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에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다
오정(午正)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하였다. 특진관 행 판돈녕부사 정곤수(鄭崑壽) 【위인이 온아하고 인자하여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오직 구제해 주는 데에 마음을 썼다. 또 서적을 몹시 좋아하고 전고(典故)에 밝았으며 고금 세가(世家)의 족계(族系)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자손 중에 자기 선대를 몰라 와서 묻는 자까지 있었으니, 세상에서 정모 족보(鄭某族譜)라고 일컬었다. 다만 진솔(眞率)할 뿐 위엄이 적었으며 본디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없었으니, 어찌 난세의 재상이 될 만하겠는가. 】 지경연사 호조 판서 김수(金睟) 【도량이 좁고 세밀히 따지는 성격이다. 일찍이 영남의 방백이 되었을 때 변성(邊城)을 쌓고 군정(軍丁)을 군적에 올리는 일로 거듭 인심을 잃어 전 도민이 원망하여 ‘왜구들이 오는 것이 어찌 이리 더딘가?’ 하였다. 왜구가 이르자 사람들이 다 무너져 흩어졌는데 절제하여 수습하지 못했다. 당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김수를 참수하여 군정(軍情)을 위로하려고까지 했는데 김성일의 구원을 힘입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참찬관 우승지 유영순(柳永詢), 검토관 수찬 정경세(鄭經世), 전경(典經) 정자 윤의립(尹義立)이 입시하였다. 상이 김수에게 이르기를,
"접대 도감의 계사(啓辭) 중에 있는 동작진의 나룻배를 숨기라는 일에 대해서 판서는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아직 모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심상히 포착(捕捉)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난밤 나는 그 적중에서 정탐자가 왔는가 의심했으나 그 곡절을 깊이 추구하지 않았는데, 심유경이 몰래 왜노를 보냈을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고, 이어 접대 도감의 초기(草記)를 제시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정원도 정탐자가 왔는가 하고 의심했을 뿐 다른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유경이 왜노 2인을 보내어 정탐시켰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 왜인이 오다가 붙잡혔는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다가 돌아가면서 서로 만났는가? 만일 정탐하고 돌아갔다면 반드시 그 간교한 음모를 이룰 것이니, 몹시 통분하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초기로써 본다면 이미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한번 만난 것만이 아니고, 평시에도 적이 반드시 번번이 와서 정탐해 가지고 갔을 것이니, 우리 나라의 동정을 어느 것인들 모르겠는가."
하니, 유영순이 아뢰기를,
"만일 정탐했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과 사귀어서 했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중국옷으로 갈아 입으면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옷으로 갈아 입으면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다. 우리 나라 옷을 입더라도 식별할 길이 없으니, 남대문으로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알아서 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근간의 제향 절차를 신이 차제관(差祭官)에게 들으니,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상사기(常沙器)와 상종자(常鍾子)로 술잔을 대신하여 사용하는데 크고 작은 것이 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깨지고 너절하여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번에 예조의 공사(公事)를 보니 사옹원으로 하여금 기명(器皿)을 구워 만들게 한 일이 있었는데, 관원을 추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명은 또한 구워 만들 수 있습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크기가 고르지 않고 깨지고 너절하여 미안하다는 것은 과연 영순이 아뢴 것과 같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정결하게 개비(改備)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영순이 아뢰기를,
"각 능소(陵所) 주변의 촌가에서 빌려 쓰는데 솥과 수저까지도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거칠고 불결하여 체통을 이루지 못하니 이러한 기명은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이 또한 해조에 말하여 개비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지난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던 때에 능(陵) 아래의 주민들은 모두 굶주려 구걸하였고 죽은 사람의 고기로 연명하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기명을 차용하여 제향에 쓰니 그 불결함은 차마 형언하기 어렵다. 양양(洋洋)히 하늘에 계신 선령들도 어찌 흠향하러 내려오겠으며 명명(冥冥)한 가운데 가호하겠는가, 애통하다. 】 정곤수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헌관(獻官)으로서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도 직접 보니, 기명 등의 물건이 참으로 미안하였는데 지금까지 역시 제기가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상하가 결연히 검소함을 숭상해야 될 때를 만났으니, 상께서 먼저 검소한 덕을 숭상한다면 공경 대부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검소함을 숭상할 것이어서 재용이 저절로 넉넉해질 것입니다. 옛날 위 문공(衛文公)이 거친 베옷과 거친 명주의 갓으로 검소의 덕을 밝게 보였으므로 초년에는 혁거(革車)가 30승(乘)이었는데 말년에는 3백 승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것은 비용을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 결과였습니다. 지금 잔파된 나머지에 온갖 것이 탕진되었고 변두(籩豆)와 기명도 갖추지 못했는데 수라상에 은그릇을 쓰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니 사기 그릇으로 대용해야 합니다. 또 반드시 애통해 하는 교서를 여러 번 내리고 모든 일을 평소보다 줄인다면 백성이 일푼의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재용이 넉넉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종묘의 제기를 점차로 갖추는 것도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정경세가 나아가 아뢰기를,
"정곤수가 아뢴 말이 매우 훌륭합니다. 내정(內庭)의 일은 외인이 알기 어려운 바라서신이 감히 내간의 의복과 수라 【어선(御膳)이다. 】 가 어떠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님은 거(莒)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말라.’164) 고 했습니다. 상께서 관서에 계셨을 때를 명심하신다면 토적(討賊)하고 복수함에 있어 그 생각을 조금도 해이하게 가지지 못하실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상방(尙方)에서 바야흐로 은그릇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외간에 들리는 말이 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런 일이 있다면 또한 이때에 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윤의립이 아뢰기를,
"환도한 뒤로 연달아 사고가 있어 한번도 종묘에 친히 제사지내지 못하셨으니 더욱 미안합니다. 서늘한 가을을 기다려 친히 제사지내심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종묘를 사가(私家)에 설치했는데 지세가 협착합니다. 친히 제사지내신다면 예절을 이루지 못할 것이어서 거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윤의립이 아뢰기를,
"친히 제사지내야 될 것인지의 가부만을 논할 일이지 지세가 좁은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환도한 뒤로 아직까지 친히 제사지내시지 않은 것은 과연 온당치 않으니 대행(代行)시키더라도 폐지해선 안 됩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역경(易經)》에, 일을 할 때는 처음에 잘 꾀하라고 했으니, 모든 일은 처음에 잘 꾀하지 않아선 안 됩니다. 행장(行長)이 철병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조처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이때에 대신과 상의하여 미리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행장이 만일 물러가서 통신사 보내기를 강요한다면 우리 나라는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저 적들은 바로 만세토록 불공 대천의 원수이니, 이치상 다시 통신사를 보낼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통신사의 설이 이미 나왔는데 지금 만약 통신사를 보낸다면 천지간에 어떻게 다시 얼굴을 들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러한 일들은 조정이 미리 강구하여 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이미 봉왜(封倭)를 청했는데 달리 또 무엇이 부끄럽겠는가."
하자, 정경세가 아뢰기를,
"일을 처음에 잘 꾀하지 않았기에 번번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래서신이 이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풍신수길(豐臣秀吉)을 봉한 고명(誥命)에 ‘조선 국왕이 너를 위하여 대신 청했다.’는 말이 있다. 원수인 왜적을 위하여 총장(竉章)을 청하기까지 했는데, 유독 통신사를 아낄 것인가. 내 뜻에는 그리해선 옳지 않을 듯하다. 만일 황제가 칙서를 내려 통신사를 보내게 한다면 우리 나라는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황명(皇命)을 어기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이 점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시비를 의논하는 사이에 갑자기 결정하여서 마침내 이러한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아마도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이른바 ‘기미(羈縻)’라는 것은 우리 나라가 곤경에 몰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렇게 구차히 미봉(彌縫)하는 계책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 만세 불공 대천의 원수는 진실로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국력을 기르며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뒷일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지금 만약 통신사를 보낸다면 국력을 기르며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왜노가 왕래하면 반드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많을 것이니 평시에도 오히려 지탱하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지금 잔파한 지방이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대신의 말을 들으니, 통신사를 보내는 것은 동쪽집의 담을 넘어가 그 집의 처녀를 꾀어내는 짓과 다름이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다는데 이 말이 꼭 맞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길을 위하여 중국 조정에 청하여 총장(竉章)을 베풀도록 하기까지 했으니, 어찌 친영(親迎)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청봉(請封)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중국이 고집을 부려 이렇게 말했으니, 통신사 문제는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신사에 대해 예부(禮部)가 성지(聖旨)를 제본(題本)하거나 병부(兵部)가 협박하여 들여보내게 하여 칙서가 내려오게까지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이왕의 일은 다시 말할 것이 없으나 당초에 김응서(金應瑞)를 죄주었던들 지금 또한 할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처음에 잘 꾀하지 못했으니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서를 내리지는 않더라도 성지가 병부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이자(移咨)하여 통신사를 보내게 한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면 할말이 있으나 우리가 이미 먼저 잘못하였으니 병부의 말까지도 필요없이 심 유격의 말이라도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종전에 말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일도 알 수 있습니다. 왜적이 멀리 우리 나라 변방에 떨어져 있으면서 중국에 요구하는데도 중국에서는 뒤질세라 그 요구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심유경(沈惟敬)이 왜의 군영에 선유(宣諭)하고 중국 사신이 왕경에 와서 머문 뒤에 행장이 관백에게 면품(面稟)하겠다고 말을 하고 비로소 돌아갔는데, 품하지 않고 곧장 중국 사신을 요청했으니 이것은 불경(不敬)한 것이요, 이미 품하고서 지금 와서 말을 바꾸었으니 이것은 간교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힐책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요구를 들어 주었으니, 중국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관원이 소서비(小西飛)를 경대(敬待)하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입니다. 사관(舍館)을 처음 정하던 날에 유경이 그 하처의 포진(舖陳)을 다 거두어 보냈고 소서비가 또 거처가 좁다고 화를 내자 유경이 자기가 들었던 집을 내주었으니 소서비가 중국에서도 매우 공경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황신(黃愼)의 장계를 보건대 수길이 크게 기뻐했다고 했으니, 신의 생각에는 봉작을 허용해 준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중국 조정을 기만한 것을 기뻐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과거에 우리 나라가 통신사를 보내려 할 때 의지(義智)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했으니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때에 통신사를 보낸 것도 또한 실책이었는데 하물며 오늘날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통신사는 우리에게 잘못이 없었지만, 지금은 왕장(王章)을 천하의 적에게 베풀었으니 큰 도둑에게 상을 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의리가 완전히 끊어지게 된 것이다."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수길은 곧 찬탈하고 시해한 도적입니다. 따라서 그때 통신사를 보낸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맞다. 지금 통신사 문제를 병부에서 이자하거나 성지를 내려보내도록 재촉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오늘 강구할 일은 이것일 뿐 다른 것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병부의 이자만이라면 그래도 사피할 수 있겠으나 성지를 내린다면 대단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에 하나라도 왜적이 중국 사신을 억류해 놓고 조선 통신사도 함께 오라고 하고 게다가 다시 준엄한 성지가 있다면 이것은 난처한 일이니 염려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적이 만일 ‘그대 나라는 처음부터 전심(專心)으로 사대(事大)해 왔는데 어찌해서 상국의 말을 따르지 않는가?’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조정이 이에 대해 미리 강구하여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데도 필경에 통신사를 보낸다면 이것은 원수들에게 놀아나는 것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유영순이 아뢰기를,
"이런 방법으로 보존할 수 있다 해도 오히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런 식으로 해서 제대로 보존한 예가 없는 데이겠습니까."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지난번 포수(砲手)·살수(殺手)의 시재 단자(試才單子)에 ‘토적 복수(討賊復讐)’ 4자를 써서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상께서 이렇게 마음을 쓰시는데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본받지 못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도 온당치 않다. 우리 나라는 마침내 적과 통호(通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말이 어떠한가? 이 적은 불공 대천의 원수이나 천만세토록 이웃 나라가 되어 번번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끝내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그 형세가 마침내 반드시 통호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6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07면
- 【분류】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사법-치안(治安)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註 164]거(莒)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말라.’ : 무망 재거(毋忘在莒)의 풀이로 곤난했던 시절을 잊지 말라는 뜻. 제 환공(齊桓公)이 공자(公子) 시절 왕위 계승전에서 공자 규(公子糾)를 편들던 관중(管仲)에게 거(莒)에서 허리띠에 화살을 맞았다. 왕위에 오른 뒤 관중을 재상으로 중용하자 관중이 어느 술자리에서 어려웠던 옛일을 잊지 말라고 깨우쳐 준 고사. 《관자(管子)》 권12 소칭(少稱) 33.
○午正, 上御別殿, 講《周易》。 特進官行判敦寧府事鄭崑壽、【爲人溫雅, 過於慈仁, 人無知與不知, 唯以救濟爲心。 且酷愛書籍, 備(請) 〔諳〕典故, 古今世家族係, 亦無不通, 至有子孫, 不知其先係而來問者, 世稱鄭某族譜。 但眞率少威重, 素無弘濟之才, 豈足爲亂世之宰輔乎?】 知 經筵事戶曹判書金睟、【局量褊狹, 未免察察。 嘗爲嶺南方伯, 以築邊城, 籍軍丁, 重失人心, 一道之人怨之曰: "倭寇來何遲?" 及倭寇至, 人皆潰散, 而莫能節制收拾。 時(郭再佑) 〔郭再祐〕 , 以義兵起, 至欲斬睟, 以慰軍情, 賴金誠一之救解, 得免於死。】 參贊官右承旨柳永詢、檢討官修撰鄭經世、典經正字尹義立入侍。 上謂金睟曰: "接待都監啓辭中, 銅雀藏船事, 判書知之乎?" 對曰: "臣未得知之矣。" 上曰: "蓋非尋常捕捉事也。 去夜予疑其賊中偵探者來, 而未究其曲折。 豈料沈惟敬, 暗送倭奴乎?" 仍以接待都監草記示之。 柳永詢啓曰: "政院亦疑偵探者之來, 而未料其他。" 上曰: "沈惟敬送倭二人偵探云, 甚可駭也。 此倭方來而見捉乎? 旣到此還歸而相遇乎? 若偵探而還歸, 則必遂其奸謀, 痛心痛心。" 金睟曰: "以草記見之, 似是旣來而還歸矣。" 上曰: "非特此一遭爲然, 平時賊必每來偵探而去也。 我國動靜, 何事不知?" 柳永詢曰: "如或偵(採)〔探〕 , 必交我國人而爲之。" 金睟曰: "變着唐服, 則誰能知之?" 上曰: "變着唐服, 則無處不行矣。 雖着我國之服, 無由識別, 入于南大門, 豈能知而禁之乎?" 柳永詢曰: "近間祭享節次, 臣聞之于差祭之官, 則宗廟行祭時, 以常沙器、常鍾子, 代爵用之, 非徒大小不均, 破陋未安。 頃見禮曹公事, 有令司饔院, 燔造器皿之事, 至於推考官員。 如此器皿, 亦可燔造也。" 金睟曰: "大小不均, 破陋未安, 果如永詢之所達。 令該曹, 精潔改備, 何如?" 柳永詢曰: "各陵(氐)〔底〕 村家, 借而用之, 至於釜鼎、匙筯, 亦莫不然, 麤陋不潔, 不成貌樣, 此等器皿, 極爲未安。 亦言于該曹, 使之改備何如?"【當上年, 人相屠食之日, 陵(氐) 〔底〕居人, 率皆飢饉丐乞, 以死人之肉, 爲命者也, 而借用器皿, 以供祭享, 其爲不潔, 有難忍言。 洋洋在天之靈, 亦豈陟降庭止, 而默佑於冥冥之中也? 痛哉!】 鄭崑壽進啓曰: "臣以獻官, 行祭于宗廟時, 亦親見之, 器皿等物, 誠爲未安。 方今祭器, 亦嘗不備, 上下固當刻意崇儉之秋, 自上若先崇儉德, 則公卿大夫以至庶人, 莫不崇儉, 而財用自足矣。 昔衛文公, 以大布之衣、大帛之冠, 昭示儉德, 故初年革車三十乘, 而季年至於三百乘云。 此節用崇儉之所致也。 今當殘破之餘, 百物蕩盡, 籩豆器皿, 亦不能備, 則銀器之用於御供者, 固爲不可, 當以沙器代之。 又必屢下哀痛之敎, 而凡事減損於平日, 則民可以得蒙一分之惠, 而因此亦可足用矣。 如此則宗廟祭器, 次次漸備, 亦何難之有?" 鄭經世進曰: "鄭崑壽啓達之言極好。 內庭之事, 外人所難知。 臣不敢知內間衣服、水剌 【御膳也。】 之何如, 而古人有言曰: ‘願君(母忌)〔毋忘〕 在〈莒〉 之時。’ 自上若以在關西之時爲心, 則其於討賊復讎, 自不敢少弛其思慮也。 臣竊聞尙方, 方造銀器云。 外間所聞之言, 雖未知其皆實, 而若果有之, 則亦非此時所可爲者也。" 尹義立啓曰: "還都以後, 連有事故, 一未得親祀於太廟, 尤爲未安。 待秋涼親祀, 恐爲合當。" 金睟曰: "太廟設於私家, 地勢狹窄。 若親祭, 則不能成禮, 似難行矣。" 尹義立曰: "只論親祀當否, 地勢狹窄, 非所論也。" 鄭崑壽曰: "還都之後, 尙未親祭, 果爲未安。 雖使代行, 亦不可廢也。" 鄭經世曰: "《易》曰: ‘作事謀始。’ 凡事不可不謀始。 行長若或撤兵, 則前頭必多有措處之事。 須及此時, 與大臣商議預定可也。 行賊若退, 而强要通信使, 則我國終將何以處之? 彼賊乃萬世不共戴天之讎, 更遣通信, 決無是理, 而信使之說, 旣已發端。 今若遣使, 則天地間, 更擧何顔? 臣意如此等事, 朝廷當預爲講定。" 上曰: "此則不然。 旣請封倭, 他又何愧?" 鄭經世曰: "事不謀始, 每每如此。 此臣所以云云者也。" 上曰: "封秀吉誥命, 有曰: ‘朝鮮國王, 爲爾代請。’ 爲讎賊至請寵章, 而獨惜通信使乎? 予意恐不宜如此。 萬一, 皇帝降勑, 使送信使, 則我國以何說辭? 若不從, 則是違逆皇命, 亦豈可乎?" 鄭經世曰: "臣以(比)〔此〕 爲懼矣。" 上曰: "大槪議論是非間, 忽然定之, 而終至於如此, 疑必有使之然者矣。" 鄭經世曰: "所謂羈縻者, 以我國迫不得已, 爲此苟延之計而已。 其萬世不共之讎, 固未嘗忘也。 我國生聚訓鍊, 將以圖後事, 而今若通信, 則生聚訓鍊, 亦奚用哉? 且倭奴往來, 必多貽弊之事。 在平時猶難支, 況今殘破地方, 何以能支? 臣聞大臣之言, 或以爲: ‘通信使, 無以異於踰東家墻, 而摟其處子。’ 此言政好。" 上曰: "爲秀吉, 請于天朝, 至加寵章, 豈可謂之親迎乎?" 鄭經世曰: "我國不言請封, 而中國之執言如此。 通信一事, 尤不可不愼。" 上曰: "通信使, 或禮部題本、聖旨、或兵部, 迫脅入送, 至於降勑, 則何以爲之?" 鄭經世曰: "已往之事, 不須更言, 而當初若罪金應端, 則今亦可以有言矣。 旣不能謀始, 其何說之辭?" 上曰: "雖不至於降勑, 聖旨若令兵部, 移咨於我國, 使之通信, 則何以答之?" 鄭經世曰: "在我無失, 則可以有言, 而我旣先失, 不必兵部之言, 雖沈遊擊之言, 亦不能拒矣。 臣之所以從前多費辭說者此也。 且中原之事, 亦可知也。 此賊邈在我國邊上, 要索中原, 而中原聽命, 猶恐不及。 沈惟敬宣諭倭營, 天使進駐王京之後, 行長乃以面稟爲辭, 方始入歸。 不稟而徑請天使, 則是不敬也; 旣稟而到今變辭, 則是姦狡也。 中原所當詰責, 而反聽命焉, 中原之事, 可知也已。 聞唐官敬待小西飛。 當舍館初定之日, 惟敬盡撤其下處鋪陳而送之, 小西飛又怒居處之狹窄, 惟敬以其所入之家許之。 小西飛之見敬於中原, 亦必多矣。 觀黃愼狀啓, 秀吉大喜云。 臣以爲非喜許封, 喜其欺瞞天朝也。 往時, 我國將送通信使, 義智聞其言而大悅云, 何以異也? 其時通信使, 亦爲失策, 況今日乎?" 上曰: "其時通信使, 在我無失; 今則王章, 加於天下之賊, 可謂賞大盜也。 義理斁絶矣。" 鄭經世曰: "秀吉, 乃簒弑之賊, 故其時送通信使, 亦以爲失也。" 上曰: "此言則是也。 今之通信一事, 兵部移咨, 或 聖旨催送, 則何以處之? 今日講究者, 只此而已。 他不須言也。" 金睟曰: "只有兵部之咨, 則猶可以辭, 若進於此, 則似甚難矣。" 上曰: "萬分有一, 賊或留天使, 使與朝鮮使臣偕來, 而其間更有聖旨之嚴峻, 則此難處而可慮者也。" 鄭經世曰: "賊若謂, ‘爾國自初專心事大, 而上國之言, 何不聽從?’ 云云, 則此最可虞。 朝廷於此, 不可不預爲講定也。 如此而畢竟送通信使, 則是未免爲讎人之役也。" 柳永詢曰: "用是保存, 猶不可爲。 況未有若是而能保存者乎?" 鄭經世曰: "臣聞頃日砲、殺手試才單(字)〔子〕 , 御書 ‘討賊復讎’ 四字而下云。 自上存心如此, 而在下之人, 不能體之, 豈不痛哉?" 上曰: "此言亦未安。 我國終不得不與賊通好。 予言何如? 此賊乃不共之讎, 而千萬世作爲隣國, 每每如是, 則終豈能拒之?" 金睟曰: "其勢終必至於通好矣。"
- 【태백산사고본】 38책 6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07면
- 【분류】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사법-치안(治安)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