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우수사 원균의 전황에 대한 장계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장계에,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場門浦)에 둔거(屯據)한 적세(賊勢)와 접전한 절차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2일 평명(平明)322) 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된 것이 필시 둔처(屯處)한 왜병을 청원(請援)한 것이었습니다.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우리 병사들이 강개(慷慨)하여 진퇴(進退)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辰時)에 주사(舟師)323) 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 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城)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步)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設備)는 매우 흉험(兇險)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陸兵)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舟師)로서는 다시 어떻게 끌어 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巨濟)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陸戰)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4일 묘시(卯時)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 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玄勝字銃筒)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精銳船)을 영등(永登)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육병장 등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가서 직접 형세를 고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서 7일에 돌아갔고, 신 및 주사(舟師)는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5일 휴병(休兵)할 때에 신이 거느린 사후선(伺候船)324) 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관(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6일 묘시(卯時)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과 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守門將)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와서 수급(首級)을 베어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있던 잡물(雜物)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櫓) 등은 싣고 왔다.’ 하였습니다. 다시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와서 증거품으로 하라고 하였더니, 7일에 돌아와 고하기를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산골짜기로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그중에 한 명이 다급하게 되자 칼을 풀고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의 중위장(中衛將)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6일에 행군하여 왜적이 숨어 있는 해변에 복병하고 있으면서 출몰하는 것을 엿보아 재빠르게 배를 움직여 돌진해서 1명을 생포해 왔고, 선봉장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적진에 달려들어가 왜인이 쓴 작은 판(版)을 탈취해 왔는데, 판본(版本)은 통제사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한산(閑山)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63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註 322]
○慶尙右水使元均狀啓:
自九月二十九日, 至十月初二日, 場門浦屯據賊勢及接戰節次, 已曾馳啓, 而初二日平明, 更進場門浦, 則必是請援屯處之倭, 而比前稍多, 無慮百餘名, 屯聚于三處高峯, 大張旗幟, 無數放丸。 我士慷慨進退, 終日接戰, 乘暗少退, 結陣于外叱浦。 初三日辰時, 擧舟師, 列立于場門浦賊陣江口, 先使先鋒, 迫城挑戰, 則賊徒遙避矢石, 或城內竄伏, 或城外鑿地隱身, 不知其數。 放丸或放大砲, 其丸大如手拳, 遠至三百餘步, 其爲猛烈, 倍於前日。 其他設備, 極其兇險, 而賊陣近處, 馬草數多積置。 臣擇送精銳, 射逐守直之倭, 盡數衝火, 火光終夜連天。 大槪非陸兵, 則在陸之賊, 以舟師, 則更無挑出之勢, 極爲痛惋。 臣更與統制使李舜臣、陸兵將郭再祐、忠勇將金德齡相議, 水陸合攻計料, 詳知道路, 巨濟射士十五名抄出嚮(道)〔導〕 , 臣之所管各船, 陸戰可合自募人三十一名, 幷爲抄擇, 聽令于郭再祐事, 申明約束, 而四日卯時, 諸船突入賊陣, 或放明火飛箭, 或放玄、勝字銃筒挑戰, 而分送精銳船于永登賊巢, 互相出入, 以示衝東擊西之狀, 絶其相援之路, 而堅壁不出, 殲滅無由, 不勝憤慨。 陸兵將等, 則面告形勢于都元帥權慄處, 以期後日, 初七日發還, 而臣等舟師, 則仍陣外叱浦。 初五日休兵時, 臣之所率伺候船, 定將發遣于廷深浦串, 使之奔告賊奴形勢, 而初六日卯時, 伺候將元士雄、曹俊彪等, 回還進告內, 伺候船四隻作綜, 巨濟 吾非叱浦止到, 相逢賊船二隻, 指旗突入, 則倭賊半已下陸, 守船之賊, 亦見我船墮突, 顚倒投水。 與守門將金希進等, 戮力攅射, 中傷之倭頗多, 而下船賊三十餘名, 放丸來援, 不得追斬, 賊船二隻及其他所載雜物, 全數衝火, 而莫風席、水筒、鎌、斧、櫓楫載來焉。 復使取來燼餘賊船憑驗, 而七日還來, 進告內, 馳到吾非叱浦, 則倭賊五六名, 彷徨海程, 如有所失, (逐)〔遂〕 下陸追逐, 彎弓發射, 則賊徒散走山谷, 而一倭則勢窮事迫, 解釰乞降, 生擒率來, 而其燼餘二隻, 賊亦爲曳來以現, 而臣之中衛將昆陽郡守李光岳, 則初六日, 行軍伏兵, 倭賊隱伏海畔, 出沒窺覘, 飛船突進, 生摛一名。 先鋒將熊川縣監李雲龍, 則馳入賊陣前, 覓得倭書小版而來, 版本則輸送于統制使李舜臣處, 而指揮還陣閑山, 刻(新)〔期〕 待變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63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