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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54권, 선조 27년 8월 7일 임자 7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정업 이시발이 정철을 논죄하는 것을 그만두고 왜적 토벌에 힘쓸 것을 아뢰다

정언 이시발이 아뢰기를,

"신이 집의 신흠, 대사헌 김우옹, 장령 기자헌, 대사간 이기 등의 피혐하는 말을 보았습니다. 신은 시골에서 생장하여 보고 들은 것이 없어서 정철최영경의 사건에 대해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들은 바에 의하면 영경은 정철 때문에 죽었다고 합니다. 조순(趙盾)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악명(惡名)277) 을 면치 못했으니 정철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후일에 공론이 분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당에서 정철을 논계할 때 정엽이 변론한 말은 신이 그 줄거리를 듣지 못했습니다만, 만약 정엽이 과연 사심을 가지고 옹호하려 했다면 정엽도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러한 일은 그만두고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고 봅니다.

바야흐로 대단히 급박한 일로는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는 것 이외에 다시는 다른 일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조정 의논에 사단이 많으면 이는 실로 국가의 큰 불행이었습니다. 지나간 역사의 패망한 화란이 실로 이러한 데서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오늘에 와서 신자(臣子)로서 어떠한 계획을 해야 하겠습니까. 전일을 거울삼아 후일을 경계하면서 힘을 모으고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국력의 축적과 군사의 훈련을 도모하고, 적심(赤心) 혈성(血誠)으로 하늘에 맹세하여, 기어이 망국한 수치를 만에 하나라도 씻어 주상의 와신 상담하시는 뜻에 보답하기에 급급해서 밤낮으로 힘써야 할 것입니다. 3년 동안 적과 대치하여 만사가 와해되고 양식도 다 되고 군사도 피폐하여 한치의 계책도 쓸 수가 없어 국가 형세가 위기일발이니 말할 수 없는 화란이 아침저녁 사이에 곧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면 머리털이 쭈뼛하고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어찌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공론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음에 대해서는 전일에 삭탈하자는 계청을 윤허하지 않았는데 먼저 정지한 것이 비록 쾌하지는 못한 것 같으니, 만약 보통 때라면 재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황천에 간 자의 설원(雪冤)도 되었고, 백골이 된 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국시(國是)가 귀정(歸正)되게 하였으니, 오늘의 사세로써 헤아리면 이에서 그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리하면 그 나머지 사소한 의논은 저절로 소멸될 것이며, 설사 있더라도 우선 참았다가 왜적이 물러감을 기다려 서서히 그 과실을 다스린다면 이는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써 다스리는 것이니, 국시에나 공론에 조금도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가일층 그 이동(異同)을 따지고 시비(是非)를 계교하여 분분하게 지적하며 쟁론하여 마지 않는다면 적을 토벌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소요스러워져 사람들이 모두 의혹하고 두려워하여 장래의 일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의논이 정해질 때 왜적은 이미 한강을 건너지 않았을까 걱정됩니다. 신은 용렬하고 부족해서 소견이 이와 같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으면서 신흠, 김우옹 등의 진퇴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5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22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註 277]
    악명(惡名) : 조순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임. 영공(靈公)을 세웠는데 영공이 임금답지 못해 간언을 드렸으나 듣지 않고 죽이려 하자 달아났다. 국경을 나가지 않고 있는데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자 돌아와 조천으로 하여금 성공(成公)을 세우게 했다. 나라의 정경(正卿)으로서 도망하면서 국경을 나가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므로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사책(史冊)에 ‘조순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역적의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 그 마음이 불순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책한 것이다. 《춘추(春秋)》 좌전(左傳) 선공(宣公) 2년.

○正言李時發啓曰: "臣伏見執義申欽、大司憲金宇顒、掌令奇自獻、大司諫李墍等避嫌之辭。 臣生長鄕曲, 矇無見識, 其於鄭澈永慶之事, 本不詳知其曲折, 若槪以所聞, 則永慶而死。 趙盾猶不免弑君之惡, 殺永慶之罪, 其何說之辭, 而後日公議之憤發, 在所不容已也。 方玉堂欲論鄭澈之時, 鄭曄論議之辭, 臣實未聞其梗槪, 若之爲心, 果出於執私營護, 則固有罪, 而臣愚之淺見, 抑舍是而有一焉。 方今大段急務, 討賊復讐之外, 更無他事。 自古朝論之多端, 實是國家之大不幸, 已往覆亡之禍, 未必非實由於此, 則今日之爲臣子者, 當如何計也? 懲前戒後, 協力同心, 共圖訓聚之事, 赤心血誠, 誓指天日, 期雪窮羞極恥於萬一, 以酬主上薪膽之志者, 在所汲汲, 而夙夜所當勉也。 三年對敵, 萬事瓦裂, 食盡兵疲, 寸策無措, 國勢之危, 僅如一髮, 難言之禍, 不朝在夕。 每一念至, 髮竪心寒, 寧暇顧他乎? 至於公論之不容已者, 則前日追削之請, 未允先停, 雖似未快, 若在平時, 再論猶可, 然旣得以雪冤重泉, 寒膽旣骨, 使國是有歸, 則揆以今日之勢, 止此似得。 其餘私小論議, 自就消泯, 而設使有之, 姑且忍之, 竢讐賊旣退, 徐攻其失, 則是攻之以不攻, 而其於國是公論, 似無所損矣。 今又轉成一節, 斥其異同, 較其是非, 紛紜指摘, 爭論不置, 則非但於討復之擧, 慮有所未專, 漸成騷擾, 人皆疑懼, 將來之事, 似不止此。 臣恐議論定時, 賊已渡矣。 臣庸劣無狀, 所見如此, 不可仍冒在職, 處置申欽金宇顒等進退。 請命遞臣職。" 答曰: "勿辭。"


  • 【태백산사고본】 32책 5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22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