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유사 당상 등과 왜적 이간, 방어사 임명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
상이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정(惟政)이 가지고 온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답서는 어떠한 내용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청정의 언사가 흉패(兇悖)합니다. 유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이간(離間)의 계획을 시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유 총병(劉總兵)이 이미 철수하고 돌아가 빙자할 데가 없으니 사세가 극히 곤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시험삼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정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사이에 틈이 있는 것은 분명한가?"
하니, 성룡이 분명하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병법에 속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행장과 의지(義智)의 편지를 청정에게 보내어 이간을 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방어사는 권응수(權應銖)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경상도는 군량이 어렵기 때문에 이시언(李時言)은 전라 병사로서 경상도를 지키고 이사명(李思命)은 충청 병사로서 경상도를 지키는데, 모두 본도의 군량을 가지고 영남에 가서 지키니, 만약 권응수로 경상 방어사를 삼는다면 군사를 먹일 계책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충주(忠州)로 진관(鎭管)을 삼아 병사로 하여금 유진(留鎭)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말한 중간에서부터 엄습하라는 것은 그 폐단이 없지 않다. 또 저 적들이 몇 사람을 시켜 잠입해와서 정탐하고 가면 누가 알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산성(山城)도 무익한데 평지의 성을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 비록 주먹만한 돌이라도 쌓지 말도록 하라."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인심이 이와 같으니 국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 총병이 ‘중국은 병사도 있고 은(銀)도 있으나 양식 운반이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중국이 만약 산동(山東)을 경유해서 배로 군량을 운반한다면 오히려 할 수 있지만, 만약 우리 나라의 양식으로 군사를 먹인다면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신의 생각에는 총병이 반드시 오래지 않아서 다시 올 것 같습니다. 총병이 아끼던 창녀가 있는데 떠날 때 임박해서 물건을 매우 많이 주었고,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서는 도감낭청 김혜(金寭)에게 편지하기를 ‘나를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구휼하라. 상사(上司)가 철수하여 돌아오라는 명령이 없는데 내가 돌아가는 것이니,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 하였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여인이 서울에 있는가? 이 또한 인정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의 장관(將官)이 이역(異域)에 나와서 우리 나라를 위해 방수하였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 또 듣자니 그 여인이 임신하였다고 한다.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라. 인정과 천리로 보아 이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호(北胡)의 일도 또한 위급하니 어찌 해야 하겠는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변장이 만약 침학하지 않는다면 북호가 스스로 반란을 일으킬 리는 없습니다. 얼음이 얼어붙으면 육진(六鎭)의 일이 극히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육진을 잃는다면 이는 앞뒤로 적을 받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인재(人材)가 모자라니 비변사가 사람을 천거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사람 수를 제한하지 말고, 십과 취사(十科取士)302) 같이 해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한효순(韓孝純)이, 경상도의 상주(尙州)·대구(大丘)·경주(慶州)·울산(蔚山) 등 네 읍(邑)의 사자(士子)와 인민들을 포장(褒奬)할 것을 장계했는데 상께서 온당치 않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아마도 영남(嶺南)의 인민들이 듣고는 맥이 풀렸을 것입니다. 영남의 풍속이 순후하여 명현(名賢) 석유(碩儒)가 모두 여기에서 배출되었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이 앞장서서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김해(金澥) 역시 의를 주창해 기병하였지만 불행히도 죽었으니 이 사람을 추후로 포장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영남의 풍속이 무예를 익히지 않고 문사(文辭)만 숭상하여 폐풍(弊風)을 개혁하기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에 전날 전교한 것이다. 추후로 포장하는 것은 비변사가 참작해서 하라."
하였다. 밤 1경에 대신 이하가 물러났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5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4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군사-특수군(特殊軍)
- [註 302]십과 취사(十科取士) : 송 철종(宋哲宗) 때 사마광(司馬光)이 시행하여 선비를 등용한 법으로 행의순고가위사표과(行義純固可爲師表科)·절조방정가비헌납과(節操方正可備獻納科)·지용과인가비장수과(智勇過人可備將帥科)·공정총명가비감사과(公正聰明可備監司科)·경술정통가비강독과(經術精通可備講讀科)·학문연박가비고문과(學問淵博可備顧問科)·문장전려가비저술과(文章典麗可備著術科)·선청옥송진공득실과(善聽獄訟盡公得實科)·선치재부공사구편과(善治財賦公私俱便科)·연습법령능단청언과(練習法令能斷請讞科) 등이다. 《송사(宋史)》 선거지(選擧志).
○上引見大臣及備邊司有司堂上。 上曰: "惟(正)〔政〕 持來淸正所答書, 如何?" 柳成龍曰: "淸正言辭兇悖。 待惟(正)〔政〕 回還, 行間之計, 不可不試, 而劉總兵旣已撤回, 無所憑藉, 事勢極難。 然在我不可不試爲之也。" 上曰: "淸正與行長, 有隙分明乎?" 成龍曰: "分明矣。" 上曰: "兵不厭詐。 行長、義智之書, 送于淸正, 行間爲妙。" 上又曰: "防禦使, 則以權應銖爲之, 如何?" 金睟曰: "慶尙道, 軍糧爲難, 故李時言, 以全羅兵使, 守慶尙; 李思命, 以忠淸兵使, 守慶尙。 皆自持本道軍糧, 往守嶺南, 若以權應銖爲慶尙防禦使, 則恐無餉軍之策也。" 成龍曰: "爲今之計, 以忠州爲鎭管, 使兵使留鎭, 可也。" 上曰: "領相所言, 從中掩襲, 不無其弊。 且彼賊令數人潛來, 體探以去, 則有誰知者?" 上曰: "山城無益, 則平地之城, 亦何用乎? 雖拳石不築, 可也。" 成龍曰: "人心如此, 國事不可爲矣。" 上曰: "劉總兵云: ‘中原有兵有銀, 而運糧爲難’ 云。 斯言是矣。" 成龍曰: "中原若由山東, 船運糧餉, 則猶可爲, 若只以我國之糧餉軍, 則不可支矣。 且臣意, 總兵必不久復來。 總兵眷戀倡女, 臨行贈物甚多, 行到迎曙, 貽書於都監郞廳金寭曰: ‘爲我, 護恤我所愛之人。 我無上司撤回之令, 而入歸, 必不久當還’ 云爾。" 上曰: "其女人在京乎? 此亦人情所不免。 天朝將官, 出來異域, 爲我國防守, 其功不貲。 且聞其女人有娠云, 厚待可也。 人情、天理, 不得不如是也。" 上曰: "北胡事, 亦危奈何?" 成龍曰: "邊將若不侵暴, 則北胡無自叛之理。 合氷則六鎭之事, 極爲悶慮。" 上曰: "若失六鎭, 是腹背受敵也。" 上曰: "方今人材絶乏, 備邊司薦人, 如何?" 成龍曰: "不限人數, 如十科取士, 爲之無妨。" 金睟曰: "慶尙監司韓孝純狀啓, 慶尙道 尙州、大丘、慶州、蔚山等四邑士子、人民褒美事, 自上下未安之敎, 恐嶺南之人, 聞之解體也。 嶺南風俗淳厚, 名賢、碩儒, 皆由此出。 及其變初, 金沔、鄭仁弘, 首起義兵, 金澥亦倡義起兵, 不幸身死。 此人追奬可也。" 上曰: "予意以爲, 嶺南之俗, 不習武藝, 專尙文辭, 弊風難革, 故前日傳敎矣。 追奬事, 備邊司斟酌爲之。" 夜一更, 大臣以下退。
- 【태백산사고본】 32책 5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4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군사-특수군(特殊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