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62권, 선조 28년 4월 19일 신유 9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정원이 비변사가 항왜를 공초한 것으로 아뢰다

정원이 비변사가 항왜(降倭)를 공초(供招)한 것으로 아뢰기를,

"신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역관 박대근(朴大根)과 함께 가서 항왜인 조사랑(助四郞)·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을 공궤(供饋)하고 그 사정을 탐문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지난해 1월에 처음 바다를 건너서 각각 주장(主將)을 따라 제포(薺浦)에 주둔하고 있는 행장의 관하(管下) 장수인 유마수리 대부(有馬修理大夫)에게 예속되거나 혹은 평호도 법인(平戶島法印)에게 예속되었으며, 혹은 동래(東萊)에 주둔한 수하(樹下) 등 장수의 군대에 예속되었었다. 그런데 수자리를 괴롭게 여기던 즈음에 조선이 후히 대접하다는 소식을 듣고 항시 도망하여 오고자 하였으나 실정을 알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중 금년 3월 경에 전라 병영(全羅兵營)의 한 군관(軍官)이 매[鷹]를 가지고 칼과 바꾸기 위하여 행장의 진영에 와서 우리들을 유혹하기를 「너희들이 내 말을 따라 우리 진영에 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 하였다. 우리들은 그의 말을 믿고서 나왔는데 진중에 도착하던 날 병사(兵使)가 말하기를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너희들은 상경(上京)한 뒤에 반드시 극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믿어 의심치 말고 상경하라. 」 하였다. 우리들은 이미 조선에 항복하였고 죽고 사는 것도 조선에 달려 있으므로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상경한 것으로 특별히 다른 뜻은 없다. 다만 지난번 모산일고(模山日高) 등은 그 음모가 정말 흉악하여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때문에 우리들은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이곳에 머물 수 있으면 머물게 해주고 이곳에 머무를 수 없으면 좋은 곳으로 보내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에 위문하기를 ‘너의 말을 듣고 보니 범상한 왜인들이 아니라 가련한 생각이 든다. 너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아는가? 일본이 군대를 일으킨 전후 사정을 듣고자 한다.’ 하니, 조사랑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지금 관백(關白)은 본래 시골 출신으로 용맹을 과시하고 싸움을 좋아하였는데 관백에 봉해진 이후론 제 마음대로 9주(州)를 정벌하니 9주의 사람들이 모두 따랐고, 또 관동(關東)을 정벌하니 관동 사람들도 모두 바람에 휩쓸리듯 따랐다. 관백이 항시 스스로 자랑하여 말하기를 「공략하면 반드시 취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일본 66주가 이미 모두 나에게 돌아왔으니 비록 죽더라도 마음이 상쾌하다. 」 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의지(義智)를 불러서 묻기를 「조선은 나라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하니, 우리가 명나라와 통호(通好)하는 것을 따르겠는가. 」 하니, 의지가 처음에는 쉽게 대답하였으나 나중에는 조선과 우호를 맺을 수 없다 하여 관백에게 말하기를 「명나라와 통호하려면 먼저 조선을 공략해야 명나라와 통하는 길을 얻을 수 있다. 」 하였다. 이 때문에 관백은 의지와 소서행장(小西行長)·가등청정(加藤淸正)·흑전장정(黑田長正) 등을 선봉장으로 정하여 내보냈는데, 조선이 싸울 능력이 없어서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고, 명나라도 강화를 말하여 서로 강화를 맺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 후에 오래도록 서로 버티면서 관백이 회군(回軍)하려고 하지 않아, 제장(諸將)들이 회군하기를 고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선 인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질이 재신(宰臣)이나 금중(禁中) 사람이 아니면 철병하지 않겠다는 말을 우리들이 자세히 들었다. 만약 이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철병하고 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관백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될는지 헤아릴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행장은 이 일은 말하지 아니하고 준봉(准封)이니 준공(准貢)이니 라고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관백의 속셈은 토지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 및 조선과 통호(通好)하여 만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행장 등은 통호를 말하여 관백의 뜻을 받들고 힘써 강화를 도모하면서 이곳에서 여러 해를 머물고 있는 것이며, 청정과 제장들은 이 때문에 서로 사사로이 미워하는 것이다. 만약 행장이 통호하지 못하면 우선 관백의 주륙을 면하기 어려우므로 항상 온순한 말로 심 유격을 꾀이고 있는 것인데, 명나라가 어찌 이 사람의 음흉하고 패악한 정상을 알겠는가. 청정의 말은 관백의 마음에 통할 수 있고 제장들은 모두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니, 화사(華使)가 도착하는 날 행장이 제장들과 함께 관백에게 잘 보고하면 철병할 이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도 억측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일본은 물력(物力)이 옛날과 변함이 없고 백성중엔 원망하고 억울해 하는 사람이 없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본 풍속은 농부는 밭을 갈고 무사는 용기를 기르며 군대는 관의 곡식을 먹으니, 군대를 일으킨 지 오래 되었어도 물력은 옛날과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백성은 군량을 운반하기에 바쁘고 요역(徭役)이 몹시 심하여 모두가 원망하고 괴로워하는데 위엄에 눌려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관백은 나이가 얼마나 되었으며 자녀는 두었는가?’ 하니 ‘나이는 59세이고 지난해 관동(關東)을 정벌할 때 3세된 아이가 죽었다. 그 뒤에 젊은 부인을 얻어서 2세 된 아이를 두었는데 이름은 약군(若君)이라고 한다. 그리고 관동주(關東主) 삼하가안(三河家安)의 아들 금오(金吾)란 자는 나이가 17, 18세인데 양자로 맞아 축전주(筑前主)를 삼았고 또 소한천융경(小旱川隆景)의 14, 15세 된 딸을 양녀로 삼아 금오와 결혼을 시켜서 근거를 굳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군량미와 군대의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지역은 어느 곳이 견고하고 어느 곳이 허술한가?’ 하니, ‘명호옥(名護屋)에 창고를 설치하여 각영(名營)에서 먹는 군량을 운반하는데 거의 떨어질 때가 없다. 군대의 수효는, 지금 강화를 하는 중이라 군대를 증강시키지 않고 예전 군대만 거느리고 있는데 조금씩 본토로 돌아가게 하여 현재 관할하는 군대 중에서 1만 명이라고 하는 곳은 겨우 7, 8천 명이 있고 5천 명이라고 하는 곳은 겨우 3천 명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처음에 비하여 매우 적어진 것이다. 만일 수륙(水陸)으로 동시에 진격하지 않는다면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니 수군(水軍)을 절영도(絶影島) 외양(外洋)에 두루 배치하거나 여러 섬에 정박하여 그들의 보급로를 끊어서 정예병을 요충지에 매복시키고 대오를 나누어 진을 쳐서 크게 위세를 펼쳐 즉시 공격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지(義智)가 주둔하고 있는 제포(薺浦)죽도(竹島)·동래(東萊) 등의 영(營)이 허술한 것 같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희들은 무슨 기능이 있는가?’ 하니 ‘우리들은 본래 포수로서 탄환을 쏘고 화약 만드는 법을 조금 알 뿐이고 특별히 다른 기능은 없다. 다만 일본 공장(工匠)이 조총 구멍을 뚫을 때 두 사람이 마주하여 3일을 뚫으면 한 자루는 뚫을 수 있었다.’ 하였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탄환을 쏘고 화약을 배합하는 법은 훈련 도감 낭청과 신이 일시에 자세히 묻고 오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6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85면
  •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政院, 以備邊司降供招, 啓曰: "臣持酒饌, 與譯官朴大根, 往饋降 助四郞老古汝文等十一名, 而探其事情, 則對曰: ‘俺等, 上年正月, 始渡海, 各隨主將, 或隷薺浦, 屯行長管下將有馬修理大夫, 或隷平戶島 法印, 或隷東萊樹下等將之軍, 而苦戌之際, 聞朝鮮厚接, 每欲逃來, 實未知其情而未然焉。 今年春三月間, 有一全羅兵營軍官者, 以鷹換釰事, 來赴行長之陣, 而誘俺等曰: 「汝等從我言, 出到我陣, 則必有好事。」 俺等信其言而出來, 到陣中之日, 兵使有言曰: 「此處不可留矣。 汝等上京, 然後必有極好。 信勿疑訝而上京。」 云云。 俺等, 旣降於朝鮮, 而死生亦在於朝鮮, 故不敢辭上京, 別無他意。 但頃者, 模山日高等, 其謀果兇, 而至於見殺, 以此俺等, 不勝惶恐。 可以留此則留, 不可以留此, 則送之好地, 是望焉。’ 且慰且問曰: ‘觀汝言, 聽汝言, 非是凡之類, 於我心有憐焉。 汝亦知我憐汝之心乎? 願聞日本興兵始末事情。’ 則助四郞叩頭對曰: ‘今關白, 本以草野之, 賈勇好戰, 自封關白之後, 擅征九州, 九州之人, 莫不隨降, 而又征關東, 關東之人, 亦皆從風。 關白, 自矜常語曰: 「攻必取, 戰必勝, 非我而誰? 日本六十六州, 悉已歸我, 雖死亦快矣。」 且招對馬島義智, 問: 「朝鮮兵强國富, 其從我通好於大明否?」 義智, 初易對, 而終不得結朝鮮之好, 乃言于關白曰: 「欲通好於大明, 則先攻朝鮮, 乃可得通大明之路。」 以此關白, 定義智行長淸正長正等, 先鋒將出送, 朝鮮亦不能力戰, (籍)〔藉〕 兵於大明大明亦以講好爲言。 相結講好之約後, 相持日久, 關白不肯回兵, 諸將雖告欲回, 而不得, 是以姑待質人之來矣。 質人, 若非宰臣、禁中之人, 則不可撤兵云, 俺等細聽矣。 此事若不成, 則撤與不撤, 專在關白, 不可料也。’ 更問: ‘行長不言此事, 而只言準封、準貢, 此何意思也?’ 對曰: ‘關白本意, 非愛土地, 欲得大明朝鮮通好, 以爲萬世之流名。 故, 行長等, 以通好爲言, 而承其關白之意, 勉圖講和, 留此多年。 淸正與諸將, 以此私相疾憎。 行長若不得通好, 一則事難免關白之誅, 每以溫言, 誘之於沈遊擊, 大明豈知此人兇悖情狀乎? 淸正之言, 可近於關白之胸, 而諸將皆願還歸, 華使到日, 行長與諸將等, 報好關白, 則不無撤兵之理。 然此事, 亦不可臆度。’ 云云。 又問: ‘日本物力依舊, 而百姓無怨抑乎?’ 對曰: ‘日本之風, 農者耕; 武者養勇; 軍食官廩, 雖曰動兵已久, 物力依舊, 而百姓運糧奔走, 徭役繁甚, 莫不怨苦, 而怯威, 莫敢出口矣。’ 又問: ‘關白, 年歲幾何, 而有子女否耶?’ 對曰: ‘年五十九。 上年, 自征關東之時, 三歲之兒死, 其後娶少婦, 有二歲兒, 名曰若君。 且關東三河家安金吾, 年可十七八者, 爲養子, 而爲(築前)〔筑前〕 主。 且小旱川隆景之女, 年可十四五者, 爲養女, 而使金吾結婚, 固根。’ 云。 又問: ‘軍糧軍數幾何, 堅瑕何地乎?’ 對曰: ‘名護屋設倉運糧, 各營所食乏餉, 庶無之時, 而軍數, 則今方講好, 不曾添兵, 只帶前兵, 而稍稍使還本土, 今之管萬兵云者, 僅有七八千; 管五千云者, 僅有三千。 以此思之, 則比初甚少矣。 如非水、陸竝進, 其勢似難, 浹舟師中流, 絶影外洋, 而或泊諸島, 以絶其糧道, 以精銳之卒, 伏兵於要衝之地, 分運設陣, 大張聲勢, 登時攻擊, 則可得乘勝矣。 且薺浦 義智所在之營及竹島東萊等營, 似瑕。’ 云云。 又問: ‘汝等有何技能乎?’ 對曰: ‘俺等, 本以砲手, 稍解放丸合藥, 別無他技。 但日本工匠鑽鳥銃之穴, 則兩人對鑽三日, 得鑽一柄。’ 云。 且其放丸合藥之規, 則訓鍊都監郞廳與臣, 一時詳問而來矣。" 答曰: "知道。"


  • 【태백산사고본】 37책 6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85면
  •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