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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57권, 선조 27년 11월 18일 임진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순변사 이빈이 치계하여 왜의 군관과 접촉한 일을 아뢰다. 첨부한 평조신 등의 서신

경상도 순변사(慶尙道巡邊使) 이빈(李薲)이 치계하기를, 【10월 24일에 성첩하였다. 】

"10월 21일에 김해(金海)에 있는 장왜(將倭)의 조카로 군관(軍官)이라고 호칭하는 왜인(倭人) 원십량(源十良)과 졸왜(卒倭) 7명이 각각 창검(搶劍)을 휴대하고서 부적인(附賊人) 최억(崔億)과 통사(通事)인 승(僧) 인사(印思)와 더불어 왜서(倭書) 3통을 가지고 나왔기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으로 하여금 그들을 접대케 하고, 도원수의 뜻으로 답서를 주어서 돌려보냈습니다. 최억이 와서 말하기를 ‘답서를 김해에 있는 장왜에게 주었더니 장왜는 그 답서를 보고 나서 죽도(竹島)로 인솔해 갔고, 다음날 배를 타고 웅포(熊浦)에 있는 평행장의 진중에 이르러 답서를 전하고 다시 평의지(平義智)의 진중에 이르렀는데, 모든 왜장이 함께 의논한 뒤에 승왜(僧倭) 두세 명이 답서를 작성해 마친 다음, 평조신(平調臣)이라고 호칭하는 왜인이 나를 불러 말하기를 「내 조선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관작이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는데 어찌 감히 조선의 은혜를 잊겠는가. 일본과 조선은 교제해 온 지 오래 되었고 별로 원망을 맺은 일도 없었으니 처음부터 조선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전에 통신사(通信使)가 돌아갈 때 중원의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한 뒤에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이르러서 성 밖에 글을 내걸고 조정에 품의하게 하였더니, 부산의 장관(將官)이 도리어 난사(亂射)를 가하였다. 그런 때문에 통정할 수 없어서 형편상 부득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에 동래(東萊)에 이르러서 또 성 밖에 글을 내걸었더니, 역시 부산에서 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여 우리를 죽이려는 자를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인 전투가 이루어져 조선을 파멸시킨 것이니, 이는 실로 조선이 접대를 잘못한 소치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 나라를 원망하는가. 지금 들으니, 중원이 강화하기 위해 보낸 심 유격(沈遊擊)의 왕래를 조선이 힘써 막는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조선이 서생포(西生浦)에 있는 왜장과 서로 통하면서 이곳과는 한번도 통하지 않으니, 또한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중원이 비록 강화를 하지 않더라도 조선이 만일 화친하려고만 한다면 장관(將官) 한 사람이 들어와서 상의하여도 그의 말 한마디에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우리 나라 사신이 돌아올 때 장관 한 사람이 함께 와서 빨리 가부를 결정하라. 」고 하였다.’ 합니다. 왜서(倭書) 중에 ‘도리가 분명한 사람을 보내와 김해에서 면담케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강제로 서로 만나려고 하면 어떤 사람을 들여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김응서의 통서(通書) 중에 함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하니, 저들이 만일 불의에 나오게 된다면 어떻게 처치해야 하겠습니까? 미리 지휘하여 임시하여 난처한 일이 없게 하도록 도원수 권율에게 상신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평조신의 서신은 다음과 같다. "일본 풍신조신(豊臣調信)은 조선의 이 장군(李將軍) 막하(幕下)에 재차 답합니다. 귀하의 뜻을 행장에게 갖추어 보고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초적(草賊)이 화를 일으킨 일은 일찍이 알지 못했던 일이다. 어찌 속히 알려주지 않았는가. 막하께서 만일 행장과 함께 강화를 의논하려고 하시거든 도리에 밝은 한 사람을 보내주시면 그와 상의하여 초적들이 표략(剽掠)하는 일을 견제하겠다. 그런 후에 양쪽 진영을 오간다면 누가 막겠는가. 행장과 의지(義智)가 선봉(先鋒)에 서서 헤쳐나갈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앞서 누차 승려 선소(仙巢) 및 조신(調信) 등을 차송하여 그로 하여금 단서(短書)를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에게 올려서 이런 임진난의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 또 뒤에 온 선위사 심희수(沈喜壽)에게도 알렸는데, 그가 어떻게 이를 성총(聖聰)에게 알리느냐고 하면서 일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선소(仙巢)와 조신(調信) 등의 요구에 따라 행장과 의지가 강화를 명하였다. 그런데 강화를 위해 부산포에 당도하던 날 비록 이 일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부산 영공(釜山令公)이 그 서찰을 받지 않고 난사를 가했기 때문에 귀국이 망하게 된 것으로 이는 본래 행장과 의지의 뜻이 아니었다. 이런 내용은 좌도 방어사(左道防禦使)에게 올린 서신 가운데 자세히 적혀 있는데, 한번 보았는가. 시간도 없고 하여 여러 말 하지는 않겠다.’ 하였는데, 이것은 행장의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귀국이 편안할 수 있는 묘책은 바로 대명(大明)과 일본이 화친하는 일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조선이란 나라가 대명과 일본의 사이에 끼어 있는데, 대명은 나라가 크고 일본은 병력이 강하므로 백번 싸우고 천변 싸워도 자웅이 결정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귀국은 전쟁터가 되어서 나라는 공허하게 되고 백성은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사신갔을 때에도 이 일을 전적으로 말씀드렸으나 조정에서 믿지 않고 지충(至忠)을 불충(不忠)으로 여겨서 행장과 의지에게 혐의를 사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운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이는 모두 전일의 잘못이니 모두 일소해 버리기 바랍니다. 지금부터는 전일의 잘못을 개선하여 행장이나 의지와 더불어 상의해서 나라를 안보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의지가 어찌 동번(東蕃)의 우호를 잊겠습니까. 행장은 의지와 사이가 매우 좋습니다. 청컨대, 깊이 생각하여 속히 한 사람을 김해에 보내면 제가 선소(仙巢)를 달래어 상대시키고, 귀하의 뜻도 갖추어 전하고 또 심중에 있는 생각도 말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계속 소식 전하기를 기하고, 또 최억의 입에 맡기고 이만 줄입니다. 10월 18일." ○직무(直茂)의 서신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풍신직무(豊臣直茂)는 조선 이 장군 막하에 재차 답합니다. 평조신에게 부친 서신은 즉시 가선 대부에게 전하였습니다. 또 답장을 올렸는데, 받아보셨습니까? 그런 때문에 괘념하지 않았습니다. 행장과 조신이 나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치안을 상의하려 하니, 도리를 밝게 아는 사람 한 명을 김해에 보내면 선소(仙巢)와 조신 등을 상대시켜 두 나라가 왕래하는 기책(奇策)을 규정하고 명조(明朝)와 일본이 화호하는 좋은 매개책을 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막하는 이 뜻에 응하여 최억이 귀래하는 날을 기다려 사자(使者)를 보내주십시오. 나머지는 최억의 혀에 맡기고 이만 줄입니다. 맹동(孟冬) 18일." ○무수(茂守)가 김해 부사 백사림에게 답한 서신은 직무의 서신과 내용이 같다. 】


  • 【태백산사고본】 34책 57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03면
  •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慶尙道巡邊使李薲馳啓 【十月二十四日成貼。】 曰: "十月二十一日, 金海姪子軍官稱號 源十良及卒七名, 各持槍劍, 與附賊人崔億, 通事僧印思, 持書三道, 出來, 令金海府使白士霖接待, 而以都元帥意, 答書回送矣。 崔億來言: ‘呈答書於金海, 則將見其書, 率往竹島, 翌日乘船, 到熊浦 平行長陣中, 傳答書, 移到平義智陣中, 諸將共議後, 僧數三, 草答書書畢, 平調信稱號, 招而言曰: 「吾受朝鮮厚恩, 爵至嘉善大夫, 何敢忘朝鮮之恩乎? 日本朝鮮, 交隣久矣, 別無結怨之事, 初非爲朝鮮而起兵。 前者通信使之還也, 請開中原之路, 後擧兵到釜山, 掛書于城外, 使之通稟朝廷, 則釜山將官, 反加亂射, 故未能通情, 勢不得已攻陷釜山後, 移到東萊, 又掛書於城外, 則亦與釜山同。 吾等不勝憤怒, 欲殺我者, 不得不殺。 因此轉成攻鬪, 殘滅朝鮮, 此實朝鮮失待之所致也。 何怨於我國乎? 今聞中原講和, 沈遊擊往來之事, 朝鮮力遏云, 未知是誠何故? 朝鮮西生 將, 互相通議, 此處則一不相通, 亦未諭其意也。 中原雖不講和, 朝鮮若欲和好, 則將官一人, 入來相議, 可一言而定。 然則卽當擧兵渡海。 我國使价之還, 將官一人, 竝與偕來, 速決可否」 云云。’ 書中, 道存理正一人, 面議于金海云。 若强欲相見, 則未知入送何如人, 而金應瑞通書內, 旣以相會咸安爲期, 彼若不意出來, 則何以處置乎? 預爲指揮, 使無臨時難處之患事, 申稟于都元帥權慄處矣。" 啓下備邊司。【平調信書曰: "日本 豐臣調信, 再答朝鮮 李將軍幕下。 具報貴意於行長, 行長曰: ‘草賊爲禍者, 未曾有, 如之何不速示之乎? 幕下, 若欲與行長議講和之事, 差道存理正之從一人, 則與渠相議, 堅制賊徒剽掠之禍, 而後兩涯(住) 〔往〕還, 有誰防之乎? 行長義智, 應先鋒之(撰)〔選〕 者也。 是無他, 先是屢次差釋仙巢調信等, (庸)〔曩〕 之日, 呈短書於宣慰使吳億齡, 以告有此禍。 且又於後宣慰使沈喜壽亦云, 爾如何達聖聰乎? 拒日本之請。 是以(副)〔釋〕 (仙巢)〔仙蘇〕 調信等, 行長義智, 以命講和, 到釜山浦之日, 雖欲說此理, 釜山令公, 不受其書, 比(干)〔于〕 首戈, 故 貴國喪亡矣。 不是行長義智素意也。 此意詳在呈左道防禦使書中, 定瀆一覽乎? 因玆不遑屢陳, 蓋是行長之言也。 僕以爲貴國平安奇策, 是在大明日本和好之事者也。 所以者何? 朝鮮爲國也, 介乎大明日本之間, 大明乃國大, 而日本乃兵强, 百戰千鬪, 難決雌雄。 然則貴國誠戰(關)〔鬪〕 之場, 國虛民飢者乎? 先是奉使之日, 亦專說此事, 廷議不信之。 以至忠爲不忠, 剩成嫌疑, 行長義智, 是亦天運所然乎? 此是皆昨非也, (東)〔束〕 高閣焉。 自今以往, 改先非, 與行長義智相議, 保國救民, 可也。 義智, 豈忘東藩之好乎? 行長, 亦與義智甚好。 請思旃速差一人於金海, 則僕誘(仙巢)〔仙蘇〕 , 相對具聞貴意, 又說心中。 餘期嗣音, 且在崔億之口。 不宣。 頓首。" 十月十八日。 直茂書曰: "日本 豐臣直茂, 再答朝鮮李將軍幕下。 被寄平調信手簡, 卽傳之嘉善大夫。 且又呈報章, 定有一覽乎? 故(東)〔束〕 高閣焉。 行長調信告予曰: ‘欲相議貴國治安, 道知理明一人, 差金海, 則釋(仙巢)〔仙蘇〕 調信等相對, 以定兩涯往還奇策, 說天朝、日本和好良媒’ 云耳。 幕下應此意, 崔億歸家之日, 待差使來駕者也。 餘付崔億舌端, 不宣。 頓首。" 孟冬十有八日。 茂守之答, 金海府使白士霖書, 與直茂書, 同意。】


    • 【태백산사고본】 34책 57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403면
    •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