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참장을 접견하여 주문하여 봉공을 청하는 일을 논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여 호 참장(胡參將)을 【이름은 택(澤)임. 시랑(侍郞) 고양겸(顧養謙)의 차관(差官)으로 와서 우리 국왕에게 주본(奏本)을 올려 왜노(倭奴)를 봉(封)해 주기를 청하라고 협박한 자이다. 】 접견하였다. 도승지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참장을 접견하실 때 있을 그와의 설화(說話)에 대해 미리 강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신의 억견(臆見)입니다만, 의로 따진다면 왜적은 불공 대천의 원수요 형세로 따지면 감히 중국(中國)을 지휘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전에 이미 군사를 조발하여 적을 섬멸시켜 주기를 청한 지가 아직 두어 달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왜의 봉공(封貢)을 청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두 조목을 가지고 답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당연하다. 대의(大義)로 볼 때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김수(金晬)를 구류(拘留)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가?"
하니, 장운익이 아뢰기를,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만 양원(楊元)과 정승미(鄭承美)·조지현(趙智賢)이 두 관리가 다 추문(推問)을 받았다고 하니, 추문이 끝나는 동안은 필시 유치(留置)해 두고 기다리게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였다. 상이 호택(胡澤)과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상이 대인(大人)이 멀리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는 뜻으로 위로하니, 호택이 말하기를,
"고야(顧爺)께서 【양겸(養謙)을 가리킴. 】 귀국(貴國)을 위하여 선처(善處)하기 위해 나를 전차(專差)시켜 이곳에 와서 상의하게 한 것입니다. 전일 이미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대신(大臣)들에게 개진했는데 아뢰어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고 대인(顧大人)께서 본국의 일에 대해 곡진히 주선해 주니 그 은덕은 헤아리기 어렵소. 배신(陪臣)이 이미 와서 아뢰었는데 대개 군신(君臣)의 뜻이 모두 한가지라오. 삼가 듣건대, 금주(金州)·복주(復州)의 【중국의 고을 이름. 】 양식 2만여 석(石)을 흠사(欽賜)한다고 하였으나 아직 그 공문(公文)을 보지는 못했는데 그것이 확실하오? 그렇다면 의지할 바 없는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있게 되었소이다."
하니, 호택이 말하기를,
"제가 조선 사람들이 거의 다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서 고야(顧爺)께 보고했더니, 고야께서 석야(石爺)081) 께 품달하였고 석야께서는 금주·복주 지방의 양식 2만 2천 7백 석을 조선에 흠사(欽賜)하여 국왕에게 맡겨 조처하도록 하자고 제청(題請)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풍(馮)·이(李) 두 수비(守備)에게 일로(一路)에서 함부로 지공받는 군사들을 잡아서 돌아오라고 했으니, 이 뒤로는 함부로 지공받는 자가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또 동정장사(東征將士)들은 공은 많은데도 죄를 받아서 송 경략(宋經略)은 【응창(應昌). 】 관직에서 떠났고 이 제독(李提督)은 【여송(如松). 】 한직(閑職)에 있습니다. 또 송 경략은 담이 작아 군중의 일을 우유 부단하게 처리한 것이 많고 과도(科道)082) 의 논의에 겁을 내어 세월만 보내고 결단하지 못한 자입니다. 만약 송 경략이 일찍 귀국의 일을 결단하였더라면 지난해 8∼9월에 이미 끝을 맺었을 것입니다. 우리 고야(顧爺)는 매우 강직하고 명석한 분으로 귀국의 일에 대해 힘을 다하여 조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위임해 보내어 국왕(國王)과 서로 의논해서 주본을 올려 봉공을 청하도록 한 것입니다. 귀국이 말한 바대로 따른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천병(川兵)을 모두 철수해다가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지키면서 조선의 일은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전일 여러 재신(宰臣)을 만나 이미 다 말하였고 또 두 통의 문서도 보냈는데, 아뢰어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고양겸이 왜를 봉공해 주도록 제주(題奏)하기를 청한 것이다. 】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황은(皇恩)이 망극한데, 고 대인이 본국의 일을 곡진히 돌봐주시니 은혜 또한 후하오. 그러나 봉공(封貢)하는 일은 바로 중조(中朝)에서 할 일인데 본국이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 참여하여 의논할 수 있으며, 제청(題請)까지 할 수 있겠소이까. 더욱이 저번에 이미 배신(陪臣)을 보내어 흉적(凶賊)을 섬멸해 주기를 청했는데 아직 두 달이 채 못 되어 또 봉공할 것을 주청하여 천청(天聽)을 번독스럽게 하는 일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의(大義)의 소재를 대인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니, 호택이 말하기를,
"과도관(科道官)은 ‘왜(倭)의 불경스러움이 여전하다. 봉공을 허락하는 의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고야는 ‘원병(援兵)을 청해도 군사를 출동시킬 수 없고 군량(軍糧)을 청해도 양식을 보낼 수가 없다. 이렇게 봉공한다는 설을 하는 것은 목전의 급박함을 늦추기 위해서이다.’고 했습니다. 귀국이 곧바로 주문(奏聞)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2월 이후 적의 정세를 사실대로 진달하고 그 끝에 은미하게 봉공의 뜻을 진달해도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대인이 정중하게 분부하시니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소이다. 그러나 본국으로서는 위태하고 절박한 사정만을 진달하고 삼가 중조(中朝)의 조처와 지휘만을 기다릴 뿐, 본국이 어떻게 감히 주본을 올려 봉해주기를 청할 수 있겠소이까. 이 일은 황공하여 감히 하지 못하겠소이다."
하니, 호택이 말하기를,
"심유경(沈惟敬)이 이미 행장(行長)과 봉공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지금은 군대를 동원하여 칠 수도 없습니다. 군사를 동원하여 칠 수도 없고 또 봉공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 왜적이 바다를 건너갈 기약이 있겠습니까. 여러 해를 머물러 있고 가지 않아 10∼20년이 된다면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점점 위급하게 될 것이니 재삼 생각하시어 십분 선처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제가 여기에 와서 고야(顧爺)가 분부한 뜻을 극진하게 개진하여 아래로 배신들과 이미 모두 상의했습니다. 다만 우리 중국이 조선(朝鮮)의 말을 미덥게 여기기 때문에 기필코 제청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본국은 조정(朝廷)083) 의 조처만을 기다릴 뿐, 상국(上國)을 지휘하는 일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소이다."
하니, 호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시는 해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재삼 간곡하게 개진한 뜻을 모쪼록 배신을 시켜 고야에게 가서 진달하게 함으로써 제가 이렇게 한 뜻을 알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도승지 장운익(張雲翼)에게 이르기를,
"참장이 ‘총독(總督)이 【고양겸(顧養謙). 】 나온 뒤에 저 왜적의 정세를 주문(奏聞)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해로울 것이 없겠다."
하니, 장운익이 아뢰기를,
"고양겸이 이를 고집하는 것은 자기의 말을 실증하려는 것이니 주본을 올리는 일은 대의(大義)에 있어 따를 수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다만 요즘의 변보(邊報)에 의거하여 사실대로 주문해서 호택의 희망에 부응해 주어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고, 홍이상(洪履祥)은 아뢰기를,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은 적의 정세를 사실에 의거하여 주문하게 하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왜적들이 공손하다는 내용을 성심으로 주본을 올려 진달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을 말할 것이 아니라 근일에는 출입하며 노략질하는 일이 없다는 것만 말하면 된다."
하니, 운익이 아뢰기를,
"이 일은 예를 파한 뒤에 조용히 강정(講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6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註 081]석야(石爺) : 석성(石星).
- [註 082]
과도(科道) : 중국 도찰원(都察院)의 육과 급사중(六科給事中)과 십오도 감찰사(十五道監察使)를 통칭하여 과도관(科道官)이라 한다. 즉 사찰기관으로 모든 관원의 잘잘못을 규찰하는 기관임.- [註 083]
조정(朝廷) : 중국 조정.○戊子/上幸南別宮, 接見胡參將。 【名澤。 以顧侍郞養謙差官, 來勒我國王, 上本請封倭奴者也。】 都承旨張雲翼啓曰: "參將接見時, 不可不預講說話。 小臣臆見, 以義則不共戴天之讎, 以勢則不敢指揮上國。 且前旣以發兵, 勦賊爲請, 曾未數月, 復請封貢, 決不可爲。 以此二條答之何如?" 上曰: "此言宜當。 大義, 不可爲也。" 上曰: "金睟拘留之言, 然乎?" 雲翼曰: "似非眞的。 楊元及鄭承美、趙智賢兩官, 皆被推問云, 究竟間, 想必留置以待矣。" 上與胡澤, 行再拜禮。 上以大人涉遠辛苦之意, 慰之。 澤曰: "顧爺 【指養謙也。】 欲爲貴國善處, 專差俺來此商議。 前日已陳於六曹判書及大臣矣, 未知啓知否也?" 上曰: "顧大人, 於小邦事, 曲盡周旋, 恩德難量。 陪臣已爲來啓矣。 大槪君臣之意, 皆一樣矣。 竊聞金、復 【中朝州名。】 之糧二萬餘石欽賜云, 而時未見其公文, 其的然乎? 若然則孑遺之民, 庶幾有生道。" 澤曰: "俺見朝鮮人餓死殆盡, 歸報于顧爺, 顧爺轉稟石爺, 題請金、復糧二萬二千七百石, 欽賜朝鮮, 以委國王處置矣。 且令馮、李兩守備, 拿還一路冒支之軍, 此後冒食者必寡矣。 且東征將士, 功高而獲罪, 宋經略 【應昌】 去職; 李提督 【如松】 閑住。 又宋經略膽小, 軍中之事, 多致依違, 刦於科道之議, 遷延不決。 若使經略, 早斷貴國之事, 前年八、九月, 必已結局矣。 顧爺, 最剛且明, 貴國之事, 盡力措置。 委遣俺, 與國王相議, 使之上本, 以請封貢。 貴國若從所言則已, 不然將盡撤川兵, 限鴨綠爲守, 東事不復顧矣。 前日見諸宰臣, 言之已悉, 且送文書二道, 未審啓知否?" 【此乃顧養謙請封倭題奏。】 上答曰: "皇恩罔極。 顧大人曲盡小邦事, 恩亦厚矣。 但封貢, 乃中朝之事, 小邦何敢與議於其間, 而至於題請也? 況頃者已遣陪臣, 請勦兇賊, 曾未數月, 又請封貢, 以瀆天聽, 決不可爲也。 且大義所在, 大人亦必諒之。" 澤曰: "科道官以爲: ‘倭之不恭, 如前, 不可不許以封貢爲論。’ 顧爺以爲: ‘請兵而兵不得發; 請糧而糧不可運。 爲此封貢之說, 以紓目前之急耳。’ 貴國, 雖不可直爲奏聞, 以二月以後賊情, 據實以陳, 其末微陳封貢之意, 似爲不妨。" 上答曰: "大人丁寧分付, 不勝感激。 但小邦只陳危迫之情, 恭竢天朝之處置指揮而已。 小邦安敢上本請封? 此事惶恐, 不敢爲也。" 澤曰: "沈惟敬, 已與行長, 約許封貢。 今不可擧兵而臨之。 不擧兵臨之, 又不許封貢, 則伊賊豈有渡海之期哉? 連年不去, 以至於十年、二十年之久, 則民不得耕, 漸至焦爛。 幸再三思量, 十分善處。" 又曰: "俺來此, 極陳顧爺分付之意, 下及陪臣, 已盡商議矣。 只以天朝, 以朝鮮言爲信, 故必欲題請也。" 上答曰: "小邦只竢朝廷處置而已。 指敎上國, 於義不敢爲也。" 澤曰: "然則更無可爲矣。 俺之再三懇陳之意, 須使陪臣, 往陳於顧爺, 俾知俺如此之意可也。" 上謂都承旨張雲翼曰: "參將言: ‘總督 【顧養謙也。】 出來後, 伊賊情形奏聞’ 云, 此則無妨。" 雲翼曰: "顧也, 欲執此, 以實己言矣。 上本事, 大義所在, 不可從也。 至於此一段, 直據近日邊報, 從實奏聞, 以副其望, 未爲不可。" 洪履祥曰: "彼之所言, 非只爲據實奏聞而已。 欲陳倭賊恭順之意, 誠心上表之事也。 此則似不可爲矣。" 上曰: "非謂此也。 只言近日無出入搶掠之事可也。" 雲翼曰: "此則罷禮後, 從容講定可也。"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6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註 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