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증원과 군량 확보에 대한 도원수 지중추부사 권율의 글
11월 10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지중추부사(都元帥知中樞府事) 권율(權慄)의 서장(書狀)에,
"신은 황신(黃愼)의 장계(狀啓) 안에 있는 사연을 보았으나 조정의 처치가 어떤 계책에서 나올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경상도 한 도로 헤아리면 탕패(蕩敗)하여 남은 것이 없는 듯하나 징발하여 뽑으면 1만여 군사를 얻을 수 있는데도 열읍(列邑)의 수령(守令)이 이미 오랫동안 게을리하여 왔으니, 이것이 지금의 큰 걱정입니다. 양호(兩湖)에서 2∼3만의 군사를 얻고 승군(僧軍)도 아울러 뽑아서 함께 합세하여 적의 형세가 펴지기 전에 동으로는 기장(機張)·울산(蔚山)으로부터 서로는 함안(咸安)·의령(宜寧)까지 수백리에 걸쳐 군영(軍營)을 잇달아 요해지에 설치하여 웅거하여 지키고, 또 주사(舟師)를 부산(釜山) 앞바다에 진출시켜서 양도(糧道)를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부산의 적이 올해에는 경작을 많이 하지 않아서 우리 땅에서 소출된 것이 필시 넉넉하지 못할 것이므로 반드시 일본에서 잇따라 독촉하여 날라와야 대어 갈 수 있을 것인데, 밖으로는 주사에게 막히고 나아가도 우리 땅에서 약탈할 수 없으므로,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사방의 진에 주둔한 적이 진퇴에 낭패하여 그 형세가 스스로 군색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요즈음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저들 중에 무지한 졸왜(卒倭)는 모두 투항할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대적이 나오기 전에 한번 이 소식을 들으면 필시 진퇴를 망설일 것이니, 이 기회를 타서 우리의 기계(奇計)를 행하면 여기에 남아 있는 적은 절로 소멸될 것입니다. 오직 양식을 이어가기가 가장 어려우나, 민간의 곡식이 여기는 풍족하니, 만약에 1백여 동(同)의 목면(木綿)을 얻어서 요해지에 진영을 설치하고 저자를 연다면, 수만 석의 쌀을 며칠 사이에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병가(兵家)의 계책은 흔히 권기(權奇)에 나오고 속임수를 꺼리지 않으니, 지금으로서는 다만 거짓말이라도 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을 형편상 보내야 하겠다.’ 하면서, 혹 통상(通商)하여 화친을 바라는 뜻을 보이기도 하고 평경직(平敬直)·요시라(要時羅)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사(機事)를 비밀히 하여 일체 누설하지 말도록 하고 먼저 각도에 굳고 분명하게 약속하여 어느 달 어느 날로 기일을 정하되, 각도의 감사(監司)·병사(兵使) 및 진관(鎭管)의 수령에게 엄히 신칙(申勑)하여 직접 단속해서 제때에 모임으로써 늦어서 시기를 어기는 폐단이 없게 하면, 일이 잘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만약에 산성(山城)이 없는 공허한 곳에 갑자기 설험(設險)하는 것을 어렵다고 여긴다면, 또 한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소위 설험이란 것은 반드시 죄다 석성(石城)을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녹각(鹿角)·거채(拒柴)를 벌여놓고 그 위에 난석(亂石)을 많이 포개 석동(石東)으로 버티어 놓으면, 비바람에 무너져 수년 동안 길게 지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때의 험조(險阻)에 웅거하는 계책에 있어서는 바깥의 적이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므로 도리어 돌로 쌓은 것보다 나은데, 이것은 신이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기장부터 함안까지는 그 사이의 도리(道里)가 돌아가는데, 도는 길로 계산하면 10식정(息程)454) 이나 되기는 하나, 머리를 들어 서로 바라 보이는 곳의 요해지를 표준으로 하면 그 사이가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전에 산성을 쌓았던 옛터 3∼4곳이 그 사이에 있으니, 이것을 이용하여 몇 곳을 더 설치하여 수미(首尾)를 이어 사수(死守)할 곳으로 삼는다면, 적이 장구(長驅)하려 하더라도 갈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삼도(下三道)의 군사가 혹 모자랄 경우 다른 도의 군사도 적당히 징발할 수 있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5∼6만의 군사를 얻으면 넉넉히 쓰겠으니, 조정에서 가부를 헤아려 가하다고 생각하면 빨리 조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전 목사(牧使) 박종남(朴宗男), 호군(護軍) 박명현(朴名賢), 전 우후(虞候) 구황(具滉) 등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들도 해사(該司)를 시켜 급히 소집하여 제때에 내려보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備邊司)에 계하(啓下)하였다. 비변사가 회계(回啓)하기를,
"오늘의 형세는 적과 양립할 수 없으니, 싸우고 지키는 두 방책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병화(兵火) 끝에 백성이 거의 다 죽고 재력(財力)이 아주 없어졌으므로, 마지못하여 몇해 동안 기미(羈縻)할 계책을 내어 뒷날에 도모하려 하였으나, 이제 이 계책이 완수되기 전에 적이 또다시 흉악한 마음을 부리니, 우리 나라는 싸우고 지키는 것으로 맞서서 장사(將士)를 격려하여 죽을 처지에서 살길을 찾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병세(兵勢)의 강약이 같지 않을 수도 있으나 군사가 피폐하고 씩씩한 것은 곡직(曲直) 여하에 달려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 추적(醜賊)은 하늘을 거스리고 도리를 어겼으므로 다시 함부로 날뛰려 하더라도 그 부하들은 반드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군사는 매우 잔약(殘弱)하기는 하나 이제는 다들 적과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장군은 죽을 결심이 있고 사졸은 살아남으려 하지 않는 의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事機)에 응하여 군사를 쓰면 승부의 형세가 반드시 어느 곳으로 기울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더구나 지난 임진년에는 변방의 성이 한번 깨지자 내지(內地)가 와해되어 공사의 저축이 곳곳마다 넉넉하였으므로 적병이 천리길을 오면서 양식을 얻어 장구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일로의 고을마다 보이는 것이라곤 가시덤불뿐인데, 적이 어찌 스스로 제 양식을 날라와서 전일처럼 장구할 수 있겠습니까.
형세가 편리한 곳을 가려서 방어를 설치하고 굳게 지키되 겹겹이 이어서 성벽(城壁)을 굳게 하고 청야(淸野)하여 기다리게 하면, 적이 나아가도 싸울 수 없고 물러가도 약탈할 것이 없으므로 며칠 안 가서 예봉(銳鋒)이 절로 사그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뒤에 정병(精兵)을 따로 가려서 분산시켜 공격하여 그 앞을 끊기도 하고 그 뒤를 막기도 하며, 주사(舟師)가 바다에서 출몰하여 그 돌아갈 길을 끊으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적에게 이길 방책은 이것밖에 없으니, 이제 이 장계에서 아뢴 것은 참으로 승산(勝算)입니다. 다만 시기에 따라 방책을 결정하여 싸우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는 것은 주장(主將)이 어떻게 처치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조정이 천리 밖에서 멀리 절제(節制)할 수는 없습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이미 편의에 따라 처치할 권한을 받고 내려갔으니, 모든 일을 다시 더 상의하여 좋은 계책에 따라 잘 처치함으로써 사기(事機)를 잃지 말게 하고, 목면(木綿) 1백 여 동은 장만하기 쉽지 않더라도 해사(該司)를 시켜 적당히 마련하여 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병가(兵家)의 계책은 속이는 것도 꺼리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청정(淸正)과 행장(行長)이 서로 다투는 틈이 있으니, 이것도 행간(行間)455) 이 없을 수 없는 기회입니다.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의 일은 가벼이 말할 수 없으나, 평경직(平敬直) 등에게 벼슬을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또한 청적(淸賊)이 그들을 의심하게 하여 저희들끼리 도모하고 지당(支黨)이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 일을 만약 주밀하게 잘 처치하지 못하여 기밀한 일이 누설되게 하면 무익할 뿐더러 도리어 유해할 것인데 이것도 원수(元帥)가 헤아려서 응변(應變)하여 허술함이 없게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병란이 일어난 이래로 조정이 강구하고 사방이 헌책(獻策)한 것이 이 한 가지 산성(山城)과 요해지를 설치하는 계책뿐이었는데도 아직 성취한 것이 없습니다. 경상도로 말하면, 금오 산성(金烏山城)·천생 산성(天生山城)은 동서로 마주 서서 낙강(洛江)의 험조를 끼고 바로 중로(中路)의 요충이 되니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고 경주(慶州)의 부산 산성(富山山城)과 삼가(三嘉)의 악견 산성(岳堅山城)도 긴요한 지역이므로 다 장수를 정하여 굳게 지켜야 하며, 이 밖에 공산 산성(公山山城)·용기 산성(龍起山城)은 당로(當路)한 요충은 아니나 이미 쌓았으니 또한 근처의 백성들로 하여금 노약자(老弱者)들을 거느리고 그 안에 들어가 보전케 해야 합니다. 나머지 지켜야 할 요충지로는, 이를테면 창녕(昌寧)의 화왕 산성(火王山城) 같은 곳도 수령에게 알려 백성을 거느리고 급히 수리하게 하되, 성을 쌓는 일이 어려우면 목책(木柵)·토루(土壘)로도 한때의 급한 것을 대응할 수 있으니, 장계의 사연과 같이 십분 조치함으로써 지체되어 미치지 못하는 염려가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박명현(朴名賢)은 이미 내려갔고, 박종남(朴宗男)·구황(具滉) 등은 병조(兵曹)를 시켜 재촉하여 보내게 했는데, 우도 도체찰사(右道都體察使)에게도 아울러 하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82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09면
- 【분류】군사(軍事) / 정론(政論) / 외교(外交) / 농업-농작(農作) / 교통(交通) / 호구-이동(移動) / 사상-불교(佛敎)
○十一月初十日成貼都元帥知中樞府事權慄書狀:
臣得見黃愼狀啓內辭緣, 未知朝廷處置出於何策。 以慶尙一道揆之, 則雖曰蕩敗, 若無遺調選, 可得萬餘兵, 而列邑守令, 怠慢已久, 此爲方今之大患。 兩湖若得二三萬兵, 竝抄僧軍, 與之合勢, 及賊未張前, 東自機張、蔚山, 西至咸安、宜寧, 連營數百里, 設險據守, 又以舟師, 進列於釜山前洋, 以遏糧道, 則釜山之賊, 今年則起耕不多, 我地所出, 必不能敷, 必須節續督運於日本, 然後可能接濟, 而外爲舟師所扼, 進不得野掠於我境, 不出一月, 四陣屯賊, 進退狼狽。 顧其勢自窘, 加以近聞和事不成, 自中無知卒倭, 皆有投降之計。 未出大賊, 一聞此奇, 則必且遲疑前却。 乘此機會, 行我奇計, 則在此殘賊, 自爾消滅, 唯是糧餉, 最爲難繼, 而民間之穀, 在此豐足。 若得百餘同木綿, 開市於設險之處, 數萬斛之米, 不日可致。 且念兵家之策, 多出權奇, 不厭詐謀。 在今, 但當詳言, 事至於此, 王子、大臣, 勢當送之也, 或令通商, 以示求和之意, 或授平敬直、要時羅高官, 以悅其心, 而密其機事, 切勿漏洩, 先於各道, 堅明約束, 期以某月某日爲定, 嚴勑各道監、兵使及鎭管, 守令, 使之親斂, 及期輳集, 無有遲退失期之弊, 事或可爲矣。 議者, 若以無山城空闊之處, 猝然設險爲難, 又有一說。 所謂設險, 非必盡築石城, 只排鹿角、拒柴, 多壘亂石於其上, 撑之以石東, 則風雨所壞, 雖不能遠守數年, 其於一時據險之計, 外面之賊, 不能內薄, 反勝於石築。 此是臣已驗之事也。 自機張至咸安, 其間道里迂曲, 從迂路而計之, 則雖至十息之遠, 以擧頭據險相望處爲準, 則其間不至闊遠, 而間有舊築山城, 爲舊基者三四處。 若因此而加設數處, 聯絡首尾, 以爲死守之所, 則賊雖欲長驅, 其道無由。 下三道軍, 如或不足, 則他道之兵, 亦可量宜(徽)〔徵〕 發。 以臣愚意, 若得五六萬兵, 足以爲用。 乞自朝廷, 商量可否, 如以爲可, 則趁速措置爲當。 前牧使朴宗男、護軍朴名賢、前虞候具滉等, 未知今在何處, 亦令該司, 火速召集, 及期下送亦宜。
啓下備邊司。 回啓曰: "今日之勢, 與賊不兩立, 戰守二策之外, 他無可爲。 但以我國兵火之餘, 人民殆盡, 財力蕩竭, 故不得已出於羈縻數年之計, 以爲後圖。 今此計未遂, 而賊又復逞兇心, 我國不得不以戰守當之, 策勵將士, 以死中求生之計也。 凡兵勢强弱, 雖或不侔, 然師之老壯, 在於曲直。 醜賊逆天悖理, 雖欲更肆跳梁, 而其下必有思歸之心。 我國之軍, 雖甚殘弱, 然在今皆有與賊不俱生之意。 所謂將軍有死之心, 士卒無生之氣, 及機用之, 則勝負之形, 未知必在於何處。 況往在壬辰, 邊城一破, 內地瓦解, 公私蓄積, 在在饒足, 故賊兵千里, 因糧得以長驅, 今則一路郡縣, 榛莽極目, 賊豈能自運其糧, 而如前日之長驅乎? 苟能擇其形便之地, 設險堅守, 使複屯相望, 堅壁淸野而待, 賊進不得戰, 退無所掠, 不待數日而銳鋒自消。 如此然後, 別擇精卒, 分散抄擊, 或截其前, 或邀其後, 舟師出沒洋中, 斷其歸路, 則可以取勝。 今日制敵之策, 無出於此。 今此狀啓所陳, 誠爲勝算。 第臨機決策, 或戰或守, 當在主將處置如何, 朝廷不可遙制於千里之外。 都體察使旣受便宜之權, 已爲下去, 凡事更加商議, 從長善處, 毋失事機, 而木綿百餘同, 雖不可易辦, 令該司, 隨宜備送爲當。 兵家之策, 不厭詐謀。 況淸正、行長, 有交爭之釁, 此亦不無行間之機。 王子、大臣事, 不可輕言, 平敬直等, 餌以官爵, 以悅其心, 亦使淸賊疑之, 而內自相圖, 支黨散落, 亦無不可矣。 此事若不能周密善處, 使機事漏洩, 則非徒無益, 或反有害。 此亦在元帥商量應變, 俾無疎虞矣。 山城設險一策, 自兵興以來, 朝廷之所講究, 四方之所獻策者, 唯此一事, 而時無成就。 以慶尙道言之, 則金烏山城、天生山城, 東西相對, 挾洛江之險, 正爲中路要衝, 爲必守之地; 慶州 富山山城、三嘉 岳堅山城, 亦係緊要地頭, 皆當定將堅守。 此外公山山城、龍起山城, 雖非當路要衝, 而旣已築之, 則亦當使近處之民, 率老弱入保其中也。 自餘要衝可守之地, 如昌寧 火王山城之類, 亦當知委守令, 倡率人民, 急急修葺, 如城役爲難, 則木柵、土壘, 亦可以應一時之急。 果如狀啓辭緣, 十分措置, 使無緩不及事之患爲當。 朴名賢則已爲下去, 朴宗男、具滉等, 令兵曹催送, 而右道都體察使處, 竝下諭何如?" 啓依允。
- 【태백산사고본】 51책 82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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