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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21일 을축 8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에서 군사 훈련 방안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해의 전 병사(兵使) 조인득(趙仁得)의 말을 들으니, 그가 본도에 있을 적에 정용(精勇)한 병사를 선발하였는데 그 수가 4천 명이어서 급할 때에 충분히 사용할 만하며 그 중에는 재주를 완전히 익힌 포수(砲手)도 수백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득(仁得)은 비록 체직되어 왔지만 새 병사 이경준(李慶濬)이 반드시 그 군사를 버리지 않고 조련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임진년 이래 군사를 일으킨 뒤로 사졸들이 패퇴하여 흩어지기를 잘 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우리 나라의 군사는 본래 나약하고 겁이 많아 아무리 조련시켜도 전진(戰陣)에는 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러한 논의가 한 번 행해지자 한 사람이 선창하면 백 사람이 화답하듯 하여, 군사를 조련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수령 중에 스스로 높은 식견이 있다고 여기는 자는 더욱 군병(軍兵)을 조련하는 일은 생각지도 않으니, 깨우치기 어려운 습속과 태만한 인심이 이와 같으므로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제 중국의 사례로 본다면, 강남(江南)의 병사가 가장 유약하고 겁이 많다고 이름나 북쪽의 건아(健兒)만 못하다고 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는 말입니다. 때문에 가정(嘉靖)399) 연간에 절강성(浙江省)의 병사 수천 명이 한 명의 왜병을 당해내지 못하였는데 참으로 당적하지 못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척계광(戚繼光)이 일개 편비장(偏裨將)400) 으로서 일반 병사 중에서 기용되어 법을 만들어 조련시킴으로써 몇 년 뒤에는 절강의 병력이 천하에 제일 강병이 되었는데, 지금도 믿고 왜적을 방어 하는 것은 북쪽의 연(燕)이나 대(代)의 병사가 아니고 강남(江南)의 절강의 병사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따진다면 군사에 있어서는 본래 정해진 형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병사의 강약(强弱)과 용겁(勇怯)은 장수가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군졸이 궤산(潰散)되지 않게 하는 가장 긴요한 것은 오직 속오(束伍)401) 에 있으니, 《기효신서(紀效新書)》 중에 장수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논한 말이 많지만 그 요점은 모두 ‘속오’ 한 편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군졸만 많이 모아 놓으면 적을 방어하는 줄로만 알고, 대오를 결속하고 부대를 나누는 법은 모르기 때문에 질서가 어긋나고 문란해져서 두서가 없습니다. 이러한 군대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임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사졸이 쉽게 무너지는 것은 그 죄가 사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수에게 있는 것이니, 그때는 속오의 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황해도의 4천 정병이 아무리 날래고 강하다 해도 만일 숫자만 믿고서 그 전처럼 분잡하고 대오를 결속하지 않는다면 위급할 때에 역시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경준이 이제 막 병사(兵使)가 되어 그 책임을 맡았는데, 군대를 다스리는 일에 염려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정에서는 다시 더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별도로 하서(下書)하여, 전일 조인득이 이미 뽑아놓은 정병 4천 명을 각기 있는 곳과 인근의 군영으로 대오(隊伍)를 나누어 보내되 한결같이 《기효신서》대로 하여 대장(隊長)이 1대(隊)를 거느리고, 기총(旗總)이 3대를 거느리고, 초장(哨將)이 3기(旗)를 거느리게 하여, 평상시에 법대로 조련하고 그 재주의 완성됨을 살펴서 등급을 나누어 계문(啓聞)하게 하고, 대장(隊長)과 기총(旗總) 이상은 모두 무리를 거느릴 만한 자로 차정(差定)하여 성책(成冊)하여 올려보내며, 대장·기총 이하의 군인은 역시 《기효신서》의 요패(腰牌)의 규정대로 각자 패를 차게 하여 서로 식별하도록 해서 혼란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기효신서》의 속오편(束伍篇) 부권(付卷)을 이제 2건(件)을 인출하였으니 우선 내려 보내고, 속오해(束伍解)는 신들이 번역하여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으니 아울러 등서하여 내려 보내되 그대로 시행하게 할 것으로 감사에게 아울러 하서(下書)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82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註 399]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 [註 400]
    편비장(偏裨將) : 부장(副將).
  • [註 401]
    속오(束伍) : 대오(隊伍)를 결속함.

○備邊司啓曰: "聞黃海前兵使趙仁得之言, 在本道時, 抄擇精勇之兵, 其數滿於四千。 此軍則緩急可以足用, 而其中砲手成才者, 亦數百云。 仁得雖遞來, 而新兵使李慶濬, 必以此額, 操鍊不廢矣。 今人習見壬辰以來兵興之後, 士卒喜於潰散, 以爲: ‘我國之軍, 性本懦怯, 雖操鍊, 難用於戰陣。’ 此論一行, 一唱百和, 主以鍊兵之事, 爲無用之(俱)〔具〕 , 而守令中, 自以爲高見者, 尤不思操鍊軍兵。 習俗之難曉, 而人心之惰慢如此, 誠可寒心。 今以中原之事觀之, 江南之兵, 最號懦怯, 不如北方之健兒, 自古有言矣。 故嘉靖年間, 浙兵數千, 不能當一, 誠若眞不可敵。 及(戚桂光)〔戚繼光〕 , 以一偏裨之將, 起於行伍, 設法操鍊, 數年之後, 兵之强, 甲於天下, 至今所恃以禦者, 不在於, 而在於江南。 以此論之, 兵豈有常勢哉? 其强弱、勇怯, 唯在於將帥之運用如何爾。 欲其軍卒之不爲潰散, 則其最所緊要處, 唯在於《束伍》《紀効新書》中, 所論將家之事, 其說多矣。 然其精神, 盡在於《束伍》一篇。 今人徒知多聚軍卒, 則可以禦賊, 而不知有《束伍》分部之法, 故參差紊亂, 不成頭緖。 以此而可望於赴湯蹈火乎? 故我國士卒之善潰, 其罪不在於士卒, 而在於將帥。 其時不知有《束伍》之法故也。 黃海道四千精兵, 雖果驍健, 而若但以名數, 依前紛雜, 不爲《束伍》, 則臨時亦不可用矣。 李慶濬方爲兵使, 繼任其責, 未知於治軍一事, 及於念慮與否矣。 然朝廷不可不更加申飭。 請別爲下書, 以前日趙仁得已抄精兵四千名, 各以所在一處及隣近之軍, 分爲隊伍, 一依《紀効新書》, 使隊長統一隊, 使旗總統三隊, 使哨將統三旗, 平時依法操鍊, 考其成才, 分等啓聞, 其隊長旗總已上, 皆以可堪統衆者差定, 成冊上送, 旗隊總以下軍人, 亦依《紀効新書》腰牌之規, 令各自佩持, 使相識別, 而不相混亂, 何如? 且《紀効新書》 《束伍篇付卷》, 今已印出二件, 爲先下送, 而《束伍解》一款, 則臣等頗爲翻譯, 務令易曉, 竝爲謄書下送, 使之依(放)〔倣〕 行之。 此意監司處, 請幷下書。" 答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82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