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을 수비하는 일에 대하여 비변사가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성(都城)은 강으로 방어를 해야 하니, 강을 지키지 못하면 도성은 또한 보전하기 어려운 것으로 성상께서 염려하신 것은 매우 원대한 처사이십니다. 강변을 수비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경기의 여주(驪州) 이하로 양근(楊根)·광주(廣州)를 거쳐 도성에 이르기까지 백여 리 되는 도리(道里)에는 얕은 여울이 25곳이 있으나 그 중에는 방어를 긴급히 해야 할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좌방어사(左防禦使) 변응성(邊應星)이 거느린 좌영(左營)에 편입된 군사가 3천여 명이고 후영(後營)의 군사가 2천여 명인데, 이들을 분군(分軍)하여 각 여울을 파수(把守)하기로 이미 약속하였습니다. 강변에 보(堡)를 설치하는 일은 날씨가 조금 온화해져 흙이 풀리기를 기다려 각각 파수하는 군사들로 하여금 높은 언덕의 지형이 서로 호응할 만한 곳을 선택하여 혹은 목책(木柵)을 사용하거나, 혹은 토성을 쌓아서 방어도 하고 변란을 알리는 곳으로도 이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은 이미 체찰사(體察使)로부터 방어사(防禦使)에게 지시하였으니 그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린 뒤에 다시 살펴보고 당부하여 허술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여주(驪州) 이상 강원도 경계로부터 충청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체가 되어 처리해야 하므로 상류에 방어사와 조방장(助防將)을 파견하였고, 강원 감사 서성(徐渻)이 내려 갈 때에도 또한 본사(本司)에서 면접하여 상세히 일러 보냈으며,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양령(兩嶺)478) 의 일을 전담하고 있는데 상류와 연접하고 있으므로 그에게도 또한 이 뜻을 알렸습니다.
다만 적의 형세가 만약 전일과 같이 여주로 바로 진격해 오고 그 세력이 방대하면, 변응성은 의당 각탄(各灘)에 파견된 군사를 모아 합력하여 방어하는 한편, 강원도에 있는 군사도 마땅히 첨가하여 협력해야만 차질이 없을 것입니다. 광진(廣津) 이하는 경성(京城)의 동도(東道)를 방호하는 대장이 잇대어 방어하되, 군병이 부족하면 병조에서 징집한 무사 1천 명과 청용 무사(聽用武士) 및 포수(砲手)·살수(殺手)를 여러 둔소(屯所)에 나누어 배치하여 서강(西江)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적당한데, 이는 병조로 하여금 군인의 수효를 다시 참작하여 각 장수에게 분배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의 형세가 경상도 동해(東海)를 거쳐서 강원도로 들어오려 한다면, 평해(平海)·울진(蔚珍)·삼척(三陟)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서쪽으로 향하는 한 길이 있고, 경상좌도의 안동(安東)·영천(榮川)을 거쳐 영월(寧越)·평창(平昌)에 이르는 한 길이 있는데, 이 두 길을 만약 방어하지 못한다면 한강 뒤쪽으로 돌아 나오게 될 것이 실로 염려됩니다. 그러나 이 길은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에 거리가 멀며 산과 골짜기가 깊고 험준한데다 거주민이 희소하여 들판에는 약탈할 곡식이 없습니다. 왜적은 사정을 잘 헤아려 스스로 양도(糧道)가 이어질 수 없음을 알 것이니, 이곳을 경유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오지 않을 것을 믿고서 방비가 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영동(嶺東) 길로 말하면, 평해와 울진에 그 요해처를 가려 굳게 지켜야 하고, 영천(榮川)·영월(寧越) 사이에 또한 큰 고개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으므로 복병을 설치하여 길을 차단하면 지키기가 쉬우니, 두 도(道)의 순찰사로 하여금 계책을 세워 대비하다가 적의 선봉이 향하는 곳을 살펴 기회를 보아 적절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또한 좋을 것입니다. 관동(關東)의 군병이 비록 수효가 적고 힘이 약하다고는 하나, 산중에는 산척(山尺)이란 자들이 곳곳에서 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이 무리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그들의 마음을 맺어 약속을 정하고 산골짜기의 복병을 설치할 만한 곳에 배치하면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진년에도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산척(山尺) 수백 인으로 하여금 우현(牛峴)을 방어하게 했는데, 많은 적들이 여러 번 진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여 거창이 이 때문에 끝까지 보전하였으니, 이는 이미 겪은 경험입니다. 이러한 뜻은 전에도 누차 지시하였으나 그대로 행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다시 하명하시어 본도 순찰사에게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왜적 청정(淸正)이 나올 때 해상에서 요격하라는 성상의 교지는 지극히 타당합니다. 왜선(倭船)의 왕래가 끊임없는 부산·대마도 사이가 곧 적이 침입하는 길인데, 만약 수군(水軍)의 세력이 강하여 적을 막아 끊어서 이길 수만 있다면 적장 청정이 오고 안 오는 것은 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다른 적선(賊船)일지라도 한 번만 이기면 성세(聲勢)가 백배나 커져서, 이미 육지에 오른 적은 돌아 갈 길이 끊길까 두려워할 것이고 잇달아 오는 적도 멀리서 바라보고는 겁먹고 전진하지 못할 것이니, 오늘날 계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일 이원익(李元翼)이 내려갈 때, 또한 이 뜻을 알고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과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성유(聖諭)에, 왜인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어 먼저 바다 건너는 일을 탐지하여 처리하라는 내용이 있으니, 속히 선전관을 파견하여 비밀히 도체찰사 및 도원수 이하에게 알려서 빠른 시일 내에 비밀히 의논하여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도모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자객(刺客)을 사용하는 일은 병가(兵家)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진실로 성사만 된다면 왕자(王者)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전일에 주질기(主叱其)의 일이 성공하였더라면 이 적(賊)을 제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를 사용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항복한 왜인 중에서 이와 같은 무리로 하여금 실시하게 하되 충분히 비밀리에 도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 조항은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비밀히 유시하여 적절한 때를 이용하여 기회를 틈타 실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항복한 왜인을 처리하는 일은 성상의 교지가 매우 온당하니, 또한 비밀히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유지를 내리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남포(藍布)와 목화(木花)로 미곡을 무역해 오기를 청하는 일도 또한 적당한 일입니다. 다만 시기가 너무 늦어져 명년 초에는 곡식이 귀할 것이고, 남포와 목화를 가져오는 시기는 바로 일기가 따뜻해진 후에 당하여 시가(市價)가 갑자기 감해지면 곡식을 많이 비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섭 유격(葉遊擊)이 이미 우리 나라의 군량 조치의 일로 나왔다고 하니, 모든 일을 사실대로 상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파사성(婆娑城)을 의엄(義嚴)이 어찌 혼자서 지킬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조정에서 무장을 차출하여 파견하되 독성(禿城)을 지킨 조발(趙撥)과 같이 한 다음에야 여러 고을을 호령할 수 있어 군사를 모집하거나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모두 주관하고 검독(檢督)하여 성을 지키는 일에 허술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남(金壽男)을 수성장(守城將)으로 결정하여 의엄과 함께 협력하여 파수(把守)하게 할 것을 경기 등도의 도체찰사와 더불어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유정(惟政)을 영남으로 내려보내는 것도 무방합니다마는, 그 중은 나이가 이미 많고 거느리고 있는 승군 중에 영남에 있던 자가 많지 않으니, 비록 내려보낸다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머무르고 있도록 했는데 이곳도 긴요한 곳이므로 명년 봄에 성을 수축할 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반드시 남쪽으로 내려보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대체로 두 중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그 정성은 그다지 쉽사리 얻지는 못할 것이므로, 조정에서 포상을 내린 일은 또한 잘한 일입니다. 저번에 의엄은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사세가 자못 중대하고 어려운 까닭으로 본사(本司)에서 미처 계청(啓請)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하교(下敎)를 받들었습니다. 선과(禪科)·승직(僧職)·도첩(度牒)을 유정과 의엄에게 물어서 각각 몇 장(張)씩을 해조가 작성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쌀을 구입하여 그 군사를 먹이도록 하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왜적에게는 꼭 보복해야 할 원수를 가진 자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처자·형제들이 왜적들에게 살해를 당하였으나 힘이 약해서 스스로 원수를 갚을 수 없는 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다만 제창하는 일이 없는 것이 한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교지가 이와 같으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피를 뿜고 눈물을 흘리며 손에 침을 뱉으면서 팔뚝을 걷지 않겠습니까. 병조로 하여금 방(榜)을 붙여 알리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게 하여, 그 중에 특수한 자가 있으면 그를 장수로 삼아 거느리게 하되 다소(多少)를 한정하지 말고 복수군(復讐軍)이라 이름할 것이며, 지방에도 이문(移文)하여 알려서 한결같이 시행토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황신(黃愼)의 서장(書狀) 안에 기록되어 있는 조항은 상교에 따라 조보(朝報)에 기재하여 민정(民情)을 안정시키는 것이 지당합니다. 북병(北兵)은 백 명을 이미 불러오게 하였으나, 다만 수효가 적어서 있으나마나할 듯합니다. 그러나 불러온 다음에는 또한 그 사세를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평행장(平行長)을 시켜 청정(淸正)을 없애는 일은, 행장의 마음을 알 수가 없으므로 이 말은 쉽사리 발설하기는 어려울 듯하고 심 유격(沈遊擊)이 잘 처리해 준다면 그런 대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황신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저들의 정세(情勢)를 상세히 듣고 처리하는 것이 옳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28면
- 【분류】군사(軍事)
- [註 478]양령(兩嶺) : 영동(嶺東)과 영서(嶺西).
○備邊司啓曰: "都城, 以長江爲險, 長江不守, 則都城亦難保守, 聖慮所及, 極爲深遠。 沿江措置之事, 自京畿 驪州以下, 歷楊根、廣州, 達於都城, 道里百餘里, 淺灘二十五處。 然其中有防禦緊歇之處。 左防禦使邊應星所率, 左營束伍之軍三千餘名, 後營之軍二千餘名, 以此分軍, 把截各灘事, 已爲約束云。 沿江設堡事, 待日氣稍和, 土脈解凍後, 各令把守之軍, 擇其高阜, 形勢相應之處, 或用木柵, 或築土壘, 以爲防守報變之所。 此等條件, 已自體察使處, 指授於防禦使, 待其措置稍成, 然後更爲審察申勑, 俾無疎虞爲當。 但驪州以上江原道地界, 以及忠淸道, 皆當一體經理, 故出上流防禦使、助防將, 而江原監司徐渻下去時, 亦於本司, 面議曲折而去。 贊畫使李時發專委兩嶺之事, 而接連上流, 故亦以此意知委矣, 但賊勢如前日直衝驪州, 而其勢浩大, 則邊應星當收聚各灘之軍, 合力防守, 而江原之軍, 亦當添助協力, 然後可無蹉跌。 至於廣津以下, 則京城東道防護大將, 接續守禦, 而軍兵不足, 則當以兵曹所徵武士千人及聽用武士, 與砲、殺手, 分部列屯, 達於西江爲便。 此則令兵曹, 更爲參酌, 軍數分配, 各將施行可也。 賊勢若由慶尙道、東海, 還入江原道, 則自平海、蔚珍、三陟, 踰嶺西向, 一路也; 由慶尙道左道安東、滎川, 達於寧越、平昌, 亦一路也。 此二路若不防塞, 則繞出漢江之後, 誠亦可慮也。 然此路道里迂遠, 山谷深險, 居民鮮少, 野無所掠。 倭賊善於揣摩, 自知糧道不繼, 似不由此, 但不可恃其不來而無備待來也。 嶺東之路則當於平海、蔚珍, 擇其要害處拒守, 榮川、寧越之間, 亦有大嶺橫天, 易於設伏把截。 令兩道巡察使, 設策措備, 觀賊鋒所向, 臨機策應亦可。 大抵關東軍兵, 雖甚寡弱, 然山峒之間, 名爲山尺, 而射獵爲生者, 處處有之。 此輩若能厚結其心, 約束分付, 用之於山谷設伏之處, 則一人可以當十。 壬辰年金沔, 使居昌山尺數百, 防守牛峴, 衆賊屢進不勝, 居昌以此終得保全。 此已然之驗也。 此意, 前雖屢屢知委, 而未知遵行, 更爲下諭, 申勅於本道巡察使爲當。 淸賊出來時, 邀擊於海上事, 聖敎極爲允當。 倭船往來絡繹, 釜山、對馬之間, 乃是賊路也。 如使舟師勢壯, 而可以邀截致勝, 則無論淸賊之來與否也。 雖他賊之船而一番勝捷, 聲勢百倍, 已爲登陸者, 恐歸路之斷絶, 而繼來者, 望風畏怯而不進, 今日之策, 實無過此。 故前日李元翼下去時, 亦知此意, 而欲與舟師諸將, 商量處之。 今此聖諭, 厚賂倭人, 先知渡海聲息而處之事, 急遣宣傳官, 密諭於都體察使及都元帥以下, 斯速密議, 登時善圖爲當。 刺客之事, 兵家亦多用之。 苟可以成事, 則不可以非王者事而不爲也。 前日主叱其之事若成, 則此賊可除矣。 今欲爲之, 則當使降倭中, 如此類者爲之, 要使十分秘密圖之, 不然則反速其禍。 此一款, 密諭於都體察使、都元帥, 使臨機觀勢處之爲當。 降倭處置事, 上敎允當, 亦秘密下諭於都體察使、都元帥爲當。 藍布、木花請來貿米事, 亦爲便當。 但時月已晩, 歲後穀貴, 而藍布、木花之來, 正當日氣已暖之後, 市價頓減, 恐難多備。 然葉遊擊旣以我國糧餉措置事出來, 凡事從實相議處之無妨。 婆娑城, 義嚴何可獨守? 當自朝廷差遣武將, 如禿城之趙撥, 然後可以號令列邑, 如抄軍、運糧等事, 皆當句管, 檢督守城之事, 似無疎虞, 故金壽男差定守城將, 與義嚴協力把守, 與京畿等道都體察使, 已爲議定矣。 惟政, 下送於嶺南無妨, 但其僧, 年紀已老, 所率僧軍, 在嶺南者不多, 雖下送, 恐無大益, 而已令留住於南漢山城。 此亦關緊之地, 明春不無措置修築之事, 不必下送於南方矣。 大抵二僧, 盡心國事。 其誠甚不易得, 朝廷之褒奬, 亦至矣。 頃者義嚴欲得空名告身, 而事頗重難, 故本司未及啓請, 今承下敎, 禪科、僧職度牒, 問於惟政、義嚴, 各若干張, 令該曹成給, 使之貿米, 自食其軍無妨。 我國之人, 於倭賊有必報之讎。 至於父母、妻子、兄弟之被害於其手, 而力弱不能自報者何限, 特患無以倡之耳。 今上敎如此, 凡有血氣, 孰不沫血飮泣, 唾手奮臂而起哉? 請令兵曹掛榜知委, 使之自募, 其中特異者, 定將統領, 不限多少, 名曰復讎軍, 外方亦移文知委, 一體施行爲當。 黃愼書狀中一款, 依上敎出於朝報, 以安民情至當。 北兵百名, 已令徵來, 但數少, 恐不足爲有無。 若徵來, 則亦慮其處事勢, 而處之爲當。 使平行長圖淸正事, 未知平賊之心, 此言恐難容易發說。 使沈遊擊善處, 差可爲之。 然當待黃愼上來, 然後詳聞彼中情形, 處之爲當。 敢啓。" 傳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1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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