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을 강하고, 중국 교사의 작폐·도원수의 교체 등을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특진관(特進官) 정곤수(鄭崐壽)·한준(韓準), 참찬관(參贊官) 유영순(柳永詢), 시강관(侍講官) 황시(黃是), 검토관(檢討官) 정경세(鄭經世), 가주서(假注書) 정수(鄭數), 기사관(記事官) 김신국(金藎國)·윤휘(尹暉). 】 《주역》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한준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전번 관서(關西)를 왕래할 때에 교사(敎師)의 행차를 만났는데 작폐가 한없이 많았습니다. 쇄마(刷馬)를 점고해 물리쳐서 반드시 명주[紬]를 받은 뒤에야 그만 두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평양에서 만났는가?"
하자, 한준이 아뢰기를,
"봉산(鳳山)과 황주(黃州) 사이에서 만났습니다. 봉산에서는 명주 5필을 지급하고 황주에서는 명주 6필을 지급했다 합니다. 또 중국 관리가 쇄마의 숫자를 많이 정하여 작폐할 자본으로 삼되 1필의 말에 명주 1필을 준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한준이 아뢰기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모 수비(毛守備)가 서흥(瑞興)을 지날 때 그곳의 주쉬(主倅)가 단지 지속(紙束)만을 주었더니, 그는 ‘전일 이곳을 지날 때 머물러둔 말값의 청포(靑布)를 반드시 다 지급하라.’ 했다는데, 이른바 ‘말값’이란 거짓말인 것입니다."
하고, 정곤수가 나아가 아뢰기를.
"교사가 나올 때는 으레 도망간 병졸을 데리고와 요식(料食)을 과도하게 받으려고 획책합니다. 신이 비변사에서 자문(咨文)과 수가 다른 상황을 물어서 알았습니다. 전일에 접반사(接伴使) 한응인(韓應寅)이 상중에 있은 뒤로 신이 그를 대신하여 나올 때 소신의 말을 중국 군사가 또한 빼앗기에 신이 ‘나는 바로 이 제독(李提督)의 접반사로 나온 사람이다.’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바로 송 경략(宋經略)의 차인(差人)이니, 이 제독은 모른다.’ 하였는데 그가 실은 이 제독의 하인이었습니다. 항간에서 작폐하고 인명을 사살하는 것은 반드시 산골짝 길을 경유하면서 자행하는데, 어찌 한준이 본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또 사 사신(司使臣)이 동파관(東坡館)에 당도하였는데, 봉공(奉供)할 물자를 모두 빼앗아 갔기 때문에 간신히 지대(支待)하였습니다."
하고, 정경세가 나아가 아뢰기를,
"중국 사람의 작폐는 실로 통사(通事)·방자(房子) 무리들이 유인한 바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번에 들은 서로(西路)의 통사가 작폐한 일은 극히 한심하였습니다. 통사가 중국 관을 따라 돌아올 때 가속을 많게는 5∼6명 정도나 거느리고서 공곡(公穀)을 먹이고 공마(公馬)에 싣되, 짐바리 수가 매우 많아서 불법으로 침탈을 자행하였습니다. 신이 전번에 정언으로 있을 때 아뢰어서 죄를 다스리려 하였는데 대신에 대해 논하느라 다른 것은 거론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아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항왜의 작폐도 모두 우리 나라 사람이 한 짓이라 합니다."
하고, 황시는 나아가 아뢰기를,
"신도 종사관(從事官)으로 해서(海西)에 가서 들으니, 중국 사람이 침탈하여도 우리 나라는 금지시키지 못한다 하고, 해서는 각읍마다 지대(支待)하는 일을 날짜별로 배정하나, 배정받은 고을에서는 마치 월(越)나라가 진(秦)나라 보듯이081) 하여 주관한 고을만이 치우치게 그 괴로움을 받음으로써 결국 탕진하여 한 해도 안 되어 버티지 못하게 된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폐단은 그렇다마는, 경연 중에는 이렇게 말해도 밖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중국 관원이 들으면 반드시 미안하게 여길 것이니, 중국 군사가 우리 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어찌 적은가. 지금 만일 사람마다 말을 하여 그 일이 중국 장수의 귀에 들어 간다면 참으로 온당치 못하니, 참작해서 말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한준이 아뢰기를,
"신이 황주를 왕래할 때 들으니, 전의 목사 이경준(李慶濬)은 선정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가 재주가 있음을 알고 특별히 병사(兵使)를 겸하도록 하였는데, 금방 논박을 받아 체직되었으니, 어찌 전에 선정을 베푼 사람을 갑자기 파직할 수 있는가. 저번에 비변사가 서용하기를 청하여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임용하려 하였는데, 징치(懲治)의 의의가 없으므로 내가 따르지 않았다. 이처럼 쓸 만한 사람을 논박하여 체직시키기까지 하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황주에서 선정을 베푼 것은 사실이나, 병사는 수령과 사체가 달라 한 도의 주장(主將)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가 매우 적고 경력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이 경외(敬畏)하지 않았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외하지 않은 것은 이경준의 죄가 아니다."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막혀서 남들의 말이 있게 되었고, 그도 역시 과실이 있음을 면치 못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도 잘못한 바가 있었는가?"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그는 목사로 있을 때 태만하였고, 끝내는 또 병이 있어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소한 사람이 무슨 병이 있는가?"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그는 바로 이증(李增)의 아들입니다. 신과 이증은 함께 금부 당상으로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 들으니 지금도 쾌차하지 못하다 합니다. 당초에 파산(罷散)082) 이 된 것으로 인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한준은 아뢰기를,
"병사가 되었을 때 처사가 엉성하였기 때문에 남의 말이 있게 된 것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큰 그릇에는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정곤수에게 이르기를,
"원수의 사람됨을 경은 아는가?"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나이가 서로 같기 때문에 관학(館學)083) 에서 범연하게 서로 보았고, 소신이 승지로 있을 때 권율이 승문원(承文院)의 참하관(參下官)으로 있으며 정원에 자주 왔기 때문에 또한 보았으나 실로 그 사람의 그릇은 잘 모릅니다. 단 영유(永柔)084) 에서 특명을 내려 원수를 삼을 때 윤두수(尹斗壽)가 이항복(李恒福)에게 그에 대해 물으니, 이항복이 ‘감사는 감당할 수 있지만 원수는 반드시 김명원(金命元)만 못할 것이다.’ 하며 깊이 걱정을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원수로서의 업적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수라는 직책을 잘 수행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만일 직사에 능하였다면 오늘날의 일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원수를 교체하는 문제는 중대한 일이므로 소신이 감히 아뢸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적을 칠 일이 바야흐로 급박한데, 어찌 월권 행위를 꺼려서 아뢰지 않겠습니까. 밖의 여론들은 모두 원수에게 실책이 있다 하는데, 조정에서는 갈아치우기를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원익 같은 이를 어찌 도원수로 삼지 않습니까. 관서가 비록 중하나 어찌 남쪽 지방의 위급한 처지와 같겠습니까. 이 사람을 보내지 않으니, 여론이 모두 울분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의 방백(方伯)을 교체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유영순의 말이 매우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원익을 대신할 사람을 생각해 보라. 비록 재주가 있는 자라도 일의 전말을 모르고 갑자기 맡는다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중국 군사를 접대하는 일이 비록 중요하지만 지금은 남쪽 지방이 더욱 급박합니다. 소신의 말은 다만 여론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경중을 논한다면 이원익을 당연히 원수로 삼아야 하고 이덕형을 관서 방백으로 제수하고 싶은데, 단 지금은 이미 늦어서 적기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60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47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경연(經筵) / 교통-마정(馬政) / 군사-병법(兵法) / 외교-명(明)
- [註 081]월(越)나라가 진(秦)나라 보듯이 : 진(秦)나라는 서북쪽에 위치하고 월(越)나라는 동남쪽에 위치하여 거리가 극히 멀었기 때문에 흔히 소원한 관계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註 082]
파산(罷散) : 파산관(罷散官).- [註 083]
관학(館學) : 성균관과 사학(四學).- [註 084]
영유(永柔) : 평안도 영변(寧邊)의 속현(屬縣).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할 때 이곳에 임시 행재소(行在所)를 두었었다.○上御別殿, 【特進官鄭崑壽ㆍ韓準、參贊官柳永詢、侍講官黃是、檢討官鄭經世、假注書鄭瑴、記事官金藎國ㆍ尹暉】 講《周易》。 講畢, 韓準進啓曰: "小臣頃自關西往來時, 逢敎師之來, 作弊無窮。 點退刷馬, 必(懲)〔徵〕 受紬匹而後已。" 上曰: "卿於平壤相遇乎?" 準曰: "鳳山、黃州間相値焉。 鳳山給紬五(四)〔匹〕 , 黃州則給紬六(四)〔匹〕 云。 且一路唐官, 多定刷馬之數, 以爲作弊之資, 一馬準紬一(四)〔匹〕 , 其弊不貲矣。" 上曰: "何以爲之?" 準曰: "無可奈何。 毛守備過瑞興時, 其主倅只以紙束給之則以爲: ‘前日過此時, 所留馬價靑布, 必須盡給’ 云。 所謂馬價者虛說也。" 鄭崑壽進啓曰: "敎師出來時, 例率逃兵而來, 欲爲濫受料食之計。 臣於備邊司, 問與咨文異數之狀而知之。 前日接伴使韓應寅在喪後, 臣爲其代出來時, 小臣之馬, 唐兵亦奪之。 臣曰: ‘我乃以李提督接伴使出來’ 云, 則唐人曰: ‘吾乃宋經略差人, 李提督則不知’ 云, 其實乃提督下人也。 閭巷作弊, 射殺人命, 必由山谷路而恣行, 豈特韓準所見而已? 且司天使, 行到東坡館, 供奉之物, 亦皆奪之, 故艱難支待矣。" 鄭經世進啓曰: "唐人作弊, 實由通事房子輩所誘也。 頃聞西路通事作弊之事, 極爲寒心。 通事陪唐官歸時, 因率其家屬, 多至六五人, 餉以公糧, 輸以公馬, 駄數甚多, 侵責無藝。 臣頃爲正言, 欲啓(徵)〔懲〕 治, 而遞論大臣, 未暇及他, 故不爲啓之。 降倭之作弊, 亦皆我國人所爲云。" 黃是進啓曰: "臣亦以從事官, 聞于海西, 唐人侵責, 我國則不可禁抑, 而海西各邑, 倂定支待, 排以日月, 倂定官則如越視秦, 不爲顧見, 主辦官偏受其苦。 以此蕩盡, 不終年而不能支吾矣。" 上曰: "弊則然矣。 筵中雖或言之, 在外處不言可也。 唐官聞之, 則必以爲未安。 唐兵之有功於我國, 豈淺淺哉? 今若人人言之, 及於唐將之耳, 則誠爲未穩, 可斟酌言之。" 準曰: "臣往來黃州時聞之, 前牧使李慶濬, 有善治之聲。" 上曰: "予知其有才。 特令兼兵使, 而旋以被駁遞之。 何前善治而遽罷其職乎? 頃者備邊司啓請敍用, 欲用於公州牧使, 而以無(微)〔懲〕 治之義, 予不從焉。 如此可用之人, 至於駁遞, 未曉其意。" 崑壽曰: "善政於黃州則然矣, 兵使, 與守令異體, 爲主將於一道。 年甚小, 無踐歷, 故守令不爲敬畏云。" 上曰: "不爲敬畏, 非慶濬之罪也。" 崑壽曰: "以不敬畏, 故上下相阻, 以致人言。 渠亦未免有失云。" 上曰: "渠亦有所失乎?" 崑壽曰: "渠亦怠於爲牧使時, 其終又有病幾死云。" 上曰: "年少之人, 有何病? 今可以爲守令乎?" 崑壽曰: "乃李增之子也。 臣與增, 同爲禁府堂上, 故因而聞之, 則今不爲快差云。 當初賴罷散, 故得免於死矣。" 準曰: "爲兵使時, 處事踈闊, 故致有人言云。" 上曰: "然則於大器, 不可用矣。" 上謂鄭崑壽曰: "元帥爲人, 卿知之乎?" 崑壽曰: "年歲相若, 故館學, 泛然相見。 小臣忝冒承旨時, 權慄以承文院參下官, 頻來政院, 故亦見之, 實未知其人器矣。 但永柔特命爲元(師)〔帥〕 時, 尹斗壽問李恒福曰: ‘如何?’ 恒福曰: ‘監司則可堪矣, 元帥則必不如金命元’ 云, 而深憂之。 其後元帥果無聲績矣。" 上曰: "元帥善職, 固難矣。 若果能於職事, 則今日之事, 豈如是乎?" 永詢曰: "元帥遞易, 事體重大, 非小臣所敢達, 討賊方急, 何嫌越位, 方外之論? 皆以爲元帥有所失, 而朝廷難其代。 如李元翼, 何不爲都元帥? 關西雖重, 豈如南方之岌岌哉? 不以此人送之, 物情皆爲憤鬱。" 上曰: "關西方伯, 遞易似難。" 崐壽曰: "柳永詢之言, 甚是。" 上曰: "元翼之代, 其思之。 雖有才者, 不知首末, 卒然當之似難矣。" 永詢曰: "天兵支待一事雖重, 今則南方尤急。 小臣之言, 只啓物情而已。" 上曰: "若論輕重, 則李元翼當爲元帥, 而李德馨欲拜關西方伯, 但今已晩, 似未及矣。"
- 【태백산사고본】 36책 60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47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경연(經筵) / 교통-마정(馬政) / 군사-병법(兵法) / 외교-명(明)
- [註 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