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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66권, 선조 28년 8월 22일 임술 1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견고한 산성을 수축하도록 명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의 술책이 점점 교사(巧詐)해져서 후일의 일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성을 쌓을 때에 대포를 막을 수 있는 계책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로써 지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파사 산성(婆裟山城)의 일은, 역군(役軍)이 오지 않아서 일이 자못 해이되고 있다 하므로 ‘본사(本司)가 특별히 유의하여 의엄(義嚴)의 말을 채택 시행하여 모든 일을 검칙(檢飭)해서 튼튼히 쌓고 성역을 마치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왜적이 전에는 경예(輕銳)로운 군사로 곧장 진격하고 조총만 사용하였는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막아내지 못하였는데, 만일 성을 공격할 때에 대포를 사용한다면 성을 지키기에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성을 쌓을 때에 마땅히 그 제도를 곡진히 하여 뜻밖의 근심을 엄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전고(前古)의 일을 살펴보건대, 포로써 성을 공격한 것으로는 원(元)나라 군사가 변경(汴京)을 공격할 때보다 더 치열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때 원나라 사람이 성밖 주위에 토산(土山)을 쌓고 그 토산 위 백보마다 찬죽포(攅竹炮) 1백여 매를 설치하여 대개(大鎧)를 깨뜨리고 혹은 녹독(碌碡)236) 으로 두 세 차례 쏘아대니 잠깐 사이에 돌과 내성(內城)이 편편해지고, 성위 망루(望樓)의 아름드리 기둥이 모두 치는 대로 부서졌습니다. 고금을 통해 포를 사용한 성대함으로 이것이 가장 으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지의 성이었으므로 그 바깥에 토산(土山)을 쌓을 수 있었고, 높이도 성과 가지런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만일 산성의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고 높이가 억 길[丈]이나 된다면 비록 토성과 대포가 있다 하더라도 사용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형의 험고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다만 원나라 군사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황해도 산성(山城)을 칠 때 대포로 성문을 공격해서 마침내 지키지 못하였고, 그 뒤 또 죽주 산성(竹州山城)을 칠 때 역시 대포로 성문을 격파하였는데, 성안 사람들도 포를 쏘아 맞받아 치니, 원나라 군사가 물러나 달아났습니다. 이곳 등의 지형을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필시 마주 보는 곳에 적병이 올라가서 바라보고 포를 쏘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하였을 것입니다.

성을 쌓을 적에는 이러한 형세를 십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만일 지세가 편리하지 못하면 우리 쪽에서 미리 포루(砲樓)를 설치하여 맞받아 공격할 계책을 세워 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파사성(婆裟城) 하나만 그러할 뿐 아니라 모든 산성을 쌓는 사람은 마땅히 모두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므로 상의 전교를 받고 대충 이렇게 진달하는 바입니다.

성을 쌓는 데에는, 먼저 원근을 의논하여 공역(功役)을 헤아리고 시일을 정해서 해야 합니다. 지금 파사성은 쌓지 않은 곳이 1천 5백 척인데, 만일 두 사람이 함께 1척을 쌓는다면 군사 3천 명을 써야 하고, 하루에 5백 명씩을 사역시킨다면 6일간의 일입니다. 듣건대 의엄(義嚴)이 징발한 승군(僧軍)이 거의 5백여 인에 이른다 하니, 그 척수(尺數)를 나누어 주어 사람마다 각각 힘을 다하게 하고 승군(僧軍)도 수효대로 일제히 이르게 하면, 6∼7일이 지나지 않아 일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먼 곳의 군사가 일시에 당도할 수 없으니 당도하는 대로 일을 시켜 각기 배정 받은 곳을 마치고 가게 한다면, 군사는 유체하는 괴로움이 없고 성역(城役)은 늦어지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뜻을 다시 의엄(義嚴)에게 알리고, 제도(諸道)에 배정된 승군은 그 보고한 바에 따라 본사(本司)에서 이미 공문을 보내어 재촉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둘러 쌓으면 견고하지 못할 것이니, 지속(遲速)을 따지지 말고 오직 튼튼히 쌓는 것을 위주로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6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47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사상-불교(佛敎)

  • [註 236]
    녹독(碌碡) : 고무래인데, 여기서는 돌을 말한 것인 듯함.

○壬戌/備邊司啓曰: "賊術漸巧, 後日之事難測。 凡築城之際, 思所以能禦大砲之計, 可矣, 以此指揮似當。 且婆娑山城事, 役軍不來, 事頗解弛云, 本司另加留意, 採施義嚴之言, 檢飭諸事, 使之堅築畢役事, 傳敎矣。 倭賊前則輕兵直進, 但用鳥銃, 而我國之人, 猶不能禦。 苟使攻城之際, 用大砲, 則城守益難, 築城之際, 所當曲盡其制, 以嚴意外之患也。 嘗觀前古, 以砲攻城, 莫過於兵攻之時。 其時元人, 於城外周圍, 築土山, 其上每百步, 設攅竹砲百餘枚, 破大鎧, 或碌碡, 爲二三放之, 頃刻石與裏城平, 城上樓櫓合抱之木, 皆隨擊而碎。 古今用砲之盛, 此其爲最。 然(比)〔此〕 乃平地之城, 故其外可築土山, 高與城齊, 能用大砲耳。 若山城, 四面截然, 高可億丈, 則雖有土城大砲, 無所用之。 此地形之險, 所以爲貴也。 但兵入我國, 攻黃海道山城, 以大砲摧擊城門, 遂不守。 其後又攻竹州山城, 亦以大砲, 擊破城門, 而城中人, 又發砲逆擊之, 兵退走。 此等處地形, 雖未可知, 然必是相對處, 有敵兵登望放砲之所, 故如此矣。 築城之際, 此等形勢, 尤當十分詳察, 若地勢不便, 則在我預設砲樓, 以爲逆擊之計, 此乃上策。 不獨婆娑一城爲然, 凡築山城者, 要當皆知此意, 故聖敎之下, 略此陳達矣。 築城, 當先議遠近而量功, 命日以爲之。 今婆娑城未築處, 一千五百尺。 若二人竝築(二)〔一〕 尺, 則當用軍三千名一日之役, 若五百名則當有六日之役。 聞義嚴所發僧軍, 幾至於五百餘人云。 誠使分其尺數, 人各致力, 而僧軍依數齊到, 則不過六七日, 而事畢矣。 然遠處之軍, 不能齊到, 則當隨其所到而役之, 各畢分定之處而去, 則軍無留滯之苦, 役無稽緩之弊矣。 此意更爲知委于義嚴, 而諸道所定僧軍, 則因其所報, 自本司, 已發行移催促矣。 敢啓。" 上答曰: "依啓。 速成不堅牢, 不計遲速, 唯當以堅築爲主。"


  • 【태백산사고본】 40책 6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47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