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83권, 선조 29년 12월 21일 계미 5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왕이 황신을 인견하다

신시(申時)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황신(黃愼)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나라의 일로 외국에 왕래하느라 노고가 많았다."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사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왕명을 바로 전달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사신의 죄가 아니니 미안해 하지 말라. 그곳 적의 정세는 어떠하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 일본에 이르렀을 때에는 일이 대부분 순조로왔습니다. 행장과 정성 등이 와서 영접하며 말하기를 ‘관백이 조사(詔使)502) 와 귀국의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우리들에게 교외(郊外)에 나가 영접하는 것이 좋겠다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우리들이 왔다.’ 하였습니다. 왕명을 전달하는 날에 관백이 말하기를 ‘일본이 중국과 통신하려 하는데 조선은 길을 빌려 주지 않았고, 그후 심 유격(沈遊擊)이 화친을 의논하려 할 때에도 조선에서는 오히려 중국에 군대를 청하여 화친하는 일을 낭패시켰으며, 또 그후에 중국 사신이 부산 진영에 들어올 때에도 조선에서는 사신 한 사람도 일본으로 함께 들여보내지 않다가 중국 사신이 일본에 들어오는 날에야 비로소 사신을 보내 왔다. 원래 왕자의 생살(生殺)과 고락(苦樂)은 모두 우리손에 달려 있었으나 우리는 예로써 대우하여 돌려보내 주었는데, 저들은 오히려 나를 무례(無禮)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내가 노한 것으로 다시는 조선 사신을 만나지 않겠다.’ 하고, 명일에 오직 중국 사신만을 접대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다음날 두 중국 사신이 봉작례(封爵禮)를 행하였는데, 관백은 뜰에 서서 오배삼고두(五拜三扣頭)의 예를 행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려주는 의복을 받았으며, 그의 신하 40여 인이 모두 차등 있게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은 관백이 출입을 금지하여 참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친히 보지 못하여 그간의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고 인편으로 전해 들었으나 또한 모두 믿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백은 예식을 거행하는 데 어떻게 하였다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왜복(倭服)을 입고 칙서를 받았는데, 배례는 혹 했다고도 하고, 혹 하지 않았다고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백은 오사포(五沙浦)에서 봉작을 받았는가? 그대들과 두 책사(冊使)도 모두 오사포에 있었는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산성주(山城州)에서 【일본의 도읍지. 】 오사포까지 6∼7리 거리인데 당시 지진이 매우 심하여 도읍이 허물어진 까닭으로 오사포로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관백은 청정(淸正)이 참소하는 말을 듣고 매우 분노하였으며 심지어 중국 사신까지도 쫓아보내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신하인 세 봉행(奉行)이 【장성(長星)·길성(吉星)·삼성(三星). 】 굳이 간하여 그만두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행은 어떤 형태의 벼슬인가? 그들도 역시 중이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봉행이란 것은 궁안에서 권력을 쥔 관원으로서 벼슬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데 권위는 그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승인(僧人)은 아니었습니다. 임진년 무렵에 군대를 따라 우리 도성의 창동(倉洞)·저동(苧洞)에 들어왔었던 자라고 하는데 행장 등이 처음 강화할 때 삼성에게 뇌물을 바치고서야 비로소 강화를 논의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던가?"

하고, 또 이르기를,

"특별히 전별연을 열어 위로해 준 일은 없었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그런 의례는 없었습니다. 또한 칙사(勅使)를 받드는 예절로써 대접하지 않고, 소신(小臣)을 【황신(黃愼)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 】 대접하는 예절과 다른 바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정(淸正)에 대한 일은 일본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청정의 일은 신이 전에 부산에 있을 때 그가 죄를 받았다고 들었고, 그후 일본에 들어갔을 때 신의 일행이 과자포(瓜子浦) 【즉 낭고야(浪古耶). 】 이르러 도중에서 한사람을 만나 물어보니 모두 헛소문이었습니다. 신이 사람을 시켜 조신(調信)에게 물으니, 조신이 ‘죄를 입었다는 것은 헛소문이다. 지금 관백이 다시금 조선을 침략하려는 계책은 대체로 청정이 충동질해서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과 우리 나라 통신사를 관백이 모두 죽이려는 뜻이 있었다 하는데 과연 그랬는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신의 일행을 죽일 뜻이 있었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역관 박대근이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관백이 일행을 모조리 죽이고 책사(冊使)까지도 쫓아내려고 하였는데, 세 봉행(奉行)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사신을 죽이는 나라는 없었고 또 지금 조선에게 왕자를 보내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중인데, 먼저 사신을 죽이면 이는 왕자가 올 길을 막는 것이다. 」 하였고, 장성(長成)도 또한 말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정이 장차 올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청정 등이 나오는 것은 2∼3월경이 될 것이고, 또 온다 하더라도 반드시 울산이나 기장(機張) 등의 읍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관백의 명령을 기다릴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왕자가 와서 사례할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 있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신이 일본으로부터 부산이 올 때 행장이 그의 장관(將官) 사귀요문(沙貴要聞) 【성명이다. 】 보내어 말하기를 ‘사처가 매우 번잡하여 만나 이야기할 수 없으니 빈집에서 잠시 만나 서로 이야기하기를 요청한다.’ 하여, 신이 승낙하였더니, 그날 초저녁에 행장이 약속대로 찾아와 말하기를 ‘사신께서 멀리 오느라 힘드셨는데도 화친을 이루지 못하여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관백의 처음 마음은 비록 왕자를 보내지 않았더라도 중국이 특별히 사신을 보냈으므로 더없이 기뻐하여 화친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 이천사(李天使) 【종성(宗誠). 】 도망하여 달아났기 때문에 사사건건 모두 틀어진 것이다. 더욱이 중국 사신을 접견할 객관(客館)이 지진으로 인하여 훼손된 모습은 보기에도 너무 참혹하였기에 관백이 이 때문에 조선에 대하여 분통해 하는 마음이 더욱 심했던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은 속히 왕자를 보내어 사례하는 것뿐이다. 대신과 백관들이 비록 일시에 모두 온다 해도 전쟁하는 것의 여부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일본이 조선 왕자를 머물려 둔다 해도 평민으로 대하겠는가, 아니면 국군(國君)으로 대하겠는가. 다만 와서 지난날 돌려보냈던 뜻을 사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서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며 ‘돌아가거든 국왕께 보고하여 그 일을 좋게 마무리지었으면 매우 다행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어찌 왕자가 와서 사례할 리가 있겠으며, 더구나 내가 귀국하여 어떻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어 왕에게 아뢸 수 있겠는가.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바라지 말라.’ 하니, 행장이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관백이 싸우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조선이 한번 싸워 패전한 후에 다시 화친을 청하려 하면 그때는 비록 백 명이 화친을 중개하더라도 묘책이 없을 것이니 후회하지 말라. 또한 군대를 움직인 후에는 나도 중간에서 도와주지 못하니 돌아가거든 자세히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답하기를 ‘비록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이 이르면 응전해야 하니, 비록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더라도 또한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사세가 이치에 타당하면 싸우지 않고 화친할 수 있으나 사세가 화친할 수 없다면 어찌 한번 싸우는 일을 두려워하겠느냐. 절대로 군대를 출동한다는 일로써 나에게 공갈하지 말라.’ 했더니, 그는 신에게 읍하고 나갔습니다.

다음날 신이 일찍 일어나니 정성(正成)이 관문(館門)밖에 와 있었습니다. 그는 신을 보고 말하기를 ‘나는 조선의 대답을 듣고 돌아가서 관백에게 고하려고 하니 속히 대답해 달라.’ 하자, 행장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조선은 반드시 성지(聖旨)를 받은 후에야 회답이 있을 것이다. 중국을 왕복하는 데 통상 3∼4개월이 소요된다. 그 사이 내가 기병(起兵)을 막아 즉시 움직이지 않게 할 것이니, 군대가 출동하기 전에 속히 조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행장은 화친을 주장하고 청정은 싸움을 청하여 두 사람의 하는 짓이 서로 엇갈려 화합되지 않는 점이 있으니 이것은 무슨 의도인가? 혹자는 일종의 앙숙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 말과 같은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말하는 품새로 그들의 취지를 살펴보면 그들의 의논은 확실히 다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행장과 조신 등이 화친할 것을 힘써 주장함은 어째서이며, 청정만이 홀로 전쟁을 주장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당초 저희들끼리 격돌한 일은 신이 실로 알지 못하겠으나 대체로 인정이란 남보다 위에 있으면 좋아하고 남보다 아래에 있으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조신오사포에 이르러 장성(長成)에게 말하기를 ‘당초부터 화친의 일에 힘쓴 것이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는 세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러우니, 차라리 내 목을 찔러 죽겠다.’고 하였으며, 행장도 신에게 말하기를 ‘청정이 비록 다시 조선에 간다 해도 울산이나 기장 등의 사이에 군사를 주둔할 것이고 많은 군졸을 거느리고 깊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인데 대개 그의 뜻은 화친을 실패시키고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조선이 만약 경주(慶州) 등지에 무기를 많이 설치하고, 군량은 멀리 떨어진 곳에 쌓아두면 청정이 싸우고자 해도 굳게 지키므로 싸울 수 없고 포위하려고 해도 식량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청정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고 하니, 대체로 행장은 우리를 돕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기어코 왕자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그들이 처음에 왕자를 포로로 한 것은 일본에 공을 세우려 한 것이고 결국 왕자를 석방한 것은 우리 나라에 은혜를 받으려 함인데, 왕자가 포로에서 벗어난 뒤 한번도 사신을 보내 사례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왕자를 다시 오도록 굳이 청하여 엉뚱한 계획을 도모하려는 것뿐입니다. 요시라(要時羅) 【행장 막하에 있는 작은 두목. 】 미천하지만 영리한 자입니다. 어느날 사사로이 박대근을 보고 말하기를 ‘관백은 극악무도하여 광증을 부리기도 하고 의혹을 품기도 하니, 3년이 지나기 전에 저절로 멸망할 것이다. 조선청정이 행동하기 전에 여러 두목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왕자를 이와 같이 굳이 찾고 있으니 즉시 보내는 것이 당연하나, 지난 임진년에 왕자가 잘못하여 토민(土民)의 원망을 사서 포박을 당한 채 청정의 군중으로 끌려갔었다. 그런 까닭으로 국군(國君)이 크게 노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기고 있다. 왕자가 오고 안 오는 것이 너희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차라리 대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고 해마다 우호 관계를 닦는 것이 오히려 옳지 않겠는가. 」 하면 관백도 혹시 기뻐하여 들어줄지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닥쳐오는 전쟁을 몇 해 지연시킬 수 있고 또한 관백이 스스로 멸망할 것을 기다리 수 있을 것이다.’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시라평조신은 모두 그대와 동행했던 자들인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조신은 간교하기가 여러 두목들 중에 으뜸이었으나 이번 우리 일행에게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협조해 주었고 그곳에서 나올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사를 매듭짓지 못해 한스럽게 여기고 마음에 좋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하였다. 황신이 아뢰기를,

"신이 일본에 가기 전 8월에 큰 지진이 일어나 사포(沙浦)·오사포(五沙捕)·산성주(山城州)의 건물들이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눈으로 직접 본 중에도 지진이 일어났던 흔적이 있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병고(兵庫) 【지명. 】 지방은 산이 내려앉아 호수가 되었고, 풍후(豊後) 【지명. 】 지방은 인가 4∼5천 호가 모두 지진에 매몰되고 단지 높은 언덕만 남아 나무끝이 곳곳에 들쭉날쭉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매몰되었다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그 지역은 전부 큰 바다로 변하였고 살아 남은 사람은 겨우 8∼9인인데, 이들은 산 정상까지 기어올랐기 때문에 익사를 면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일본에 들어간 후에도 지진이 있었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8월부터 9월까지 사포에 머무른 20여 일 동안 지진이 없는 날이 없었는데, 혹 사람의 몸이 흔들리거나 혹 가옥까지 흔들릴 정도로 심한 것은 약 10일에 한번정도 있었고, 기타 소소한 지진이 어떤 때에는 하루 동안에도 두세 번 있었습니다. 더욱이 사포 근처 인가의 벽은 완전한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왜적이 우리 나라의 기계 중 선제(船制)·대포(大砲)·궁시(弓矢)와 같은 것들을 모두 배웠다고 하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궁시를 가져가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불을 붙이는 것과 늦추고 당기는 데 요령을 얻기 어려워서 궁시에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배에 있어서는 왜인들도 일찍이 익혀온 것이지만 가볍고 빠른 것이 좋은 줄로만 알고, 완전하고 두꺼운 것이 믿음직하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선제(船制)를 배울 줄 모릅니다. 대포는 없고 항상 조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출입할 때 모두 우리 나라 배를 탔었는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신의 처음 생각에는 왜선(倭船)이 필시 우리 배보다 우수하리라 여겼으므로 부산에서부터 일기도(一崎島)에 도착하기까지는 모두 왜선을 탔으나, 거기서부터 적관(赤關) 【지명. 】 까지는 우리 배를 타고 갔고 돌아올 때에도 우리 배를 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옥선(板屋船)이던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감독하여 만든 배로 왜선의 제도를 모방한 것입니다. 신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곧바로 부산으로 건너려 하니, 여러 왜인들이 말하기를 ‘바람이 맞은 편에서 부는 듯하니 반드시 곧장 부산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다시 우리 나라 사공에게 물어보니 모두 건널 수 있다고 하므로 왜인들이 굳이 만류하는 것도 듣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반쯤 건너자 왜인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제는 건널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밤중에 이르러 부산에 정박하니, 부산 진영에 머물러 있던 왜인들이 보고서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수채(平守采)수길(秀吉)의 자리를 빼앗으려다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무고를 당해 살해되었으므로 원통히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도 하는데 어찌된 일인가?"

하니, 아뢰기를,

"항간에서는 평수채가 살해당한 것을 원통히 여긴다 하지만 조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모반하다가 발각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백성으로서 왜적에게 포로가 된 자들은 어떤 옷을 입었던가?"

하니, 아뢰기를,

"왜인의 옷을 입고 왜인의 말로 이야기하면서 우리 나라 말은 전혀 잊어버리고 몰랐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은 장차 우리를 다시 침범하려고 군사를 더욱 더 조련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별로 들어본 것은 없고 다만 관백이 행장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통솔하게 하는 한편, 각자 무기와 식량을 자급 자족하도록 하여 우리 나라처럼 병력을 내게 하거나 군량을 운반하게 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백이 우리 나라에 대하여는 화가 나서 그렇다고 하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이미 봉작(封爵)을 받았는데도 어찌 사람을 보내어 사례하지 않는가?"

하니, 아뢰기를,

"적지에 있으면서 그 뜻을 탐지해 보니, 관백의 말이 ‘반드시 먼저 조선과 통한 다음에야 중국에 사신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하고, 오억령(吳億齡)이 아뢰기를,

"왜인의 사은 표문(謝恩表文)은 왜인의 투식이 아닌데도 억지로 왜글을 만들었는데 중국 글의 사은표와 같았으니 또한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하고, 황신이 아뢰기를,

"세 장로(長老)가 표문을 가지고 왔다가 다시 관백에게로 돌아갔고, 다시 정성(正成)이 표문을 가지고 왔으나 표문에 인신(印信)이 없다 하여 중국 사신이 받지 않으니, 정성이 도로 들어가서 인신을 찍어 가지고 낭고야(浪古也) 【지명. 】 까지 왔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전후로 올린 장계가 비변사에서 유출되어 전파되었기 때문에 진 유격(陳遊擊)이 하루는 신을 불러 놓고 그 글을 외었습니다. 이어서 신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당신 때문에 귀국 국왕이 중국에 청병하였으니 두 사신은 장차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하였는데, 비록 크게 노하지는 않았으나 편치 않은 기색이 많았습니다. 또한 한 장의 문서를 내놓았는데 우리 나라 공사(公事)간의 문서와 청병하는 자문 속의 말에다 우리 나라 도성 백성들의 술렁거린 말까지 낱낱이 모두 적에게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가의 기밀이 이와 같이 누설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황신이 아뢰기를,

"7월에 조신(調信)이 신을 보고 말하기를 ‘지금 들으니 이 책사(李冊使)503)부산에서 도망가자 서울이 어수선하여 임금은 장차 천도하려 하고 사대부들은 모두 피난하는데 육로를 따라 피난하는 자들은 양주(楊州)에서 토적(土賊)을 만나고, 수로를 따라 피난하는 자들은 강화(江華)에서 수적(水賊)을 만난다 한다. 우리 군대가 침범하지 않아도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가 다시 출동하면 어찌 우리에게 대항하겠는가.’ 하였으니, 그 말이 참으로 원통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 안의 간사한 무리 중에 혹시 왜인과 비밀히 통하는 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자, 황신이 아뢰기를,

"도성 백성만이 간첩의 일을 할 뿐 아니라, 남쪽 사람들도 왜적이 원수임을 알지 못하고 사사로이 서로 왕래하면서 마치 이웃처럼 지내는 자가 있습니다. 이민(吏民)들도 한 달에 반은 관가에서 일하고 반은 왜적에게서 일하여, 세금을 독촉하고 역사를 요구함에 피차의 구별이 없으니 이같은 백성으로 이런 일을 내통함에 거리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마도(對馬島)는 원래 우리 나라의 땅이었는데 일찍이 왜적에게 빼앗긴 것이다. 지금은 그곳의 형세가 어떠하던가? 혹시 가서 정벌한다면 쉽사리 빼앗을 수 있겠는가?"

하니, 황신이 아뢰기를,

"형세를 살펴보건대, 대마도는 비록 우리 나라가 오늘과 같이 잔폐된 형편일지라도 또한 공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풍의군(風漪郡)은 배를 숨겨둘 만한 곳이 매우 많아 어느 곳이고 있으니, 또한 쉽사리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대마도는 바다가운데 멀리 떨어진 섬이므로 순풍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리 급변이 있어도 즉시 일본과 연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 땅에는 비축된 식량과 채소가 없으니, 그 형세가 결코 오래도록 성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다시 임진년과 같이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침입할 수 있겠던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만약 다시 침범한다면 잠시 침략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많은 군대로 출동할 것입니다. 조신(調信)은 항상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전일 조선에 들어갔을 때에는 후속 군사가 없이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실적이 없고 소문도 좋지 않았으나, 지금은 농사를 지어 곡식이 쌓여 있으니 먼저 수군을 공격할 것이다.’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어찌하여 수군을 공격한다고 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수군을 공격하지 않으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통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는 국력이 미약하여 지탱하지 어렵지만 중국이 어찌 그와 같은 흉적을 한 집안식구 같은 우리 나라에 용납하게 하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적이 중국군을 볼 때 비록 우리 나라와 같이 허약하게 보지는 않으나 또한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비록 스스로 강한 체하나 어찌 황제의 위세(威勢)를 당해낼 수 있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행장평양에서 중국군에 패하여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청정은 향하는 곳마다 진 적이 없었으므로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진년에 침략해 왔던 왜적의 수효는 얼마라고 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10만이라고도 하고 20만이라고도 하여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설치한 진영이 길가에 연결되어 그 진영이 경성에서 북도까지 뻗혀 있었고 또한 부산에서 한강까지 뻗혀 있었으니, 병졸이 20만이 아니고서는 필시 이같이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길(秀吉)이 중국 사신을 대접할 때 거친 채소로 찬을 만들었고 의장대도 마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아뢰기를,

"왜국은 본래 예의가 없는 나라로 특별한 의장은 없이 금우(金牛)로써 운행할 뿐이었고 이따금 소홀하고 오만한 예로 대하였는데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도보로 와서 접견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 일행인 상하 원역(員役)들은 모두 사고가 없이 나왔는가?"

하니, 아뢰기를,

"격군(格軍) 한 사람이 우리 나라의 사세가 순조롭지 못하여 장차 일본이 통신사 일행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유없이 도망하여 적중으로 들어갔고, 이 밖에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다. 황신이 나가려 하니, 상이 잠시 앉으라 이르고 황문(黃門)에게 명하여 촛불을 들고 사관(史官) 앞에 가서 기사(記事)를 확인하게 하였다. 조금 후에 소황문(小黃門)이 술상을 가지고 나오자 상이 황신에게 술을 마시게 한 뒤에 인견을 마치니, 밤 3경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3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註 502]
    조사(詔使) : 명 나라 사신.
  • [註 503]
    이 책사(李冊使) : 이종성(李宗城).

○申時上御別殿, 引見黃愼。 上曰: "爾以國事, 往來異域, 多苦勞。" 曰: "奉使無狀, 不能傳命, 臣罪當萬死。" 上曰: "此非奉使人之罪, 勿爲未安。 且其處賊情何如?" 曰: "臣初到日本, 事多歸順。 行長正成等來迎曰: ‘關白聞詔使及貴國使臣來, 心獨喜, 勑令吾們, 卽可郊迎以入, 故吾等來耳。’ 及其傳命之日, 關白言曰: ‘日本欲通中國, 而朝鮮不許借道, 厥後沈遊擊講好之時, 朝鮮請兵敗事。 又其後, 天使入營, 朝鮮不送一介使, 偕入日本, 逮乎 天使入日本之日, 始遣使來。 當初, 王子生殺苦樂, 都由我手, 我以禮而還, 彼以不禮而待我, 我是以怒, 不敢相見來使。’ 因令明日, 獨接天使, 翌日兩天使行封, 關白立於庭上, 五拜三扣頭, 敬受賜衣, 其臣四十餘人, 皆受欽賜有差云。 臣以關白禁不入參, 故不得親見, 其間曲折, 未能詳知, 而因人傳聞, 亦難盡信。" 上曰: "關白行禮, 何以爲之云乎?" 曰: "以服受勑, 而拜禮則或云爲之, 或云不爲矣。" 上曰: "關白在五沙浦受封乎? 爾等及兩冊使, 皆在沙浦乎?" 曰: "山城州 【日所都。】五沙浦, 六七里矣。 時地震尤甚, 都邑圮毁, 故出五沙浦待之。 關白聽淸正之譖, 極有憤悱, 至於天使, 亦令驅迫出送, 其臣三奉行 【長星、吉星、三星也。】 苦諫止之。" 上曰: "奉行, 何狀官爵? 亦是緇髠乎?" 曰: "奉行者, 居中用事之官, 爲官不高不卑, 而威權出乎其人者也。 非僧人也。 壬辰年中, 〔有〕 隨兵入我都中倉洞苧洞者。 行長等初講和時, 納賂於三星而始議和云矣。" 上曰: "然則何以不成云矣?" 上曰: "別無餞慰之事乎?" 曰: "無是禮。 且不以奉勑使之禮待之, 與待小臣 【愼自稱之辭。】 之禮無異。" 上曰: "淸正事, 日本人何以言之?" 曰: "淸正事, 臣前在釜山, 聞其被罪。 其後入日本時, 臣行到瓜子浦, 【卽浪古耶。】 道逢一人問之, 皆虛語也。 臣使人問于調信, 調信曰: ‘罪則虛言也。 今此關白, 更肆朝鮮之計, 蓋淸正激之也’ 云。" 上曰: "天使與我國信使, 關白有竝殺之志云, 然乎?" 曰: "臣之一行, 有格殺之志者, 未能詳知, 但譯官朴大根來言于臣曰: ‘關白欲鏖糟一行, 竝與冊使而驅逐, 三奉行言曰: 「自古無殺使之國。 且方責朝鮮, 以不遣王子, 而先殺其使, 是塞其歸路也。」 長成亦止之云矣。’" 上曰: "淸正將爲出來云, 然乎?" 曰: "淸正等之出來, 當在二三月, 雖來, 必留陣蔚山機張等邑, 以待關白號令云。" 上曰: "要二王子來謝之言, 有之耶?" 曰: "臣自日本釜山時, 行長遣其將官沙貴要聞 【姓名也。】 言曰: ‘下處甚煩, 不可會敍。 請於空舍, 暫得相語。’ 臣許之。 是日初昏, 行長如約而來言曰: ‘使臣遠來勤苦, 不成和事, 深有恧然。 關白初心, 雖不送王子, 天朝特遣使臣, 故喜悅無比, 和好可成, 而適李天使 【宗誠。】 遁走, 故事事違誤。 至於天使接見之館, 盡爲地震所撼, 所見極慘, 故關白由是憤恨朝鮮, 益無限度。 前頭之事, 莫如急遣王子, 來謝而已。 如大臣、百僚, 雖一時齊到, 用兵與否, 未有輕重。 況我日本朝鮮王子, 以爲平民乎? 以爲國君乎? 只令來謝, 放還之意可也。’ 因自誓天曰: ‘歸報國王, 以終厥事幸甚。’ 臣答曰: ‘王子豈有來謝之理? 況吾歸, 安得發於口, 聞於上乎? 此必無之事, 幸勿望也。’ 行長曰: ‘然則奈何? 關白必戰無疑。 朝鮮一戰而蹶後, 復請和, 則雖緩頰百人, 不得善其策矣。 其無悔。 且動兵之後, 我亦不得自便於其間, 幸仔細歸啓。’ 臣復答曰: ‘雖不好兵, 敵至則應戰, 雖厭苦, 亦出不得已。 事有當理, 不戰自和; 事不當和, 豈畏一戰? 愼勿以動兵, 恐喝我也。’ 乃作揖而出。 翌日, 臣早作起身, 正成來在館門外。 見臣言曰: ‘吾待朝鮮對答之還, 歸告關白, 須速示及。’ 行長曰: ‘不然。 朝鮮必取稟聖旨, 然後乃有回話。 往復之間, 動延三四月, 吾當阻遏起兵, 不使卽動, 幸於未動前, 速有攸處’ 云矣。" 上曰: "行長議和, 淸正請戰, 兩人所爲, 互相牴牾, 有似枘鑿, 是何意耶? 或云自作元隻, 斯言或近之耶?" 曰: "以言語辭氣之間, 詗探其趣, 其所議論, 判然不合矣。" 上曰: "行長調信等, 力主和事, 何也? 淸正獨主戰爭, 何也?" 曰: "當初自中之事, 臣實不知, 大抵人情上於人則好, 下於人則惡。 是故, 調信沙浦, 言於長成曰: ‘當初用力於和事者, 竟歸白地, 吾慙於三國人。 寧剚刃我頸而死’ 云耳。 行長亦言於臣曰: ‘淸正雖或再航, 當住軍之間, 不爲大擧深入, 而其意, 蓋主敗和要戰。 若於慶州等地, 力設器械, 軍糧遠置他處, 淸正欲戰則堅守, 欲圍則無糗, 勢必自沮’ 云。 蓋似助我者也。" 上曰: "賊之必欲要致王子, 何意耶?" 曰: "渠輩初擒王子, 爲功於日本, 終放王子, 求恩於我國, 王子脫擒之後, 一未遣使修謝, 故固請王子再至, 以逞狂圖耳。 要時羅, 【行長幕下小酋。】 微賤而伶俐者, 一日私見朴大根言曰: ‘關白極惡不道, 爲狂爲惑, 不出三年, 自底滅亡。 須於淸正未動之前, 遣人言於諸酋曰: 「王子如是固索, 卽宜起送, 而昔在壬辰, 王子失誤, 因致土民啓釁, 縛致淸正軍中, 故國君大怒, 屛逐邊遠, 一國人民, 莫不鄙夷。 來與不來, 何關爾國乎? 可遣大臣, 講定和好, 年年修好, 無乃不可乎」 云云, 則關白或悅而聽之, 干戈之禍, 可延數年, 而關白自滅, 亦可待也。’" 上曰: "要時羅平調信, 皆爾所同行者耶?" 曰: "調信奸猾, 甲於諸酋, 今玆一行, 極盡心力, 出來之日, 亦如是矣, 而且恨其大事不成, 心頗不悅。" 上曰: "地震之說是乎?" 愼曰: "臣未及日本, 八月大地震, 崩傾沙浦、五沙浦山城州樓觀云。" 上曰: "爾所目見, 亦有地震之迹耶?" 曰: "兵庫 【地名。】 間, 原陵自陷, 仍爲沮澤, 豐後 【地名。】 地方, 有人家四五千, 皆沒於地震, 只餘高丘, 樹梢處處出沒矣。" 上曰: "家居皆陷云者耶?" 曰: "其地全爲大洋, 人之全活者, 僅八九人, 蓋攀緣上頂而上者, 得免溺死云矣。" 上曰: "爾入日本之後, 亦有地震乎?" 曰: "臣自八月至九月, 留沙浦, 其間二十日, 地震無虛日而震之, 掀人身體, 撤人房舍者, 或十日一有之, 其他小小之震, 一日之內, 或有震再三者焉。 沙浦近處, 人家四壁, 小無完土矣。" 上曰: "彼賊以我國器械, 如船制、大砲、弓矢之類, 皆已學得云耶?" 曰: "弓矢非不持去, 而點火弛張, 必難得宜, 故不爲用力於弓矢。 至於舟楫, 子之所嘗操習, 而只知輕捷之愛, 不知完厚之爲可恃, 故我國船制, 不知學得矣。 大砲則無之, 每以鳥銃放之。" 上曰: "爾出入, 皆乘我國船乎?" 曰: "臣初意船, 必優於我船, 自釜山抵彼一歧, 皆乘艇, 行至赤關, 【地名。】 乘我船而去, 其回也亦乘我船。" 上曰: "板屋船乎?" 曰: "李舜臣所監造者, 效船制矣。 臣自日本還, 將渡釜山, 諸曰: ‘風勢似逆, 必不直泊釜山。’ 問之我國沙工, 皆曰: ‘可以及渡’, 子固止之不聽。 及其半渡, 子悅曰: ‘可以渡矣。’ 至夜半泊釜山, 子見之驚駭。" 上曰: "平守采欲簒秀吉, 而事覺被誅云, 或曰: ‘誣告見殺, 人多傷冤。’ 何也?" 曰: "村巷以守采之被害爲冤, 而調信言其謀叛發覺云耳。" 上曰: "我民之擄於倭賊者, 所着何物?" 曰: "衣服、語言, 我國說話, 全忘不知矣。" 上曰: "倭賊將欲更肆, 益加組練耶?" 曰: "別無所聞見, 而但關白使行長等將兵, 而各治兵治食以自給, 不如我國或出兵力, 或運糧糗矣。" 上曰: "關白於我國, 有忿懥而如是, 至於天朝, 業已受封, 何不遣人陳謝乎?" 曰: "在虜中探偵其意, 則關白云: ‘必先通朝鮮後, 次可遣使天朝’ 云矣。" 吳億齡曰: "之謝恩表文, 非文字, 而强爲文, 似是唐文謝恩之事, 亦難取信。" 曰: "三長老齎來表文, 還入關白, 復令正成齎表來, 無印信, 天使不受, 正成還入踏印, 而來及於浪古也 【地名。】 之間。" 且曰: "臣之前後狀啓, 自備邊司〔漏〕 出傳行, 故陳遊擊一日招臣誦之, 因責臣曰: ‘以爾之故, 貴國賢王請兵上國。 兩使將何以處之?’ 雖不甚怒, 多有不安之色。 又置一紙文書, 亦我國公事間簿書, 及請兵咨文中說話。 我國都民騷擾之言, 一一皆播於賊中。" 上曰: "兵家機事如此, 奈何?" 曰: "七月調信見臣言曰: ‘今聞李冊使遁走, 王京洶洶, 國君將遷, 士夫皆避, 由陸路而行者, 遇土賊於楊州, 由水路而去者, 遇水賊於江華。 我兵不犯前境, 尙且憂懼, 況若更動, 則若何以支吾?’ 其言誠可痛惋。" 上曰: "京中奸細之流, 或有漏通者耶?" 曰: "不但都民作爲奸細, 南邊士(必)〔女〕 不知倭賊之爲讎, 私相來去, 有似隣(竝)〔比〕 。 至於吏民, 一朔之內, 半月役於官家, 半月役於倭賊, 催科責役, 無有此彼。 以如此民, 通如此事, 何厭之有?" 上曰: "對馬島, 我國之地, 而曾被奪於者。 形勢何耶? 設或往征, 則其易拔之乎?" 曰: "察見形勢, 對馬島則雖我國今日之瘡殘, 亦可擊之。 風漪郡藏船處極多, 處處有之, 亦可易拔。 且對馬島, 分海中別嶼, 而不遇順風, 則雖有急變, 未得卽通於日本國矣。 況其地無峙糗積茤, 其勢決難嬰城持久。" 上曰: "賊復如壬辰, 而大擧入寇耶?" 曰: "臣未知其詳, 設或再起, 則非暫時侵掠之比, 必大擧矣。 調信常恨曰: ‘我前入朝鮮, 懸軍深入, 事無實而名不美。 今則作農積粟, 先擊舟師。’" 上曰: "舟師渠何能攻?" 曰: "非攻舟師, 不通糧道云。" 上曰: "我國力弱, 似難支吾, 天朝豈容兇穢於視同內服之我國乎?" 曰: "賊視天兵, 雖不如我之孤弱, 亦不至畏懼矣。" 上曰: "渠雖自强, 安能當帝威?" 曰: "行長破於平壤, 故多有畏怖, 淸正所向無衂, 故不知所憚。" 上曰: "壬辰賊來寇者, 其額幾何云耶? 曰: "或十萬云, 或二十萬云, 未知孰是。 但結陣連營, 相望於道者, 自京城迤於北道, 自京城又迤於平壤, 自釜山迤於漢水, 兵非二十萬, 必不如是之盛也。" 上曰: "秀吉待天使甚惡草, 不設儀仗云, 然耶?" 曰: "倭國無禮義, 故別無儀仗, 而只以金牛, 運行有時, 以簡慢之禮待之, 則一枝筇竹, 徒步來見云。" 上曰: "爾之一行上下員役, 皆無故出來耶?" 曰: "格軍一人, 聞我國事勢不順, 日本將盡殺信使之行, 故無緣逃脫, 投入賊中, 此外無死亡人。" 黃愼將出, 上曰: "姑坐", 命黃門引燭,前於史官, 以明記事。 俄而小黃門持杯盤出, 上命賜黃愼飮訖, 罷對, 漏下三鼓矣。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3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