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부승지 이덕열이 유 총병이 봉공을 허락하면 지키고 그렇지 않으면 압록강을 경계로 지키겠다는 말을 아뢰다
좌부승지 이덕열(李德悅)이 유 총병(劉摠兵)221) 에게 연향(燕享)하는 일로 호남(湖南)에 갔다가 돌아와 서계(書啓)하였다.
"6월 26일 아침에 신이 접반사(接伴使) 김찬(金瓚), 관찰사 홍세공(洪世恭)과 총병을 진알(進謁)하였더니 즉시 들어오라고 하고 자리를 내주며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에게 말하기를, ‘어제의 성대한 예에 매우 감사한다.’ 하기에, 김찬이 ‘노야(老爺)가 돌아가려고 하므로 민정(民情)이 소요하니 매우 염려스럽다. 어제는 그래서 감히 이를 물었던 것이다.’ 하자, 답하기를 ‘민정이 그렇다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천리마가 있더라도 그 한 발을 묶어두고 또 잘못 부리면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백성이 노야를 장성(長城)처럼 의지하고 적도 호표(虎豹)와 같이 두려워하고 꺼려 하는데 이제 만약 한번 흔들린다면 다시 누구를 믿겠는가. 우리 나라의 상하가 이래서 마음을 조이고 있으니 끝까지 진정시켜 주기 바란다.’ 하니, 총병이 ‘내가 여기 나온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부자(父子)가 다 왜적을 소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일찍이 사천(泗川) 지방을 맡고 있던 중에 본국에 병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청하여 온 것이다. 군사와 군량이 다 풍족할 때는 경략(經略)222) 이 싸우려고 하였으나 제독(提督)223) 이 방해하였고, 또 군사 1만 5천 명만 남겨두면 십만의 적군을 대항할 수 있는데도 황급히 철수하여 돌아갔다. 현재 남은 병력 5천 명으로도 수만 명의 적을 대항할 수는 있으나 물고(物故)가 수백 명에 이르고 건강한 자가 많지 않으니 어떻게 임무를 수행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노야께서 떠날 것인지 머물 것인지 확실한 말을 들어 국왕께 아뢰고 싶다.’ 하니, 총병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첩문(帖文)을 보냈으니 5∼6일이 지난 뒤에 그 회보를 기다려 처리할 것이고 아직은 미정이다. 철병령(撤兵令)이 내린지가 지금 3개월인데 나는 아직 머물러 형세를 관망하고 있다. 만약 봉공(封貢)을 허락한다면 나는 머물러 지키고 지급한 군량과 군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떠나서 압록강을 한계로 지킬 것이다. 봉공을 허락한다면 적이 바다를 건너갈 확률은 십중 구할이지만 그들이 반드시 강화를 요구하러 또 올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다음 달은 전부터 적이 발동하던 시기이므로 인심이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 이때 노야께서 진영을 옮긴다면 호남의 모든 도는 절대 보전될 희망이 없다.’ 하니, 총병이 ‘적은 식량을 얻는 것을 서둘러 경상도는 이미 쓸어가버렸다. 곡식이 익을 때면 반드시 이곳도 노략질을 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도내의 병력이 아직도 4만 명이 있다고 하니 만약 조련하여 방어하면서 청야(淸野)224) 로 대응한다면 충분히 적을 방어할 것이다. 도원수(都元帥)가 그 책임을 맡을 만하니 군졸이 적더라도 항상 훈련시키면 적이 반드시 그 소문을 듣고 방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호택(胡澤)이 조선이 봉공을 허락하기를 청하는 일로 나왔는데 석 상서(石尙書)225) 는 나의 은문(恩門)이다. 나에게도 봉공을 청하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나는 차라리 석야(石爺)의 뜻을 거스를지언정 감히 조정을 저버리지는 못하겠다. 만약 중국 조정이 봉공을 허락한 뒤에도 적이 바다를 건너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귀국은 의당 이 뜻으로 주문(奏聞)해야 할 것이다. 저 나오는 무리는 누구나 선류(善類)가 아니고 다 이 제독의 문하이다. 제독은 권신(權臣)이지 충신은 아니다. 석야는 시위 소찬(尸位素餐)226) 하였으므로 과도관(科道官)의 탄핵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손 시랑(孫侍郞)227) 이 그 직책을 대신하였으므로 나오지 못하고 이씨 성을 지닌 사람이 대신 총독이 되었는데 누구인지 모르겠다. 한 순안(韓巡按)도 체직되어 떠나고, 장 각로(張閣老)는 송 경략과 뜻을 같이한 사람으로 논박을 받아 사직하고 떠났다. 과도관으로 감(甘)씨 성을 지닌 자는 나와 절친한 사이인데 조선에 나오기로 되어 있다가 도로 갈렸고 과도관이 나온다는 확실한 소식은 없다…….’ 하였는데, 총병이 한 말은 끝이 없었으나 다 전달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대강만 기록하였습니다.
도원수가 김찬(金瓚)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내, 총병에게 물어서 적추(賊酋)를 효유하게 했으면 하였기 때문에 김찬이 이를 그대로 총병에게 고하니, 총병이 보고 나서 말하기를, ‘나의 뜻도 대강 이와 같다. 내가 이미 담종인(譚宗仁)이 보내온 편지에 이런 뜻으로 답을 하였다.’ 하고 담종인의 편지와 답한 내용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이 수비(李守備)가 왜의 편지 한 장을 김찬에게 보냈는데 대략 종인의 편지와 같았습니다. 신은 들으니, 남도의 백성들이 술렁거려 독부(督府)가 장차 돌아가면 왜적이 뒤따라 이를 것이라는 생각에 뜻을 굳게 가진 사람이 없어 총병의 거취에 따라 자기의 거취를 결정할 계획을 하고 심지어 짐을 꾸려놓고 기다리는 자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들이 갈수록 와전되어 원근의 사람이 놀라고 의심합니다. 인정이 이러하니 무슨 수로 막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5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07면
- 【분류】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註 221]유 총병(劉摠兵) : 유정(劉綎).
- [註 222]
경략(經略) : 송응창(宋應昌).- [註 223]
제독(提督) : 이여송(李如松).- [註 224]
청야(淸野) : 들의 곡식이나 가옥을 모두 거두거나 철거함.- [註 225]
○左副承旨李德悅, 以劉摠兵燕享事, 往湖南入來, 書啓曰: "六月二十六日朝, 臣與接伴使金瓚, 觀察使洪世恭, 進謁摠兵, 則卽令入見, 賜坐饋茶, 謂臣曰: ‘昨日盛禮,多謝多謝, 金瓚告曰: ‘民情以老爺欲歸, 騷擾, 極爲心慮。 昨日, 玆敢仰稟。’ 答曰: ‘民情如是, 果然矣。 雖有千里馬, 縶其一足, 因且失御, 則何以展才?’ 臣等告曰: ‘百姓倚老爺, 以爲長城, 賊且畏憚, 有虎豹之勢。 今若一搖, 更有何賴? 小邦上下, 玆爲悶迫。 請終始鎭定。’ 摠兵曰: ‘我之出來, 初非偶然。 父子皆曉勦倭之事, 曾任(泗川)〔四川〕 地方, 聞本國有難, 自請而來。 兵糧俱足之時, 經略欲戰, 而提督沮撓, 且留兵一萬五千, 可當十萬之敵, 而遽爲撤還。 見兵五千, 亦可抵當數萬, 而物故數百, 好漢不多, 何能有爲?’ 臣等告曰: ‘老爺去留的奇, 切欲聽知, 期報國王。’ 摠兵曰: ‘我已送帖, 當過五六日, 待其回報而處之, 時未定矣。 有撤兵之令, 今已三月, 我且停留觀勢。 若許封貢, 我當留守, 給糧、給兵, 亦可因在, 不然則不得已當去, 把截鴨綠矣。 若許封貢, 則賊之渡海, 其勢十去九分, 而但更要和好, 渠必復來矣。’ 臣等告曰: ‘開月, 乃自前賊發之期, 人心尤爲危懼。 此時老爺移營, 則湖南一道, 斷無保全之望。’ 摠兵曰: ‘賊以取糧爲急, 慶尙道已爲空虛, 穀熟之時, 必使搶掠於此。 然此道之兵, 尙有四萬云, 若操鍊防守, 淸野以待, 足以禦賊。 都元帥可任其責, 軍卒雖少, 常加敎鍊, 則賊必聞之, 以爲有備矣。 胡澤, 以請準封貢事出來。 石尙書, 我之恩門也。 令我亦請封貢, 而我寧忤石爺, 不敢負朝廷矣。 天朝, 若許封貢之後, 賊不渡海, 則何以爲之? 貴國當以此意奏聞可也。 如彼出來之輩, 非盡善類, 皆是李提督之門下。 提督, 乃是權臣, 非忠臣也。 石爺以尸位素餐, 被科道之(殫)〔彈〕 辭。 我孫侍郞代其職事, 故不爲出來。 有李姓之人, 代爲摠督, 未知爲誰也。 韓巡按, 亦爲遞去; 張閣老, 以宋經略同志之人, 被論辭去。 有科道官甘姓者, 是我切親, 將出來而還遞。 科道之來, 未有的奇’ 云云。 摠兵所言, 刺刺不已, 而傳(澤)〔達〕 未悉, 粗記大槪如此。 都元帥書送一紙於金瓚, 欲稟摠兵, 俾諭賊酋, 故金瓚俱告摠兵, 則見之曰: ‘我意思, 與此略同。 我已於譚宗仁之書, 以此意答之’, 因出宗仁書及所答之辭示之。 李守備, 以倭書一紙, 送于金瓚, 大略與宗仁書相同矣。 臣聞南民洶洶, 以爲督府將歸, 倭賊隨至, 人無固志, 以摠兵行止, 爲自己去就之計, 至有荷擔而待者, 轉相傳訛, 遠近(警)〔驚〕 惑。 人情如此, 未知何以禁遏也。"
- 【태백산사고본】 31책 5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07면
- 【분류】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註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