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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83권, 선조 29년 12월 7일 기사 4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심 유격이 병부에 품첩을 올리다

심 유격(沈遊擊)이 병부에 올린 품첩은 다음과 같다.

"동봉(東封)을 완보(完報)한 일입니다. 윤8월 18일에 비직(卑職) 등은 용절(龍節)471) ·새서(璽書)472) 등을 받들고 일본국에 도달하니, 수길이 9월 2일을 택하여 대판(大坂)에서 영접하고 책봉 조서를 받기로 하여, 비직이 먼저 가서 예식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신중히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기일이 되자 책사를 영접하여 곧바로 중당(中堂)으로 안내하므로 고인(誥印)·관디복(冠帶服) 등을 반사하니, 수길은 무리를 거느리고 오배삼고두례(五拜三叩頭禮)를 행하고, 절차가 끝날 때마다 중국음을 익혀 만세를 부르며 망궐 사은(望闕謝恩)473) 하되 일일이 의식에 따라 하고, 예가 끝나자 사신 및 수행하는 각 관원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이날 밤에는 수길이 몸소 비직이 유숙하는 곳으로 찾아와 사례하고, 다음날 아침에는 양 정사(楊正使)를 찾아 가 사례하며 의도(衣刀)와 갑마(甲馬)를 선사하는 한편, 각 마관(馬官)에게도 칼과 폐백을 선사하며 황제의 은혜를 입은 데 대하여 감격해 극구 칭송하면서 재삼 위로해 주었습니다. 비직이 부산에 주둔한 병졸을 속히 철수할 것을 특별히 효유하니, 그는 말하기를 ‘지금 황제가 사봉(賜封)한 왕작(王爵)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병졸을 철수하여 이웃 나라의 우호를 닦아야 할 것이나 다만 조선이 전일의 원한을 풀지 않을까 염려되니 앞으로 황제의 처분을 기다려 다시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겠다.’ 하므로, 비직이 정색하고 개유하니, 면전에서는 비록 수긍하였으나 아직 실행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비직은 오기에 돌아오다가 화천(和泉)에 이르러 한편으로는 배를 준비하고 한편으로는 누차 재촉하는 개유를 하다가, 9일에 배에 올랐습니다. 비직이 정성(正成)474)행장을 일본에 보냈더니 중도에서 돌아와 즉시 명령을 따르겠다고 했다 하였고, 일행이 명호옥(名護屋)에 이르렀을 때에 다시 정성을 보냈으니, 그가 돌아오는 날에야 사실을 모두 파악하여 치보(馳報)할 수 있겠기에 우선 이와 같이 품달합니다. 만력(萬曆) 24년475) 10월 모일."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2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471]
    용절(龍節) : 황제의 위력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신이 소지하고 가는 의장(儀仗)의 하나. 누런 실로 갓끈을 매듯이 맨 길이가 한 자쯤되는 의장인데, 용정(龍亭)에 안치하여 외국의 군신에게 황제가 친히 임한 것처럼 공경케 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절을 하게 하였다. 《대동야승(大東野乘)》 권55 문소만록(聞韶漫錄).
  • [註 472]
    새서(璽書) : 칙서.
  • [註 473]
    망궐 사은(望闕謝恩) : 중국 대궐쪽을 향하여 배례하는 것.
  • [註 474]
    정성(正成) : 사택정성(寺澤正成).
  • [註 475]
    만력(萬曆) 24년 : 1596 선조 29년.

【沈遊擊兵部稟帖曰:】

爲完報東封事, 閏八月十八日卑職等, 奉到欽鋪龍節、璽書等件, 秀吉擇以九月初二日, 迎於大坂受封, 卑職先往敎禮, 奉行惟謹。 至期, 迎請冊使, 直至中堂, 頒以誥印、冠帶服等項, 率衆行五拜三叩頭禮, 件件頭項, 習華音, 呼萬歲, 望闕謝恩, 一一如儀, 禮畢, 開宴使臣及隨行各官。 是晩, 秀吉親詣卑職寓所, 稱謝, 次早謁謝楊正使, 饋以衣、刀、甲、馬, 各馬官亦饋刀、幣, 極言感戴天恩不盡, 再三慰勞。 卑職特諭速撤兵, 彼言: "今受皇帝賜封王爵, 兵當卽撤, 以修隣好。 但恐朝鮮前怨不釋。 仍聽皇帝處分, 再候命下。" 卑職正色開諭, 面雖首肯, 尙未見行。 卑職至初四日, 回至和泉, 一面調集船隻, 一面屢行催諭, 初九日登船。 卑職遣正成行長日本, 中途回言, 卽當如命。 行至名護屋, 卑職復遣正成往促。 俟回日, 備悉中情, 飛騎馳報, 爲此先行具稟。 萬曆二十四年十月日。


  • 【태백산사고본】 52책 8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2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