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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24일 병진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비변사에서 수성책에 대해 아뢰다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성교(聖敎)를 받드니, 성을 지키는 곡절에 대하여 남김없이 상세히 말씀하셨으므로 신들은 감격스런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들이 매우 어리석기는 하나, 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사세를 헤아려 잘 처치할 방도를 진실로 감히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수도(戰守圖)에 있는 성을 지키는 방법이 상세하다 하겠으나, 그 절목(節目)이 널리 갖추어진 것은 오히려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수초편(守哨篇)에 미치지 못합니다. 무릇 성의 제도는 50타(垜)마다 한 가운데에 치(雉)가 있고, 25타마다 또 기성포(騎城鋪)가 있고, 1타마다 현안(懸眼)을 만들며, 그 밖에 또 양마장(羊馬場)이 있어서 대포를 쏘게 하고, 또 그밖에 해참(垓塹)을 깊이 파는데, 그 성의 제도가 이처럼 치밀합니다. 그리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守備)하는 것을 보면 또 미리 용맹한 자와 비겁한 자를 나누어 타 위에 이름을 쓰고 5타마다 소기(小旗), 50타마다 대기(大旗)를 세워서 잘 정제(整齊)하여 감히 조금도 문란할 수 없게 하는 동시에 또 따로 용맹한 군사를 내어서 유병(遊兵)을 만들어 적세(賊勢)가 향하는 데에 따라 힘을 합하여 책응(策應)하게 하였는데, 이는 전수도의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이른바 성을 지키는 데에는 조치할 것이 많이 있고 허다한 곡절이 있으니 우리 나라의 성을 지키는 일이 한번 웃을 거리도 못된다는 것은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신들도 도성(都城)이 매우 넓어서 지키기 어려운 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도성이야말로 결국 사방의 근본으로서 버릴 수 없는 곳인데다가 적이 도성에 다가오는 것이 늦을지 빠를지도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올해에는 전일에 했던 것처럼 장구(長驅)하여 깊이 들어오지는 않고 있다 하더라도 변경(邊境)에 주둔하면서 양남(兩南)에 침입하여 어지럽히며 세월을 끄니, 이러한 때에 우리의 방비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방비없이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그래도 낮지 않겠습니까. 또 국가의 대계로 말하건대, 대가가 어쩔 수 없이 거둥하더라도 전면에서 차폐(遮蔽)하는 일을 조치하는 계책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경상도를 지키지 못하면 영로(嶺路)를 지키고, 영로를 지키지 못하면 한강을 지키며, 한강을 지키지 못하면 임진(臨津)을 지키면서 다 죽을 각오로 힘껏 싸워야 할 것이니, 사세가 어렵다 하여 천험(天險)의 승지(勝地)를 헛되이 버려서 적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근일 군민의 마음을 보면 전일과 크게 다릅니다. 떠나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다들 알고서 싸워 지킬 뜻을 가지고 있는데, 도성의 시정(市井) 백성들까지 다들 이러하니, 백성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도성을 수리하는 일은 때가 이미 늦었고 인력도 적어 이제야 비로소 하려는 것이 참으로 어긋나긴 합니다마는 또한 형세를 보아 처치하여 그 공역(功役)을 헤아리고 난이도(難易度)를 견주어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포루(砲樓)를 설치할 수 있으면 포루를 설치해야 하겠는데 성타(城垜)의 수는 8천이 못 된다 합니다. 우리 나라의 성타는 매우 낮고 넓이도 넓지 않으므로 두세 타(垜)를 합하여 한 타로 만들면 타의 수가 반으로 줄 것인데, 섭 유격(葉遊擊)이 가르쳐준 대로 타면(垜面)에 포화 현안(砲畫懸眼)을 내는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산(南山)의 경우 왜가 만든 보루(堡壘)를 더 크게 증축하여 아래로 강면(江面)까지 닿게 한다면 강물 위아래 수십 리가 막히는 곳 없이 바라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다 성을 지키는 데에 관계되는 좋은 방법인데, 전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고자 하지 않으므로 감히 경솔히 거론하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사세가 끝까지 다왔으므로, 경성 안팎과 경기의 백성까지 다들 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니, 이는 반드시 할 수 있는 시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순탄하게 이루기는 쉽지 않으니, 신들 또한 어찌 감히 시일 안에 반드시 이룰 수 있다 하겠습니까.

이제 사면(四面)의 순검사(巡檢使)를 차출하였으니, 빨리 성면(城面)을 순시하고 공력(功力)이 얼마나 드는지를 살펴서 계품(啓稟)하여 처치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덕형(李德謦)이 서면 순검사(西面巡檢使)로 계하(啓下)되었으나, 도성을 수선하는 것은 본디 병조의 임무이며 판서는 그 주관하는 벼슬이니, 일면(一面)으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강신(姜紳)은 전에 순검사를 한 적이 있으니, 서면 순검사는 강신을 시켜 그대로 맡게 하고, 판서 이덕형은 총괄하여 검칙(檢勅)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울러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8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18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 備邊司啓曰: "伏承聖敎, 其於守城曲折, 詳備無餘, 臣等不勝感激。 臣等雖甚愚劣, 當此危迫之際, 所以揣摩事勢者, 固不敢不盡矣。 守城之法, 在於《戰守圖》者, 可謂詳矣, 然其節目該備, 猶未及於《紀效新書》《守哨篇》。 凡城制, 每五十垜有一雉當中, 二十五垜又有騎城鋪, 每垜爲懸眼。 其外又有羊馬場, 使放大砲, 又其外深鑿垓塹。 其城制, (鎭)〔縝〕 密如此, 而分軍守備, 則又預分勇怯, 書名於垜上, 五垜立小旗, 五十垜立大旗, 整整齊齊, 無敢或紊, 而又別出勇軍, 作爲遊兵, 隨賊勢所向, 而協力策應, 不出於《戰守圖》之法矣。 以此觀之, 所謂守城, 有多少措置, 有許多曲折。 我國守城之事, 未滿一哂者, 誠如聖敎。 臣等亦非不知都城太闊難守, 然都城, 終是四方根本, 不可委棄之地, 而賊之來逼都城, 遲速亦難知。 脫使今年, 賊未長驅深入, 如前日之事, 而留屯境上, 侵擾兩南, 淹遲時月, 如此之際, 我之爲備得成, 則不猶逾於無備而坐待乎? 且以國家大計言之, 雖大駕有不得已之擧, 而前面措置遮蔽之計, 不可少緩。 故慶尙道不守, 則保嶺路, 嶺路不守, 則守漢江, 漢江不守, 則守臨津, 皆當分死力爭, 不可以爲事勢之難, 而虛棄天險之勝, 以與賊也。 竊見近日軍民之心, 大異於前日, 皆知去無所適, 而有戰守之意。 都城市井之民, 亦皆如此, 民情所在, 不可不察。 都城修治之事, 時日已晩, 人力單薄, 今始欲爲, 誠爲齟齬矣。 但亦觀勢處之, 量其功役, 較其難易, 如砲樓可設, 則設砲樓。 城垜之數, 未滿八千云, 而我國城垜太低, 延袤不廣, 若幷二三垜爲一垜, 則垜數當減半。 仍於垜面, 出砲畫懸眼, 如《葉》遊擊所敎, 則此亦可爲也。 至於南山, 因壘增築恢大, 而下達於江面, 則水上下數十里, 通望無礙。 此則處置, 皆係守城良法。 向也人心不欲, 故不敢輕擧, 今則勢窮事極, 京城內外, 以及畿甸之民, 皆以守城爲言, 此未必非可爲之機也。 然事之難平矣, 臣等亦安敢必成於時日之內哉? 今四面巡撿使已出, 意速巡視城面, 且察功力之多少, 啓稟處置無妨。 兵曹判書李德馨, 以西面巡撿使啓下矣。 都城修繕, 元是兵曹之任, 判書乃其主治之官, 不可以一面限之。 兵曹參判姜紳, 曾爲巡撿使。 西面巡撿使, 使姜紳仍爲之, 而判書李德馨, 摠爲撿勑似當。 敢此幷啓?" 傳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51책 8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18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