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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69권, 선조 28년 11월 20일 무자 2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변응규가 오랑캐 정황과 서신 왕래·쇄환 등에 관한 내용을 치계하다

평안도 병사 변응규(邊應奎)가 치계하기를,

"만포 첨사(滿浦僉使) 유염(柳濂)의 첩보(牒報)에 ‘지난 8월 18일 중국 관원의 가정(家丁)과 향통사(鄕通事) 하세국 등을 이파(梨坡)의 호인 동여고(童汝古)·동평고(童坪古) 등을 일시에 선유(宣諭)하는 일로 노을가적에게 들여보냈는데, 이달 11월 2일 각인 및 노호(老胡) 형제, 차장(次將) 마신(馬臣)·동양재(佟羊才) 등이 일시에 나왔다.

하세국에게 오랑캐의 정황을 추문(推問)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노을가적이 평상시에 거주하는 집은 휘하 4천여 명이 칼을 차고 호위해 서 있는데 좌교의(坐交椅)를 설치하였다. 중국 관원의 가정이 먼저 들어가기를 청하여 배사(拜辭)하고 파한 뒤에, 하세국이 또한 들어가기를 청하여 읍례(揖禮)를 하고 나왔으며, 소을가적(小乙可赤)에게도 그에게와 마찬가지로 예를 행하였다. 노을가적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소을가적은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으며 각기 상급(賞給)이 있었다. 노을가적의 성은 둘레가 80여 리쯤 되고 성문은 7개 처이며 궁가(弓家)가 없는 석축이었다. 호인의 집은 5백여 호이고 성 밖은 6백여 호였다. 내성(內城)은 둘레가 10리 쯤이고 석축이었으며, 궁가(弓家)와 누각(樓閣)을 다섯 곳에 이미 조성하였고 또 목수를 바야흐로 부역시켜 만들고 있었다. 노을가적의 형제가 주거하는 집은 기와를 덮었다. 각기 열 채로 나누어 목책(木冊)을 만들고 각각 대문을 만들었으며 별도로 누각을 세 곳에 설치 하였는데 모두 기와를 덮었다. 대개 눈으로 본 바로는 노을가적의 휘하는 1만여 명이고 소을가적의 휘하는 5천여 명이며 늘 성중에 있었다. 오래도록 성중에 있으면서 항상 진법을 익히는 자가 1천여 명이었는데 각기 전마(戰馬)를 가지고 갑옷을 입고 성밖 10리쯤에서 군사 훈련을 하였다. 노을가적의 전마는 7백여 필이고 소을가적의 전마는 4백여 필인데 모두 점고(點考)하였다. 화원(畫員) 2명, 와장(瓦匠) 3명은 중국에서 명하여 보낸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그때 바야흐로 번와(燔瓦)의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문학 외랑(文學外郞)은 중국 사람으로서 오랑캐 땅에 투속(投屬)한 지가 거의 30여년이나 되었는데, 모든 통서(通書)하는 일을 이 사람이 오로지 맡아서 한다고 하였다. 갑장(甲匠)이 16명, 전장(箭匠)이 50여 명, 궁장(弓匠)이 30여 명, 야장(冶匠)이 15명인데 모두 호인으로 일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세국이 3일 머무르는 동안 수상(水上) 서해평(西海坪)의 여러 호인이 아울러 모두 나아왔는데 무슨 일로 모였는지는 몰랐다. 동대길(童大吉) 등과 같이 자면서 오랑캐의 정세를 은근히 물어보았더니, 몰래 「조선이 원수가 되었으므로 오는 정월에서 2월 사이에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보복할 계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부락의 호인들을 바야흐로 모아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으나, 조선이 이처럼 사람을 보내와서 화친하니, 특별히 흔단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 하였다. 호인 동해(童海)란 자도 또 몰래 「나도 전일 위원(渭原) 경내에 삼캐는 일로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동군(同郡)의 사람이 요로에 숨었다가 27명을 쏘아 죽이거나 목베었는데 나는 간신히 자맥질하여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노을가적이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하여 집 식구를 모두 잡아 가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것으로 벌을 결정하였다. 」 하고,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는 일은 동대질 등의 말과 한결같았다.

26일 하직하고 물러나서 돌아올 적에 노을가적이 「전일 동해로(童海老)조선의 경내로 함부로 들어가서 동류의 호인이 27명이나 살해당하게 하고 겨우 살아 돌아왔으므로 집 식구를 잡아다가 고역(苦役)을 결정하였다. 앞으로 조선 성밑을 범할적에 조선에서 사살하지 않고 잡아 보내면 우리가 극법(極法)으로 그를 참형할 것이니, 조선 사람이 우리 지방을 범하여 우리가 잡아보내면 조선에서도 처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피차 원한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중국 사람이 물러온 뒤에 노을가적이 하세국을 별도로 불러 「두나라가 특별한 원한이 없고 다만 우리 달자(㺚子)가 그대 경내에 함부로 들어가서 스스로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이미 그 무리들의 아내들을 이곳에 잡아와서 그대들을 위해 지공을 하게 하여 모욕을 주었다. 앞으로 전처럼 좋게 지내면 왕래하는 사람이 말채찍만 가지고 다녀도 될 것이다. 천조(天朝) 사람은 심상히 왕래하니 이상한 일이 못되지만, 그대 나라 사람은 예부터 이곳에 온 사람이 없다. 지금 소를 잡아 공궤(供饋)하는 것은 오로지 그대를 위해서이다……. 」 하였다.

마신(馬臣) 등에게 상공(相公)이 잔치를 하사한 뒤에 첨사(僉使)가 잇따라 회원관(懷遠館)으로 가서 연례(宴禮)를 베풀었더니, 차장(次將) 등이 「조선 사람으로서 다른 위(衛)에 있는 달자(㺚子)에게 사로잡힌 자는, 우리 왕자(王子)의 계려(計慮)가 장원(長遠)하기 때문에 전후 모두 10여 명을 남김없이 쇄환하였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인호(隣好)의 의사가 없이 무지한 달자가 함부로 들어가서 삼을 캐자 묶어서 우리에게 보내주지 아니하고 남김없이 다 죽였다. 오늘날에 와서 아들은 그 아비를 잃고 아우는 그 형을 잃었으며 아내는 그 남편을 곡하여 부르짖고 원통해 하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다. 우리 왕자가 목전의 슬프고 괴로운 정상을 견디지 못하여 장차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그런데 마침 천조(天朝)에서 선유(宣諭)하여 고해주고 조선 사람을 데리고 왔다. 우리 왕자가 생각하기를, 죽은 자는 그만이거니와 이미 사신을 차임하여 보내왔으니 면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으므로 우리들을 차송(差送)하여 서로 좋게 지내는 뜻으로 고하게 하고, 또 서로 다니며 왕래하기를 요청하였다……. 」 하므로, 첨사가 답하기를 「여름 사이에 너희들이 경내에 한번 들어와서 삼을 캐려는 의사에 대해 내가 불가한 뜻으로 고하여 서로 해치는 근심을 면하기를 바랐는데,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무릅쓰고 위원에 들어와서 인가의 소를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무지한 산골 백성이 이색적인 인물을 놀랍게 보았으므로 서로 격투하는 즈음에 너희 달자만 죽은 자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인물도 상해를 당한 자가 많았다. 너희가 우리에게만 탓하는 것은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마신 등이 「앞으로 두 나라를 일체로 같이 보아 무릇 일이 있으면 문서로 통하겠다. 」 하므로, 첨사가 답하기를 「예부터 너희와 우리 나라는 원래 문서로 서로 통하지 않았다. 또 감히 사사로이 교제하지 못하고 중국의 법령을 준수하였다. 지금 한번 문서를 통하게 된 것은 또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 뒤로부터는 피차가 마땅히 말로 서로 통해야 할 뿐이다. 」 하고, 이어서 술을 들기를 권하였다. 마신 등이 「우리들의 차장(次將)은 용렬한 노자(奴子)에 비할 바가 아닌데, 연희 도구만 풍성할 뿐 여악(女樂)이 없으니 실망을 견딜 수 없다. 」 하므로, 첨사가 「연향(宴享)에 음악을 쓰는 경우는 과연 있다. 전에 너희가 우리 나라 인물을 쇄환하였으므로 우리 조정에서 그 성의를 아름답게 여겨 곧 연향을 베풀어서 그 노고에 보답하려 하였다. 그러나 쇄환한 자가 함경도의 인물이어서 문이(文移)하고 가서 묻는 사이에 시일이 지연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금년 9월 사이에 이미 날을 정하여 연구(宴具)를 준비하였으나 너희들이 제날짜에 맞추어 이르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아직까지 시행하지 못하였다. 명년 봄에 마땅히 설행할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난잡하게 이르지 말고 당초 쇄환에 공이 있는 몇 사람만을 가려 기일 안에 와서 참석하되 어기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 하니, 마신은 「삼가 명령대로 받들어 행하겠다. 」하였다. 이어서 소금·어물·포목·기명 등 물품을 차등있게 주었다.’ 하였습니다.

통서(通書)에 관한 일은 난처한 근심이 있을까 염려되어 말로 통정(通情)할 것을 이미 계달(啓達)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저들의 통서가 있는데 엄준히 거절하고 답하지 않으면 그 분한 마음만 더해줄 뿐이어서 일에 도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만일 노을가적이 통서해 오면 회답을 간략히 만들어 우선 그의 의사를 따르고 조정으로 하여금 자세히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비변사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69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9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平安道兵使邊應奎馳啓曰: "滿浦僉使柳濂牒報: ‘去八月十八日, 官家丁, 與鄕通事河世國等, 梨坡胡 童汝古童坪古等, 一時宣諭事, 老乙可赤處入送, 今十一月初二日, 各人及老胡兄弟、次將馬臣佟羊才等, 一時出來。 河世國處, 情推問, 則老乙可赤常時所住之家, 麾下四千餘名, 佩劍衛立, 而設坐交椅。 官家丁先爲請入, 拜辭而罷然後, 世國亦爲請入, 揖禮而出, 小乙可赤處, 一樣行禮矣。 老乙可赤屠牛設宴, 小乙可赤屠猪設宴, 各有賞給。 老乙可赤城, 周回八十餘里許, 城門七處, 無弓家石築。 家五百餘戶, 城外六百餘戶。 內城, 周回十里許, 石築弓家, 樓閣五處則已造, 又以木手, 時方赴役造作。 老乙可赤兄弟所住家舍, 則蓋瓦各以十坐, 分爲木柵, 各造大門。 別設樓閣三處, 皆爲蓋瓦。 大槪目覩, 則老乙可赤麾下萬餘名, 小乙可赤麾下五千餘名, 長在城中, 而常時習陣。 千餘名, 各持戰馬着甲, 城外十里許鍊兵, 而老乙可赤戰馬, 則七百餘匹, 小乙可赤戰馬四百餘匹, 竝爲點考矣。 畫員二名、瓦匠三名, 則天朝命送之人云, 而時方始役燔瓦。 文學外郞, 則以唐人投屬地, 幾至三十餘年, 而凡所通書, 此人專掌云。 甲匠十六名、箭匠五十餘名、弓匠三十餘名、冶匠十五名, 皆是胡人, 無日不措矣。 世國三日留住, 而水上西海坪頭頭胡人, 竝皆進來, 未知因何事聚會。 與童大吉等同宿, 而引問情, 則潛言曰: 「因朝鮮作爲仇讐, 來正二月間, 必爲起兵報復設計, 故諸部落胡人等, 方爲調聚鍊兵, 而朝鮮如是送人和親, 別無起釁」 云。 胡人 童海者, 又以潛言曰: 「我亦前日, 渭原境內採蔘事入歸, 而同郡之人, 要路隱伏, 射斬二十七名。 吾身則艱難游泳生還, 而老乙可赤, 以犯入朝鮮之境, 家口竝爲捉來, 炊飯汲水定罰。」 起兵報復之事, 與童大吉等言辭, 一樣說道矣。 二十六日, 辭退回程之際, 老乙可赤曰: 「前日, 童海老冒入朝鮮之境, 同類之, 多至二十七名被殺而僅還, 故捉致家口, 定苦役。 今後犯于朝鮮城底, 朝鮮不爲射殺而捉送, 則我極法斬之。 朝鮮之人, 犯于我地方, 我捉送, 則朝鮮亦可處置。 然則彼此無讐矣。」 唐人退來後, 老乙可赤別招世國言曰: 「兩國別無讐怨, 只緣我㺚子, 冒入爾境, 自取殺死, 故已將其輩妻屬, 拿致於此, 爲爾輩設供而辱之也。 今後如前和好, 則往來之人, 只持馬箠行走可也。 天朝之人, 尋常往來, 不是異事, 爾國之人, 古無來此者。 今之殺牛供饋, 專爲爾也」 云云。 馬臣等, 相公宴賜後, 僉使繼往懷遠館, 設行宴禮, 次將等曰: 「朝鮮人搶在他衛㺚子者, 則我王子計慮長遠, 故前後竝十餘名, 無遺刷還。 朝鮮則(設)〔沒〕 有隣好之意, 無知㺚子, 冒入採蔘者, 不爲拘迫解送于我, 盡殺無餘。 至今子喪其父, 弟失其兄, 婦哭其夫, 號呼冤痛, 慘不忍聞。 我王子不堪目前悲苦之狀, 將起兵報讐, 適有天朝宣諭告示, 帶朝鮮人來到, 我王子以爲, 死者已矣, 旣承委遣, 則不可不面話, 故差送我們, 告以相好之意。 且要互相行走往來」 云云。 僉使答曰: 「夏間, 爾等來試入境採蔘之意, 我告以不可之意, 冀免相害之虞, 而爾等不我聽信, 冒入渭原, 至掠人家牛隻, 無知山谷之民, 驚見異色人物, 互相鬪格之際, 不徒爾的㺚子, 有殺死者, 朝鮮人物, 亦多傷害。 爾的偏咎於我, 是甚道理?」 馬臣等曰: 「今後, 則爾國視同一體, 凡有事, 當以文書相通」 云。 僉使答曰: 「自古以來, 爾與我國, 原不以文書相通。 且不敢私交, 遵奉天朝法令。 今此一遭通書, 亦出於不得已也。 自後則彼此當以言語相通而已。」 因勸諭行酒。 馬臣等曰: 「我們次將, 非庸劣奴子之比, 而宴具徒豐, 未見女樂, 不勝缺望。」 僉使曰: 「宴享用樂則果有之, 前次爾的刷還我國人物, 我朝廷嘉其誠意, 卽欲設宴享, 以酬其勞, 而刷還者係是咸鏡道人物, 文移往問之間, 未免稽延日月。 今年九月間, 已爲定日備具, 而因爾輩不准到, 迄不果行。 明春當爲設行, 爾等切勿雜擾沓至, 擇當初刷還有功若干人, 期日來參, 毋致違悞可也。」 答曰: 「謹領命。」 仍給鹽石、魚物、木匹、器皿等物有差’ 云云。 通書之事, 慮有難處之患, 以言語通情, 已爲啓達, 而更爲思量, 則彼有通書, 峻拒不答, 徒增其憤, 無益於事。 若老乙可赤通書, 則略修回答, 姑順其意。 令朝廷商確處置。" 上下于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42책 69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9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