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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74권, 선조 29년 4월 10일 병오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김수가 남호정이 보고한 정사의 탈출 과정을 보고하다

김수(金晬) 【임진란 때 겁을 먹고 도망하여 남의 비방을 많이 들었다. 】 아뢰었다.

"본월 3일 신이 경주(慶州)에 있을 때 남호정(南好正)이 왜영으로부터 달려와 말하기를 ‘어제 상사(上使)가 연회를 베풀고 의지(義智)·사고야문(沙古也門)·비란도법인(飛鸞島法仁) 등 세 왜장(倭將)을 불러 대접하면서 행장(行長)의 회정(回程)이 왜 그리 늦느냐고 조용히 묻고, 또 사융(謝隆) 【사융은 중국 관리인데 일찍이 와언(訛言)으로 상사를 겁준 자이다. 】 말한 사실을 가지고 단서를 잡아 물으니, 세 왜장은 이에 대해 대답하였는데, 말하는 태도가 공손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에 상사는 한편으로 은밀히 장만록(張萬祿) 등에게 일러 절부(節符)와 칙인(勅印) 등을 싸가지고 먼저 빠져나가게 하는 한편 이서(李恕) 등을 보내 관전(寬奠)의 병사들을 먼저 조발하게 해놓고 거짓으로 왜장에게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3경이 되어 취한 몸을 부축하여 돌아왔는데, 이날 밤 5경에 자기 부하의 옷차림으로 변장하고 파발마를 타고 탈출하였고, 【발군(撥軍)의 말과 바꾸어 탔다. 】 부사는 전날밤 술을 마실 때 이미 먼저 도망쳤다. 일행의 원역(員役)들은 모두 곤히 잠들어 알지 못하였고 나는 통지해 주는 사람이 있어 간신히 탈출하였다. 동래(東萊)에 이르러 길에서 정사와 중군관(中軍官) 왕승열(王承烈)을 만났다. 내가 울면서 「말이 지쳐서 전진할 수 없다. 」고 하니, 상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너는 김 판서와 【김수(金睟). 】 함께 달려가라. 3∼4일 후에 왕경이나 아니면 의주에서 만나자. 」 하였다. 박의검(朴義儉)의 탈출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남호정의 사서 첩정(私書牒呈)을 동봉합니다."

【호정의 사서(私書)는 다음과 같다. "도학(陶學)이 와서 소식을 전하기를 ‘손 군문 병과(孫軍門兵科)와 요동 무안(遼東撫按) 양 포정(楊布政)이 함께 공문을 올려 책봉이 적절치 못하다고 말하고, 군사와 군량을 확보하여 사태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다. 석 상서(石尙書)는 사융(謝隆)의 말이 북경에서 퍼질 것을 우려하여 상서의 가속들을 내보내어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고, 혼자 남아서 스스로 책임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28일에 사융이 어르신께 화친(和親)·할지(割地)·납지(納質)·통상(通商) 이 네 가지 사안과 관련하여 '해당 사안들은 당초에 서(徐)와 사(謝)가 갔을 때, 인신(印信)을 위조하여 한 통의 약서를 만들어 관백(關白)에게 준 것입니다.’ 하자, 어르신께서 꾸짖기를, ‘어찌 일찍 나에게 말하지 않고 조정에까지 곧장 가서 이야기 함으로써 나를 이처럼 곤경에 빠뜨렸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사융이 말하기를 ‘동응고(董應誥)·서치등이 모두 직언으로 책망을 들었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엿습니다. 29일에 장충(張忠)이 북경에서 돌아와서는 석 상서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책봉을 책임진 사신을 시켜 기회를 보아 일본에 가게 하였는데 사신은 왜적의 동태가 공손하다고 누차 보고해 왔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황제에게 보고했을 뿐이다. 내가 북경에 있으면서 어떻게 알 길이 있겠는가.' 하면서 전적으로 책임을 책봉사에게 미루는 의도가 많았습니다. 여러 아문(衙門)의 제본(題本)으로 인하여 우선 군사 2만 명을 동원하여 압록강을 수비하고, 그 수에 준하여 10만석의 식량을 내어 기회를 보아 토벌할 계획이 허락될 무렵, 가족들이 밤낮으로 울부짖으면서 어르신을 구출할 계획을 세우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어제 복광(福廣)의 왜적 3명이 또 와서 중국 사신에게 고하기를 ‘행장(行長)은 황녀(皇女)가 곧 도착한다고 관백(關白)에게 큰소리 쳤는데, 이제 황녀가 없자 관백이 크게 화를 내며 아야사(夜也士)에게 명하여 군사 40만 명을 일으켜 나온다고 한다. 지금 관백이 병사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러 왜적들은 필시 경도(京都)에 이르러 서로 공박하며 관백의 자리를 다툴 것이고, 조선과 중국을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천만다행이다.’ 하였습니다. 어르신께서 익성노(益城奴) 백이(白伊)의 말을 들었는데, 여기에 있는 왜인들이 사신을 따라 바다를 건너면 아야사가 거느린 군사가 바로 건너와서 왕경(王京) 이하 여러 곳에 포진하고 사신을 인질로 잡아 강화를 요구할 것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 말은 복광 왜인의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이 분분하여 무엇이 사실인지 모르겠고, 확인할 수도 없으니 가슴속에 울화만 치밀 뿐입니다. 잘 되든 못 되든 간에 머지 않아 결말이 날 것이니, 바라건대 좋은 말[馬]을 골라 기복(騎卜)과 함께 보내주기를 손모아 빕니다. 또 말하기를, "저는 사수(死守)해야 할 만한 이유가 없으니 탈출을 도모할 것입니다. 노모(老母)와 가족이나 만나보게 된다면 죄를 준다 하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마필을 보내 구해줌이 어떻겠습니까." 】


  • 【태백산사고본】 45책 74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7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金睟 【壬辰之變, 恇怯退遁, 厚招謗言。】 啓曰: "本月初三日, 臣在慶州時, 南好正營馳到言: ‘昨日上使設宴, 呼義智沙古也門飛鸞島法引等三將, 饋餉從容, 引問行長之回, 何其久也。 且以謝隆所言之事, 【謝隆, 唐官, 嘗以訛言, 恐動上使者。】 發端問之, 三將對有是事, 且所言, 頗似不恭。 上使一面密諭張萬祿等, 齎節符、勅印, 使先出送, 且差李恕等, 往先調寬奠兵, 佯示歡意於將, 三更扶醉而歸, 於是日五更, 變着家丁衣服, 騎撥馬遁走。 【與撥軍馬, 相換。】 副使, 於昨夕飮酒時, 先已遁去。 一行員役, 皆睡熟不覺, 而好正有意詗知, 艱得脫逃。 至東萊路, 遇正使與中軍官王承烈, 好正泣告馬疲不能前, 則語好正曰: 「爾可與金判書, 【金睟。】 三四日馳會王京, 否則會我於義州」 云。 朴義儉得脫與否, 亦不得知之。’ 南好正私書牒呈同封。"【好正私書云: "陶學之來聞, 孫軍門兵科, 遼東撫按楊布政, 俱上本, 言封事不停當, 請兵備糧, 以應緩急, 而石尙書恐謝隆在京(楊) 〔揚〕播, 故令出送。 尙書家小, 已還本土, 獨留自己, 以當譴責。 二十八日, 謝隆, 以和親、割地、納質、通商四件事, 直陳于老爺曰: ‘此當初去時, 僞造印信, 作一約書, 與關白者云。’ 老爺呵曰: ‘何不早言於我, 徑到天朝言之, 使我入此網中耶?’ 曰: ‘董應誥徐治登, 皆以直言被責, 敢不故稟。’ 二十九日, 張忠, 自北京來, 因聞石尙書以爲: ‘我使冊使, 相機前往, 而冊使累報情恭順, 故據此題奏而已。 我在京師, 何由得知?’ 多有全推於冊使之意。 因諸衙門上本, 先調二萬兵, 來守鴨綠, 而唯發十萬錢糧如數, 相機攻勦之計而臨准, 一家日夜泣求, 救出老爺之策。 昨日, , 又來告天使曰: ‘行長, 以皇女, 將至哄關白, 而今無皇女, 關白大怒, 命夜也士, 起兵四十萬出來云。 今有關白病死之說, 若果爾, 則諸必到京, 相攻擊, 爭關白之位, 不暇顧朝鮮與天朝, 此則天幸’ 云云。 老爺聞益城白伊之言, 在此之, 隨天使過海, 則夜也士所領兵, 卽過來, 分屯王京以下諸地, 而質天使求和親, 定然無疑矣。 此言與人所言相符, 紛紛傳說, 未知孰是。 不能究確, 心胸起火。 大槪好歹間, 不遠將決。 乞擇善馬, 俱騎卜入送, 則祝手祝手。" 又云: "小的無守死之道, 當圖出奔。 相見老母、家小, 而就罪, 是所甘心。 以馬匹送救, 何如? 云。"】


  • 【태백산사고본】 45책 74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7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