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 이억례가 여희원과 함께 노을가적을 방문한 일을 보고하다
역관(譯官) 이억례(李億禮)가 서계(書啓)하였다.
"신이 여희원(余希元)과 함께 2월 2일에 강을 건너 구랑합동(仇郞哈洞)에서 유숙하고, 3일에 첫째 부락(部落)에 이르니 남녀가 주육(酒肉)을 가지고 노상에 나와 접대하였으며, 날이 저물자 만거(滿車) 땅 동거우합(佟巨于哈)의 집에서 유숙하였습니다. 4일은 소란(所難) 땅 왕골적(王骨赤)의 집에서 유숙하고, 5일은 노중(路中)에 이르렀는데 노을가적(老乙可赤)이 먼저 호인(胡人) 강고리(康古里)를 보내 문안하고 또 중군(中軍) 장해(張海) 및 그의 사위 홀호리(忽乎里)로 하여금 기병(騎兵) 3백명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장해 등이 노중에 나와 무릎꿇어 알현하고 그대로 수행하였습니다. 여희원이 장해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미 도독(都督)의 후의를 입었다. 만약에 먼 길을 수행하려면 초료(草料)가 불편할 뿐, 병마(兵馬)의 수행은 필요치 않다.’고 하여 장해가 거느린 군사를 파산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서 청수(淸水) 땅 화라(和羅)의 집에서 유숙하고, 6일 노중에 이르자 노을가적이 호장(胡將) 8명으로 하여금 기보병(騎步兵) 6∼7천을 거느리고 도로에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병마를 전과 같이 해산하였으며, 날이 저물자 동대(佟大)의 집에서 유숙하였습니다. 7일 건주성(建州城)에서 30리쯤 떨어진 노을가적의 농사(農舍)에 당도하니 노을가적의 형제가 기병(騎兵) 3∼4천을 거느리고 영접하였습니다. 여희원이 마상(馬上)에서 손을 들어 서로 읍한 후 말에서 내려 술을 들었는데, 삼배(三杯)가 돈 후 바로 일어나 2∼3리에 이르자 기병 4∼5천이 좌우에 열지어 수행하였고, 15리에 이르자 보병 1만 명 가량이 좌우로 나누어 길가에 나열하여 섰는데, 줄이 건주성까지 잇대었었습니다.
성중으로 들어가니 노을가적의 형제가 즉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습니다. 노을가적이 말하기를, ‘천조(天朝)의 지경 9백 50리를 보수(保守)하여 내가 이를 관리한지 13년 동안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으니, 공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양 포정(楊布政)은 무단히 우리를 불순하다고 말하면서 지금 바야흐로 제본(題本)을 올려 우리의 부락을 정벌하려 하고, 이 애매한 정상을 광녕 도어사(廣寧都御史)에게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양 포정이 가로막고 보내지 않았다. 다른 계책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우리는 조선과 본래부터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조선 사람이 왜인의 구축을 당하여 호지(胡地)를 지날 때 우리가 각각 의식을 제공하여 만포(滿浦)로 쇄환하였으니, 우리의 호의는 분명하였다. 지난해 호인이 위원(渭原) 땅에서 인삼을 캔 것이 잘못은 잘못이다. 그러나 조선이 우리에게 포박해 보내어 우리가 죽이도록 했어야 할 것을 조선 사람이 호인 40명을 멋대로 죽였으니 이는 잘못이다. 만약에 노야(老爺)의 선유(宣諭)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무례함이 어찌 오늘날을 기다렸겠는가. 우리는 명예를 도모하지 재물은 도모하지 않는다. 노야는 이런 사정을 군문(軍門)에 품보(稟報)하여 그로 하여금 제본(題本)하게 하여 황상께서 우리의 공순함을 알아준다면 마음에 흡족하겠다.’고 하자, 여희원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런 사정을 어찌 보고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만포에 돌아가서 바로 사람을 차출하여 손 노야(孫老爺)에게 품보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노을가적이 ‘어느 때 회신이 있겠는가?’ 하자, 여희원이 대답하기를 ‘며칠만 손꼽아 기다리라. 6월이면 회신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노을가적이 말하기를, ‘일을 성취하는 것도 노야에게 달려 있고 일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도 노야에게 달려 있으니 나는 다만 6월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포로가 된 절강(浙江) 사람 공정륙(龔正陸)이, 금년에 그들 군사가 움직이지 않는 소식과 크고 작은 일들을 한가한 틈을 타 여희원에게 말해 주고, 또 말하기를 ‘모든 기밀에 관계되는 일은 호인이 곁에 있으므로 다 말할 수 없다. 4∼5월 사이에 소인이 친히 만포에 가서 분명하게 노야에게 품상(稟上)하겠다.’고 하였습니다. 8일 노을가적이 누상(樓上)에서 참기(參旗) 의식을 할 때 하늘을 향하여 맹세하기를, ‘내가 일을 관장한 후 13년 동안 오직 공순한 마음만 가졌을 뿐,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 하고 의식을 마친 후 호상(犒賞)을 받고 잠깐 쉬어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9일 소을가적(小乙可赤)이 여희원의 일행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10일 출행에 임하여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기마(騎馬)를 주지 않자, 여희원이 말하기를 ‘나는 조선의 연병 유격 장군(練兵遊擊將軍)이다. 조선 사람이지만 나를 따라왔으니, 이는 모두 나의 사람인데 어찌 피차를 분별하는가.’ 하니, 노을가적이 호인(胡人) 마신(馬信)을 시켜 전하기를 ‘조선의 말을 제기하기만 하면 문득 위원(渭原)의 사건이 연상되어 마음이 몹시 아프다. 어떻게 기마를 주겠는가.’ 하였습니다. 여희원이 말하기를 ‘위원의 사건은 국왕(國王)이 아는 일이 아니요, 곧 변민(邊民)의 망령된 행동이다. 조선의 국왕이 이미 위원 태수(渭原太守)를 치죄하여 도독(都督)도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조선 역시 중국의 속국이요, 너의 건주 역시 중국의 속국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오로지 이 일을 위함인데, 만약 피차를 분별한다면 어찌 강화할 수 있겠는가.’ 하니, 노을가적이 말하기를 ‘노야(老爺)의 명에 의하여 조선 사람도 함께 말을 주겠다.’ 하고, 노을가적은 여희원에게 대마(大馬) 1필을 주고 기패관(旗牌官) 가대은(賈大恩)과 신에게는 각각 단의(段衣) 1건과 초피(貂皮) 5장씩을 주었으며, 소을가적 역시 각각 초피 2장씩을 주었습니다. 당인 교사(唐人敎師) 방효충(方孝忠)·진국용(陳國用)·진충(鎭忠) 등에게도 각각 단의 1건과 초피 3장씩을 주었으며, 소을가적 역시 각각 초피 2장씩을 주었습니다. 여희원의 내가정(內家丁) 2명에게는 각각 단의 1건을, 외가정(外家丁) 10명에게는 각각 남포(藍布) 2필씩을 주었습니다. 만포 첨사(滿浦僉使)의 군관 안충성(安忠誠), 토병 출신(土兵出身) 최보형(崔甫亨), 강계 부사(江界府使)의 군관 백웅걸(白雄傑) 등에게는 각각 단의 1건씩을 주었습니다. 노을가적의 형제가 제장(諸將) 40∼50명으로 호위하여 성밖 1∼2리에 장막을 설치하고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왕반(往返)하는 도중 모두 소를 잡고 술을 내었습니다. 이처럼 후대함으로 인해 신은 휴대한 반전(盤纏)의 쓰다 남은 은전(銀錢) 6∼7냥을 반납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7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61면
- 【분류】외교-야(野)
○譯官李億禮書啓曰:
臣與余希元, 二月初二日越江, 宿仇郞哈洞。 初三日, 行行到初部落, 男女持酒肉, 路中來接。 向晩, 宿滿車地佟巨于哈家; 初四日, 宿所難地王骨赤家。 初五日, 行到路中, 老乙可赤先遣胡人 康古里問安, 又令中軍張海及其壻忽乎里, 領騎兵三百, 張海等路中跪見, 仍隨行。 余希元說與張海曰: "俺旣見都督厚情。 若遠路隨行, 草料非便, 兵馬不要隨行。" 張海領兵散罷。 日晩, 宿淸水地和羅家。 初六日, 行到路中, 老乙可赤令胡將八名, 領騎步兵六七千, 迎接道路後, 兵馬如前卽散。 日晩, 宿佟大家。 初七日, 距建州城三十里許, 於老乙可赤農舍, 老乙可赤兄弟, 領騎兵三四千迎接。 余希元於馬上, 擧手相揖後, 下馬設酌, 行三杯酒, 卽起身, 行到二三里, 騎兵四五千, 左右成列隨行, 行到十五里, 步兵萬數, 分左右列立道傍者, 至建州城而止。 入城, 老乙可赤兄弟, 卽設下馬宴。 老乙可赤說稱: "保守天朝地界九百五十里, 俺管事後十三年, 不敢犯邊, 非不爲恭順也, 而楊布政無端說我不順, 今方欲題本, 征我部落。 將此瞹昧情由, 欲呈文于廣寧都御史, 則楊布政攔阻不送, 無計奈何? 俺與朝鮮, 本無釁端, 而朝鮮之人, 被倭追逐, 走過胡地, 俺各供衣食, 刷還滿浦, 我之(學)〔擧〕 好明矣。 上年胡人採蔘于渭原地, 非則非矣, 朝鮮縛送於我, 待我殺之可也, 而朝鮮人擅殺胡人四十名, 是則非矣。 若無老爺宣諭, 我之無禮, 豈待今日? 俺圖名不圖財。 老爺此等事情, 稟報于軍門, 使之題本, 聖上知我恭順, 則心願止矣。" 余希元曰: "俺此等事情, 豈有不報之理? 回到滿浦, 卽差人稟報于孫老爺。" 老乙可赤曰: "幾時有信乎?" 余希元曰: "屈指數日。 六月間, 纔有信矣。" 老乙可赤曰: "事情完了, 亦在老爺; 不完, 亦在老爺。 我只待六月間而已。" 被虜浙江人龔正陸, 今年不動之奇及大小之事, 乘閑說與余希元。 又曰: "凡干密機, 有胡人在傍, 不可盡說。 四五月間, 小的親到滿浦, 明白稟上老爺。" 初八日, 老乙可赤, 於樓上參旗時, 向天說誓曰: "俺管事後十三年, 只有恭順之心, 別無二心。" 行禮訖, 受犒賞, 小歇, 設宴。 初九日, 小乙可赤, 請余希元一行, 設宴。 初十日臨行, 我國之人, 不給騎馬, 余希元曰: "我是朝鮮練兵遊擊將軍。 朝鮮之人, 隨我而來, 皆是我之人。 豈分彼此?" 老乙可赤使胡人 馬信, 傳曰: "若提起朝鮮之言, 却想渭原事, 心甚痛憤。 何以給馬騎?" 余希元曰: "渭原之事, 非國王所知, 乃邊民之妄作。 朝鮮國王, 旣已治罪渭原太守矣。 都督再不提擧。 朝鮮, 亦天朝屬國也; 爾建州, 亦天朝屬國也, 而我之此來, 專爲此事而來。 若分彼此, 何有講和之道?" 老乙可赤曰: "依老爺之命, 竝朝鮮人給馬。" 老乙可赤, 給余希元大馬一匹, 旗牌官賈大恩及臣, 各給段衣一件、貂皮五令; 小乙可赤, 亦各給貂皮二令。 唐人敎師方孝忠、陳國用、陳忠等, 各給段衣一件、貂皮三令; 小乙可赤, 亦各給貂皮二令。 余希元內家丁二名, 各給段衣一件; 外家丁十名, 各給藍布二匹; 滿浦僉使軍官安忠誠、土兵出身崔甫享、江界府使軍官白雄傑等, 各給段衣一件矣。 老乙可赤兄弟, 衛諸將四五十名, 城外一二里, 設帳幕餞宴, 往返一路, 皆殺牛設酒。 如是厚待, 臣齎持盤纏, 用餘銀六兩七錢還納矣。
- 【태백산사고본】 44책 7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6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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