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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6일 무술 2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황신의 군관 조덕수·박정호에게 통신사의 동태에 관해 아뢰게 하다

사시 초에 상이 황신의 군관 조덕수·박정호 등을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중(賊中)에서 들은 것이 어떠한가? 죄다 말하라."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배신이 들어갈 때에 관백의 처소와 3일 정(程)되는 곳에서 조신(調信)이 먼저 관백에게 갔는데, 윤8월 15일에 고칙(誥勑) 및 천사·배신이 사개(沙蓋)에 들어가 각각 관소(館所)로 갔습니다. 관백이 조신에게 말하기를 ‘5년 동안의 전쟁을 마침내 끝냈으니 너의 공이 아름답다. 다만 천사를 접대할 관사(館舍)가 지진(地震) 때에 죄다 무너져서 접대하기 어려울 듯하므로, 이제 다시 신관(新館)을 만들어서 접대하려 한다.’ 하니, 삼 장로(三長老)가 말하기를 ‘천사를 우리 땅에 오래 머물려두면서 관백이 만나지 않는 것은 일의 체모가 매우 어그러지며, 또 관사를 짓는 것은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니, 빨리 만나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 장로는 누구인가? 한 사람의 이름인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길성(吉成)·장성(長成)·삼성(三成) 세 중[僧]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신이 말하기를 ‘천사가 들어온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신관에서 접대하려면 날짜가 매우 오래 걸릴 것이니, 빨리 어디서든 접견해야 한다.’ 하니, 관백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 말이 좋다. 9월 1일에 오사개(五沙蓋)에 가서 천사와 배신을 접대하겠다.’ 하였습니다. 소위 오사개라는 곳은 그 지역에 본디 관사(官舍)는 없고 여염 가운데에 절이 있을 뿐인데 이 절을 명사를 접대하는 곳으로 삼아, 어느 곳에는 상사(上使)를 들게 하고 어느 곳에는 부사(副使)를 들게 하였습니다.

조신사개에 나와서 말하기를 ‘일이 장차 이루어지게 되어 마음이 아주 기쁘다.’ 하였는데, 조신산성주(山城州)에서 사개에 나온 뒤로 우리 나라 통신사(通信使)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조신이 통사(通事) 박대근(朴大根)에게 말하기를 ‘일이 장차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매우 답답하고 염려된다.’ 하였고, 조신이 부사의 아문(衙門)에 나아가 말하기를 ‘일이 장차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데, 나는 감히 관백 앞에서 스스로 청할 수 없으니, 노야(老爺)가 관백에게 청해야 하겠다.’ 하니, 심 부사(沈副使)가 말하기를 ‘나는 오로지 이 일 때문에 왔으니, 관백을 만나서 한꺼번에 배신까지 다 만나야 한다는 뜻을 힘써 말하겠다.’ 하였습니다, 윤8월 29일에 관백이 오사개에 오자 9월 1일에 부사가 먼저 오사개에 갔으나 관백이 만나주지 않았는데, 상사가 오후에 비로소 와서 2일에 서로 만나 수봉(受封)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황신이 명사 아문에 여쭈어 군관(軍官)·역관(譯官)을 차출하여 수봉(受封)하는 곳에 따라가서 형세를 보기를 청하였다 하는데 명사가 데려갈 것 없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러므로 일행은 다 명사의 거둥과 관백이 수봉하는 절목(節目)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이미 봉왕례(封王禮)를 거행하였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은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들은 것이 이러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구에게 들었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단지 파총(把總) 왕귀(王貴)가 황신에게 말하였는데 신도 들었습니다. 3일에 연향례(宴享禮)를 거행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사람은 가지 않았는가? 명사 차비 역관(差備譯官)은 필시 같이 갔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차비 역관도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연향 때에 부사가 군사 철수에 관한 말을 내었으나, 관백은 답하지 않았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시 말하라. 계사(啓辭)는 큰소리로 해야 한다."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관백이 군사 철수에 관한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명사가 관소로 돌아왔습니다. 4일 양사(兩使)가 사개에 돌아오자, 황신이 곧 명사 아문에 가서 말하기를 ‘노야(老爺)는 이제 일을 끝냈으므로 곧 떠나야 하겠으나, 나는 명을 받고 멀리 와서 도대체 분명히 한 것이 없으니,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반드시 일을 끝내고야 돌아가겠다.’ 하니, 명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객이 왔을 때 주인이 대접해야 객이 머무를 수 있다. 주인이 손님대접을 하지 않으니, 나는 이제 갈 것인데, 그대가 어찌 홀로 머무르겠는가. 그대는 그대 나라의 서폐(書幣)429) 를 가져왔을 뿐 관백에게 줄 것이 따로 없는데 관백이 받지 않는 것이니, 그대가 서폐를 가지고 온전하게 돌아가는 것은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또 그대는 나를 근수(跟隨)한 사람이니, 내가 가면 그대는 따라가야 한다. 내가 고칙(誥勑)을 가지고 왕을 봉하러 왔어도 관백이 분명히 하지 않고 나를 이렇게 구박하여 나가게 하는데, 어찌 그대에게만 특별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황신심 노야(沈老爺)를 보러 가니, 심 노야의 말도 그러하여 ‘그대는 수행하여 왔으므로 행동을 반드시 우리에 따라야 할 것이니, 그대는 빨리 가서 행리(行李)를 수습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9일에 황신이 명사를 따라 배에 올라 앞바다에 머물렀다가 10일 한밤에 배를 띄워 떠났습니다.

관백이 평 행장(平行長)에게 묻기를 ‘조선의 왕자를 네가 잡아 올 수 있는가?’ 하였는데, 행장이 말하기를 ‘말로는 할 수 없고 반드시 전투로 해야 하는데, 병가(兵家)의 승패를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 하니, 관백이 행장에게 노하여 물러가게 하였고, 청정(淸正)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는데, 청정이 말하기를 ‘당초에 내 말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일이 이렇게 되었다. 내가 나가면 분부대로 하겠다.’ 하였습니다. 청정행장은 매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이번의 승전(勝戰)을 기약할 수 없기는 하나 두 장수가 말하는 것은 번번이 서로 어그러진다 하는데, 일본의 대소인(大小人)은 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떠한 사람이 말하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이 친히 들은 것이 아니라 조신(調信) 등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대저 관백이 통신사(通信使)를 만나지 않은 것은 다 청정이 한 짓이며, 관백과 청정 사이가 가장 서로 가까와서 관백의 아이를 청정의 집에서 기른다고 합니다. 일본이 선봉장(先鋒將) 네 사람을 차출하여 이제 나올 것인데, 청정·갑비수(甲棐守)·일기수(一岐守)는 선봉이고 행장은 후위가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나온다면 부산(釜山)을 지킬 것인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오는 자는 다 전에 왔던 장수이니, 김해(金海)기장(機張)은 꼭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은 표문(謝恩表文)430)정성(正星)431) 이 가지고 오는데, 뒤따라 남도(南島)로 올 것입니다. 표문에 실려 있기를 ‘조선은 죄가 크니, 대명(大明)에서 정토한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싸워 섬멸하겠다…….’ 하였는데, 명사가 말하기를 ‘내년 2월에는 회답이 올 것인데, 어찌 갑자기 군사를 움직이려 하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말인가? 이것은 적추(賊酋)의 말인가, 아니면 명사가 말한 것인가? 우리 나라가 적을 토벌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대명이 적을 토벌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회답은 누구의 회답인가? 그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다시 상세히 말하라."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2월의 회답이란 명사가 적이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를 늦추어 시일을 끄는 말이지, 실제로 회답을 기다려서 반드시 군사를 움직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다시 움직인다면 반드시 먼저 군마(軍馬)를 조치할 것인데, 그대는 본 것이 없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병마를 조치하는 것은 신이 보고 듣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청정은 관백의 뜻에 따라 반드시 다시 오려 하므로, 모든 일본 사람들은 아이들이나 주졸(走卒)까지도 다 전쟁에 지쳐서 누구나 다 관백을 원망하고 청정을 허물합니다. 또 관백의 각진(各鎭)과 일기(一岐)·대마(對馬)같은 섬들은 사람이 사는 집이 드물어서 반은 비었습니다. 소신이 왜승(倭僧)과 잡혀온 사람에게 들으니, 다들 말하기를 ‘일본은 국중(國中)에 재변이 거듭 나타나서 올해 7∼8월 사이에는 토우(土雨)·석우(石雨)·모우(毛雨)의 변이 있었는데, 관백이 천재(天災)를 두려워하지 않고 병력을 다하여 싸워 마지않으니, 반드시 마침내 멸망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준민(禹俊民)이 말하기를,

"이 모두를 듣기만 하고 눈으로는 보지 못하였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오색모우(五色毛雨)는 나무에 걸려서 다 오채(五彩)를 이루었는데,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서 혹 감추어 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며칠 동안 머물렀었는가? 지진에 쓰러진 집을 그대는 직접 보았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20여 일이나 머물렀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이 대단하지는 않았으나, 하루에 두 세 번씩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집이 무너지는 것으로 의심하여 사람들이 다 피하여 나갔으나, 얼마 지나서는 평상으로 돌아가고 집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병고관(兵古關)은 관백의 구도(舊都)인데 그 주산(主山)이 무너지고 큰 집이 다 땅에 쓰러졌고, 또 땅이 갈라져서 검은 물이 솟아나므로 사람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갈라진 땅으로 빠져들어가 죽은 자가 거의 1만여 명이었으며, 전일 무너진 집은 이제야 비로소 수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로(一路)에서 치병(治兵) 등의 일을 전혀 눈으로 보지 못하였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들은 것은 있으나 본 것이 없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마도(對馬島)부터 일기(一岐)·낭고야(浪古耶)까지는 다 해도(海島)인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다 해도입니다. 부산에서 하루 만에 대마도에 이르고, 또 하루 만에 대마부중(對馬府中)에 이르는데 평의지(平義智)가 사는 곳입니다. 또 하루 만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고, 또 반일 만에 낭고야에 이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기 역시 섬인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낭고야에서 서쪽으로 가면 관백이 사는 곳에 곧바로 닿는데 섬이 서로 잇따랐고, 낭고야정성(正成)이 지키는 곳인데 인가가 자못 빽빽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들으니 낭고야에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당초 유진(留鎭)하였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성지(城池)가 있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돌로 쌓았는가, 흙으로 쌓았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담처럼 흙을 쌓고 그 안에 오층루(五層樓)를 세웠는데, 바로 관백이 전일에 살던 곳이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서해도(西海島)를 보았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그런 곳이 있는지 없는지 신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있는데 네가 보지 못한 것이다."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낭고야에서 관백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면 좌우의 섬 사이를 배로 가야 하고, 또 직로(直路)가 있는데 그 사이에 적간관(赤干關)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간관은 지명(地名)인가, 아니면 성자(城子)인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이는 지명입니다. 주현(州縣)이 아니고 성자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땅은 산이 험한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산은 있어도 험조(險阻)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박정호(朴挺豪)가 아뢰기를,

"지나는 참(站)일 뿐이고 인가는 많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沿路)의 지나는 곳에 사는 백성은 번성하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연화(烟火)는 잇따랐으나, 별로 번성한 마을이 없고, 낭고야만이 인가가 즐비하였습니다. 병고관 아래 낭고야 위 지방에도 인가가 많았으나, 다른 곳은 혹 수백 집이나 1백 집 정도인데 태반이 비었습니다. 적간관·상관(上關)·상로포(霜露浦)·도모(都毛)·무로(無老) 등에는 인가도 아주 적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개(沙蓋)는 관백의 국도(國都)에서 몇 일정(日程)이나 떨어져 있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사개산성주(山城州)에서 2일 정 떨어져 있는데, 산성주가 곧 관백이 도읍한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성주에는 인가가 얼마나 되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사개까지만 가고 관백이 도읍한 곳까지 가지는 못하였으나, 오사개(五沙蓋)에서 바라보니, 사는 백성이 많은 것이 사개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잡혀간 사람들을 보았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많이 있었습니다. 혹 한 집에 열 사람이 있으면 우리 나라 사람이 열 가운데 서넛을 차지하여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우리 나라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는가? 다들 왜자(倭子)의 종이 되어 있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이 과연 알아보았습니다. 신이 본 바로는 잡혀간 사람이 많아서 그곳 주민의 3분의 1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놈들이 노예처럼 부리면서 경중에 따라 모욕을 주고 있었습니다. 문자를 조금 아는 양반의 자손이면 승왜(僧倭)에 의탁하여 사미(沙彌)가 되어 입고 먹는 것이 자못 넉넉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은왜(謝恩倭)는 분명히 오지 않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오지 않습니다. 중국 사신을 따라오는 자는 행장(行長)정성(正成)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누가 표문(表文)을 가져오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소신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대개 관백이 명사에게 노하여 나가도록 재촉하였는데, 명사가 배를 탄 뒤에 정성을 시켜 관백에게 알리기를 ‘내가 이제 홀로 가고 일본은 사표(謝表)가 없으니, 매우 미안하다.’ 하니, 관백은 듣고서 크게 웃고 말았고, 세 봉행(奉行)이 정성에게 말하기를 ‘관백이 네 글을 보고 웃은 것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으나, 내가 관백을 만나서 말이 미치게 되면 내가 주선하겠으니, 이 뜻을 명사에게 돌아가 이야기한 뒤에 빨리 들어오라.’ 하였으므로, 정성도모(都毛)에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정성산성주(山城州)에 들어갔으므로, 명사가 정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혹 2∼3일 동안 머무르기도 하면서 천천히 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承旨)는 들었을 것이다. 당초에는 사은왜 3백이 올 것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오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우리 나라를 변변치 않게 대우하는 것일 뿐더러 중국에 불공(不恭)한 것도 심하다. 또 차비 역관(差備譯官)마저 수봉(受封)하는 행례(行禮)를 보지 못하였다 하니, 이 일은 결말이 어떠할지 더욱 모르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왜자(倭子)가 중국 사신을 어떻게 대우하던가?"

하니, 우준민(禹俊民)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신보다는 조금 낫게 하였으나, 명사가 말하기를 ‘우물 위에 있는 사람이라야 우물 안에 있는 사람을 구제할 것인데, 이제 나도 우물 안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알 만합니다."

하였다. 조덕수가 아뢰기를,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하고, 우준민이 아뢰기를,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매우 분명하지 않다."

하였다. 조덕수가 아뢰기를,

"처음에 관백이 매우 노하여 통신사 일행을 죄다 죽이려 하였으나, 세 봉행이 관백의 노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보고 들어가 관백에게 말하기를 ‘예전부터 사신을 죽였던 적이 없었는데, 온 자를 죽이면 뒷사람이 경계하여 다들 일본을 무례한 나라라 할 것이다. 사신을 죽일 수는 있으나 무례하다는 이름을 면할 수 없는 데다가, 더구나 천사가 여기에 와있으니 더욱 사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 하니, 관백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그만두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신을 무로(無老)·낭고야(浪古耶)·일기(一岐)·대마도(對馬島) 같은 곳에 구류한다.’ 했는데, 이것은 졸왜(卒倭)가 서로 전하는 말이었습니다. 황신(黃愼)은 감히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행장은 중국 사신과 함께 오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대엿새 뒤떨어져서 올 것입니다. 정성은 표문을 가지고 뒤미처 남도(南島)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성은 군사가 없이 홀로 오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정성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지, 사행(師行)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정이 발병(發兵)하는 것은 틀림없이 어느 때에 있겠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지난달 15일에 세 적장(賊將)이 나올 것이라 하였는데 신이 낭고야에 이르러 알아보아도 확실한 통보가 없었고, 또 25일에 나온다 하였으나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장왜(將倭) 일기수(一岐守)가 대마도 가까운 곳에 와 있고 그가 온 목적이 반드시 군사와 양식을 징발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또한 상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평조신(平調信)이 작은 배를 삯내어 우리를 보냈으므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식은 과연 참말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만들어서 공동(恐動)시키려는 것인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이 들은 것은 올해에 세 장수가 나온다는 말뿐인데 거짓인지 참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큰 군사가 나오는 시기는 2월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은왜(謝恩倭)는 틀림없이 오지 않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이 일본에 있을 때에는 단연코 내보낸다는 통보가 없었는데, 나온 뒤의 일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두 사신을 배행(陪行)하는 자는 행장과 정성 두 사람뿐이고, 다른 왜가 온다는 것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중(賊中)에서는 명사를 지공(支供)으로 대접하던가, 산료(散料)로 하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날짜를 헤아려서 산료하고 찬물(饌物)만을 지공하였습니다. 관인(官人)은 흰쌀로 급료(給料)하고 팥으로 찬 값을 주었는데, 우리 나라 사신에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대개 관백의 국도에는 쌀이 옥보다 귀하고 논도 드뭅니다. 대마도는 견줄 데 없이 땅이 척박하여 토란을 심어서 먹을 뿐이고, 이따금 논이 있으나 겨우 열 섬을 파종할 수 있으며 모밀도 거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기도는 어떠한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전지(田地)가 아주 적고 나무도 없습니다. 고을이 있는 곳은 산에 의지하여 진(鎭)을 설치하였고, 군사를 일으킨 뒤로 비로소 산성(山城)을 만들었는데, 나무를 잇대고 흙을 칠하여서 쌓았습니다. 대마도에는 성자(城子)가 없고, 다만 도주(島主)가 있는 곳에 목책(木柵)을 세운 것이 길이가 수백 보에 너비가 30보쯤 되며 포루(砲樓) 다섯 곳을 설치하고 총혈(銃穴)을 많이 뚫어 놓았는데, 의지(義智)가 장수를 보내어 지키게 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백을 죽이려고 꾀한 자를 죽였다 하는데, 그대는 그 일을 들었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염사근(廉士謹)에게서 들었습니다. 염사근장성(長成)의 집에 있을 때에 자못 친하였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일본 사람들이 다 관백을 원망하니, 이제 군사를 징발한다면 다 따르지 않고 「차라리 여기에서 죽을지언정 다시는 가지 않겠다. 」고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임진년에 동산도(東山島)만이 오지 않았으니, 오늘날 군사를 징발하는 것은 그곳에서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새 관백이 수길(秀吉)을 죽이려다가 해내지 못하고 패하여 죽었다 하는데, 그대는 상세히 말하라."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염사근이 신에게 말하기를 ‘새 관백은 수길의 조카인데, 잔치를 세 번이나 크게 차리고 관백을 청하였으나 세 번 다 오지 않았으므로 새 관백이 매우 원망하였다. 마침 수길을 죽일 것이라는 간언(間言)이 있었으므로, 수길이 그를 죽이고 그 겨레붙이와 휘하(麾下)를 다 죽였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실은 죽이려고 꾀한 것이 아니다. 수길이 태합(太閤)이라 자칭하는데, 새 관백이 또 있었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수길은 나이가 예순 셋이고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가 겨우 다섯 살입니다. 관백 위에 황제가 있는데, 전에는 관백이 업신여겨 예대(禮待)하지 않고 또한 급료(給料)하지 않았으나, 수길에 이르러 비로소 우대(優待)하였습니다. 관교(官敎)는 반드시 황제에게서 나오나, 황제는 또한 관백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나는 일로(一路)에서는 배신을 후대하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국도보다는 조금 우대하였습니다. 또 각도(各島)에서는 스스로 장만하여 명사를 공궤(供饋)하였는데, 일기도는 궁핍하여 접대할 물건이 없으므로 닷새를 지내면 속수무책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사와 배신(陪臣) 일행은 빠짐없이 나오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정사(正使)의 장관(將官) 한 사람과 가정(家丁) 두 사람, 부사(副使)의 서자(書子)와 가정 한 사람씩이 지진 때에 눌려 죽었고, 그 나머지는 다 나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사(兩使)는 사포(沙浦)에만 가고 국도에는 가지 않았겠다."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부사는 지진 전에 국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왔고, 정사는 들어가지 않았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비밀히 온 것을 양사가 모르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이 올 때에 조신(調信)의 군관(軍官)인 왜인과 잠행(潛行)하여 절영도(絶影島)에서부터 어렵게 노를 저어 밤을 타서 왜영(倭營)과 멀리 떨어진 곳에 상륙(上陸)하여 암암리에 왔으니, 명사와 진 유격(陳遊擊)은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우준민이 아뢰기를,

"조신이 우리 나라 사신의 행차를 보호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조신은 요구가 별로 없던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조신도 일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부사가 정성 등에게 말하기를 ‘나를 죽이기는 쉬우나 왕자를 오게 하기는 어렵다.’ 하니, 조신이 말하기를 ‘일본이 이번에 왕자를 사로잡으려고 사신을 구박하려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다. 다른 나라의 일일지라도 어찌 이렇게 해야 하겠는가. 죽은 뒤에 악명을 남게 할 뿐이니, 내 입장에서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어느 지방 사람인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은 김제(金堤) 사람입니다."

하고, 박정호가 아뢰기를,

"신은 영해(寧海)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 출신(出身)하였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신은 출신하여 수문장(守門將)이 되었습니다."

하고, 박정호가 아뢰기를,

"신은 출신하여 직장(直長)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사는 어느 때에 부산에 이르는가?"

하니, 조덕수가 아뢰기를,

"일기도에서는 관대(館待)하기가 어려우므로 명사가 반드시 오래 지체하지 않을 것이나, 순풍을 만나야 배를 띄울 수 있습니다. 신이 올 때부터 동남풍이 아주 없었는데 바람이 없을 경우 일기에서부터 노를 저으면 2∼3일 만에 대마도의 동북 모퉁이 도회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왜자(倭子)가 말하기를 ‘1월 1·5·20·23일의 바람에는 배를 띄울 수 있다.’ 하였는데, 바람이 순하면 빨리 올 수 있을 것이나, 오는 것이 더디고 빠른 것은 신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사시(巳時) 끝 무렵에 파하여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8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9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註 429]
    서폐(書幣) : 국서와 폐백.
  • [註 430]
    사은 표문(謝恩表文) : 은혜에 사례하는 표문. 표문은 신하가 임금에게 경하(慶賀)·공헌(貢獻) 등의 뜻을 아뢰는 글. 여기서는 국왕이 황제에게 아뢰는 것이며, 제후국(諸侯國)의 신하가 그 임금에게 아뢰는 것은 전문(箋文)이라 하여 표문과 구별한다.
  • [註 431]
    정성(正星) : 정사(正使).

○巳初, 上引見黃愼軍官趙德秀朴挺豪等于別殿。 上曰: "賊中所聞如何? 盡言之。" 德秀曰: "陪臣入去時, 去關白三日程, 調信先往關白處, 閏八月十八日, 誥勑及天使、 陪臣, 入沙蓋, 各就所館。 關白謂調信曰: ‘五年干戈, 終是了事, 汝功可嘉。 但天使接待處所館舍, 地震時盡爲破毁, 接待似難。 今欲更作新館以待之。’ 三長老曰: ‘天使久留我地, 而關白不見, 事體甚爲乖當。 且營造館舍, 時日必多, 須宜速見。’" 上曰: "三長老爲誰? 一人之名乎?" 德秀曰: "非一人之名, 乃是吉成長成三成, 三僧之謂也。 調信曰: ‘天使入來已久, 若新館以待, 則日月甚多, 須速於某處接見。’ 關白笑曰: ‘汝言好矣。 九月初一日, 當往五沙蓋, 接待天使及陪臣矣。’ 所謂五沙蓋, 厥地素無官舍, 但有寺刹, 在於閭閻中, 以此寺爲接待天使之所, 某處則館上使, 某處則館副使矣。 調信出來沙蓋曰: "事將成矣, 心地十分喜悅。’ 調信山城州, 出來沙蓋之後, 有不見本國通信使之語。 調信謂通事朴大根曰: ‘事將不成, 殊爲愍慮。’ 調信前進副使衙門曰: ‘事將不成, 而我不敢自請關白之前, 老爺須請於關白乃可。’ 沈副使曰: ‘我專以此事來, 當見關白, 力言一時俱見陪臣之意。 閏八月二十九日, 關白來五沙蓋, 九月初一日, 副使先往五沙蓋, 關白不見, 上使午後始至, 期初二日相見封受云。 黃愼稟於天使衙門, 請差軍官、譯官跟往受封之處, 以觀形勢云, 天使曰: ‘不必帶去’ 云, 故一行之人, 皆未見天使擧動及關白受封節目。" 上曰: "然則已行封王禮乎?" 德秀曰: "臣不得目覩, 只所聞如此耳。" 上曰: "聞於誰人乎?" 德秀曰: "但把摠言於黃愼, 臣亦聞之。 初三日行宴享禮云。" 上曰: "他人不往乎? 天使差備譯官, 想必同去也。" 德秀曰: "差備譯官, 亦不得隨去。 宴享時, 副使出撤兵之言, 關白不答云矣。" 上曰: "更言之。 啓辭宜用高聲。" 德秀曰: "關白不答撤兵之言, 天使還于所館。 初四日, 兩使還來沙蓋, 黃愼卽往天使衙門曰: ‘老爺今已完事, 宜卽起身。 我則受命遠來, 頓無黑白, 雖一年、十年, 須竣事乃還。’ 天使笑曰: ‘客來, 主則待之, 客可留也。 今主人不賓我, 從此逝矣。 汝何獨留? 爾持爾國書幣而來, 別無贈關白, 而關白不受之(事)〔故〕 , 爾持書幣, 得全而歸, 於義不乖。 且爾乃我跟隨之人, 我往爾當從之。 我將誥勑封王而來, 關白不爲皂白, 迫我出去如此, 何獨汝乎?’ 黃愼往見沈老爺, 沈老爺之言亦然, 曰: ‘爾是跟隨而來, 動止必須隨俺等矣。 汝宜速往, 收拾行李。’ 初九日, 黃愼隨天使登舟, 駐在前洋, 十日夜半, 泛舟而行。 關白問於平行長曰: ‘朝鮮王子, 汝可獲來耶?’ 行長曰: ‘不可以言語得之, 必以戰鬪, 兵家勝敗, 安可必也?’ 關白怒行長而退之, 問淸正亦如之, 淸正曰: ‘當初不用吾言, 故事至於此。 我若出去, 當如所敎。’ 大槪淸正行長, 大相不好, 故今之勝戰, 雖不可必, 而兩將所言, 每每相反云。 日本大小人, 皆言如此。" 上曰: "何許人言之?" 德秀曰: "非臣親聞也, 調信等言若此。 夫關白不見通信, 皆淸正所爲。 關白、淸正之間, 最爲相切, 關白孩子, 養於淸正處云矣。 日本差先鋒將四人, 今將出來, 淸正甲棐守、一歧守, 卽是先鋒, 而行長爲扞後云矣。" 上曰: "賊若出來, 守釜山乎?" 德秀曰: "來者皆是前將, 金海機張, 要必守之。 謝恩表文, 正星落後齎來, 追到南島矣。 夫表文所載, 則朝鮮罪大, 自大明征則已, 否者我當戰鏖云云。 天使曰: ‘明年二月, 回答當來, 何遽動兵乎?’" 上曰: "何謂也? 此乃賊酋之言乎? 抑 天使所言乎? 指我國討賊而言乎? 指大明討賊而言乎? 回答則誰人回答乎? 不曉乃言, 更詳言之。" 德秀曰: "二月回答, 乃天使緩賊動兵之期, 以遷延時日之言也, 非實待回答, 而必動兵之謂也。" 上曰: "賊若再動, 則必先措置軍馬, 汝無所見乎?" 德秀曰: "措置兵馬, 臣未見聞, 但淸正承關白意, 必欲再來。 凡日本之人, 雖兒童走卒, 皆困於兵革, 莫不怨關白而咎淸正。 且關白各鎭、一歧對馬等島, 人烟稀罕, 爲半空虛矣。 小臣聞於僧及被擄人, 皆曰: ‘日本國中, 災變疊出, 今年七八月間, 有土雨、石雨、毛雨之變, 關白不畏天災, 窮兵不已, 必終滅亡’ 云矣。" 禹俊民曰: "此皆所聞而不得目見乎?" 德秀曰: "五色毛雨, 則掛置樹木, 皆成五彩。 人以爲非常, 或有藏置者。" 上曰: "爾留幾許日字? 家舍之仆於地震者, 汝得目見乎?" 德秀曰: "留至二十餘日。 地震之作, 雖不大段, 而一日再三回, 無日無之。 初疑屋壞, 人皆避出, 久乃尋常, 屋亦不頹。 兵古關, 乃關白舊都, 其主山崩頹, 大家皆仆地, 又龜拆, 黑水湧出, 人人驚恐走出, 沒入裂地, 死者幾萬餘人。 前日所毁之屋, 今始修葺矣。" 上曰: "一路治兵等事, 全未目見乎?" 德秀曰: "有聞無見, 何以知之?" 上曰: "自對馬島一歧浪古耶, 皆海島乎?" 德秀曰: "皆海島也。 自釜山一日到對馬島, 又一日到對馬府中, 義智所居也。 又一日到一岐島, 又半日到(郞古耶)〔浪古耶〕 矣。" 上曰: "一歧亦島乎?" 德秀曰: "然。 自浪古耶西行, 直抵關白所居, 島嶼相連。 浪古耶, 卽正成所守, 人家頗稠密矣。" 上曰: "前聞浪古耶, 是秀吉當初留鎭云。 若爾則有城池乎?" 德秀曰: "有之。" 上曰: "築之以石乎? 以土乎?" 德秀曰: "築土如墻, 立五層樓於其內, 乃關白前日所居云。" 上曰: "汝見西海島乎?" 德秀曰其地有無, 臣未之知。" 上曰: "誠有之, 汝不得見也。" 德秀曰: "自浪古耶入關白所存處, 左右島間, 以舟行之, 而又有直路, 其間有地, 名曰(赤干關)〔赤間關〕 。" 上曰: "(赤干關)〔赤間關〕 , 地名乎? 抑城子乎?" 德秀曰: "此是地名, 非州縣, 又無城子。" 上曰: "厥土山險乎?" 德秀曰: "山則有之, 亦不險阻矣。" 朴挺豪曰: "只是過站, 人家不多。" 上曰: "沿路所經, 居民繁庶乎?" 德秀曰: "烟火相望, 別無盛村, 只浪古耶, 人烟櫛比。 兵古關以下, 浪古耶以上, 亦多人居, 他處則或數百家百家, 而大半空虛矣。 (赤干關)〔赤間關〕 上關霜露浦都毛無老等處, 人家亦絶少也。" 上曰: "沙蓋距關白國都, 幾日程?" 德秀曰: "沙蓋山城州, 二日程, 山城州, 是關白所都處。" 上曰: "山城州, 人家幾何?" 德秀曰: 只到沙蓋, 未及關白所都。 自五沙蓋望見, 則居民之衆與沙蓋等。" 上曰: "汝見被擄人乎?" 德秀曰: "多有之。 或一家有十人, 則我國人, 居十分之三四, 無處無之。" 上曰: "汝能知見我國人乎? 皆爲子奴僕乎?" 德秀曰: "臣果知見矣。 以臣所覩, 被擄人多至三分之一, 而率皆奴虜, 使之輕重折辱。 若兩班子姓, 稍解文字者, 則依托僧, 作沙彌, 衣食頗饒足矣。" 上曰: "謝恩, 分明不來乎?" 德秀曰: "不來。 陪天使者, 只行長正成也。" 上曰: "然則誰持表文來者?" 德秀曰: "小臣亦不得細知, 大槪關白怒天使促出。 天使乘舟後, 使正成通於關白曰: ‘我今獨行, 而日本無謝表, 殊爲未安。’ 關白聞之, 大笑而已。 三奉行言於正成曰: ‘關白見汝書笑之, 其意叵測。 我見關白, 若語及則我當周旋。 此意回話天使後, 速爲入來。’ 正成乃還都毛。 其後正成入山城州, 故天使遲正成之還, 或留二三日, 緩緩而行矣。" 上曰: "承旨聽之乎? 當初, 以謝恩三百, 當來聞, 而今不見來, 非但待我國無狀, 不恭於天朝, 亦甚矣。 且差備譯官, 亦不見受封行禮云, 此事尤不知結局之如何也。" 上又曰: "子待天使何如?" 禹俊民曰:"差勝於我國使臣矣。 天使云: ‘在井上之人, 方救井中之人, 今我亦在井中。’ 以此可知也。" 德秀曰: "封王時, 賊將四十餘人, 皆以服行禮, 獨關白不爲衣冠矣。" 俊民曰: "譯官、軍官等, 俱不得見, 其間情事, 不知何樣。" 上曰: "是事極不分明了。" 德秀曰: "初關白怒甚, 通信一行, 欲盡殺之。 三奉行見關白怒氣少怠而入, 謂關白曰: ‘自古無殺戮使臣之事。 若來者殺之, 則後人爲戒, 皆以日本爲無禮之國。 雖使臣可殺, 無禮之名不可免。 況天使在此, 尤不當殺使。’ 關白然其言, 乃止之。 或云: ‘拘留我國使臣於無老浪古耶一歧對馬島釜山等地, 而此乃卒相傳之言, 黃愼則不敢動矣。" 上曰: "行長與天使偕來耶?" 德秀曰: "落五六日而來。 正成持表文, 追到南島矣。" 上曰: "正成無軍獨來乎?" 德秀曰: "但聞正成之來, 未見師行也。" 上曰: "淸正發兵, 定在何時?" 德秀曰: "前月十五日, 三賊將當出來云, 而臣到浪古耶, 聞問無的報。 又云二十五日出來, 而亦不得細委矣。 但聞將 一歧守, 來在對馬島近地。 其來也, 必爲調兵與糧, 而亦不得詳也。 平調信爲賃小舟送我, 故臣得出來耳。" 上曰: "起兵聲息, 果是眞的耶? 抑作虛聲, 以恐動之耶?" 德秀曰: "臣所聞, 只今年三將出來之說, 而虛實難知。 且聞大兵之期, 在二月矣。" 上曰: "謝恩, 定不來乎?" 德秀曰: "臣在日本時, 則斷然無出送之報, 出來後事何可知也?" 陪兩使行者, 只行長正成兩人而已, 他之來, 臣未有聞。" 上曰: "賊中待天使, 以支供乎? 以散料乎?" 德秀曰: "計日散料, 而只供饌物。 官人則以白粲給料, 赤米予饌直, 我國使臣亦如之。 大槪關白國都, 米貴於玉, 亦罕水田。 對馬島土瘠無比, 只種土蓮以爲食, 間有水田, 纔播十碩之種, 而麰麥亦大無矣。" 上曰: "一岐島則何如?" 德秀曰: "田地絶少, 又無樹木, 州縣所在, 依山設鎭。 自起兵後, 始作山城, 而絡木塗土, 以爲之築。 對馬島則無城子, 但於島主所在, 立木柵, 長數百步, 廣三十步許, 設砲樓五處, 多穿銃穴。 義智遣將守之云。" 上曰: "謀殺關白者死之, 汝聞其事乎?" 德秀曰: "聞諸廉士謹士謹長成家, 頗見親(進)〔信〕 。謂臣曰: "日本人皆怨關白。 今若調兵, 則皆不願從曰: ‘寧死於此, 不能再行’ 云云。 壬辰之歲, 只東山島不來, 今日調兵, 其在此乎!" 上曰: "新關白欲殺秀吉, 不克敗死云。 汝備言之。" 德秀曰: "廉士謹言臣曰: ‘新關白, 乃秀吉之姪也。 大具宴享三次, 而邀關白, 皆不來, 新關白深恨之。 適有間言, 將殺秀吉云, 故秀吉殺之, 其族屬麾下, 皆殲焉。" 上曰: "然則實非謀殺也。 秀吉自稱大閤云, 亦有新關白乎?" 德秀曰: "秀吉年六十有三, 有一子, 年纔五歲。 關白上有皇帝, 前時關白, 慢不爲禮, 亦不給料, 至秀吉始優待之。 官校必自皇帝出, 而皇帝亦不知關白所爲矣。" 上曰: "一路所經, 厚遇陪臣乎?" 德秀曰: "比國都則差優對。 且各島自備供饋天使, 而一岐島窮乏, 無物接待。 若過五日, 則束手無策云。" 上曰: "天使及陪臣一行, 無遺出來乎?" 德秀曰: "正使將官一人、家丁二人, 副使書子一人、家丁一人, 地震時壓死, 而其餘皆出來矣。" 上曰: "兩使只到沙浦, 而不到國都矣。" 德秀曰: "副使於地震前, 入國都還來, 正使則不入云。" 上曰: "汝等密來, 兩使不知乎?" 德秀曰: "臣來時, 同調信軍官潛行, 自絶影島, 艱難搖櫓, 乘夜下陸於營相遠處, 暗暗而來, 天使及陳遊擊俱不得知。" 俊民曰: "調信保護我國使臣之行, 似非偶然。" 上曰: "平調信別無要索乎?" 德秀曰: "調信亦以不諧事爲慙。 副使謂正成等曰: ‘殺我易, 來王子難。’ 調信曰: ‘日本於今者, 擬生獲王子, 驅迫使臣, 計已決矣。 雖他國之事, 豈宜如是乎? 祗令死後, 留惡名而已, 我則更何言乎?" 上曰: "汝等何地人耶?" 德秀曰: "臣金堤人。" 朴挺豪曰: "臣寧海人也。" 上曰: "俱出身乎?" 德秀曰: "臣出身爲守門將。" 挺豪曰: "臣出身爲直長矣。" 上曰: "兩使何時到釜山?" 德秀曰: "一岐島館待爲艱, 天使必不淹久, 必遇順風, 乃可發船。 自臣來時, 殊無東南風。 無風則自一歧搖櫓, 二三日可到對馬島東北角都也。 子言: ‘一月初一日、初五日、二十日、二十五日之風, 可以放船。’ 風順則必得速來, 來之遲速, 臣亦未料耳。" 巳末罷黜。


  • 【태백산사고본】 51책 8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9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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