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 감사 이정암이 화친을 약속하여 적을 물러가게 할 것을 치계하다
전라 감사 이정암(李廷馣)이 치계하였다.
"신이 경략(經略)이 우리 나라 신료(臣僚)들에게 선유(宣諭)한 차문(箚文)을 보건대, 걱정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중국군을 다시 청할 수도 없고 양식을 다시 바랄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유정(劉綎)의 대군(大軍)도 오래지 않아 철군할 것입니다. 그리고 왜구(倭寇)는 정돈하고 있으면서 조금도 바다를 건너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방비책은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이 뒤로 어떻게 대처해 가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일의 기미를 일찍 살펴서 스스로 보존할 수 있도록 꾀하는 한 가지 일만이 있을 뿐이니, 급급히 계획해서 시의에 맞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습니다. 성명께서는 1천 권의 책을 읽으셨으므로 역대(歷代)의 치란에 대해 한가하실 적에 모두 헤아려보지 않은 것이 없으십니다. 옛날에 임금이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대계를 위하여는 심지어 육단(肉袒)과 견양(牽羊)096) 도 욕스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더구나 이러한 처지에 이르지 않은 경우이겠습니까. 지금 경략(經略)이 독부(督府)에 공문을 보내어 유주(留駐)시키고 임기 응변의 말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약속함으로써 군사를 물러가게 한다면 힘쓰기가 쉬울 것이지만 이때를 넘기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오랑캐들의 정실(情實)과 허위(虛僞)에 대한 내막은 헤아릴 수 없으나, 그들이 삼경(三京)을 석권하고 마음대로 팔도(八道)를 도륙하다가 하루아침에 영해(嶺海)097) 로 물러가 주둔하고는 왕자(王子)와 사로잡혀 있던 신하들을 보낸 것은 그들의 병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또 중국의 위엄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 조종(祖宗)의 교린(交隣)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여 무도함이 극도에 이르자 선한 마음이 다시 싹터서 강화하고 자진해서 물려가려는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과 같이 반드시 땅을 떼어주고 인질을 교환한 다음에야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조종의 토지(土地)를 한 치도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죽어도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포(薺浦)의 길을 열고 삼포(三浦)에 허접(許接)하고 세공선(歲貢船)에 대해 전과 같이 식료(食料)를 지급하는 것을 조종조의 고사(故事)처럼 하는 데 그친다면, 마땅히 당(唐)·송(宋) 때의 예(例)와 같이 치욕을 참고 견디면서 위로는 중국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는 대소(大小)의 민정(民情)에 따라 아픔을 참으면서 보존할 것을 도모해야 합니다.
세견선(歲遣船)에 지급하는 양료(糧料)와 화매(和賣)를 허여(許與)하는 물화(物貨)에 대해 1년간 드는 비용의 숫자를 통계(通計)해 보면, 수개월 간에 소요되는 비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태왕(太王)이 곤이(昆夷)를 섬기고098)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기던 것099) 처럼 한다면 오늘날 그들에게 주는 것이 후일 모두 우리 나라의 소유가 될는지 또한 어찌 알겠습니까. 병법(兵法)에 ‘장차 취(取)하려는 마음이 있거든 반드시 우선 주어야 한다.’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지금 믿고서 적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호남(湖南) 한쪽이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년간 전쟁을 치르느라 공사(公私)의 저축이 탕진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수송하는 일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에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합니다. 따라서 가을갈이한 밀과 보리는 개떡거리로 다 없어졌고 비가 흡족하게 내렸어도 파종(播種)을 제때에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적이 물러가지 않아서 중국군의 지공(支供)이 전과 같게 된다면 장정(壯丁)들은 모두 도적이 될 것이고, 노약자들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적과 싸우기도 전에 성패(成敗)의 형세는 이미 판결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 뒤에는 비록 슬기로운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뒷감당을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73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096]육단(肉袒)과 견양(牽羊) : 육단은 옷을 벗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적국(敵國)에게 항복하고 신복이 될 것을 청하는 뜻을 표하는 행위이고, 견양은 항복하는 마당에 양을 손수 잡아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을 표하는 뜻으로 양을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2에 "정백(鄭伯)이 육단을 하고 양을 끌고서 맞이했다."고 한 데서 온 고사(故事).
- [註 097]
영해(嶺海) : 영남지방.- [註 098]
태왕(太王)이 곤이(昆夷)를 섬기고 : 태왕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할아버지. 곤이(昆夷)는 서융(西戎)의 이름. 곤이가 태왕에게 요구하는 것이 심하자 태왕이 본거지를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註 099]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기던 것 : 구천은 춘추 시대 월왕(越王)의 이름. 오왕(吳王) 합여(闔閭)에게 항복한 뒤에 굴욕을 감수하면서 오나라를 섬겼다. 그후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全羅監司李廷馣馳啓曰: "臣伏見經略宣諭我國臣僚箚文, 不勝憂悶。 天兵不可復請, 糧餉不可復望, 而劉綎大軍, 必不久撤還。 倭寇整居, 小無渡海之意, 而在我備禦, 無一可恃, 未知此後, 何以處之? 唯有早見事機, 以自圖存一事, 所當汲汲籌思, 講求權(時)〔宜〕 之策耳。 聖明, 讀書千卷, 歷代治亂, 靡不揣摩於燕閑矣。 古之人君, 爲宗社、生民大計, 至於肉袒、牽羊, 不以爲辱。 況不及此者乎? 若及今經略, 文告督府留駐, 權辭遣使, 約和以退師, 則易爲力也, 過此, 臍不及噬矣。 虜之情僞, 雖不可測, 席捲三京, 屠剪八道, 惟所欲爲, 而一朝退屯嶺海, 送還王子及被擄之臣, 非兵力不足也, 抑非畏天朝之威也。 特念我祖宗交隣之義, 不戢已極, 善端復(萠)〔萌〕 , 將欲講而自退也。 若果如往來之言, 必欲割地交質而後和, 則 祖宗土地一寸, 不可許人, 有死而不可從也。 若止於薺浦開路, 三浦許接歲貢船, 依舊給料, 但如祖宗朝故事而已, 則當如唐、宋朝例, 忍辱含垢, 仰遵明旨, 下循大小民情, 隱忍而圖存也。 歲遣倭船糧料及和賣許與物貨, 通計一年費用之數, 不過數月之費耳, 能如(大王)〔太王〕 事昆夷, 句踐事吳, 則今之所與者, 亦安知他日, 皆爲我有乎? 《兵法》 ‘將欲取之, 必姑與之’ 者, 正謂此也。 目今所恃而禦敵者, 只擬湖南一片也, 而軍旅三年, 公私蕩盡, 征輸不已, 民不聊生, 十室九空, 餓莩盈野。 秋耕兩麥, 盡於餠餌, 雨水雖足, 播種不時, 賊若不退, 天兵支供如舊, 則壯者盡爲盜賊, 老弱靡有孑遺, 不待交鋒, 而成敗之形已決矣。 雖有智者, 恐無以善後也。"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73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