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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53권, 선조 27년 7월 17일 계사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유성룡이 요동의 자문에 대한 일, 성문을 지키며 척간하게 하는 일, 군량에 관한 일, 이요를 청대한 일 등을 아뢰다

상이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동(遼東)의 자문은 어떠하던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요즘에 유정(劉綎)의 병력이 철수하려 하고 군기(軍器)도 점차 수송해가려고 하므로 매우 실망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 이 자문을 보니 중국이 우리 나라를 잊지 않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중국이 군사를 대거 출동하여 왜적의 소굴을 소탕한 다음에야 비로소 수천의 군사로도 부산 등지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3천의 병력과 유 총병의 군사 5천으로 돌격해 오는 저 왜적을 당해내려고 한다면 오래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요즘 중국의 일을 보면 말들이 많아 마치 길가에 집을 짓는 것과 같으므로 석 상서(石尙書)의 의견 같은 것도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이 참으로 용병(用兵)을 하고 봉공을 허락하지 않고자 한다면 의당 먼저 군량을 조치하고 대군을 출동하여 적을 섬멸한 뒤라야 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산을 지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생각은 꼭 우리 나라가 충분히 협력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지만 우리 나라는 피폐하여 필시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이 매우 옳다. 대체로 우리 나라를 버릴 수는 없는데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치는 것도 매우 어렵고 화친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 방어하면서 천천히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 중국에 사설(邪說)이 성행하는데 이번 논의는 실로 기이하다. 조숭선(趙崇善)이 우리 나라를 위하는 생각이 지극하다고 할 만하니 그를 위해 비(碑)라도 세워 줄 만하다고 하겠다. 그의 생각은 조선을 보전하려면 마땅히 전라도와 경상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전일에도 저들의 봉공을 파하자는 논의가 없지 않았는데도 그의 말이 이제 시행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비록 우리 나라가 스스로 계책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었기 때문에 조선 국왕에게 헤아려서 회보하라고 했을 것이니, 이 일은 의당 자세히 살펴 대책을 마련해서 진주해야 한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마땅히 동지사(冬至使) 편에 순부(順付)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매우 시급하니 의당 먼저 회자(回咨)하여 적정(賊情)을 빠짐없이 진달하고 또 계책을 아뢰어 채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마땅히 먼저 군사를 출동하여 쳐야 한다는 뜻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만약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여 소탕하고 아울러 정병 수천 명으로 우리 나라의 병력과 협력하여 지킨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의 아뢴 뜻이 매우 좋으니 그 뜻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도하(都下)의 인심이 날로 더욱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남산(南山)에서 봉화 세 개를 올렸을 때 사람들이 다 놀라 술렁거리다가 이튿날 비로소 의례적인 봉화였음을 알고 난 뒤에 안정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병력과 군량을 미처 조치하기 전에 적이 돌격이라도 해 온다면 인심이 와해되는 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이 나의 뜻과 같으니 이 일은 참으로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중국군은 도착하지 않았는데 지금 떠나는 소서비(小西飛)의 왜졸(倭卒)이 만약 봉공을 파한 논의를 먼저 통보한다면 적은 반드시 독기를 부릴 것이니 그 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이 자문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외인(外人)이 알까 두렵다.’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적의 정탐자로서 성중에 오가는 자가 반드시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할 것인가. 내가 일찍이 한강(漢江) 나루는 마땅히 장수를 정하여 기찰(譏察)하라고 말하였지만 오늘의 우리 나라 일은 아이들 장난과 같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성문(城門)을 지키며 척간하게 하였는데 매우 허술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간첩이 어찌 반드시 한 곳으로만 들어오겠는가. 이 일은 참으로 염려되니 방비하는 여러 가지 일을 엄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은 성을 굳게 지키고 청야(淸野)하여 병진(兵陣)을 전후에 배치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나도 전일에 계책을 낱낱이 진술할 때 그런 말을 하였었다. 산성(山城)을 수축하는 것도 백성을 보전하는 방도인데 남원 산성(南原山城)은 그 역사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천하의 일이 어찌 폐단이 없이 시행되는 것이 있을 것인가."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산성을 지키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수원(水原)·인천(仁川)·행주(幸州) 등의 경우로 보면 산성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들이 성을 공격하는 기구는 매우 흉교(凶巧)하여 평지의 성곽은 결코 보전할 수 없다. 진주성(晉州城)에 대해서도 내가 일찍이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고, 연안(延安)의 경우는 침공해 오는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진주의 장사(將士)가 어찌 연안보다 못하여 함락되었겠는가. 적이 만약 합공(合攻)한다면 우리 나라의 성지(城池)로서는 비록 지키고자 하더라도 지키지 못할 것으로 나는 안다."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보면 중원(中原)의 성 제도가 옛날과 다릅니다. 옛날의 성을 공격하는 것은 운제(雲梯)·충거(衝車)·지도(地道)250) 일 뿐이었는데, 이 적은 조총(鳥銃)을 많이 쏘아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대로 공격하므로 지키기 어렵습니다. 《신서》의 성제(城制)는 대체로 왜를 방어하기 위하여 마련한 것입니다. 허의후(許儀後)의 상소에 ‘관백(關白)이 먼저 토루(土樓)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므로 가장 방어할 수 없다.’하였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이는 군인으로 하여금 흙을 져다가 쌓아올려 한 누대를 만들게 하여 성안을 굽어보고 그 위에 방패를 많이 설치하고서 철환(鐵丸)을 난사하기 때문에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신경진(辛慶晉)이 떠날 때 포루(砲樓)의 제도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나 토루에는 대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산성의 경우는 토루로 공격할 수 없고 조총도 위로 향하여 쏘기가 어려우니 지키기에 쉬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원 부사(南原府使) 조의(趙誼)는 수어(守禦)의 임무에 합당치 않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조의는 사실 합당치 않습니다. 이복남(李福男)은 차송할 만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빨리 보내야 한다. 일이 실패한 뒤에는 보내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적이 만약 남원에 이르러 패배를 당하고 물러가면 호남은 보전될 수 있습니다."

하고, 덕열이 아뢰기를,

"진주성의 패배에, 황진(黃進)이 죽자 호령이 산만하여 끝내 지킬 수 없었고, 김천일(金千鎰)의 군사는 모두가 시정(市井)의 무뢰배였으므로 북문을 지켰으나 먼저 궤멸되었고, 이종인(李宗仁)이 힘껏 싸웠으나 지탱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주의 장사(將士)가 생존해 있다면 국사가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자, 덕열이 아뢰기를,

"죽은 자가 6만이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성을 수축하는 것과 청야(淸野)하는 등의 일은 비록 폐단이 있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성은 곳곳에 있으니 만일 겨울 이전에 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 수축하여 명년의 환난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철병하지 않고 3천 명을 더 보내려고 하는데 그에 따른 군량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군량을 조치하는 데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작미(作米)·수세(收稅)·모속(募粟)·무속(貿粟)251) 입니다. 1년의 상용 경비 이외는 다 군량으로 쓸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입(稅入)이 적지 않으니 그것을 군량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1년의 세입을 호조(戶曹)의 계산으로 보면 1개월에 사용하는 것은 1천 7백 석이고 12개월 사용하는 것은 3만 6천 석이며, 이 밖에 또 중국 군대가 왕래할 때 소비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아울러 계산하여 공제하고 그 나머지는 의당 군량으로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는 일 없이 먹는 사람을 감해야 한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다급하지 않은 관원을 감축한 일이 있으니 쓸데없는 관원은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근래에 월료(月料)로 생활을 꾸려가는 자가 매우 많으니 줄여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시 줄이는 것은 안 된다 하더라도 하인(下人)들이 훔쳐가는 것이 전일보다 심하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전세(田稅) 3백 석 중에 2백 석만 바쳤다 하니 훔쳐가는 문제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력이 있는 자를 가려서 살피게 해야 하니 대신이 이조(吏曹)에 말하여 사람을 가려 그 일을 맡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허상(許鏛)이 일찍이 광흥창(廣興倉)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그 직무를 잘 보았으므로 아무도 훔쳐가지 못했었는데 지금 양구 현감(楊口縣監)으로 있습니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덕형(李德馨)은 비록 상중(喪中)에 있기는 하나 중신(重臣)이니 기복(起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사를 치른 뒤에 불러 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장사를 치른 뒤에 기복시키고자 한다. 이런 때에 어찌 상도(常道)를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기를,

"장사 뒤에 기복시키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경안령(慶安令)을 알고 있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그가 효성과 우애가 있다는 말을 들었고 또 최영경(崔永慶)을 만나보았는데 그 또한 비범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번에 신을 찾아왔기에 잠깐 보았습니다. 오늘 청대(請對)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 청대에서 내가 그 사람됨을 보니 옛글을 많이 읽어 속되지 않았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의 학문은 남언경(南彦經)을 존신(尊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됨이 약간 실없는 것 같았다. 내가 경안에게 이르기를, ‘나를 보자고 한 것은 좋지만 어찌하여 곡을 하였는가. 나중에 또 나를 보고 싶을 때는 보자고 요청하기만 할 뿐, 곡은 하지 마라.’ 하니 그가 자신이 배운 것을 다 말하였는데 왕양명(王陽明)의 글과 석씨(釋氏)의 글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였고, 또 의병(義兵)에 종사했었다고도 하였다. 사람이란 본디 알 수 없는 법이니 혹시 쓸 만한 사람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가 읽었다는 책은 다 헛된 것입니다."

하고, 덕열은 아뢰기를,

"너무 노쇠(老衰)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한 장의 글을 성룡에게 내리면서 이르기를,

"경안이 이 글을 바치면서 하는 말이 남언경이 일찍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말은 신도 일찍이 들었습니다. 대개 중원(中原)에 들어가 어떤 일을 진달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할 만한 것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어찌 경솔히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사세는 고려(高麗) 때와는 다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또 한 가지 온편하지 못한 일이 있다. 경안이 하는 말이 ‘신이 성혼(成渾)을 보았더니, 성혼이 「이정암(李廷馣)이 말한 일은 많은 사람이 말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못하므로 그가 그런 말을 하였다. 」 했다.’ 하니, 자신이 실언하고서 또 다른 사람을 핑계대면 되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성혼을 찾아보니 그도 망발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이와 같은 자가 많으니 매우 좋지 않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이런 때에 어찌 감히 적과 서로 화친하려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당장의 사세가 위급하므로 사람들은 다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과는 다르다. 성혼은 자기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도 그러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괴이한 일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성혼은 말로 자기의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여 망발을 면치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안이 하는 말이 ‘성혼극중(克中)이 있는 장소에서 보았는데 성혼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였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이 적은 만세를 두고 꼭 갚아야 할 원수인데 어찌 그들과 화친을 하고자 하겠습니까. 요즘의 회유책은 병란을 늦춰보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글을 많이 읽어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였다. 그는 중국에 심학(心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문하여 그를 보고 싶다고 했고 양명(陽明)격치설(格致說)252) 도 말하였다. 만약 양명에게 오늘의 일을 경략하게 한다면 이 적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성룡이 이뢰기를,

"양명의 학문은 상산(象上)과 다르니 대개 양명은 운용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명은 재주가 높아서 우리 나라의 재질이 낮은 사람은 배울 수가 없다. 그의 이른바 항상 마음을 돌아본다는 설을 보면 그렇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 마음이란 준칙(準則)이 없는 마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뜻은 본령(本領)이 먼저 바로 되면 일마다 바로 된다는 말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옛사람의 말에 ‘유(儒)는 이(理)를 위주로 하고, 선(禪)은 심(心)을 위주로 하고, 도(道)는 기(氣)를 위주로 한다.’ 하였는데 이 설이 매우 좋습니다. 대개 이(理)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사물(事物)에 당연한 이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며, 심(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광명(光明)하더라도 결국에는 어지러워져 스스로 방자해지는 폐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명이 한 말에 ‘양지(良知)253) 를 이룬다.’는 것은 어떤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말은 거짓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명은 효(孝)의 이치가 내 마음에 있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어버이가 살고 죽은 것으로써 효성의 차이가 있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장사지내기를 예로써 하고 제사지내기를 예로써 하는 것은 다 효(孝)의 도로서 각각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어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양명도 어릴 적에 책을 한 글자도 읽지 않고 다만 양지(良知)만을 이루고자 하였다면 매사를 어찌 두루 알겠습니까. 또 양명이 전대의 글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면 전대의 일을 어떻게 자세히 알겠습니까. 지금 사람으로 남언경에게서 배운 자도 또한 양명을 많이 숭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의 학문을 하는 것이 전혀 배우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53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14면
  • 【분류】
    사상-유학(儒學)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군사-통신(通信)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註 250]
    지도(地道) : 땅속의 길.
  • [註 251]
    작미(作米)·수세(收稅)·모속(募粟)·무속(貿粟) :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미는 노비들이 신역 대신 바치는 저화(楮貨)나 면포(綿布)를 쌀로 대체하여 바치도록 하는 것이고, 수세는 전세를 쌀로 받는 것이며, 모속은 관작을 내리고 쌀을 바치게 하는 것이요, 무속은 은(銀)으로 중국에서 쌀을 사들이는 것을 말한다.
  • [註 252]
    격치설(格致說) : 격물·치지에 관한 설.
  • [註 253]
    양지(良知) : 선천적으로 타고난 도덕성과 인식본능.

○上引見領議政柳成龍。 上曰: "遼東咨文, 何如?" 成龍曰: "近來劉綎兵將撤回, 軍器亦漸輸送, 頗有缺望之心, 今見此咨, 則可知天朝不忘我國之意矣。 但天朝大擧兵, 蕩掃賊窟穴, 然後可以數千兵, 防守釜山等地矣。 今若以三千兵, 與兵五千, 欲當彼賊之衝突, 蓋亦難(久)〔矣〕 。 近觀中國事, 如作舍道傍。 如石尙書之意, 亦不得行矣。 天朝實欲用兵, 而不許封貢, 則當先使措置糧餉, 出大兵殲賊然後, (以可)〔可以〕 千餘兵守釜山矣。 中國之意, 必以爲我國, 足可協力, 而我國疲弊, 必不能支矣。" 上曰: "領相之言, 極是。 蓋我國不可棄, 而興師擊之, 勢亦甚難。 和議又不可爲, 故欲姑防守, 而徐爲之圖也。 近者天朝, 邪說盛行, 而今此議論, 實爲奇異。 趙崇善之爲我國, 可謂至矣。 雖爲之立碑可也。 此人以爲: ‘欲保朝鮮, 當守。’ 前日非無罷封貢之論, 而此人之言, 今乃見施, 何也? 雖使我國, 自爲之謀, 不過如此。 蓋已奉聖旨, 故今朝鮮國王料理回報, 此事宜詳察, 設策陳奏。" 成龍曰: "當於冬至使順付。" 上曰: "此事甚急。 當先回咨, 極陳賊情。 又陳謀策, 以備採用。"成龍曰: "當以擧兵先討之意爲主。 若天朝發兵蕩掃, 仍以精兵數千, 協我國兵力守之則善矣。" 上曰: "備邊司之啓意, 甚好。 以此意爲之可也。" 成龍曰: "都下人心, 日益危懼。 頃者南山烽火擧三柄, 人皆驚擾; 明日始知例烽而後定。 今若兵糧未及措之前, 賊或衝突, 則恐有瓦解之患也。" 上曰: "領相之言, 與予意同。 此事誠一喜一懼。 天兵未至, 而今去小西飛之卒, 若先通罷封貢之議, 則賊必肆毒, 其禍不可言矣。 故予嘗言于承旨曰: "此咨文, 勿出朝報。 恐外人得知也。 非(持)〔特〕 此也。 賊之偵探者, 往來于城中, 安保其必無也? 予嘗謂漢江津渡, 當定將譏察, 而今日我國之事, 有同兒戲矣。" 成龍曰: "令郞廳, 擲奸城門, 亦甚虛疎云矣。" 上曰: "賊之間諜, 豈必由一處入來? 此事誠爲可慮, 而防備諸事, 不可不嚴。" 成龍曰: "爲今之計, 堅壁、淸野, 布置兵陣前後, 使賊不得前進, 乃上策也。" 上曰: "此言是也。 予亦於前日條陳計策時言之矣。 修築山城, 亦是保民之道, 而南原山城, 中止其役云。 天下事豈有無弊而爲之者哉?" 成龍曰: "山城甚好。 如水原仁川幸州等處觀之, 則可以知山城之不可不守也。" 上曰: "彼賊攻城之器, 甚是凶巧, 平地城郭, 決不可保。 如晋州之城, 予嘗言其難守, 卒果陷沒; 如延安, 則賊來者不多, 故能守矣。 晋州將士, 豈不及於延安而見陷哉? 賊若合攻, 以我國城池, 雖欲守之, 予知其不能守矣。" 成龍曰: "《紀效新書》中原城制, 與前古異矣。 古之攻城, 或以雲梯、衝車、地道而已, 此賊則多放鳥銃, 使人不敢近, 而任意攻之, 所以難守也。 《新書》之城制, 蓋爲禦而設也。 許儀後之疏云, ‘關白先爲土樓以攻城, 最不可禦之’ 云。 此言是也。 乃使軍人, 負土積成一樓, 俯臨城中, 多設楯於其上, 亂放鐵丸, 故難守矣。 辛慶晋之行, 使爲砲樓之制, 而若土樓, 則難敵矣。 至若山城, 則非土樓所可攻, 而鳥銃亦難仰而放之, 守之似易。" 上曰: "南原府使趙誼, 不合守禦云。 果何如耶?" 成龍曰: "趙誼誠不合。 李福男可以差送矣。" 上曰: "然則可速遣。 敗事之後, 雖遣之何益?" 成龍曰: "賊若到南原, 見敗而退, 則湖南可保。" 德悅曰: "晋城之敗, 黃進旣死, 號令散漫, 終不能守, 金千鎰之軍, 皆市井無用之輩, 故守北門而先漬, 李宗仁力戰而不能支矣" 上曰: "晋州將士若存, 國事豈至此乎?" 德悅曰: "死者, 六萬云。" 上曰: "修築山城及淸野等事, 雖有弊, 不可不爲。 山城處處有之, 冬前賊若不動, 皆可修築, 以備明年之患。 且天朝不爲撤兵, 欲加送三千, 糧餉何以爲之?" 成龍曰: "措置糧餉, 有四條。 乃作米、收稅、募粟、貿粟也。 一年經費之外, 皆可爲軍餉。" 上曰: "稅入不少, 以此爲軍糧可也。" 成龍曰: "一年稅入, 戶曹計一朔所用, 一千七百石, 十二朔所用, 乃三萬六千石。 此外又有天兵往來之費, 竝計除, 其餘皆當爲軍餉。" 上曰: "冗食之人, 可減。" 成龍曰: "古亦有捐不急之官。 冗官不可不省, 而但近來以月料爲生理者, 甚多, 恐不可省也。" 上曰: "不可更省, 但下人偸竊, 甚於前日矣。" 成龍曰: "田稅三百石, 只納二百石云。 其偸竊之患, 不可勝言。" 上曰: "當擇能者而察之。 大臣言于吏曹, 使之擇人掌之可也。" 成龍曰: "許鏛, 嘗爲廣興倉官, 善其職事, 不見偸竊。 今爲楊口縣監。 使此人掌之何如? 李德馨雖在喪, 重臣也, 不可不起復。 葬後召來何如?" 上曰: "予亦欲葬後起復。 此時豈可守經乎?" 仍 命承旨, 曰: "令葬後起復。" 上曰: "領相嘗知慶安令乎?" 成龍曰: "臣嘗聞其孝友。 臣又嘗見崔永慶, 則亦言其非常人。 頃者來見, 臣暫見之矣。 今日請對, 何事耶?" 上曰: "今日請對, 予觀其爲人, 多讀古書, 不爲鄙野矣。" 成龍曰: "其學, 尊信南彦經矣。" 上曰: "爲人差似浮虛矣。 予謂慶安曰: ‘求見可也, 何必哭之? 後日亦欲見予, 但請見而不須哭也。’ 且渠極陳所學, 而如王陽明書、釋氏書, 無不知之云矣。 且言從事義兵。 人固不可知, 或是可爲之人乎?" 成龍曰: "所讀之書, 皆是虛矣。" 德悅曰: "衰耗甚矣。" 上下一紙書于成龍曰: "慶安進此書云, 南彦經所嘗爲者。" 成龍曰: "此言, 臣亦嘗聞之。 蓋欲其入中原, 陳達某事也。" 上曰: "可爲之乎?" 成龍曰: "豈可輕爲? 事勢與高麗異。" 上曰: "又有一事, 未安。 慶安曰: ‘臣見成渾, 則云: 「李廷馣所言之事, 人多欲言不言, 而吾乃言之」 云。’ 己則失言, 而又托他人, 可乎?" 成龍曰: "臣見, 則渠亦以爲妄發矣。" 上曰: "朝廷之上, 如是者多, 甚不好。" 成龍曰: "此時, 豈敢有與賊相和之心哉? 當今事勢危迫, 人皆悶慮。" 上曰: "非如領相之言。 則以爲: ‘不獨我也, 他人亦有是心而不言云’, 可怪。" 成龍曰: "以爲, 辭不達意, 不免妄發云矣。" 上曰: "慶安云: ‘見克中所在處, 則言之矣。" 成龍曰: "此賊萬世必報之仇。 豈可欲與之和乎? 近來羈縻之計, 欲緩其兵亂耳。" 上曰: "其人多讀書, 似非庸衆人也。 渠以爲: ‘朝心學之人, 欲訪問而見之。’ 陽明格致之說, 亦言之矣。 若使陽明, 爲今日經略, 則此賊可以蕩掃矣。" 成龍曰: "陽明之學, 異於象山。 蓋陽明多有運用處矣。" 上曰: "陽明才高, 我國才質卑下之人, 不可學也。 其所謂常常顧心之說, 是也。" 成龍曰: "其心, 則無準則之心。" 上曰: "其意以爲: ‘本領先正, 事事當正’ 云。" 成龍曰: "古人云: ‘儒主理; 禪主心; 道主氣。’ 此說極好。 蓋主理, 故以爲事物有當然之理; 主心, 故以爲光明, 而終有猖狂自恣之弊。" 上曰: "陽明之言曰: ‘致良知。’" 成龍曰: "此言僞矣。" 上曰: "陽明言孝之理, 在於吾心。 豈以親身之存沒而有異乎?" 成龍曰: "葬之以禮, 祭之以禮, 皆是孝之道, 而各有攸主。 豈可如是言之? 如陽明, 少時不讀一字, 而但欲致良知, 每事豈能周知乎? 使陽明, 不讀前代書, 前代之事, 何以詳識乎? 今人學於彦經者, 亦多尙陽明矣。" 上曰: "爲其學, 亦愈於專不學者矣。"


  • 【태백산사고본】 31책 53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14면
  • 【분류】
    사상-유학(儒學)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군사-통신(通信)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