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주부 신충일이 변방 오랑캐의 실정에 대하여 서계를 올리다
남부 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 서계(書啓)를 올렸다.
"신이 지난해 12월 15일 강계(江界)에 이르렀는데, 마침 부사(府使) 허욱(許頊)이 방비를 점검하는 일로 그 경내에 소속된 진보(鎭堡)에 나가 있음으로 인해 본부에 머물러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17일 그가 본관으로 돌아와 드디어 서로 회합, 변방 오랑캐의 실정에 대해 물을 만한 것을 문의한 다음에 반전(盤纏)을 마련하여 20일에 출발하여 21일 만포진(滿浦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향도 호인(嚮導胡人)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날이 저물어지자 이파(梨坡)의 추호(酋胡)인 동녀을고(童女乙古)와 동퍅응고(童愎應古) 등이 나왔습니다. 22일 아침에 전 첨사(僉使) 유염(柳濂)이 회원관(懷遠館)에 나와 있었는데, 두 호인(胡人)을 불러 주식(酒食)을 먹이고 각각 미포(米布)를 준 후, 신은 향통사(鄕通事) 나세홍(羅世弘)과 하세국(河世國) 및 진노(鎭奴) 강수(姜守)와 신노(臣奴) 춘기(春起) 등과 함께 정오에 만포진을 떠나 얼음 위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노추(奴酋)의 집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22일부터 28일까지의 지나온 노정의 일을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1. 노추의 집은 소추(小酋)의 집 북쪽에 있어 남쪽을 향하여 안배되어 있었고, 소추의 집은 노추의 집 남쪽에 있어 북향하여 있었습니다.
1. 외성(外城)의 주위는 겨우 1리이며, 내성의 주위는 2마장쯤 되었습니다.
1. 외성은 먼저 돌로 쌓아 위가 2∼3자의 높이며 또 연목(椽木)을 깔았는데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높이는 10척 가량 되었고 안팎에는 진흙으로 발랐으며, 치첩(雉堞)·사대(射臺)·격대(隔臺)·호자(壕子)는 없었습니다.
1. 외성문(外城門)은 나무 판자로 하였고 자물쇠가 없이 문을 닫은 뒤에는 나무로 건너질렀는데 마치 우리 나라의 장군목(將軍木) 제도와 같았습니다. 위에는 적루(敵樓)를 설치하고 풀로 덮었으며, 내성문은 외성문과 같고 문루(門樓)가 없었습니다.
1. 내성의 축조 역시 외성과 같은데, 원첩(垣堞)과 격대(隔臺)가 동문으로부터 남문을 지나 서문에 이르기까지 있으며, 성위에는 관망하는 판옥(板屋)을 설치하였는데 지붕이 없으며, 사다리를 설치하여 오르내리었습니다.
1. 내성 안에 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그 목책 안에 노추(奴酋)가 살고 있었습니다.
1. 외성 안에는 호가(胡家)가 겨우 3백 채, 내성 안에는 호가가 1백 채, 외성 밑 사면에는 호가가 4백여 채가 되었습니다.
1. 내성 안에는 친근한 족류가 살며, 외성 안에는 모든 장수 및 족당(族黨)이 살고 외성 밑에 사는 자는 모두 군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 외성의 밑바닥은 넓이가 4∼5척 가량 되고 위는 2∼3척 가량 되며, 내성의 밑 바닥은 넓이가 7∼8척 가량 되고 위의 넓이도 같았습니다.
1. 성중에 있는 샘물은 겨우 네댓 곳이었는데, 물줄기가 길지 못하기 때문에 성중 사람들은 시내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실어들이기를 아침 저녁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1. 저녁과 새벽에는 단지 삼통(三通)만 치고 별다른 순경(巡更)027) 이나 좌경(坐更)028) 을 하는 일이 없었으며, 외성문은 닫고 내성문은 닫지 않았습니다.
1. 호인의 목책은 마치 우리 나라의 울타리와 같아 집집마다 목책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견고한 것은 부락마다 서너 곳에 불과하였습니다.
1. 성 위에는 방비하는 어떤 기구도 볼 수 없었습니다.
1. 노추의 성에서 서북쪽으로 중국 무순(撫順)까지와의 거리는 이틀 길이며, 서쪽으로 청하(淸河)까지와의 거리는 하루 길이며, 서남으로 애양(靉陽)까지와의 거리는 사흘 길이며, 남쪽으로 신보(新堡)까지와의 거리는 나흘 길이며, 남쪽으로 압록강까지와의 거리는 하루 길입니다.
1. 28일 미시(未時)에 노추의 집으로 가서 바로 그 목책 안의 객청(客廳)이란 곳에 도착하니 마신(馬臣)·동양재(佟羊才)·왜내(歪乃) 등이 찾아와 신을 보고 노추의 말로 신에게 전하기를 ‘험준한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였다. 그 후의가 실로 근실하므로 사례하여 마지않는다.’ 하고, 이어 ‘문서를 가지고 왔느냐.’고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첨사(僉使)께서 도독(都督)이 차장(次將)을 파견한 데 대해 통사 졸예(通事卒隷)로 경홀히 보사(報謝)할 수 없다 하여 전개(專价)를 달려 회첩(回帖)을 봉해 보냈다. 오는 도중에는 별로 어려운 일이 없었다. 무슨 노고가 있었겠는가.’ 하고 드디어 회첩을 꺼내어 주어 보냈는데, 조금 후에 노추가 중문 밖에 나와 신에게 상견(相見)을 청하므로 신은 노추의 앞에 서고 나세홍(羅世弘)·하세국(河世國)은 신의 좌우에 섰습니다. 조금 후에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예가 끝나자 간략한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마신(馬臣)을 시켜 객청에 와 신을 위문하고 신에게 그대로 객청에서 유숙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 ‘만약 여기에 머물면 모든 오랑캐의 실정을 탐문할 길이 없을 것이다.’고 여겨져서 핑계하여 말하기를 ‘몸에 질병이 많아 온실(溫室)에서 조리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더니 신을 외성 안 동친자합(童親自哈)의 집에 숙소를 정해 주었습니다.
1. 신들이 입성(入城)하던 날 저녁에 마신(馬臣)이 친자흡(親自哈)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말먹이가 밖에 있는데 미처 가져오지 못하여 보내줄 수가 없으니 오늘은 당신이 제공하라.’고 하였습니다.
1. 신이 반전(盤纏)으로 가지고 간 동노구(銅爐口) 2개, 숟가락 20매, 젓가락 20쌍, 종이[紙束], 어물(魚物) 등을 가지고 마신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도중에 혹시 부족할까 염려되어 이 물건을 준비해 왔는데, 지금 별로 소용이 없어 도독에게 바치려 한다. 이 생각이 어떠한가?’ 하니, 마신이 답하기를 ‘해롭지 않은 일이다.’ 하므로, 즉시 마신으로 하여금 노추 형제에게 보내게 하였습니다. 노추의 형제는 이를 받고 몹시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1. 노추의 형제가 마신과 동양재를 보내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게 하고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수시로 요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어육과 술을 계속 보내왔고, 말먹이까지도 계속 보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내(歪乃)는 날마다, 혹은 하루 걸러 찾아와 문안하였습니다.
1. 마신의 본명은 시하(時下)이며, 동양재의 본명은 소시(蘇屎)였는데, 지난해 여 상공(余相公)과 회합하는 일로 만포진에 나와 있을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왜내는 본래 명나라 사람인데 노추의 집에 와서 문서를 관장한다고 하나 문리를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의 사람들도 글을 아는 자가 없었고, 또 글을 배우는 자도 없었습니다.
1. 29일 소추(小酋)의 형제가 신을 청하여 본 후 동양재로 하여금 소략한 주연을 베풀게 하여 신을 위로하였습니다.
1. 병신년 정월 1일 사시(巳時)에 마신과 왜내가 노추의 말을 전해와 연회에 참석하기를 요청하므로, 신이 나세홍·하세국과 함께 가서 참석하였습니다. 노추의 문족(門族) 및 형제 인친(兄弟姻親)과 당통사(唐通事)는 동벽(東壁)에 있고, 몽고(蒙古)의 사할자(沙割者)·홀가(忽可)·과을자(果乙者)·이마차(尼麻車)·제비시(諸憊時)는 북벽(北壁)에 있고, 신들 및 노추의 여족(女族)은 서벽(西壁)에 있고, 노추 형제의 처와 제장(諸將)의 처는 모두 남벽(南壁)의 온돌 밑에 섰는데, 노추의 형제는 남쪽의 동쪽 모퉁이 땅위에서 서북쪽을 향하여 검은 의자에 앉았고 제장은 모두 소추의 뒤에 시립하였습니다. 술이 두어 순배 돈 후에 올라부락(兀剌部落)의 새로 항복한 장수 부자태(夫者太)가 일어나 춤을 추었고, 노추도 문득 의자에서 내려와 비파를 퉁기면서 몸을 흔들었습니다. 춤이 끝나자 광대 8명이 각각 재주를 보였는데 그 재주가 몹시 생소하였습니다.
1. 이날 연회가 시작되기 전 상견할 때에 노추가 마신을 시켜 전언하기를 ‘지금부터 두 나라는 한 나라와 같이 지내고 두 집은 한 집과 같이 지내면서 영원히 우호를 맺어 대대로 변하지 말자.’고 하였는데 마치 우리 나라의 덕담(德談)과 같았습니다.
1. 연회할 때 청외(廳外)에서는 나팔을 불고, 청내(廳內)에서는 비파를 퉁기며 퉁소와 피리를 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빙 둘러서서 창(唱)을 하면서 주흥(酒興)을 돋우었습니다.
1. 제장이 노추에게 잔을 드릴 때에는 모두 이엄(耳掩)을 벗었고 춤을 출 때에도 또한 이엄을 벗었는데 소추(小酋)만은 벗지 않았습니다.
1. 2일 소추가 말 3필을 보내 신들을 청하기에 신들이 그 말을 타고 가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모든 기구가 형의 것과 같지 못함이 너무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날은 곧 국기(國忌)라서 그곳의 형태나 살펴보려고 가기는 하였으나 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소추가 간절히 권하므로 신이 망친(亡親)의 기일(忌日)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 3일 추호(酋胡) 동호라후(童好羅厚)·동망자합(童亡自哈)과 여추(女酋) 초기(椒箕)가 신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노추가 시킨 것이라 하였습니다.
1. 동호라후가 연회를 파할 무렵에 애꾸눈을 한 한 사람을 데리고와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곧 산양회(山羊會)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자다. 산양회 건너편 박시천(朴時川)은 곧 새매를 잡는 곳인데 당신네 나라 사람이 반드시 엿보고 훔쳐간다. 이를 금할 수 없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어느 때 어느 곳 사람이 훔쳐갔는가? 그 사람의 생김새는 어떠하던가? 우리 나라는 법령이 몹시 엄격한데, 누가 감히 지경을 넘어 와 너희들의 물건을 훔치겠는가. 그럴 리가 만무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호라후(好羅厚)의 말이 ‘근자에는 훔쳐간 자가 없다. 만약에 혹시라도 있을 경우 특별히 금지시키라.’고 하였습니다.
1. 4일에 소추가 동양재를 보내 신에게 요청하기를 ‘군관(軍官)이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형을 위해서만이 아니니, 나 역시 당신을 접대해야겠다.’고 하면서 드디어 신을 그의 장수 다지(多之)의 집으로 맞이하였는데 다지는 곧 소추의 사촌형이었습니다. 이어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밤이 되어 파하였습니다.
1. 다지(多之)가 우리 나라 사람의 용약(勇弱) 여부를 동양재(佟羊才)에게 묻자, 동양재의 말이 ‘만포(滿浦)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나열한 군사가 3∼4백 명이 있었다. 등에는 화살통을 지고 앞에는 활집을 안았는데, 화살은 깃이 떨어지고 활촉이 없으며 활은 앞이 터지고 뒤가 파열되어 타국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무리에게는 궁전(弓箭)을 쓰지 않고 한 자 되는 검(劍)만 가지고도 4∼5백 명을 벨 수 있는데, 오직 팔의 힘에 한계가 있음이 유감일 뿐이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우리 첨사(僉使)가 만일 군사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한병 정졸(悍兵精卒)과 강궁 이촉(强弓利鏃)으로 크게 성세를 떨쳤을 것이다. 양재(羊才)가 본 것은 군병이 아니라 뜰에서 공급하는 사람과 금훤군뢰(禁喧軍牢)029) 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1. 다지가 말하기를 ‘우리의 왕자(王子)가 당신네 나라와 일가(一家)를 맺고자 하기 때문에 포로가 된 당신네 나라 사람을 후하게 전매(轉賣)하여 다수를 쇄환(刷還)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왕자는 당신의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당신의 나라는 채삼(採蔘)하는 우리측 사람을 많이 죽였다. 채삼하는 것이 무슨 피해가 있길래 이처럼 살상하였는가. 정의가 몹시 박하여 깊이 원한과 유감을 품고 있다.’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법에 호인(胡人)이 무단히 우리의 국경에 잠입하면 이를 적호(賊胡)로 논죄한다. 하물며 너희 나라 사람이 어두운 밤이면 수백 년 동안 오지 않던 땅에 난입하여 우마(牛馬)를 약탈하고 인민을 살해하는 데이겠는가. 산골짜기에 사는 우매한 백성들이 황급히 놀라 스스로 서로 짐승잡듯 마구 죽이게 된 것이니, 사세가 반드시 이렇게 만든 것이지 하나의 풀[草]030) 때문만은 아니다. 대개 우리 나라가 오랑캐를 접대하는 도리는 성심으로 복종해 오는 자에게는 어루만져 도와주고 부드럽게 감싸주지만, 금지된 국경을 함부로 침범하는 자에는 일체 적호(賊胡)로 논죄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 지난 무자년 간에 너희 나라 지방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자가 도로에 널렸었다. 그리하여 너희 무리가 귀순하면서 만포(滿浦)에 먹이를 구하는 자가 날마다 수천으로 헤아릴 정도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각각 주식(酒食)으로 먹여주고 또 쌀과 소금을 지급함으로써 이를 힘입어 살아난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우리 나라가 애초부터 너희 무리를 죽이는 데에 뜻을 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무리가 함부로 국경을 넘어 와 스스로 죽음에 나아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지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원(渭源)의 관병(管兵)을 무슨 연유로 면직시키고 치죄(治罪)하였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위원의 관병관(管兵官)이 죄를 입은 것은 유독 너희의 무리를 죽여서만이 아니다. 변방의 관병관은 순찰하며 멀리 관망하는 것이 그의 본직인데, 그가 순찰하며 멀리 관망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음으로 너희 무리가 우리의 국경에 난입하여 인민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 갔다.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 이것이 결국 면직하고 치죄하게 된 원인이다. 만약 너희들이 우리 나라 국경에 이를 때 멀리 살펴 엄히 경계하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면 우리의 백성과 너희들이 모두 함께 짐승처럼 마구 죽이는 환란은 없었을 것이다.’ 하니, 다지는 다시 할 말이 없어 엉뚱한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1. 동양재(佟羊才)의 말이 ‘당신네 나라는 연회를 베풀 때 왜 한 사람도 비단옷을 입는 자가 없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의장(衣章)은 귀천(貴賤)을 분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군민(軍民)은 감히 비단옷을 입지 못한다. 어찌 너희 나라의 상하가 같이 입는 것과 같겠는가.’ 하니, 양재는 말이 없었습니다.
1. 다지(多之)가 신에게 묻기를 ‘당신네 나라에 비장(飛將) 두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두 사람 뿐만이 아니다. 남변(南邊)에 있는 자는 많지만 여기에 온 자는 두 사람이니, 하나는 벽동 군수(碧潼郡守)이며 하나는 영원 군수(寧遠郡守)이다. 남녀의 왜적(倭賊)을 이미 다 구축하였기 때문에 그 비장들이 머지 않아 이곳에 와 방비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다지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능히 난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듣고자 한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두 손에 각각 80여 근의 장검(長劍)을 들고 말을 달려 절벽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조그마한 창문을 빠져나가는 데도 걸리지 않으며, 혹은 큰 내를 뛰어 넘기도 하며, 혹은 나뭇가지 위로 왕래하기를 평지를 밟듯이 하며, 혹은 며칠 길을 하룻밤 사이에 능히 왕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지의 말이 ‘몇 보나 되는 넓이의 시내를 건너뛸 수 있느냐?’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파저강(波猪江)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니, 다지는 좌우를 돌아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1. 5일 아침에 왜내(歪乃)가 회첩(回帖)과 아울러 흑단단령(黑段團領) 3건, 초피(貂皮) 6장, 남포(藍布) 4필, 면포(綿布) 4필을 가지고 왔기에 신과 나세홍(羅世弘)·하세국(河世國)이 각각 1건을 갖고 초피는 신과 나세홍이 각각 3장씩 나누어 갖고 포필(布疋)은 강수(姜守)와 춘기(春起)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소추(小酋)가 또 흑단단령(黑段團領) 각 3건, 흑안정구(黑鞍精具) 3건을 신과 나세홍·하세국에게 보내왔습니다. 신이 왜내·동양재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만포(滿浦)의 군관으로서 문서만 가지고 왕복할 뿐인데, 무슨 일을 한 것이 있어 두 도독부(都督府)의 후한 예물을 받겠는가. 가정(家丁)에게까지 그 선물을 나누어 주니 더욱 미안하다. 이를 받아들일 명목이 없으니 도로 돌려주고 싶다.’고 하자, 왜내와 동양재가 각각 신의 의사를 두 우두머리에게 고하였습니다. 두 우두머리의 말이 ‘전에 마신(馬臣) 등이 만포에 갔을 때에 받은 예물의 숫자가 극히 많았는데도 마신 등이 오히려 사양하지 않고 받아가지고 왔다. 지금 군관이 이처럼 사양한다면 받아온 마신이 어떻게 얼굴을 들겠는가. 하인(下人)에게 준 물건은 귀한 것이 못 된다. 다만 행자의 뜻을 표했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호인(胡人)이 와서 매우 급하게 마신을 불렀는데, 얼마 뒤에 마신이 돌아와 왕자(王子)에게 말하기를 ‘쇄환(刷還)의 보답은 다른 물건보다 벼슬로 제수해 주기를 바란다. 만약에 조선이 벼슬을 제수해 준다면 한 자의 베로 상주더라도 오히려 받을 수 있거니와, 만약에 벼슬을 제수해 주지 않으면 금백(金帛)으로 상을 주더라도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돌아가서 첨사(僉使)에게 고하겠다.’고 하였는데, 그들의 의사를 보니, 중국 및 우리 나라와 더불어 우호를 맺는 것을 호인에게 과시하여 모든 부락을 위복(威服)하고자 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말하기를 ‘모린위(毛麟衛)의 호인이 자주 당신네 지방을 침범한다. 운산(雲山) 건너편에 하나의 진영을 설치하여 국경을 넘는 호인을 막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 동북면은 호인과 밀접하여 단지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심상히 왕래하며, 귀순자가 이따금 도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자주 변경(邊警)을 일으키지만, 서북면은 호인이 사는 곳과 수백 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 해를 끼치는 일이 많지 않다. 너희들도 두 귀가 있는데 어찌 익히 듣지 못하였겠는가. 너희 도독도 필시 자세히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마신이 그렇다고 인정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이미 이와 같음을 알면서도 또한 진영을 설치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지금은 왕자가 모든 호인들을 통솔하여 진퇴(進退)를 호령하니 어찌 어길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난해 김왜두(金歪斗)가 남변(南邊)을 침범하였을 때는 도독(都督)이 단속한 처음인데도 이와 같았으니 훗날의 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또 말하기를 ‘진영을 설치하는 것은 훗날 불화를 일으키는 단서를 만드는 것이다. 대개 이를 설치함에 있어 만약 처음을 잘 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말의 후회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다만 사세가 그와 같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마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왜내가 말하기를 ‘진을 설치하는 일은 회첩 속에 자세히 말하였으니, 돌아가 첨사에게 고하라. 그대로 그 회답을 기다릴 것이다.’ 하고, 드디어 신과 함께 성문을 나왔습니다. 동홀합(童忽哈)이 신을 그 집에 초청하여 술자리를 베풀어 전송하였는데, 술이 두어 순배에 이르렀을 때 신은 날이 저물었음을 칭탁하여 물러나왔고, 홀합(忽哈)은 성밖에 나와 전송하였습니다.
1. 회첩(回帖) 속에 찍힌 인(印)을 살펴보니 ‘건주 좌위의 인[建州左衛之印]’이라고 전각되어 있었습니다.
1. 발정(發程)할 때 몽고(蒙古)의 장수 만자(晩者)를 내성문(內城門) 밖에서 만나 묻기를 ‘너희들은 여기에 오래 있을 계획인가?’ 하니, ‘우리도 7일에 돌아갈 것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 정월 4일에 호인(胡人) 1백여 기(騎)가 각각 병기(兵器)와 양식 두어 말씩을 가지고 깃대를 세워 들고 북문(北門)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연대(烟臺) 및 방비처(防備處)를 살피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기는 청색·황색·적색·백색·흑색으로 각각 2폭씩 붙여서 만들었는데 길이는 2자쯤 되었습니다. 5일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1. 5일 신들이 출발할 무렵에, 여을고(汝乙古)가 마신(馬臣)에게 말하기를 ‘웅피(熊皮)와 녹피(鹿皮)를 만포(滿浦)에 가지고 가 팔아서 소를 사 밭을 갈려고 하니, 네가 왕자(王子)에게 말하여 왕자께서 군관에게 이것을 말하도록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마신이 노추(奴酋)에게 고하니 노추가 말하기를 ‘조선에서 상경(上京)을 허락하기 전에는 너희들이 결코 만포에 앞질러 가서 매매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1. 12월 28일 노추의 성밖에 이르렀을 때에는, 길이 10여 척씩 되는 아름드리 나무를 소에다 실어들이는 자가 길에 잇달았었는데, 이는 외성(外城)에 목책을 설치할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1. 정월 5일 돌아올 때 보니, 운반해 들이는 수가 전일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역군(役軍)은 3∼4일 걸리는 곳의 부락에서 1호(戶)마다 그 남정(男丁)의 수를 헤아려 번갈아 역(役)에 나오는데, 1인당 10개씩 운반한다고 하였습니다.
1. 노아합적(奴兒哈赤)과 소아합적(小兒哈赤)은 같은 어미의 소생이고 모아초적(毛兒貂赤)은 다른 어미의 소생이라고 합니다.
1. 노추는 비대하거나 수척한 편도 아닌데, 체구가 건장하고 코는 곧고 크며, 얼굴은 야무지면서 길었습니다.
1. 머리에는 초피(貂皮)를 얹고 그 위에 이엄(耳掩)을 썼는데, 그 위에 꽂은 상모(象毛)가 주먹만하였습니다. 또 은(銀)으로 꽃받침을 만들고 그 받침 위에 인형(人形)을 만들어서 상모 앞에 장식하였는데, 모든 장수들이 쓰고 있는 것도 역시 일반이었습니다.
1. 몸에는 5색 용문(龍文)의 철릭[天益]을 입고 있었는데, 상의의 길이는 무릅까지 이르고 하의의 길이는 발등에까지 이르렀으며, 초피(貂皮)를 재단하여 연식(緣飾)을 하였습니다. 모든 장수 역시 용문(龍文)의 옷을 입었으나, 연식은 초피(貂皮)나 표피(豹皮), 혹은 수달피(水獺皮), 혹은 산서피(山鼠皮)로 하였습니다.
1. 호정(護頂)은 초피(貂皮) 8∼9장으로 만들었습니다.
1. 허리에는 은입사금대(銀入絲金帶)를 매고 여기에 세건(帨巾)·도자(刀子)·여석(礪石)·장각(獐角) 등을 한 줄에 꿰어 찼습니다.
1. 발에는 녹피올라화(鹿皮兀剌靴)를 신었는데, 혹은 황색, 혹은 흑색이었습니다.
1. 오랑캐의 풍속은 모두 머리를 깍는데 뇌후(腦後)에만 조금 남겨 두 가닥으로 땋아 드리웠으며, 윗 수염 역시 좌우로 10여 개만 남겨 두고 모두 깍아 버렸습니다.
1. 노추(奴酋)가 제배(除拜)하는 관직의 임기는 도독(都督)은 10년, 용호 장군(龍虎將軍)은 3년이라고 합니다.
1. 노추가 출입할 때 특별한 의장(儀仗)은 없고 군뢰(軍牢) 등이 길을 인도하는데, 2명 혹은 4명의 장수가 짝을 지어 노추가 타면 같이 타고 노추가 걸으면 같이 걸으면서 앞을 인도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면서 갔습니다.
1. 소추(小酋)는 체구가 장대한 데다가 얼굴빛은 희며 모가 났고, 귀에는 은고리[銀環]를 걸었으며 복색은 형과 같았습니다.
1. 노추는 그의 집으로부터 남쪽의 대길호리(大吉號里)로 향하는 하루 길 지점과 북쪽의 여허(如許)로 향하는 하루 길 지점에 각각 하나의 보루[堡]를 설치하였고, 서쪽의 요동(遼東)으로 향하는 길의 하루 거리 지점에 10개의 보루를 설치하였는데, 이 보루를 지키는 장수는 추장(酋長)으로서 성중에 있는 자를 정해 보내어 1년이 차면 교체하며, 군사는 각 보루의 부근부락에서 뽑아 보내어 10일마다 교체한다고 합니다.
1. 노추는 요동 근처를 제외한 나머지 북·동·남 3∼4일 거리의 노정 안은 각 부락의 추장이 성안에 모여 살게 하면서 군사를 동원할 때에는 모든 추장에게 화살을 전하여 각각 그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은 군사들 스스로가 준비하도록 하며 군사의 다과(多寡)는 노추가 그 수를 정한다고 합니다.
1. 노추의 장수는 1백 50여 명이며, 소추(小酋)의 장수는 40여 명인데, 모두 각 부락의 추장들이며 성안에서 가솔을 거느리고 살게 하였습니다.
1. 연대(煙臺)의 군인은 2호의 가구를 함께 입접(入接)시켰다가 1년이 차면 교체시키는데, 양식 등의 물품은 그 사람 수를 따져 달마다 노추가 준비해 보낸다고 합니다.
1. 연대에서 변고를 알릴 때에는 연화(煙火)를 쓰지 않고 목탁만 치는데, 이웃 연대가 서로 헤아릴 정도로만 치고, 서로 경보를 헤아리면 문득 피하여 숨어 버리니, 이는 적의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서라고 합니다.
1. 도중에 한 호인이 가재도구를 싣고 가솔과 함께 가고 있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연대를 관망하는 일로 나간다고 하였는데 자못 원망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1. 양식은 각처의 부락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그 부락의 추장으로 하여금 경작을 관장시켜 그곳에 그대로 쌓아 두었다가 사용할 임시에 가져다 쓰며 성중에는 쌓아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1. 노추는 대길호리(大吉號里) 건너편 박달령(朴達嶺) 북편에다가 작년부터 둔전(屯田)을 설치하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1. 대길호리 건너편 인천(忍川)은 동아(童阿)의 농막인데, 지난해부터 영영 황폐해져서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길이 요원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하(阿下)는 노추의 성중에 있었습니다.
1. 전지(田地)가 비옥한 곳이면 1두의 조를 파종하여 8∼9석은 수확할 수 있고 척박한 곳이면 1석도 겨우 수확한다고 합니다.
1. 추수한 후에는 즉시 실어 들이지 않고 밭머리에 묻어 두었다가 얼음이 언 후에 가서야 실어들인다고 합니다.
1. 호인들은 모두 물을 따라 살기 때문에 호인의 집은 냇가에 많고 산골짜기에는 적었습니다.
1. 호인들의 집은 옥상 및 사면을 모두 진흙으로 두텁게 바르기 때문에 비록 화재가 있어도 개초(蓋草)만 탈 뿐이었습니다.
1. 집집마다 모두 닭·돼지·오리·염소 등의 짐승을 길렀습니다.
1. 호인들이 궁시(弓矢)·갑주(甲胄)·후량(糗糧)을 가지고 오가면서 도로에 잇달았습니다. 이들은 바로 번을 들고 나는 자들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잔열(殘劣)하여 하나도 건장하고 용감한 자가 없었습니다.
1. 노추는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그 웃옷을 벗긴 다음 명적전(鳴鏑箭)으로 등을 쏘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쏘는 숫자가 다르며, 또 뺨을 때리는 체벌도 있다고 합니다.
1. 청하보(淸河堡)의 장수가 인부 6∼7명을 시켜 12월 28일 노추에게 주육(酒肉)을 갖추어 보냈는데, 이는 곧 세찬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1. 무순(撫順)의 당통사(唐通事)가 노추의 집에 왔기에 온 까닭을 물으니 그의 대답이 ‘청하보에 새로 연대를 설치하였는데, 노추가 이를 헐어 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요동관(遼東官)이 그 차장(次將) 당고리(唐古里)를 잡아다가 곤장 20대를 쳐 돌려보낸 후, 노추가 성낼 것을 염려하여 은 5백 냥으로 그의 마음을 위로해 풀어주려고 나로 하여금 먼저 이러한 의사를 고하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1. 당통사의 말이 ‘노추가 늘 요동에 총통(銃筒)을 달라고 요청해 왔으나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1. 지난해 남도(南道)에서 변란이 일어났을 적에 고미개(古未介)의 추장 김왜두(金歪斗)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었다고 합니다. 왜두의 아비 주창합(周昌哈)은 앞서 우리 나라에 귀화하였으므로 김추(金秋)로 성명을 주어 겸사복(兼司僕)에 두었는데 서울에 있으면서 8∼9년간 벼슬하다가 그 아비를 뵈러 간다는 핑계로 고토(故土)에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추의 집에서 고미개까지의 거리는 6일 길이 된다고 합니다.
1. 호인들의 말이 ‘전일에는 출입하는 자가 반드시 궁시(弓矢)를 휴대하여야만 서로 침해하며 노략질하는 환란을 피할 수 있었는데, 왕자(王子)가 단속한 후부터는 원근의 출행에 마편(馬鞭)만을 가지고 다녀도 되니 왕자의 위덕(威德)은 비길 데가 없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전에는 자의에 맡겨 행동하게 하고 또 사냥으로 생업을 도왔는데, 지금은 행동을 속박하고 또 사냥한 것을 바치게 한다. 비록 그를 두려워하여 말하지는 못하나 마음속으로야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1. 노추가 군사 3천 명을 취합하여 얼음이 어는 즉시 일진은 말을거령(末乙巨嶺)을 경유하여 고산리(高山里)로 나가고, 일진은 열어령(列於嶺)을 경유하여 가을헌동(加乙軒洞)으로 나아가 위원(渭源)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가, 요동관(遼東官) 및 여 상공(余相公)의 회유로 군사를 해산시켰다고 합니다.
1. 위원에서 인삼을 채취하는 호인들을 노추가 각 부락으로 하여금 색출하게 한 다음, 1인당 소 한 마리 혹은 은자 18냥을 징수하여 자의로 강을 건넌 죄를 갚게 하였는데, 그 중 가난하여 은자와 소를 구해내지 못하는 자는 그 가솔을 잡아다가 사환으로 부린다고 합니다.
1. 신이 친자합(親自哈)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호인 4∼5명이 왔기에, 그들의 말을 듣고자 하여 통사(通事)로 하여금 술에 취해 누워 자는 체하면서 몰래 엿듣게 하였는데, 호인 하나가 친자합에게 묻기를 ‘지금 이 군관이 무슨 볼일이 있어 왔는가?’ 하니, 대답이 ‘두 나라가 한 나라와 같이 지내고 두 집이 한 집과 같이 지내기 위해서 왔다. 또 문서를 가지고 그 나라에 가서 고하여 위원 관병관(管兵官)의 죄를 다스린 후에 각각 봉강(封疆)을 지켜 서로 침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이에 호인 하나가 말하기를 ‘조선은 속임수가 많다. 얼음이 풀리기 전에 우선 신사(信使)를 왕래시켜 우리의 군사를 느슨하게 하려는 것인지를 어찌 알겠는가. 또 조선 사람은 우리 나라 지방에 와서 풀을 베어가고 나무를 잘라가고 사냥을 하며, 우리 나라가 수확해 놓은 곡식도 모두 약탈해 간다. 저희들 소행은 이와 같이 하면서 어찌 우리에게 채삼(採蔘)을 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였다고 합니다.
1. 온화위(溫火衛)의 도추장(都酋長) 동강구리(童姜求里)의 손자 보하하(甫下下)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함께 성을 지키다가 지금 철거하였다고 하는데, 보하하가 성을 지킬 때 거느렸던 파산(坡山)·시번(時番)·소을가(小乙可)·후지(厚地)·소추(所樞)·응고(應古) 등 여섯 부락은 모두 온화위에 예속되었다고 합니다.
1. 온화위(溫火衛) 마로(馬老) 부락의 추장 동타부(童打夫)가 군사를 거느리고 보하하(甫下下)와 함께 노추의 성에 와 7개월 동안 머물러 있다가 지금에서야 철거하였다고 합니다.
1. 마신(馬臣)이 상경(上京)하는 일을 가지고 신에게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명(明)나라의 법령을 철저히 따르는 터라, 이런 일은 반드시 명나라에 주문(奏聞)하여 명나라가 허락하면 행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신의 말이 ‘일이 진실로 이와 같이 되어서 만약 상경하게 된다면 도로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기에, 신이 길이 멀고도 험하다고 답하였더니, 마신이 ‘양대조(楊大朝) 역시 멀고도 험하다고 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양대조는 여 상공(余相公)의 야불수(夜不收)031) 로 하세국(河世國)과 함께 오랑캐 땅에 왕래하던 자입니다.
1. 마신의 말이 ‘당신네 나라 연해 지방에 항복한 왜인(倭人)을 머물려 두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기에, 신이 사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신은 또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기에, 신이 ‘약 5∼6천 명이다.’고 답하였습니다. 마신의 말이 ‘무엇 때문에 연강 지방에 머물게 하느냐?’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왜노(倭奴)가 덕의(德義)을 사모하여 항복해 오므로 우리 나라가 이들에게 모두 의식을 주어 안정시켰다. 그들이 이 은혜에 감복하여 변상(邊上)에 머물면서 나라를 위해 외침(外侵)을 방어하므로 우리 나라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어 연강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하였습니다. 마신은 또 말하기를 ‘왜인들의 체격이 장대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형체가 몹시 작아서 풀숲 사이를 잠행(潛行)할 수 있고, 총을 쏘면 반드시 명중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신은 또 말하기를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잘 맞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왜인의 총은 능히 날으는 새도 맞힐 수 있기 때문에 조총(鳥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마신이 쇠투구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투구도 뚫을 수 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조총의 탄환은 능히 박철(薄鐵)로 씌운 이중으로 된 참나무 방패도 뚫는데 이 투구야 어찌 거론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더니, 마신이 ‘어찌 그럴 수야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좌우에 서서 듣던 호인들도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운 기색을 지었습니다.
1. 소추(小酋)가 말하기를 ‘훗날 당신의 첨사(僉使)로부터 만약 송례(送禮)가 있을 경우 우리 형제에게 차등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1. 건주위(建州衛)는 서쪽 요동계(遼東界)로부터 동쪽 만차(蔓遮) 부락에까지 이르는데, 우리 나라의 지방으로 준하여 따지면 서쪽 창성(昌城)으로부터 동쪽 고산리(高山里)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좌위(左衛)에 속하며, 노강(老江) 위의 우위(右衛)는 해서위(海西衛)의 지경이라고 합니다.
1. 온화위(溫火衛)는 서쪽 여파(黎坡) 부락에서부터 동쪽 고미개(古未介) 부락까지라고 합니다.
1. 모린위(毛隣衛)는 함경북도(咸鏡北道) 건너편이 된다고 합니다.
1. 몽고에서는 수레 위에 집을 꾸미고 모피로 장막을 치는데 배가 고프면 전육(膻肉)을 먹고 목이 마르면 낙장(酪漿)을 마신다고 합니다.
1. 몽고에서는 봄에 밭을 갈 때 평야에다가 인마(人馬)를 많이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여러 번 밟아대면서 분예(糞穢)를 버려 걸어지게 한 후에 기장과 조, 그리고 수수[蜀秫]의 종자를 파종하고 또 다시 인마로 밟게 하며, 김매고 가꾸거나 수확을 할 때에는 군인을 시켜 돕게 한다고 합니다.
1. 몽고는 모두 모피로 된 옷을 입었습니다.
1. 모린위(毛隣衛)의 추호(酋胡) 노동(老佟)이 전마(戰馬) 70필과 돈피(獤皮) 1백여 장을 예물로 바쳤는데, 12월 초승에 투항하였다고 합니다.
1. 마신의 말이 ‘위(衛)는 모두 30인데, 투항하여 귀속한 것이 20여 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1. 노추(老酋)의 성(城)으로부터 몽고왕 나팔(剌八)이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는 동북쪽으로 한 달 노정(路程)이고, 차장(次將) 만자(晩者)의 부락까지는 12일 노정이고, 사할자(沙割者)·홀가(忽可)·과을자(果乙者)·니마차(尼馬車)·제비시(諸憊時)의 다섯 부락은 북쪽으로 15일의 노정인데 모두 금년에 투속(投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온(剌溫)은 동북쪽으로 20일의 노정이며, 올라(兀剌)는 북쪽으로 18일 노정, 백두산(白頭山)은 동쪽으로 10일 노정이라고 합니다.
1. 여허(如許)의 추장(酋長)인 부자(夫者)와 나리(羅里) 형제가 노추의 강성을 걱정한 끝에 몽고왕 나팔(剌八)과 올라(兀剌)의 추장 부자태(夫者太) 등의 군사를 청하여 계사년032) 9월에 내침하였는데, 노추가 군사를 거느리고 허제(虛諸) 부락을 에워싸고 싸워 여허(如許)의 군사를 대패시켰으므로 부자는 전사하고 나리는 도주하였으며, 부자태는 투항하였으므로 노획한 인축(人畜)과 갑주(甲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노추가 노획한 몽고 사람 20명을 뽑아 비단옷을 입히고 전마(戰馬)를 태워 그들의 소굴로 돌려보내니 20명의 사람들이 돌아가 노추의 위덕(威德)을 말하였기 때문에, 나팔(剌八)이 차장(次將)인 만자(晩者) 등 20여 명으로 하여금 호인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마(戰馬) 1백 필, 탁타(橐駝) 10두를 가지고와 바치게 하여, 이에 말 60필과 탁타 6두는 노추를 주고 말 40필과 탁타 4두는 소추를 주었는데, 그 장령(將領) 등에게 노추(奴酋)는 모두 후대하여 비단옷을 주었다고 합니다. 노추의 집으로부터 북쪽으로 허제에 이르는 거리는 3식(息)이 된다고 합니다.
1. 부자태가 투항한 후 그 형 만태(晩太)가 말 1백 필로 아우를 속신(贖身)하였으나 노추가 허락하지 않아 만태 역시 투속되었다고 합니다. 부자태가 노추의 성중에 와 있은 지 3년 만에 20여 명의 가속 모두를 12월 보름 전에 비로소 데려 왔다고 합니다.
1. 계사년에 여허(女許) 등의 군사가 대패한 후로 원근의 모든 부락이 계속하여 투항하였다고 합니다.
1. 여허의 호인은 대부분 백전의(白氈衣)를 입었습니다.
1. 여러 호인 중 몽고·여허·올라 등이 가장 강하다고 합니다.
1. 12월 29일 소추의 집에 한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감파인(甘坡人)이다’고 하였습니다. 1월 4일에 여인(女人) 복지(福只)가 말하기를 ‘임해군(臨海君)의 종으로 임진년에 경성(鏡城)에 있다가 반노(班奴) 박기토리(朴基土里)와 함께 포로가 되어 결국 여기에 전매되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또 6일 동수사리(童愁沙里) 부락에서 유숙할 때 남자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오촌(吾村)의 갑사(甲士) 박언수(朴彦守)인데, 임진년 8월에 호인 30여 명이 뜻밖에 돌입하였을 때 배수난(裵守難)·하덕인(河德仁)·최막손(崔莫孫) 등과 함께 일시에 납치되어 백두산 서쪽 산기슭을 넘은 지 3일 반만에 와을가(臥乙可) 부락에 도착하였고 10일이 못 되어 여연(汝延) 아즐대(牙叱大)의 집에 전매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또 노추의 성안 동조이(童召史)의 집에 와서 곡물을 수송하는 일로 여기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와을가에서 여연에 이르기까지는 8일 노정인데 그 중간에 인가가 없으며, 여연에서부터 노추의 성에 이르기까지는 6∼8일의 노정이라고 합니다. 신이 이 세 사람을 만나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호인의 실정을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문답할 즈음에 호인들이 의심하는 생각을 가질까 염려되어 단지 하인으로 하여금 물어보게 하고 신은 듣지 못하는 체하고 있었는데, 호인이 그 사람들을 불러내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 전일 마신과 동양재가 만포진에서 받아간 상품을 노추의 형제가 모두 빼앗았으므로 그들은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71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640면
- 【분류】군사-통신(通信) / 외교-야(野)
- [註 027]순경(巡更) : 야경 도는 것.
- [註 028]
좌경(坐更) : 초소 같은 데 앉아서 밤을 경계하는 것.- [註 029]
금훤군뢰(禁喧軍牢) : 어지러이 떠드는 것을 금지하는 군졸.- [註 030]
○南部主簿申忠一書啓:
臣於上年十二月十五日, 到江界, 適値府使許頊, 以防備檢勅事, 出在其境內所屬鎭堡, 仍留本府, 以待其回。 十七日還官, 遂與相會, 問邊上虜情之可問者, 備辦盤纏, 二十日發行, 二十一日到滿浦鎭, 以待嚮道胡人之來。 是日向暮, 梨坡酋胡 童女乙古、童愎應古等出來。 二十二日朝, 前僉使柳濂, 出在懷遠館, 招兩胡, 饋以酒食, 各給米、布後, 臣與鄕通事羅世弘、河世國、鎭奴姜守及臣奴春起等, 竝晌午離發滿浦, 氷渡鴨綠江, 前向奴酋家進發。 自二十二日, 至二十八日, 所經一路事, 載錄于圖。 一, 奴酋家, 在小酋家北, 南向造排; 小酋家, 在奴酋家〔南〕 , 北向造排。 一, 外城周僅一里; 內城周二馬場許。 一, 外城, 先以石築, 上數三尺, 又布(緣)〔椽〕 木, 如是而終, 高可十餘尺, 內外以粘泥塗之, 無雉堞、射臺、隔臺、壕子。 一, 外城門, 以木板爲之; 又無鎖鑰, 門閉後, 以木橫張, 如我國將軍木之制。 上設敵樓, 蓋之以草, 內城門, 與外城門同, 而無門樓。 一, 內城之築, 亦同外城, 有垣堞與隔臺, 自東門過南門, 至西門, 城上設候望板屋, 而無上蓋, 設梯上下。 一, 內城之內, 又設木柵, 柵內奴酋居之。 一, 外城中, 胡家纔三百餘; 內城中, 胡家百餘; 外城底四面, 胡家四百餘。 一, 內城中, 親近族類居之; 外城中, 諸將及族黨居之; 外城底居生者, 皆軍人云。 一, 外城下底, 廣可四五尺, 上可二三尺; 內城下底, 廣可七八尺, 上廣同。 一, 城中泉井, 僅四五處, 源流不長, 故城中之人, 伐氷于川, 搖曳輸入, 朝夕不絶。 一, 昏曉, 只擊三通, 別無巡更、坐更之事; 外城門閉, 而內城不閉。 一, 胡人木柵, 如我國垣籬, 家家雖設木柵, 堅固者, 每部落不過三四處。 一, 城上, 不見防備諸具。 一, 奴酋城, 西北距上國撫順二日程; 西距淸河一日程; 西南距靉陽三日程; 南距新堡四日程; 南距鴨綠江一日程。 一, 二十八日未時, 行抵老酋家, 直到其木柵內所謂客廳, 馬臣、佟羊才、歪乃等來見臣, 以奴酋言, 傳于臣曰: "崎嶇遠路, 跋涉勞苦, 厚意良(厪)〔勤〕 , 多謝不已。" 因問文書來否, 臣答曰: "我僉使, 以都督, 委遣次將, 不可以通事卒隷, 草草報謝。 玆馳專价, 齎送回帖。 一路所到, 別無艱楚。 何勞苦之有?" 遂出帖, 遞與以送, 小頃, 奴酋出中門外, 請臣相見。 臣立於奴酋前, 羅世弘、河世國, 立於臣左右。 差後, 行相見禮, 禮罷, 設小酌。 使馬臣, 慰臣於客廳, 謂臣仍留宿於客廳。 臣意以爲, 若留在此, 凡百虜情, 無從得聞, 諉之曰: "身多疾病, 願調溫室。" 遂館臣于外城內童親自哈家。 一, 臣等入城之夕, 馬臣來言于親自哈曰: "馬料在外邊, 未及取來, 不得送去。 今日則爾可備呈。" 云。 一, 臣以齎去盤纏銅爐口二、匙二十枚、箸二十雙、紙束、魚物等, 言于馬臣曰: "俺慮途中或有缺乏之事, 將此等物齎來, 今別無所用, 欲奉于都督, 此意如何?" 馬臣曰: "不妨事。" 臣卽令馬臣, 送于奴酋兄弟。 奴酋兄弟, 皆受之而多謝云。 一, 奴酋兄弟, 送馬臣、佟羊才, 逐日朝夕來問, 如有缺乏事, 隨卽探來云。 魚肉與酒, 連絡送來, 至於馬料, 亦連送不絶。 歪乃, 或逐日或間日來問。 一, 馬臣本名時下, 羊才本名蘇屎。 上年以余相公相會事, 出來滿浦時, 改此名云。 歪乃, 本上國人, 來于奴酋處, 掌文書云, 而文理不通。 此外之人, 更無解文者, 且無學習者。 一, 二十九日, 小酋兄弟, 請臣相見後, 令佟羊才, 設小酌以慰之。 一, 丙申正月初一日巳時, 馬臣、歪乃, 將奴酋言, 來請參宴, 臣與羅世弘、河世國往參。 奴酋門族及其兄弟姻親與唐通事, 在東壁; 蒙古 沙割者、忽可、果乙者、尼麻車、諸憊時, 在北壁; 臣等及奴酋女族, 在西壁; 奴酋兄弟妻及諸將妻, 皆立於南壁炕下; 奴酋兄弟, 則南行東隅地上, 向西北, 坐黑漆倚子, 諸將俱立於奴酋後。 酒數巡, 兀剌部落新降將夫者太起舞, 奴酋便下倚子, 自彈琵琶, 聳動其身。 舞罷, 優人八名, 各呈其才, 才甚生踈。 一, 是日未宴前, 相見之時, 奴酋令馬臣, 傳言曰: "繼自今, 兩國如一國, 兩家如一家, 永結歡好, 世世無替。" 云。
蓋如我國之德談也。 一, 宴時, 廳外吹打, 廳內彈琵琶, 吹洞簫、瓟柳。 餘皆環立, 拘手唱曲, 以助酒興。 一, 諸將進盞於奴酋時, 皆脫耳掩, 舞時亦脫, 惟小酋不脫。 一, 初二日, 小酋送馬三匹, 來請臣等, 臣等騎往參宴。 凡百器具, 不如其兄遠矣。 是日, 乃國忌, 而欲物色其處事狀往焉, 而不食肉。 小酋懇勸之, 臣答以亡親忌日云。 一, 初三日, 酋胡 童好羅厚ㆍ童亡自哈、女酋椒箕請臣設宴。 奴酋所敎云。 一, 童好羅厚將宴罷, 帶瞎一目者, 來示曰: ‘此人, 乃田獵於山羊會近處者。 山羊會越邊朴時川, 卽捉得鷲之處, 而爾國人必窺伺偸去。 不可禁止耶?" 臣答曰: "某時、某處人偸去? 其人狀貌, 如何? 我國法令甚嚴, 誰敢越境, 以偸爾等之物乎? 萬無是理。" 云, 則好羅厚曰: "近無偸去者, 如或有之, 另加禁止。" 云。 一, 初四日, 小酋送佟羊才, 請臣曰: "軍官不但爲兄而來, 我亦當接待。" 遂館臣於其將多之家。 多之, 乃小酋四寸兄也。 因設酌, 入夜而罷。 一, 多之問我國人勇弱與否於佟羊才, 佟羊才曰: "滿浦宴享時, 列立軍數, (弱)〔略〕 有三四百。 背負矢服, 前抱弓帒, 箭則羽落而無鏃, 弓則前拆而後裂, 只爲他國笑資。 如此等輩, 不用弓箭, 只將一尺劎, 可斫四五百。 但恨臂力有限。" 兩人相與大噱。 臣曰: "我僉使, 若欲誇視軍威, 當以悍兵、精卒, 强弓、利鏃, 大張聲勢。 羊才所見者, 不是軍兵。 是只在庭供給之人與禁喧軍牢也。" 一, 多之曰: "我王子與爾國, 將欲結爲一家, 故爾國被擄人, 厚加轉買, 多數刷還。 我王子無負於爾國, 爾國則多殺我採蔘人。 採蔘是何擾害, 而殺傷至此也? 情義甚薄, 深銜怨憾。" 臣答曰: "我國之法, 凡胡人無故潛入我境者, 論以賊胡。 況爾國人, 夜間昏黑, 闌入數百年曾所不來之地, 搶奪牛馬, 怯殺人民, 山谷間愚氓, 蒼皇驚怕, 自相厮殺, 勢所必至, 非爲一草之故。 凡我國待夷之道, 誠心納款者, 則撫恤懷柔, 自餘冒犯禁境者, 則一切以賊胡論, 少不饒貸。 往在戊子年間, 爾國地方饑饉, 餓殍相望, 爾類之歸順望哺於滿浦者, 日以數千計, 我國各饋酒食, 且給米、鹽, 賴以生活者何限? 然則我國, 初非有意於勦殺爾輩也。 特以爾輩, 冒犯越境, 自就誅戮也。" 多之曰: "信爾所言, (渭源)〔渭原〕 管兵, 緣何革職治罪乎?" 臣答曰: "(渭源)〔渭原〕 管兵官被罪者, 非獨以勦殺爾輩也。 邊上管兵之官, 巡邏瞭望, 此其職也。 渠不謹巡邏瞭望, 致令爾輩, 闌入我境, 人民、牛畜, 多致殺掠。 罪在罔赦, 所以革職治罪也。 若於爾們, 來到我境之時, 瞭望戒嚴, 使不得越境, 則我民與爾等, 俱無厮殺之患矣。" 多之更無所言, 只他閑說話。 一, 佟羊才曰: "爾國宴享時, 何無一人身穿錦衣者耶?" 臣曰: "衣章, 所以辨貴賤, 故我國軍民, 不敢着錦衣。 豈如爾國上下同服者乎?" 羊才無言。 一, 多之問臣曰: "爾國有飛將二人云, 然耶? 今在那裏?" 臣答曰: "非止二人。 在南邊者多, 而來此則二人。 一爲碧潼郡守, 一爲寧遠郡守, 而南邊倭賊, 已盡驅逐, 故其飛將等, 近當來防于此處矣。" 多之曰: "我聞能飛云, 欲聞其實。" 臣曰: "兩手, 各提八十餘斤長劍, 馳馬上下絶壁。 或出小戶, 略無所礙, 或超過大川, 或往來樹梢, 如履平地, 或數日之程, 一夜間可能往返。" 多之曰: "能超過幾步廣川也?" 臣曰: "如波猪江則可以超過矣。" 多之顧其左右而吐舌。 一, 初五日朝, 歪乃持回帖、黑段團領三件、貂皮六令、藍布四疋、綿布四疋而來, 臣與羅世弘、河世國, 各一件; 貂皮, 則臣與羅世弘, 各三令; 布疋, 則分與姜守、春起。 小酋亦送黑叚團領各三件、黑鞍精具三件于臣與羅世弘、河世國。 臣言于歪乃、佟羊才曰: "我以滿浦軍官, 只持文書往復而已。 有何句幹, 膺此兩都督府重禮? 分貺家丁, 尤極未安。 承領無名, 情願反(壁)〔璧〕 。" 歪乃、佟羊才, 各將臣意, 分告兩酋。 兩酋云: "前者, 馬臣等歸滿浦時, 所受物件, 儀數極多, 馬臣等, 猶且無辭拜受而來。 今此軍官, 如是云云, 則受來馬臣, 將置顔於何地? 下人所給, 物不足貴。 只表行贐而已。" 言未訖, 有一胡來叫馬臣甚急。 有頃, 馬臣回言王子云: "刷還之報, 不要他物。 且要除職。
若朝鮮除職, 則賞之以一尺之布, 猶可受也; 如不得除職, 賞之以金帛而不願也。" 臣答曰: "當歸告僉使。" 觀其意, 欲以與 上國及我國結好之意, 誇示胡人, 威服諸部也。 又曰: "毛麟衛 胡人, 屢犯貴國地方, 欲設一陣於雲山越邊, 以遏境賊胡, 如何?" 臣答曰: "我國東北面, 與胡密邇, 只隔一江, 故尋常往來, 歸順者往往竊發, 屢興邊警。 西北面, 則與胡居相隔數百里, 故越境而作賊者無多。 爾有兩耳, 豈不飽聞? 我知都督, 亦必詳悉。" 馬臣曰: "然。" 臣曰: "然則旣知如此, 而又欲設鎭, 何耶?" 曰: "今則王子統率諸胡, 號令進退, 豈有違越之理?" 臣曰: "然則上年, 金歪斗作賊於南邊, 當都督管束之初, 亦且如是。 他日之事, 不待見而後可知也。 (則對曰)〔雲山越邊〕 設陣, 作後日啓釁之端。 凡當設施, 若不善於始, 必有悔於終。 然此非我之所可擅斷, 事勢則如是矣。" 馬臣未及對, 歪乃曰: "設鎭之事, 且悉於回帖中。 爾其歸告僉使。 立等回話。" 遂與臣出城。 童忽哈, 邀臣於其家, 設酌以餞。 酒至數巡, 臣托以日晩而罷, 忽哈拜別臣於城外。 一, 觀回帖中印迹, 篆之以建州左衛之印。 一, 發程時, 逢蒙古將晩者于內城門外, 問曰: "爾久在這裏否?" 答曰: "俺亦初七日當還" 云。 一, 正月初四日, 胡人百餘騎, 各(俱)〔具〕 兵器, 糧餉數斗許, 建旗, 出北門, 乃煙臺及防備處擲奸事, 出去云。 旗用靑、黃、赤、白、黑, 各付二幅, 長可二尺餘。 初五日, 亦如之。 一, 初五日, 臣等出來時, 汝乙古言於馬臣曰: "欲將熊皮、鹿皮, 賣於滿浦, 買牛耕田。 爾可言於王子, 說與軍官。" 馬臣入告于奴酋, 奴酋曰: ‘朝鮮不許上京之前, 爾等決不可徑往滿浦買賣。" 云。 一, 十二月二十八日, 到奴酋城外, 合抱之木, 長可十餘尺, 駕牛輸入者, 絡繹於道, 乃外城外設柵之木云。 正月初五日, 回還時見之, 則運入之數, 倍於前日; 役軍, 則三四日程內部落, 每一戶計其男丁之數, 分番赴役, 每名輸十條云。 一, 奴兒哈赤、小兒哈赤, 同母, 毛兒哈赤, 異母云。 一, 奴酋, 不肥不瘦, 軀幹壯健, 鼻直而大面鐵而長。 一, 頭戴貂皮, 上防耳掩, 防上釘象毛如拳許。 又以銀造蓮花臺, 臺上作人形, 亦(开)〔飾〕 于象毛前, 諸將所戴, 亦一樣矣。 一, 身穿五綵龍文天益, 上長至膝, 下長至足背, 裁剪貂皮, 以爲緣(开)〔飾〕 。 諸將亦有穿龍文衣, 緣(开)〔飾〕 則或以貂, 或以豹, 或以水獺, 或以山鼠皮。 一, 護頂, 以貂皮八九令, 造作。 一, 腰繫銀入絲金帶, 佩帨巾、刀子、礪石、獐角一條物等。 一, 足納鹿皮兀剌靴, 或黃色, 或黑色。 一, 胡俗, 皆剃髮, 只留腦後小許, 上下二條, 辮結以垂, 口髭亦留左右十餘莖, 餘皆鑷去。 一, 奴酋除拜都督十年, 龍虎將軍三年云。 一, 奴酋出入, 別無執器械, 軍牢等引路。 只諸將, 或二或四作雙, 奴酋騎則騎, 步則步而前導, 餘皆或先或後而行。 一, 小酋, 體胖壯大, 面白而方, 耳穿銀環, 服色與兄一樣矣。 一, 奴酋, 自其家, 南距大吉號里一日程, 北距如許, 向路一日程, 各設一堡; 西距遼東, 向路一日程, 設十堡。 將則以酋長之在城中者定送, 滿一年相遞; 軍則以各堡附近部落調送, 十日相遞云。 一, 奴酋, 除遼東近處, 其餘北、東、南三四日程內, 各部落酋長, 聚居于城中, 動兵時, 則傳箭於諸酋, 各領其兵, 軍器、軍糧, 使之自備。 兵之多寡, 則奴酋定數云。 一, 奴酋, 諸將一百五十餘名; 小酋, 諸將四十餘名, 皆以各部酋爲之, 而率居於城中。 一, 煙臺軍人, 幷家口二戶入接, 滿一年遞番, 糧餉等, 計其人數, 每朔奴酋備送云。 一, 煙臺報變時, 不用煙火, 只擊木梆, 以隣臺相準爲限。 相準則輒走避匿, 恐被賊害也云。 一, 路〔中〕 一胡, 載其家藏雜物, 竝率家屬而去, 問之, 則煙臺爲望事, 進去云, 頗有怨苦之狀。 一, 糧餉, 於各處部落, 例置屯田, 使其部酋長, 掌治耕穫, 因置其處, 而臨時取用, 不於城中積置云。 一, 奴酋, 於大吉號里越邊朴達嶺北邊, 自上年, 欲置屯田云。 一, 大吉號里越邊忍川, 童阿農幕, 而自上年永爲荒棄云。
問其由則曰: "道路遼遠故也。" 阿下在奴酋城中。 一, 田地品膏, 則粟一斗落種, 可穫八九石, 瘠則僅得一石云。 一, 秋收後, 不卽輸入, 埋置於田頭, 至氷凍後輸入云。 一, 胡人, 皆逐水而居, 故胡家多於川邊, 少於山谷。 一, 胡家, 於屋上及四面, 竝以粘泥厚塗, 故雖有火災, 只燒蓋草而已。 一, 家家皆畜鷄猪、鵝鴨、羔羊之屬。 一, 胡人持弓矢、甲冑、糗糧, 去去來來, 連絡於道。 乃是出入番云, 而都是殘劣, 一無壯勇。 一, 奴酋不用刑杖, 有罪者, 只以鳴鏑箭, 脫其衣而射其背, 隨其罪之輕重, 而多少之。 亦有打腮之罰云。 一, 淸河堡將備酒肉, 以人夫六七名, 十二月二十八日, 領送于奴酋, 乃歲遺云。 一, 撫順 唐通事來到奴酋家, 問其來故, 則曰: "淸河堡新設烟臺, 奴酋自欲撤毁。 遼東官, 拏其次將唐古里, 棍二十還送後, 慮奴酋嗔怪, 將銀子伍百兩, 慰解其心, 令俺先告此意。" 云。 一, 唐通事言: "奴酋, 每請銃筒於遼東, 而不許" 云。 一, 上年, 南道生變時, 古未介酋長金歪斗領兵入寇云。 歪斗父周昌哈, 向化於我國, 賜姓名金秋有, 兼司僕, 在京時, 仕八九年, 托以其父歸見事, 還其故土, 仍不出來云。 自奴酋家, 距古未介, 六日程云。 一, 胡人等言: "在前日, 胡人之凡有出入者, 必佩持弓矢, 以避相侵害搶掠之患, 自王子管束之後, 遠近行走, 只持馬鞭。 王子威德, 無所議擬。" 或言: "前則一任自意行止, 亦且田獵資生, 今則旣束行止, 又納所獵。 雖畏彼不言, 中心豈無怨苦?" 云。 一, 奴酋聚兵三千, 合氷卽時, 一運, 由末乙巨嶺, 出高山里; 一運, 由列於嶺, 出加乙軒洞, 以復渭原之讎, 因遼東官及余相公之宣諭, 罷兵云。 一, 渭原採蔘胡人等, 奴酋乃令其各部落, 刷出每名, 或牛一隻, 或銀十八兩徵收, 以贖其私自越江之罪, 其中貧不能措備銀與牛者, 則竝家口拏去使喚" 云。 一, 臣留在親自哈家時, 有胡人四五來到。 臣欲聞其語, 令通事, 佯睡醉臥而竊聽之。 一胡問于親自哈曰: "今此軍官, 何幹而來?" 答曰: "爲兩國如一國, 兩家如一家而來。 且將文書來告其國, 治渭原管兵官之罪, 此後各守封疆, 無相侵犯之意。" 一胡曰: "朝鮮多詐, 安知解氷前, 姑爲信使之往來, 以緩吾師乎? 且朝鮮人刈草伐木, 田獵於我國地方, 我國所穫者, 亦皆搶奪而去。 渠等所爲若此, 而何禁我們使不得採蔘也?" 云。 一, 溫火衛都酋長童姜求里之孫甫下下, 領兵千餘, 一同守城, 今則罷去云。 甫下下守城時, 所領坡山、時番、小乙可、厚地、所樞、應古等六部落, 皆屬溫火衛云。 一, 溫火衛 馬老部落酋長童打夫, 領兵與甫下下, 往在奴酋城留七朔, 今始罷歸云。 一, 馬臣, 將上京之事, 問於臣, 臣答曰: "我國恪守天朝法令, 此等事, 必須奏聞天朝, 天朝許之則行, 不許則不可行。" 馬臣曰: "事苟如是, 若得上京, 途路如何?" 臣答以路遠且險。 馬臣曰: "楊大朝, 亦言脩阻云。" 楊大朝, 以余相公夜不收, 與河世國, 往來虜中者也。 一, 馬臣曰: "爾國沿海地面, 留置降倭云, 然耶?" 臣曰: "然。" 馬臣曰: "其數幾何?" 臣答曰: "約五六千。" 馬臣曰: "緣何留置沿江地面?" 臣答曰: "倭奴慕義行降, 我國皆給與衣食, 俾得安揷。 渠輩感恩懷惠, 留住邊上, 爲國禦侮。
我國嘉其誠款, 分置沿江諸郡矣。" 馬臣曰: "倭子等狀貌壯大云, 然耶?" 臣曰: "形體甚小, 能潛行草間, 放丸必中。" 馬臣曰: "雖且小, 能中否?" 臣曰: "倭銃, 能中飛鳥。 故曰鳥銃。" 馬臣出鐵盔以示曰: "能透得這盔否?" 臣曰: "鳥銃放丸, 能穿兩重眞木防牌, 籠以薄鐵者透過。 此盔, 何足道哉?" 馬臣曰: "豈至於此乎?" 諸胡之立於左右者, 皆相顧愕然。 一, 小酋云: "日後爾僉使, 若有送禮, 則不可高下於我兄弟" 云。 一, 建州衛, 自西遼東界, 東至蔓遮部落, 以我國地方準計, 則西自昌城, 東止高山里, 左衛也; 老江上, 右衛, 海西衛地界云。 一, 溫火衛, 西自黎坡部落, 東止古未介部落云。 一, 毛隣衛, 咸鏡北道越邊云。 一, 蒙古, 車上造家, 以毳爲幕, 飢則食膻肉, 渴則飮酪漿云。 一, 蒙古, 春耕時, 多聚人馬於平野, 累累使之踐踏糞穢後, 播黍粟、蜀秫諸種, 又使人馬踐踏。 至耘治、收穫時, 令軍人齊力云。 一, 蒙古, 皆着毛皮衣。 一, 毛麟衛酋胡 老佟, 以戰馬七十疋、獤皮百餘令, 爲禮, 十二月初生, 投降云。 一, 馬臣言: "衛凡三十, 而投屬者, 二十餘衛。" 云。 一, 自老酋城至蒙古, 蒙古王剌八所在處, 東北距一月程, 次將晩者部落, 十二日程; 沙割者、忽可、果乙者、尼馬車、諸憊時五部落, 北距十五日程; 皆以今年投屬云。 剌溫, 東北距二十日程; 兀剌, 北距十八日程; 白頭山, 東距十日程云。 一, 如許酋長夫者、羅里兄弟, 患奴酋强盛, 請蒙古王剌八、兀剌酋長夫者太等兵, 癸巳九月來侵, 奴酋率兵, 匝戰於虛諸部落, 如許兵大敗, 夫者戰死, 羅里逃還, 夫者 〔太〕 投降, 所獲人畜、甲冑, 不可勝計。 奴酋選所獲蒙古人二十, 被錦衣, 騎戰馬, 使還其巢穴, 二十人歸言, 奴酋威德, 故剌八令次將晩者等二十餘名, 率胡百餘人, 持戰馬百疋、橐駝十頭來獻。 馬六十疋、駝六頭, 與奴酋; 馬四十疋、駝四頭, 與小酋; 其將領等, 奴酋皆厚待, 給與錦衣云。 自奴酋家, 北距虛諸三息云。 一, 夫者太投降後, 其兄晩太, 以馬百疋, 欲贖其弟, 而奴酋不許, 晩太以此, 亦爲投屬云。 夫者太在奴酋城中, 第三年, 其家屬上下, 幷二十餘名, 十二月望前, 始爲率來云。 一, 自癸巳, 如許等兵大敗後, 遠近諸部, 相繼投降云。 一, 如許 胡人, 多着白氈衣。 一, 諸胡中, 蒙古、如許、兀剌等最强云。 一, 十二月二十九日, 小酋家, 有一小兒, 自言甘坡人。 正月初四日, 女人福只自言: "以臨海君婢, 壬辰年, 在鏡城, 與班奴朴其土里被擄, 轉賣來此" 云。 初六日, 止宿于童愁沙里部落時, 見一男子, 自言: "吾村甲士朴彦守, 壬辰年八月, 胡人三十餘人, 不意突入, 與裵守難、河德仁、崔莫孫等, 一時被擄。 踰白頭山西麓, 三日半, 到臥乙可部落。 不十日, 轉賣於汝延 牙叱大家。 前年冬, 又來于奴酋城內童昭史家, 以穀物載來事, 來此。" 云。 自臥乙可, 至汝延, 八日程, 其間幷無人家; 自汝延至奴酋城, 六八日程云。 臣遇此三人, 皆欲細詢虜情其所聞見者, 而問答之際, 恐生胡人疑慮之心, 只令下人盤問, 而臣則似亦不聞者然。 胡人等, 亦叫還那人, 使不得久留矣。 一, 前日, 馬臣、佟羊才, 滿浦所受賞物, 盡爲奴酋兄弟所奪, 渠輩亦有不平之色矣。
- 【태백산사고본】 43책 71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640면
- 【분류】군사-통신(通信) / 외교-야(野)
- [註 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