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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65권, 선조 28년 7월 8일 기묘 1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별전에 나아가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판윤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지중추부사 유근(柳根)·신점(申點), 동지중추부사 조경(趙儆), 부제학 이정형(李廷馨), 호조 참판 노직(盧稷), 동지중추부사 유영경(柳永慶), 동부승지 기자헌(奇自獻), 사간 황시(黃是), 장령 정기원(鄭期遠), 전한 김시헌(金時獻), 가주서 채형(蔡衡), 봉교 오백령(吳百齡), 홍문 정자(弘文正字) 윤의립(尹義立), 검열 성이문(成以文). 】 상이 하문하기를,

"근일 왜적의 형세가 어떠한가?"

하니,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왜적의 형세는 정말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금년에 돌아가지 않으면 농사 일이 모두 되지 않을 텐데, 대개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간에 충분히 조치하고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김명원(金命元)에게 이르기를,

"명사(明使)는 언제 가겠는가?"

하니, 명원이 나아가 아뢰기를,

"부사(副使)는 보름경에 출발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사(上使)가 나중에 출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장 천총(張千總)이 왜적의 진영에 갔는데 돌아오면 출발의 여부(與否)를 안다고 했습니다. 장 천총은 바로 상사가 신임하는 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밤 북경(北京)으로 떠난 일은 무슨 일 때문인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대개 남쪽 변방의 일을 치보(馳報)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에 관해 특별한 기별은 없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모두 철수하고, 명사(明使)를 기다리는 자만 남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진영을 남겨둔다고 하는데 옛날 삼가(三嘉)의 경우와 같지 않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와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령 뒤에 떨어져 여기에 진을 머물러 둔다 하더라도 그들이 철수하는 대로 우리 나라 군대가 먼저 요해처(要害處)를 점거해야 한다. 비록 가등청정(加藤淸正)거제(巨濟)에 머물러 주둔하면서 건너가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요해처를 점거하면 저들이 반드시 요해처를 잃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왜적이 비록 철수한다 하여도 텅 빈 남쪽 변방을 지키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참으로 염려됩니다. 거제김응서(金應瑞)가 들어가 점거하고 웅천(熊川)가덕(加德) 등 지역은 백사림(白士霖) 등이 지킬 만합니다. 대개 왜인들이 우리 나라에서 저들에게 붙은 사람들이 매우 많으므로 흘러 들어온 사람과 원래 살던 사람을 분류하여 진(鎭)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형세를 인하여 토병(土兵)을 만들고 겸하여 농사를 짓고 개간하게 하면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변방에 머물며 방어하는 군대의 일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계획을 세워 토병으로 방어하게 하되 평소에 내던 공물(貢物)을 봉납(捧納)시키지 말고 그 물건을 토병에게 나누어 주면, 군사들이 반드시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監司)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비록 잘하는 자라도 물자가 부족하여 혹 일의 형편상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체찰사가 여러 도(道)를 통해 조처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김해(金海)양산(梁山) 두 읍의 사이에 삼차하(三叉河)칠점산(七點山)이 있는데 그 밑에서 왜적들이 대대적으로 둔전을 개간하고 또 큰 행랑을 지어놓고는 20명씩 부대를 편성해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왜적이 만약 물러가면 그 둔전을 수확하여 군량을 만들 수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반드시 토적(土賊)들이 거두어 갈 것입니다. 고언백(高彦伯)을 시켜 지키면 그런대로 되긴 하겠는데 식량이 없으면 군인들이 반드시 백성을 약탈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어서 형편상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가 지킬 만한가? 왜적이 물러가면 급히 방수(防守)하지 않을 수 없다. 근일 수전(水戰) 등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거제(巨濟)를 잃었기 때문이다. 웅천(熊川)·천성(天城)·가덕(加德) 등 지역도 모두 텅 비었으니, 또한 때맞추어 들어가 점거하지 않을 수 없다. 왜적이 물러가면 이순신(李舜臣)에게 거제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니, 이정형(李廷馨)이 아뢰기를,

"전라도의 군대로 거제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전라도의 군대로도 즉시 가서 지킬 수는 있으나 다만 좌수사(左水使)가 고단하고 약한 군대로 어떻게 능히 지키겠는가. 이처럼 지키기 어려운 지역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라도 해야 한다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군대를 거느리고 큰 진영을 지키게 하는 것이 옳다. 부산(釜山)과 같이 큰 진영은 마땅히 이순신으로 지키게 하고 전라 수사(全羅水使)는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니, 황시(黃是)가 아뢰기를,

"경상도의 식량이 매우 염려됩니다. 금년의 농사가 풍작이긴 하지만 수령(守令)의 공사(公私) 둔전(屯田)이 가장 많으니, 조정에서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둔전(私屯田)도 실상 관력(官力)으로 인하여 만든 것이니 또한 마땅히 조정에서 조처해야 합니다."

하고, 이덕형(李德馨)이 나아가 아뢰기를,

"남쪽 지방의 일을 조처하고 계획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성공한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상께서 매번 착실히 하라고 하교하셨지만 모든 시위(施爲)가 한갓 형식에 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군사의 수효는 이미 감사에게 물어보았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답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왜적이 물러간 뒤에는 소포(小浦) 같은데는 합병해야 하고 형세가 좋은 곳은 또한 점거해야 합니다. 김해(金海) 등 지역은 가장 기름진 땅이니, 만약 힘써 경작하면 몇 년이 안 되어 군량이 충분해질 것입니다. 대개 경상도는 모두 힘써 농사지을 땅입니다. 중국의 장수가 말하기를 ‘어찌 흩어진 백성을 수습하고 힘을 다해 조치하여 한편으로는 백성을 구원하고 한편으로는 식량을 저축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형이 아뢰기를,

"감사는 명사(明使)를 기다리느라 형세가 곤란하여 변방을 방어하는 큰 일을 모두 살필 수 없다고 합니다."

하고, 명원이 아뢰기를,

"명사(明使)가 가고 머무는 것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감사는 그렇습니다. 모든 일은 도원수가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정형이 아뢰기를,

"도원수는 허위(虛位)일 뿐입니다. 도원수가 만약 이 일을 담당할 수 있다면 염려할 바가 아니지만, 지금 장계를 보니 다만 들은 것을 전달할 뿐입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도원수가 남쪽 지방에서 인심을 크게 잃어 머물러 있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해보면 7월까지 유방(留防)해야 할 군사를 6월에 벌써 내보냈으니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놀라운 일이다. 이는 반드시 색리(色吏)의 소행일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에 어사가 없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윤방(尹昉)이 체직되어 온 후로 이시언(李時彦)이 그 임무를 겸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찰사가 내려가기 전에는 우선 어사를 보내 안무사(安撫使)의 임무를 맡게 함으로써 여러 장수가 침탈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 우선은 안무사의 칭호를 주어 종사관을 임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체찰사가 남쪽 지방에 내려가면 반드시 경략(經略)할 일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남쪽 지방은 반드시 경영하여 조치한 뒤라야 할 수 있을 것이니, 내 생각으로는 남쪽 지방이 평양과는 다를까 염려된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옳습니다. 이원익이 자신에 대한 보양(保養)은 매우 소박하게 하면서 대중을 보살핌에는 반드시 사랑과 은혜를 제일로 삼았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인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상께서 분부하신 것처럼 남쪽 지방은 평양과는 다르니, 인심 얻기가 혹 서쪽에 있을 때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전에 영상에게 말했는데 경은 기억하는가? 우리 나라는 작으니 각처에 진보(鎭堡)를 나열한 것은 매우 적절하지 않다. 가령 대적이 침범해 오면 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무리가 적은 군대로 어떻게 대적의 세력을 당해내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신은 항상 상의 분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송(宋)나라 때 번·진(藩鎭)을 없애고 군·현(郡縣)을 만들었는데, 적이 한 군에 이르면 한 군이 파괴되고 적이 한 현에 이르면 한 현이 파괴되었습니다. 악비(岳飛)양양(襄陽)번성(樊城)을 경리(經理)하여 철저히 수비하였지만 원(元)나라 군대가 부교(浮橋)의 길을 끊었으므로 임안(臨安)을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우리 나라는 경상도로 말하면 부산성(釜山城)을 산 위에 개축(改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동래성(東萊城)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동래가 더욱 소중합니다. 거제(巨濟)·가덕(加德)·천성(天城) 등 지역은 큰 진영이니 거의 연대(煙臺)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봉화군(烽火軍)이 봉화를 멀리 전하지 못하는 것은 봉화를 들고 난 후에 즉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연대가 서로 바라보이는 거리에 있고 처자를 거느리고 그 곳에서 살기 때문에 연대가 천리까지 통하는 것입니다. 대개 부산의 형세는 지키기 어렵습니다만 부산으로부터 동래·김해·웅천에 이르기까지 중진(重鎭)을 삼아 이들 중진을 지켜내기만 한다면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연대는 우리 나라와 달라 그 안에서 처자와 살 수 있고 그 제도가 매우 견고하여 비록 적이 오더라도 침범하기 어려우니, 우리 나라의 제도도 중국 제도로 법을 삼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변방을 방어하는 모든 일이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데 내륙 지방의 고을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본래 장수의 재능을 익히지 않는 것을 평소에 늘 내가 옳지 않게 여겨 왔다. 문인들은 늘 ‘무예는 우리들이 힘쓸 만한 것이 아니다.’고 하는데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강 태공(姜太公)제갈양(諸葛亮)이 어찌 무인인가. 두예(杜預)는 화살로 갑옷의 비늘 하나도 뚫지 못했지만 대장이 되었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장수와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의 일을 강습(講習)하지 않을 수 없는데 평안도 이외의 다른 지방은 소활하다고 하니, 참으로 상께서 하교하신 것처럼 무예도 익히지 않고 군무(軍務)도 익히지 않아 그러한 것입니다.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이 장수를 훈련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명첩(空名牒)이 허위 조작되는 폐단을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내 생각에 왕작(王爵)을 한 사람의 손에 위임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전쟁시에 부득이해서 한 것입니다. 공명첩뿐만이 아니라 군공(軍功)의 폐단도 이와 같습니다."

하고, 노직(盧稷)이 나아가 아뢰기를,

"공명첩이 발급되는 길이 너무 많아 세밀히 조사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명첩을 위조하는 자도 있는가?"

하니, 유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요즘 인신(印信)을 위조한 자를 형조에서 추고하는 중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교사(敎師)가 힘을 다해 훈련시키고 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교사가 날마다 훈련을 시키고 대오(隊伍)를 지어 권장하므로 살수(殺手)는 전일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진법(陣法)이 있는데, 실로 성산(聖算)에서 나온 것이니, 때때로 진법을 익혀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다. 만약 우리 나라의 진법에 전념하면 또한 적을 방어할 수 있을 텐데 하필 척계광(戚繼光)의 진법만을 취하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척계광의 진법은 대개 간화첩(間花疊) 형의 진으로서 동정(動靜) 간에 서로 수응하는데 전적으로 왜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왜적을 방어하는 데는 보병(步兵)이 기병(騎兵)보다 낫습니다. 전일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요동(遼東)의 군대가 기병이었으므로 왜인들이 보병으로 급습하자, 요동의 군대가 패배하였습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대개 적을 막는 방법은 조총(鳥銃)으로는 당할 수 없으니, 대포(大砲)와 화전(火箭)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중국의 화포(火砲)를 이미 배워 알았고 또 우리 나라의 활쏘는 법도 배웠으니 그 세력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처럼 큰 나라도 오히려 왜적을 두려워하는데 더구나 우리 나라처럼 작은 나라이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6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527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출판-인쇄(印刷)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전쟁(戰爭) / 군사-관방(關防)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기(軍器) / 외교-왜(倭) / 외교-명(明)

    ○己卯/上御別殿, 引見備邊司堂上。 【領議政柳成龍、判尹金命元、兵曹判書李德馨、知中樞柳根、知中樞申點、同知中樞趙儆、副提學李廷馨、戶曹參判盧稷、同知中樞柳永慶、同副承旨奇自獻、司諫黃是、掌令鄭期遠、典翰金時獻、假注書蔡衡、奉敎吳百齡、弘文正字尹義立、檢閱成以文。】 上問曰: "近日賊勢何如?" 柳成龍對曰: "賊勢則固不能詳知, 但今年不歸, 則農事皆不得措矣。 大槪歸與不歸, 不可不十分措置區畫。" 上謂金命元曰: "天使何時當去乎?" 命元進曰: "副使, 當於望時, 欲發云云。" 上曰: "上使追後發去者, 何耶?" 命元曰: "張千緫營, 若來則當知其定發與否云。 張乃上使信任者也。" 上曰: "前夜, 北京離發之事, 爲何事乎?" 命元曰: "大槪以馳報南邊事也。" 上曰: "則別無的奇耶?" 命元曰: "當盡撤回, 而待天使者, 獨留云耳。" 上曰: "行長之留餘陣云者, 無乃如昔日之於三嘉耶?" 成龍曰: "安知其不如此也?" 上曰: "設使落後留鎭於此, 隨其撤毁, 以我軍先據險爲當。 雖使淸正, 留駐巨濟而不渡, 我以形勢入據, 則彼必失險而無憑矣。" 成龍曰: "賊雖撤去, 南邊之空虛, 難以守之, 此誠可慮。 如巨濟, 則金應瑞入據; 熊川加德等處, 則白士霖等可以守之, 而大槪倭人, 以我國所附之人甚衆, 以流入元居等人, 分類作鎭云云。 因其形勢, 以爲土兵, 兼作耕墾, 則可以防守矣。 大槪留防軍士事, 不可不變通矣。 今計, 以土兵爲防守, 以平時所賦之物, 不爲捧納, 以其物分給土兵, 則軍情必甚喜矣。" 上曰: "監司可爲乎?" 成龍曰: "雖善爲者, 物力不足, 或事勢有所未及, 不如體察使之通諸道而爲之措處也。 金海梁山兩邑之間, 有三叉河七點山, 其下, 賊大作屯田, 又大作長廊, 以二十人作隊耕耘云。 賊若退去, 則其屯田可以收穫而爲兵糧, 而無人守之, 必爲土賊所收。 若使高彦伯守之, 則猶可爲, 而無糧道, 則軍人必有掠奪之弊, 勢不得保存矣。" 上曰: "誰可守之? 若賊退, 則不可不急急防守也。 近日水戰等事, 不得爲之者, 仍以失巨濟故也。 如熊川天城加德等處, 盡爲空虛之地, 亦不可不趁時入據。 若賊退, 則以李舜臣, 防守於巨濟可也。" 廷馨曰: "以全羅軍, 可以守巨濟矣。" 上曰: "雖全羅軍, 亦可卽往守之, 而但左水使, 以孤弱之軍, 何能守之? 如此難守之地, 不可不憂也。 無已則, 以李舜臣, 領其軍守大陣, 可也。 如釜山等大陣, 當以李舜臣守之, 而全羅水使, 可以他人代之。" 黃是曰: "慶尙道糧餉, 極可悶慮。 今年農事豐登, 而守令之公、私屯田最多, 自朝廷不可不處置。 私屯田, 其實因官力爲之, 亦當自朝廷處置也。" 李德馨進曰: "南方之事, 措畫者累年, 而無一事可成。 自上每敎以着實, 而凡百施爲, 徒爲文具而已。 且軍士之數, 已問於監司, 而至今無黑白。 不得已賊退之後, 若小浦則當爲合幷, 若形勢好處, 則亦可以據之矣。 如金海等處, 則最是沃饒之地, 若用力而耕作, 則不數年間, 可得兵食之有裕矣。 大槪慶尙道, 皆力農之地也。 將云: ‘何不收拾流散百姓, 盡力措置, 一以救活赤子, 一以儲峙糧餉乎?’" 廷馨曰: "伏聞監司, 待候天使, 勢難相及。 其於邊防大事, 不能總察。" 命元曰: "天使去留, 未可預料。" 德馨曰: "監司則然矣。 諸事, 都元帥所當經理。" 廷馨曰: "元帥則虛位而已。 元帥若擔當此事, 則不是深慮, 而今觀狀啓, 則只是傳通所聞而已。" 德馨曰: "元帥大失南方人心, 勢(雖)〔難〕 留在。 於一事言之, 七月留防, 六月(經)〔徑〕 出, 極可駭愕。" 上曰: "果是駭愕。 此必色吏所爲。" 上曰: "慶尙道, 無御史乎?" 成龍曰: "尹昉遞來後, 李時彦兼察其任矣。" 上曰: "體察使未下之前, 姑遣御史, 爲安撫之任, 俾無諸將侵擾之弊, 可也。 姑除從事官, 以安撫稱號爲當。" 上曰: "體察使若南下, 則必有經略之事矣。 但南方, 必經營處置, 然後乃可爲之。 予恐南方, 與平壤異矣。" 成龍曰: "上敎是矣。 元翼奉己甚薄, (禦)〔御〕 衆必以慈惠爲先, 其所往, 必得人心, 而但誠如上敎, 南方與平壤有異, 其得人心, 或不如在西之日也。" 上曰: "予前言於領相, 卿其記耶? 我國小鎭堡之布列於各處, 甚爲不關。 設使大賊來犯, 則如僉使ㆍ萬戶、權管輩, 以數少之軍, 何能當大賊之勢乎?" 成龍曰: "臣常謹記其上敎矣。 時, 罷藩鎭, 爲郡縣, 賊至一郡則一郡破, 賊至一縣則一縣破。 岳飛經理襄陽 樊城, 極其守禦, 兵絶其浮橋之路, 故臨安失守而破矣。 我國, 以慶尙道言之, 則釜山城, 不可不改築於山上; 東萊之城, 亦難防守。 以此言之, 東萊爲重。 如巨濟加德天城等處, 爲大鎭, 則庶可爲烟臺矣。 我國烽火軍, 不得傳通於遠者, 擧火之後, 卽爲下來故也。 中原則烟臺相望, 率妻子居生, 故烟臺通及於千里。 大槪釜山, 形勢不可守也。 自釜山東萊金海熊川, 當爲重鎭, 若守此重鎭, 可以禦賊矣。 中原之烟臺, 與我國不同, 其內可容妻子, 其制甚固, 雖賊來難觸。 我國之制, 亦以此爲法也。" 上曰: "我國之邊防諸事, 有同兒戲。 內邑則尤不可言也。" 上曰: "我國之人, 素不習將才, 予平日深以爲不可。 文人每云: ‘武才則非我輩所可務者’, 寧有是理? 姜太公諸葛亮, 豈武人? 杜預射不穿札, 而爲大將。" 成龍曰: "鍊將、鍊兵等事, 不可不講。 平安道外, 他餘外方則踈闊云, 正如上敎。 不習武藝, 不閑軍務而然也。 鍊兵不如鍊將矣。" 上曰: "空名告身之弊, 予旣知其虛僞奸濫矣。 王爵付之於一人之手, 予意則甚以爲不可也。" 成龍曰: "兵興之時, 不得已爲之。 非但空名告身, 軍功之弊, 亦如此。" 盧稷進曰: "空名告身, 所出之路甚多, 難以致察。" 上曰: "僞造空名告身者有之耶?" 永慶曰: "近日, 僞造印信者, 方推於刑曹矣。" 上曰: "敎師盡力敎鍊乎?" 德馨曰: "敎師逐日敎鍊, 作隊勸奬, 故殺手則比前大勝。" 上曰: "我國亦有陣法, 實出於聖算, 時時習陣, 使不忘之可也。 若致念於我國陣法, 則亦可以禦敵。 何必獨取於戚繼光之法乎?" 成龍曰: "戚繼光陣法, 大槪間花疊而動靜相隨, 專爲防而設也。 防則步兵勝於騎兵。 前日碧蹄之戰, 遼兵騎兵, 故倭人以步兵急趨, 遼兵見敗。" 德馨曰: "大槪禦侮之道, 不可以鳥銃當之。 以大砲與火箭用之。" 上曰: "賊若更發, 則中原火砲, 旣已學得, 又學我國弓射, 其勢莫能當也。 雖以上國之人, 猶可畏之, 況我國之褊小乎?"


    • 【태백산사고본】 39책 6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527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출판-인쇄(印刷)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전쟁(戰爭) / 군사-관방(關防)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기(軍器) / 외교-왜(倭)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