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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69권, 선조 28년 11월 20일 무자 3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접반사 심희수가 서변의 수상(水上)과 수하(水下) 방어에 대해 치계하다

양 포정(楊布政)349) 의 접반사(接伴使) 심희수(沈喜壽)가 치계하기를,

"서변(西邊)의 일이 어렵고 근심스러운데, 수상(水上)과 수하(水下)의 방비가 한결 같이 허술합니다. 이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방비하는 경계가 부족하였고 또 일을 당하여서도 대처할 방비가 없는데, 강의 얼음이 이미 얼어 위태로움이 날로 심합니다. 역관 박인검(朴仁儉)의 말을 듣건대 ‘요동의 장관(將官)들이 동쪽 달자를 크게 근심하여 밤낮으로 변에 대비하고 있다.’ 하고, 또 의주(義州) 관노(官奴)로서 요양(遼陽)으로부터 돌아온 자의 말을 듣건대 ‘적이 애양(靉陽) 등의 보(堡)를 침범한 소식이 도로에 시끄럽고 우격(羽檄)이 교대로 날아다닌다.’ 합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의지하는 곳이 망하면 다른 곳도 위태로와지는 해가 점차 핍박하게 되니, 우리의 방비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신 병사(兵使) 변응규(邊應奎)는 배류(輩流) 중에 자못 명성이 있으나 또한 젊은 나이에 우뚝 일어났고 전진에 익숙치 못한 사람입니다. 순찰사 윤승길(尹承吉)은 백면 서생으로 자상할 뿐 군사(軍事)에 익숙치 못하므로 혹시라도 위급함이 있으면 혼자 맡기기 어려울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조정에서 변무(邊務)를 알고 위망(威望)이 있는 중신을 가려 원수의 소임을 맡겨 제장(諸將)을 절제하게 하면 사체가 중대하고 책응(策應)이 적의하게 되어 적을 방어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대저 적이 난을 일으킴에 있어서는 반드시 상류에서 시작하여 차츰차츰 먹어들어 하류에 미치게 되는데 의주는 곧 강변 7읍 중에 끝에 속하니, 진실로 절급한 근심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곳은 적의 경내와의 거리가 겨우 3일정 밖에 안 되는데 저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선망하는 것은 반드시 의주가 풍요한 거진(巨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음이 언 뒤에는 천 갈래 백 갈래의 길이 통하지 않는 데가 없으므로 회오리 바람과 소낙비가 실로 어느 지방에서 일어날지 모르니, 수미(首尾)에서 움직임이 어느 곳에서 먼저 일어날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일 대병이 멀리 내지까지 곧장 쳐들어오면 반드시 우리 군사가 뒤를 막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군사가 협공하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의주의 위박(危迫)함은 수상의 제진(諸鎭)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방어가 수월하다고 핑계하여 토병(土兵)과 무사를 뽑아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 쓴 것은 실계(失計)한 것이 심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 방산(方山)·청성(淸城) 두 보의 장졸 및 용천(龍川)과 철산(鐵山)의 수령이 포수를 거느리고 모두 본주(本州)에 첩입(疊入)하여 힘을 다해 방수(防守)하게 하되, 약간의 창곡(倉穀)을 편의에 따라 운반하면 양전(兩全)의 이익이 있을 듯합니다. 이밖에 남관(南關)의 수삼 개 읍의 정병·포수도 본주에 첨방(添防)시켜 뜻밖의 근심에 대비해야 합니다. 만일 수상에 변고가 있음을 들으면 도리(道里)가 멀지 않으니 오히려 달려가서 계속 지원할 수 있습니다. 대개 수상(水上)은 황해도 신급제(新及第) 및 본도 열읍의 군사로써 나누어 방어하기에 족하거니와, 이 의주는 성이 가장 크고 의거할 만한 요새가 없으므로 4천여 명의 군사가 아니면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임진년 이후에 군사 출동의 요해(擾害)와 부역의 번중함을 견디지 못하여 유망(流亡)이 서로 잇따라서 군액(軍額)이 극히 줄어들었으므로 지금 한잡인(閑雜人)·노약자를 다 뽑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2천 명이 차지 못하는데 그 중에 활을 쏠 줄 아는 자는 열에 하나도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문부에 실려 있는 군기도 거의 다 산실(散失)되었고 또 지난해 화재를 만나 궁시(弓矢) 등 중한 물품이 몹시 결핍되었으며 누로(樓櫓)·기계도 어긋난 것이 많으니, 오래도록 안전했던 지방은 본디 이와 같이 되기 마련입니다. 신이 본 바로는 한심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한 주를 보면 제진(諸鎭)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 이 주를 지키지 못하면 서문(西門)을 의지할 바가 없고 중국을 통할 수 없으니, 사세의 중함이 제진보다 백배나 심합니다.

광망하고 어리석은 말로 성상을 번독하게 하나, 천 리 먼길에 진달하기 쉽지 않기에 공언(空言)으로 때 늦게 아뢰오니 죄만 더할 뿐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변사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6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59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註 349]
    양 포정(楊布政) : 양호(楊鎬).

楊布政接伴使沈喜壽馳啓曰: "西事艱虞, 而水上、水下防備, 一樣虛疎。 旣乏未雨之戒, 又無臨渴之掘, 江氷旣合, 懍懍日甚。 伏聞譯官朴仁儉之言, ‘遼東將官輩, 深以東㺚子爲憂, 日夜待變’ 云, 而又聞義州官奴回自遼陽者之說, ‘賊犯靉陽等堡, 道路喧傳, 羽檄交馳云。’ 唇齒之害, 漸至逼迫, 在我之備, 不容少忽。 新兵使邊應奎, 在輩流中, 頗有聲名, 而亦是年少崛起, 不習戰陣之人。 巡察使尹承吉, 白面慈祥, 不閑軍旅, 脫有緩急, 似難獨任。 臣之愚意, 自朝廷擇遣知邊務有威望重臣, 以爲元帥之任, 節制諸將, 則事體重大, 策應得宜, 庶有禦敵之望矣。 大抵寇賊作耗, 必先於上流, 稍稍蚕食, 以及下流, 則義州乃江邊七邑之末端, 固無切急之虞矣。 第念此距賊境, 僅三日程, 伊之朶頤流涎, 未必不在於號爲豐饒巨鎭者, 而連陸之後, 千蹊百逕, 無所不通, 飄風驟雨, 實未知適發於何地, 首尾運動, 難測其先起於某處。 若大勢長驅, 則必不畏我軍之綴後, 又何憚兵之夾攻也? 以此而言, 義州危迫, 少無間於水上諸鎭, 諉謂防歇, 抽出土兵武士, 移用他處, 失計之甚者。 臣之愚意, 方山淸城兩堡將卒及守令, 率其砲手, 皆令疊入本州, 悉力防守, 而些小倉穀, 隨便搬運, 則恐有兩全之益。 此外南關數三邑精兵砲手, 亦宜添防本州, 以備不虞。 若聞水上有變, 則道里不遠, 猶可奔馳繼援也。 蓋(氷)〔水〕 上, 則黃海道新及第及本道列邑之兵, 足以分防, 此州則城子最大, 無險可據, 非四千餘兵, 不可守, 而壬辰以後, 不堪師旅之擾害, 力役之煩重, 流亡相繼, 軍額極縮, 今雖拔盡閑雜老弱, 猶未滿二千之數, 其中操弓者, 不能十之一。 載簿軍器, 散失殆盡, 又遭上年火變, 弓矢重物, 最爲缺(少)〔乏〕 , 樓櫓ㆍ器械, 亦多齟齬。 久安之地, 固宜如此, 臣所目覩, 不勝寒心。 以此一州, 可想諸鎭同然。 不幸此州失守, 則西門無所倚, 天朝不得通, 事勢之重, 有甚於諸鎭百倍。 以狂瞽之說, 干瀆宸嚴, 千里遠路, 未易得達, 空言後時, 只增罪戾。" 上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42책 6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59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