이니, 거듭 바라건대 귀원(貴院)은 일전에 자보(咨報)한 대로 속히 남병 수천 명을 징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와서 경성(京城)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여 성원해 줌으로써 왜적의 흉봉을 막는 한편, 뒤이어 대군을 징발하고 필요한 식량을 준비하여 수륙으로 협공, 기어이 왜적을 섬멸해 준다면 이에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41면
  • 【분류】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어문학-문학(文學)

  • [註 513]
    섭 유격 장군 : 섭상(葉鱨).

○移咨于總督經略軍門。 其文曰:

朝鮮國王爲乞急調南兵, 星夜赴援事, 該本年十二月二十一日, 據冊使跟隨陪臣黃愼啓稱: "前在日本時分, 有賊將平調信, 向臣說稱: ‘關白已令淸正長政等四箇人, 爲先鋒, 當等候天使回還, 次第過海, 分據機張等處舊壘, 大衆隨於明年二月間, 調去厮殺。’ 臣回到郞古耶地面, 看得有賊將長政, 已自豐前州, 來到本處, 又聽得, 有賊將淸正, 在肥後州, 方召募戰衆, 將要剋期過海。 又接得書一紙內, 有高麗戍番將, 釜山浦, 小西 津州守, 西生浦, 賀散 主計守, 竹島, 鍻嶋 加賀守, 加德島津兵庫, 安骨浦一番森伊紀, 二番黑田 (甲非)〔甲裴〕 守等字樣, 仍齎原書, 回還進呈" 等因。 隨該本月二十五日, 據冊使伺候陪臣李恒福李光庭等馳啓: "該通事朴義儉飛報: ‘本月十七日頭更時分, 有冊使二位, 自對馬島回泊釜山。’ 又該本役飛報, 有冊使二位, 要於本月二十一日, 各起身出營" 等因。 據此査照, 先該本年十一月內, 據冊使跟隨陪臣黃愼朴弘長等節次馳啓, 俱言緊急賊情, 已經備由, 移咨軍門撫院, 乞先調三四千兵馬, 把截京城等處, 以爲聲援, 又經具本, 專差陪臣鄭期遠, 星馳齎奏去訖。 隨該本年十二月內, 據陪臣義州鎭節制使黃璡馳啓, 總督軍門, 因本國咨請, 先調鎭馬兵, 前來把截等因。 據此當職爲照, 小邦地形, 素稱不便馬兵, 而賊所畏, 惟在南兵。 卽令陪臣兵曹判書(李得馨)〔李德馨〕 , 備由呈稟遊擊將軍處, 乞急報軍門, 將該馬兵暫駐江西, 別調南兵數千員名, 前來把截去後。 今該前因, 當職竊照, 當初天朝, 以小邦殘破, 無以禦賊, 爲之暫設羈縻之計, 令小邦幸得數年無事, 練兵峙糧, 以爲後圖, 而卽目陪臣黃愼所啓, 賊情旣已如彼, 冊使已離釜山, 春汛又已到頭, 本賊狶突之禍, 委在朝夕。 小邦地方空虛, 軍兵單弱, 賊若輕兵(悏)〔快〕 進, 徑搶腹裏, 以小邦之力, 決難抵當, 必藉天兵聲援, 可以少遏兇鋒。 仍照小邦地形, 多有山林稻田, 不便馬兵, 而兼又賊之所畏, 惟在南兵, 此是已試之效。 煩乞貴院, 査依日前咨報事理, 急調南兵數千員名, 着令星夜前來, 分駐京城等處, 先爲聲援, 以遏兇鋒, 而隨調大勢, 官軍兼濟, 該支糧餉, 水陸夾勦, 以期殲滅, 不勝幸甚。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41면
  • 【분류】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