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에서 포루의 설치·대포의 주조·연철의 채취·승군의 조직 등에 대하여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병화(兵禍)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몇 년 내에는 그 평정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모든 조치에 있어서 반드시 계획을 세워 주선하여 밤낮으로 계속한 연후에야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있음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이 커서 거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때가 늦어서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손을 마주 잡고 앉아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나라를 잘 도모해 나가는 자는 비록 백 번 패하여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러서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해이하게 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인심이 날로 게을러지는 것은 바로 조정에 이러한 정신과 기백이 없어서 족히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들은 일찍이 우리 나라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도성(都城)만한 데가 있지 않습니다. 대개 안팎으로 짜인 산하(山河)의 굳건함이 참으로 백이(百二)의 형세가 있고, 또 주즙(舟楫)의 이로움이 통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진실로 시일을 두고 조치하여 질서를 잡아서 사방으로 하여금 견고함을 믿게 한다면 민심이 필시 오늘날처럼 흉흉한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도성의 남북은 모두 산을 의지해 험조함을 이루었기 때문에 지키기가 그리 어렵지 않겠으나 동서 양면은 평탄하여 걱정됩니다.
동면이 더욱 나직하니 이곳에 만약 두어 채의 포루(砲樓)를 설치하여 서로 바라보게 하면 위급할 때 반드시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민(都民)들이 이미 편리한 줄을 알면 다른 곳 역시 차례로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만세의 이로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화포(火砲)와 군기(軍器)를 정비하는 일은 상의 하교가 지극히 온당합니다. 비록 포루가 있어도 이 군기를 갖추지 않으면 포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군기시(軍器寺)에서 지난해 주조한 크고 작은 포가 도합 1백 90여 문이 넘고, 또 천자(天字)·지자(地字) 이하의 대포(大砲) 수십여 문을 거두어 모았으나 이 또한 쓰기에 부족합니다. 마땅히 계속하여 많이 주조해야 하는데, 놋쇠가 다하고 인력도 갖추어지지 않아 갑자기 마련해 낼 수가 없습니다. 또 종루(鐘樓)의 깨어진 종이 땅속에 묻혀 있어서 전에 이를 가져다가 포를 주조하려 하였으나 도민들 중에 혹 구물(舊物)임을 아끼어 깨어서 쓰고자 하지 않는 자가 있어 군기시가 회암사(檜巖寺)의 종을 깨어 주조하였습니다. 이 종이 아직 땅 속에 묻혀 있어 장차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말게 되었는데, 남겨둔들 또한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군기시로 하여금 날씨가 풀린뒤에 탄석(炭石)을 준비하여 이 깨어진 종으로 대포를 더 주조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함흥(咸興)·안변(安邊)·단천(端川)의 연철(鉛鐵) 및 충청도 충주(忠州) 등 연철이 생산되는 곳의 각도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많이 채취해서 올려보내게 하여 급박한 수용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중흥동(中興洞)에는 옛날에 산성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석축(石築)이 완연합니다. 세인의 전언에 고려 때 최영(崔瑩)이 군사를 주둔하였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상봉(上峯)의 암석에는 아직까지 깃대를 꽂았던 구멍이 있습니다. 그 동구(洞口)가 극히 험준하기 때문에 왜인이 오직 단 한번 그곳에 이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곧 경성 후면의 가장 가까운 곳이라, 근일 아랫사람들의 의논 또한 ‘이곳에 별도로 하나의 진영을 설치하고 혹 사찰(寺刹)의 승도(僧徒)를 소집하되 응모하는 자에게 곧바로 면역(免役)의 도첩(度牒)을 주게 되면 머지않아 원근의 중들이 모여들 것이니, 이에 한 사람이 통솔하게 하여 화포 등의 기술을 연습하며 훈련을 통해 군(軍)을 이루게 하면 이는 경성과 더불어 서로 돕는 형세가 되어 만에 하나 적병이 일면에 와 핍박한다 하더라도 감히 산후(山後)를 포위하지는 못할 것이다.’고 합니다. 이 말이 또한 몹시 이치가 있습니다.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영민한 성산(聖算)이 미친 바가 실로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 신들이 삼가 명을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일을 아는 관원을 뽑아 중흥동 산성으로 달려 보내어 지세를 살핀 후에 다시 조처를 의논하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종루의 깨어진 종에 대해서는 전에 훼손하지 말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혹시 그 뜻이 함부로 파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싶으니 아직 천천히 하라. 중흥산성의 일은 그 형세를 육안으로 알아볼 수 없으니, 눈이 녹기를 기다려 병판(兵判)을 보내 살펴본 후에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71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3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군사-군역(軍役) / 사상-불교(佛敎)
○備邊司啓曰: "兵禍旣始, 非可以歲年而望其平定。 凡措置所當爲之事, 必須經營料理, 夜以繼日, 然後庶可望其有補於萬一。 若以爲事大而難擧, 時晩而無及, 則是將拱手待亡而已。 古之善謀人國者, 雖百敗垂亡之際, 有爲之志, 未嘗或懈, 良以此也。 今之人心日怠者, 正緣朝廷, 無此精神氣魄, 足以動人故也。 臣等嘗觀我國形勢, 無有如都城者。 蓋表裏山河之固, 眞有百二之勢; 且舟(揖)〔楫〕 之利, 無所不通。 誠能假以時月, 措置成緖, 使四方恃以爲固, 則民心必不至如今日之洶洶矣。 都城南北, 則皆據山爲險, 守之不至甚難, 唯東西兩面, 平易可虞, 東面尤甚低微。 此處若設砲樓數坐, 屹然相望, 則緩急必可得力, 而都民旣知便好, 則他處亦可次第成就, 豈不爲萬世之利乎? 火砲、軍器整備事, 上敎極當。 雖有砲樓, 而此物不具, 則與無樓同。 軍器寺前年所造大、小砲, 合一百九十餘; 又有收拾天、地字以下大砲數十餘位, 此亦不足於用。 所當連續多鑄, 而鍮鐵已盡, 事力不具, 未能卒辦。 且鐘樓破鐘, 埋在地中, 往時欲竝取鑄砲, 而都民或有戀其舊物, 而不欲破用者, 故軍器寺, 以檜巖之鍾破鑄, 此鍾則尙埋於地中, 將成無用之物, 留亦何益? 請令軍器寺, 日暖後, 準備炭石, 以此破鍾, 添鑄大砲爲當。 咸興、安邊、端川鉛鐵及忠淸道 忠州鉛鐵所産處, 下書各道監司, 多數採取上送, 以備急用爲當。 中興洞舊有山城, 今尙石築宛然, 世傳高麗時, 崔瑩住兵處。 今其上峰巖石, 尙有竪旗之穴。 其洞口極險, 故倭人但得一至其處云。 此乃京城後面至近之地, 近日在下之議, 亦以爲: ‘此地, 當爲別設一營或寺刹, 招集僧徒, 應募者輒與免役度牒, 則不久遠近之僧, 皆來集, 因使一人統之, 練習火砲等技, 操鍊成軍, 則是與京城, 爲子母輔車之勢, 萬一賊兵, 雖來迫一面, 而不敢圍繞山後’ 云。 此言亦甚有理。 伏承聖敎, 睿算所及, 實出尋常, 臣等謹當遵奉施行。 請發事知官員, 馳往中興洞山城, 相視形勢後, 更議措處之事, 何如?" 上答曰: "依啓。 鍾樓破鍾, 前日啓請勿毁, 或有其意。 不可輕破, 姑徐之。 中興山城事, 其形勢非肉眼可知, 姑待雪消, 可遣兵判, 相視後處之。"
- 【태백산사고본】 43책 71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3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군사-군역(軍役)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