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용장 김덕령이 상소하여 사은하다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상소하기를,
"신이 이달 27일에 전라 감사의 이첩(移牒)을 보고 위에서 본도로 하여금 신의 처자에게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도록 한 전지를 받들어 살폈습니다. 신은 명을 받고 황공하여 놀라 마지않았습니다. 신이 공이 없음은 성상께서 환히 아시는 바입니다. 주야로 군중에서 오랫동안 죄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는데, 엄한 꾸지람을 가하지 않고 도리어 은총이 사실(私室)에 내려질 줄을 어찌 헤아렸겠습니까. 황공한 마음이 더하여 감격의 눈물이 턱을 적십니다.
신이 보잘것 없는 몸으로 당초에 살피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망령되이 맡은 것은 어찌 잘 할 수 있다고 해서였겠습니까. 다만 신자(臣子)의 민박한 정황에서 그랬던 것인데, 헛된 이름이 한번 전파되어 그릇 구중 궁궐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성상의 은택이 먼저 입혀져 호칭을 더하고 인신(印信)을 내려주셔서 격려함을 보이시니, 신이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죽음을 각오할 줄 모르겠습니까. 이런 때문에 조령(鳥嶺)을 넘어온 이후로 주야로 걱정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해서 남쪽을 돌보시는 성상의 간절한 마음을 저버릴까 염려하였는데, 일년 내내 화의(和議)로 인하여 매번 일을 그르치고 게다가 전란이 일어난 지 오래되어서 군량과 무기가 완전치 못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자신이 죽는 일은 애석할 것이 없으나 한번 쓰러진 뒤로는 선후책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혹 기회를 탈 만한 형세가 있어도 또한 감히 용이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시일만 지연하게 되었으므로 중앙이나 지방이 온통 실망하였습니다.
신은 상중에 기복(起復)되어 이미 친상(親喪)에 능히 효성을 다하지도 못하였고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또 적을 치는 데 목숨을 바치지도 못하였으니, 나아가나 물러가나 의거할 바 없어 충효가 모두 결여되었습니다. 신의 죄는 법에 있어서 사면되지 못할 바인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성상의 무궁한 인자함에 힘입은 때문입니다. 일찍이 낭서(郞署)를 제수하여 본분에 넘치게 대우해 주시어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 그지없는데, 오늘날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여러번 남다른 예우를 받으니, 하해 같은 은택은 갖옷을 하사받는 그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신이 무슨 공으로 감히 이것을 받겠습니까. 신은 들으니, 공이 없는데 상을 주는 것은 재질이 있는 신하로 하여금 권장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때문에 한 소후(韓昭侯)는 해진 바지로도 공 있는 자를 기다렸고043) , 한 고조(漢高祖)는 남겨 주는 밥도 반드시 줄 사람에게 주었으니044) , 참으로 한번 하사하는 일은 임금에 있어서 소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본래 알고 있는 바인데 비상한 성상의 은혜가 갑자기 이처럼 극한에 이르니, 분수에 넘친 일이므로 형편상 함부로 받기 어렵습니다. 반복하여 생각건대, 놀라서 흐르는 땀이 등을 적십니다.
신은 조령 밖에서 해를 넘겼는데, 군사들이 오랜 동안 헐벗은 상태로 있습니다. 이후의 염려는 오직 식량이 다한 것에 있을 뿐이니, 식량을 계속 운송해 주는 한가지 일에 유의하여 신으로 하여금 노둔한 충성을 다할 수 있게 하소서. 신은 하늘을 보고 대궐을 사모하며 감격하고 황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영남 각진의 여러 장수들에게는 군량이 하나같이 떨어졌는데, 듣자하니 양호(兩湖)의 창고에 저장된 곡식도 고갈이 되어서 옮겨다 군량을 대기가 극히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덕령이 맡은 진의 군량은 일찍이 전라도 담양(潭陽) 등 네 고을이 전적으로 분담케 하였는데, 네 고을에는 필시 가을과 겨울에 납입한 곡식이 있을 것이니, 본도로 하여금 단속을 펴서 곡식을 계속 운송하여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60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430면
- 【분류】군사-병참(兵站)
- [註 043]한 소후(韓昭侯)는 해진 바지로도 공 있는 자를 기다렸고 : 한 소후가 시자(侍者)를 시켜 해진 바지를 간직해 두자 모두들 인색하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소후가 말하기를 "옛 사람은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끼었다고 한다. 지금 이 바지가 어찌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정도일 뿐이랴. 나는 공로가 있는 자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상(上).
- [註 044]
한 고조(漢高祖)는 남겨 주는 밥도 반드시 줄 사람에게 주었으니 : 《사기(史記)》 회음후 열전(淮陰侯列傳)에 "한왕(漢王)이 옷을 벗어서 나에게 입혀 주고 밥을 남겨 나에게 먹이고 내 말을 들어주고 내 꾀를 써 주었다."라는 말이 보인다. - [註 044]
○忠勇將金德齡上疏:
伏以臣, 以今月二十七日, 伏見全羅監司移牒, 奉審自上有旨, 令本道, 題給食物于臣之妻子。 臣承命震惶, 魂爽若驚。 臣之罔功, 天鑑孔昭, 晝夜綏下, 久竢鈇鉞之誅, 豈料嚴譴不加, 恩霈反沾於私室哉? 撫躬增懼, 感淚交頤。 臣以無狀, 初旣不諒, 妄擧難堪之事者, 豈曰能之? 只出於臣子悶迫之情, 而虛名一播, 誤(澈)〔徹〕 九重, 涓滴未效, 聖澤先集, 加號賜印, 以示激厲, 臣非木石, 寧不自知其一死哉? 是以踰嶺以來, 夙夜憂憤, 恐志願未遂, 以孤南顧之勤, 而第緣終年和議, 每誤事機, 加之以軍興日久, 糧械無完。 竊念身死有不足惜, 而一蹶之餘, 善後無策。 故或有可乘之勢, 而亦不敢容易於其間, 遂至遷延時月, 中外失望。 臣起自憂服, 旣不能自盡於親喪, 事與心違, 又不得效命於討賊, 進退無據, 忠孝俱闕。 臣之罪, 在法不赦, 其得保首領, 亦由於覆燾罔極之仁, 而曾除郞署, 奬待踰量, 慙懼之心, 固已無限, 而今日推恩, 累蒙異數, (兵)〔丘〕 山隆渥, 不啻錫裘。 臣是何功, 敢此承當? 臣聞無功施賞, 使才臣不勸。 是故, 韓侯弊袴, 須待有功; 漢祖推食, 必於其人。 誠以一賜予, 在人主不可忽也。 臣之無足可稱, 自卜素矣, 而非常睿眷, 遽至於此極, 揣分踰涯, 勢難(叩)〔叨〕 濫。 反覆思惟, 駭汗沾背。 臣經年嶺外, 師徒久露, 此後可慮, 惟在乏食。 無已, 則更加留意於繼運一事, 使之得竭駑鈍, 臣不勝瞻天戀闕, 感戴兢惶之至, 謹昧死以聞。
上下于備邊司。 備邊司覆啓: "嶺南各陣諸將軍糧, 一樣乏絶, 而聞道兩湖倉儲已竭, 推移極難。 金德齡陣軍糧, 曾以全羅道 潭陽等四官, 專爲分定, 四邑必有秋冬所納, 令本道檢勑繼運, 毋致缺乏。"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36책 60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430면
- 【분류】군사-병참(兵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