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의 접반사 김수와 남호정을 인견하여 정사의 탈출 연유에 대하여 묻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정사의 접반사 김수(金晬)를 인견하였다. 【전부터 정사는 부산영(釜山營)에 있었고, 김수는 경주(慶州)에 있었는데, 지금 정사(正使)가 도망쳐서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하므로 김수가 상경한 것이다. 】 상이 이르기를,
"경이 국사(國使)로 해가 넘도록 외방에 있었으니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정사가 왜영을 탈출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만위(萬煒)란 자가 【융경 황제(隆慶皇帝)의 부마(駙馬)이다. 】 정사에게 글을 보내기를 ‘귀척 대신(貴戚大臣)은 타인과 다르니, 왜정(倭情)이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사실대로 진술하라.’ 하고, 손 군문(孫軍門) 역시 왕경(王京)으로 퇴주(退駐)하라는 말이 있었으며, 석 상서(石尙書)는 자기 처자를 고향 집으로 보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죄를 입고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일로 보면 중조(中朝) 역시 봉사(封事)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처음에 사용재(謝用榟)와 서일관(徐一貫)이 【중국 관리이다. 】 황인(皇印)을 위조하여 적장(賊將)에게 주어 비밀히 서로 약조하였습니다. 그 약조에 4건의 조항이 있었으니, 곧 납지(納質)·통상(通商)·할지(割地)·황녀(皇女)였습니다. 【사용재와 서일관이 구차하게 화친의 일을 완성하여 자신들의 공로를 세우려 하였기 때문에 이 4건의 일을 공문으로 위조하여 왜장(倭將)에게 주었다가 후에 일이 발각되어 모두 유배당했다. 】 지금 책사가 왜영에 이르렀는데도 4건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관백(關白)이 노하였다고 합니다. 이 역시 비천한 주졸(走卒)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어찌 믿을 수야 있겠습니까. 심 유격을 결박하였다는 말은 서울에 와서 비로소 들었습니다. 대개 봉사가 지연되어 정사는 늘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 2일 여러 장관(將官)들이 정사에게 계책을 드리되 각자 탈출할 계책을 진술하니, 정사가 말하기를 ‘이는 크게 부당한 일이다. 만약 나만이 몸을 빠져 나가면 휘하의 5백인이 모두 살육을 당할 것이요, 조선 지방 또한 전쟁에 시달릴 것이다. 내 비록 구류를 당한들 어떻게 몸을 빠져 나갈 수 있겠는가. 왜정(倭情)이 불순하면 천조가 유구(琉球)·섬라(暹羅)·조선과 합세하여 수륙(水陸)으로 협공할 것이니 일거에 말끔히 씻을 수 있다.’고 하자, 여러 장관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정사가 3일 저녁에 평의지(平義智)·사고여문(沙古汝文)·법인(法仁) 등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고 몹시 즐기면서, 의지에게 말하기를 ‘성천자(聖天子)께서 평등하게 보시고 자애를 베풀어 동봉(東封)을 허락하고 이 일을 위해 훈구(勳舊)를 보내기까지 하였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속히 철수해 돌아가지 않는가. 내가 듣건대 관백이 별다른 요구 조건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의지가 말하기를 ‘그렇다. 바로 4건의 일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정사가 말하기를 ‘4건의 일은 황조(皇朝)가 반드시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나는 마땅히 행장을 챙겨 회정(回程)할 것이다.’ 하니, 의지의 말이 ‘책사가 비록 회정하려 하여도 우리가 만류할 것이니 어떻게 나가겠는가. 또 생각건대 군량의 저축이 없어 책사를 지공(支供)할 물자를 계속하기 어려우니 바다를 건너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면 조선에서 군량을 빌려서 지공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정사는 의지의 말을 듣고 더욱 왜정이 불순하다고 믿어 몰래 공문소(孔聞韶)로 하여금 황칙(皇勅)과 용절(龍節)을 싸가지고 먼저 나가게 한 다음 그날 새벽에 정사가 탈출하였습니다 남호정(南好正)이 동래(東萊)까지 뒤쫓아오니, 정사는 전립(氈笠)에 청포의(靑布衣)를 입고 험난한 사잇길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이는 왜인이 추격하여 잡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詔使)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사리에 온당치 못할 뿐 아니라, 연도(沿途)의 지공하는 일 또한 필시 제대로 못할 것이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심 유격이 하는 일에는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그 하나는 중국에서는 혼인을 허락하였는데 황녀(皇女)가 중도에 죽었다고 말한 것이요, 또 하나는 명사(明使)의 말 3백 필을 가리켜 황조에서 상으로 내린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격이 중국 조정을 속인 것과 행장이 관백을 속인 것에 대해 그 종말을 알 수 없다. 장차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남호정이 또한 필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니, 하문(下問)하심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중관(中官)에게 호정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호정이 입시하였다. 상이 호정에게 이르기를,
"정사가 경솔하게 왜영을 탈출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호정이 아뢰기를,
"만 부마(萬駙馬)가 정사에게 글을 보내어 ‘옛날에 정(鄭)나라 사람 자산(子産)도 제(齊)나라에 사신가서 끝내 굽히지 않았는데 하물며 당당한 천조이겠는가. 특별히 훈척 대신(動戚大臣)을 파견한 데에는 뜻이 있는데 그대는 이를 생각지 않는가. 봉사가 지연되는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사실대로 솔직히 진술하여야 성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사해에 명예를 드날리는 것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렸으니 힘쓰고 힘쓰라. 봉사가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미연의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정사가 이 말을 들은 뒤로 더욱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3일 의지(義智)와 함께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는데, 4경에 정사가 미복(微服)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소신은 잠에 빠져 정사가 나간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떤 중국 사람이 신을 발로 차 일으키면서 ‘노야(老爺)가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외성(外城)이 열려 있었습니다. 신이 뒤쫓아 동래에 이르러 왕 중군(王中軍)에게 【왕승렬(王承烈). 】 노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분이 바로 노야다.’ 하였습니다. 신이 자세히 보니 바로 정사였는데, 전립(氈笠)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이 하나의 하졸(下卒)과 같았습니다. 정사가 준마를 타고 양산(梁山)으로 달려가려 하기에 신이 울면서 말하기를 ‘소생은 말이 지쳐서 모시고 수행할 수 없다.’고 하니, 정사가 말하기를 ‘나를 따라 오는 것이 무익할 것이다. 내가 3일 후면 왕경에 도착할 것이니, 너는 가서 김 상서(金尙書)를 【김수(金晬)를 가리킨다. 】 만나 그와 함께 왕경에서 나를 기다리라. 내가 만약 왕경을 지나면 의주에서 머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동을 경유해 오는가?"
하니, 호정이 아뢰기를,
"필시 영동을 경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다시 동병할 기미가 있던가?"
하니, 호정이 아뢰기를,
"아야사(夜也士)가 【왜장(倭將). 】 정병(精兵) 20만을 거느리고서 황칙(皇勅)을 맞는다고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7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77면
- 【분류】외교-명(明) / 사법-치안(治安)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丙午/上御別殿, 引見正使接伴使金睟。 【自前正使在釜營, 金睟在慶州。 今正使遁逃不知去處, 金睟上京。】 上曰: "卿以國使, 經年在外, 勤苦多矣。 正使之所以出營者, 何故也?" 睟啓曰: "頃者有萬煒者, 【隆慶駙馬。】 通書于正使曰: ‘貴戚大臣, 自與他人異, 倭情順與不順, 據實直陳’ 云, 而孫軍門亦有退駐王京之語, 石尙書送其妻子於鄕家曰: ‘吾將被罪而死。’ 以是觀之, 中朝亦以封事, 爲不可成矣。 當初謝用榟、徐一貫, 【唐官也。】 假作皇印, 遺于賊將, 密與相約, 其約有四件, 乃納質、通商、割地、皇女也。【謝與徐, 欲苟完和事, 以要(已) 〔己〕功, 故以四件事, 僞作公文, 以遺倭將, 後事覺, 皆爲被竄。】 今者冊使到營, 而四件之事不成, 故關白怒之云矣。 此亦出於走回人丁之口, 烏可信哉? 至於沈遊擊綁縛之說, 到京始聞矣。 大槪封事遲延, 正使每有疑懼之心, 初二日諸將官, 獻策於正使, 各陳自脫之謀, 正使曰: ‘是大不然。 若俺挺身獨出, 則管下五百人, 皆被殺戮, 朝鮮地方, 且苦兵矣。 俺雖見拘, 豈可脫身以出哉? 倭情不順, 則天朝與琉球、暹羅、朝鮮, 水陸來攻, 則一擧可以凈洗。’ 諸將官皆退。 正使於初三日夕, 招平義智、沙古汝、文法仁等, 設宴甚歡, 因謂義智曰: ‘聖天子一視同仁, 許以東封, 送以勳舊, 爾等何不作速撤還乎? 俺聞關白有別樣要求之事, 信耶?’ 義智曰: ‘然。 乃四件事也。’ 正使曰: ‘四件事, 皇朝必不許。 俺不可渡海也。 俺當起身回程。’ 義智曰: ‘冊使雖欲回程, 吾儕挽留, 則何以得出? 且念軍糧無儲, 冊使支供之物, 亦難繼之, 不得不渡海。 若不欲渡海, 則當乞米於朝鮮, 以爲支供之資耳。’ 正使聞義智言, 益信倭情不順, 潛令孔聞韶, 齎持皇勅龍節, 先爲出送, 其日曉頭, 正使遁逃。 南好正赶來于東萊, 則正使着氈笠與靑布衣, 間關走出。 恐倭子之追捕故也。" 上曰: "詔使所在, 尙不知之, 不但事理之未穩, 沿途支供之事, 亦必虧損矣。" 金睟啓曰: "沈遊擊所爲之事, 多不當理。 一則曰: ‘天朝許婚, 而皇女死于中途’, 一則, 以天使馬三百匹, 指以爲皇朝賞賜之物矣。" 上曰: "遊擊誣天朝, 行長誣關白, 未知厥終, 將何以處之?" 睟啓曰: "南好正亦必有所聞, 下問可矣。" 上謂中官曰: "引好正來。" 好正入, 上謂好正曰: "正使率爾出營, 何也?" 好正曰: "萬駙馬, 通書于正使曰: ‘昔, 鄭人子産, 使於齊, 終不屈。 況堂堂天朝, 特遣勳戚大臣, 有意存焉。 爾不念之乎? 封事遲延, 必有其由。 必須據實直陳, 方可成事。 (楊)〔揚〕 名四海, 在此一端, 勉之勉之。 封事如不可成, 則曲突之策, 不可不講。’ 正使自聞此言之後, 益復不樂。 初三日, 與義智, 飮酒至醉, 夜深乃罷; 四更, 正使以微服步出。 小臣方宿, 未知正使之已出, 有一唐人, 蹴臣起曰: ‘老爺已出矣。’ 臣驚駭起視, 則外城已開。 臣追至東萊, 見王中軍, 【承烈。】 問曰: ‘老爺安在?’ 中軍以手指之曰: ‘此乃老爺也。’ 臣熟視之, 則乃正使也。 着氈笠、衣道袍, 有同一下卒也。 正使騎駿馬, 將馳向梁山, 臣涕泣曰: ‘小生馬疲, 不能陪隨矣。’ 正使曰: ‘從我而來, 無益也。 俺三日, 當到王京, 爾往見金尙書, 【指金睟。】 與之俱來, 待我于王京。 俺若過王京, 當駐義州。’" 上曰: "由嶺東而來耶?" 好正曰: "必不由於嶺東矣。" 上曰: "賊有再動之幾歟?" 好正曰: "夜也士, 【倭將。】 帥精兵二十萬, 以迎皇勅爲名矣。"
- 【태백산사고본】 45책 7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77면
- 【분류】외교-명(明) / 사법-치안(治安)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