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을 허락할 것을 요청하는 요동 도사의 자문
고 시랑(顧侍郞)의 접반사(接伴使)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심희수(沈喜壽)와 부사(副使)인 상호군(上護軍) 허성(許筬)이 의주(義州)에서 치계하기를,
"오늘 이정형이 강을 건너왔는데 그가 받아온 요동 도사(遼東都司)의 자문(咨文)을 보니, 고 총독(顧總督)의 마음과 생각이 송 경략(宋經略)보다도 더 삐뚤어져 있습니다. 김수(金睟) 등이 앞뒤 사정을 명백하고 통쾌하게 다 진술했는데도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성질을 건드려 사나운 화만 더 내게 만들었습니다. 여러 과도관(科道官)들이 분분하게 많은 말로써 사의(邪議)를 물리치려 하였으나 황상(皇上)이 양쪽 주장을 가리지 말게 하였습니다. 사감 과도관(査勘科道官)을 파견할 것을 청하여 부회(附會)할 계책을 조장하고 있으니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현재 서남(西南)의 일로(一路)에는 물력(物力)이 탕갈되어 중국 사신이 나온다는 소식이 있자 놀라고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비록 피를 짜내고 뼈를 깎아 중국 사행을 지공(支供)하려 하여도 3∼4분의 1도 미칠 능력이 없어 안타깝고 민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는데, 모두 비변사에 내렸다. 도사의 자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요동 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는 명지(明旨)를 받들어 속국(屬國)이 일찍 사기(事機)를 알아 스스로 보존할 길을 찾도록 할 것을 선유(宣諭)하라는 흠차 총독 계요 보정 등처 군무 겸 리양향 급 방해 어왜 사무 병부 좌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兼理糧餉及防海禦倭事務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 고(顧)의 【양겸(讓謙). 】 헌첩(憲帖)을 받았습니다. 먼저 병부(兵部)에서 동사(東事)에 대한 제본(題本)을 올려 성지(聖旨)를 받든 내용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에 일이 많을 때는 말하는 자는 말하고 판단하는 자는 판단하는 것으로, 요는 그 가운데에서 보다 나은 계책을 따르는 데 있는 것이므로 원래 서로 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경이 짐(朕)의 위탁을 받고 군국(軍國)의 중한 임무를 맡았으니 확실한 주견이 섰으면 오직 그대로 극력 주장하라. 짐은 마땅히 허심 탄회한 마음으로 따를 것이다. 성공했을 때는 공이 돌아갈 것이고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책임 또한 미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쟁론(爭論)하는 주소(奏疏)가 있을 때 양쪽을 변별하지 말고 다 받아들여 뒷날 효험(効驗)이 어떠한 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왜병의 정세에 있어서도 순역(順逆)을 따질 것 없이 스스로 착실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고(顧)와 함께 군대 철수의 대계(大計)에 대해 일찍 단안을 내리어 조선으로 하여금 서둘러 자력으로 수비(修備)하게 하라.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 은의(恩義)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다. 종래에도 자기 스스로 군량까지 갖추어 가지고 가서 외국을 대신하여 수수(戌守)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제본(題本)에 사감과 도관을 파견할 것을 청한 데 대하여는 이미 성지(聖旨)를 내렸으니 이를 준행하라. 본부원(本部院)이 자문을 작성할 적에는 이를 참조하라.’
이상과 같은 내용의 성지를 받았습니다. 황상(皇上)께서는 귀국이 급함을 알려왔기에 혁연히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귀국을 구원하였습니다. 한번 싸워 평양(平壤)을 깨뜨렸고 재차 진격하여 개성(開城)을 빼앗자, 왜노들은 결국 서울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리하여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되돌려보냈고 2천여 리의 땅을 수복하였으니, 황상께서 소국을 사랑하시는 인자함과 포악한 자를 정벌하신 의로움은 천고에 빛날 공렬인 것입니다. 그동안에 소비된 탕금(帑金)도 적지 않았고 죽어간 사마(士馬) 역시 적은 수가 아니었으며 부서져 버린 기계(器械) 또한 수도 없었으니, 이른바 자기 밭은 버려두고 남의 밭을 김매준다는 것보다 더한 것이어서 황상의 망극한 은혜야말로 너무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군량도 이미 다시 운반할 길이 없고 군대 또한 다시 쓸 군대가 없으며, 왜노들 역시 겁에 질려 항복해 올 것을 청하고 있으니 중국으로서는 당연히 받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국의 배신 김수 등이 시무(時務)를 모르고 여종(蠡種)070) 의 충절은 본받지 아니하고 포서(包胥)071) 의 울음만 본받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왜노의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중국을 범하려 한다느니 또는 성채(城寨)를 새로 늘리고 있다느니 하면서, 어떻게든지 군대를 청하고 군량을 청할 계책만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산동(山東)·하남(河南) 및 대강(大江) 이북은 흉년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처지입니다. 그리하여 황상께서 유사(有司)에게 다방면으로 구황(救荒)하도록 하였는데도 부족한 실정인데 무슨 양식이 또 있어 귀국에 보낼 것이며 또 어디서 곡식 안 먹는 군대를 찾아내어 귀국에 보내겠습니까. 지금 조정에서는 논의가 분분하여 봉공(封貢)을 거절하기를 바라는 상소를 올리는 자가 뒤를 잇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을 담당하고 있는 신하로서 현재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위태로운 길을 밟고 있는데, 귀국이 자국을 위하는 계책을 세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본부원이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 밤을 지새우며 걱정을 하고 마음을 태우며 계획을 짰습니다. 밥이 목에서 내려가지 않고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있었는데 귀국 배신들은 지난해의 일만 자주 거론하여 천청(天聽)을 흐리게 하면서 황상의 의혹을 자아내어 도리어 본부원을 중상하려 하니, 이는 덕(德)을 원망으로 갚으려는 처사입니다. 그러니 인심(人心)이 있고 천리(天理)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귀국이 할 일은 귀국 군신(君臣) 모두가 장주(章奏)에다 왜노들이 점점 부산(釜山) 등지로 퇴각하여 그곳에 잔류하면서 명지(明旨)의 처분을 바랄 뿐, 다시는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모두 넣어 조정에 알리고 왜노를 위하여 봉공을 간청함으로써 왜노들을 빨리 가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왜노들은 반드시 귀국에게 덕을 보았다고 여겨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곤욕을 당할 때 자기 자신이 신하가 되고 아내는 첩(妾)이 되기를 청하기도 하였는데 하물며 왜노들이 자청하여 신첩(臣妾)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왜노들이 자청하여 중국의 신첩이 되면 우선 여유를 가졌다가 천천히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구천의 군신들이 꾀했던 것보다 오히려 나은 것입니다. 본부원이 왜장 행장(行長)에게 사람을 보내어 부산 등 여러 곳의 성채를 헐지 말도록 하고 또 아직 남아 있는 식량과 꼴을 남겨 두어 귀국의 덕에 보답하도록 효유한다면 왜노들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노들의 공도(貢道)는 절강(浙江)·영파(寧波)를 이용하게 하여 부산을 경유함으로써 장래 어떠한 화환을 남기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 총병(劉總兵)이 거느린 군대도 빨리 철수해야 합니다. 5천 명에게 공급하는 식량을 조금 절약하면 귀국 사람 2만 명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귀국을 진구(賑救)하는 것이니 귀국 군신은 서둘러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배신 윤두수(尹斗壽)·이덕형(李德馨) 등은 이것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 국왕에게 아뢰어 종사(從事)토록 하기 바랍니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57면
- 【분류】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註 070]여종(蠡種) : 월(越)의 대부(大夫) 범여(范蠡)와 문종(文種). 월이 오(吳)에 패하여 이른바 회계(會稽)의 수치를 당하였는데, 그후 월왕 구천(句踐)은 그 회계의 수치를 씻기 위하여 상담(嘗膽)을 하였다. 이때 이 두 사람이 구천을 도와 끝내 그 수치를 씻게 하였다. 《사기(史記)》 권129.
- [註 071]
포서(包胥) : 춘추 시대 초(楚)의 대부(大夫) 신포서(申包胥). 성은 공손(公孫)씨로 신(申)에 봉하여졌으므로 신포서라고 하였음. 오(吳)의 군대가 쳐들어와 나라가 함몰 직전에 놓였을 때 원군(援軍)을 빌기위하여 진(秦)에 들어가 7일 동안을 밤낮없이 통곡하여 진 애공(秦哀公)을 감동시켰다. 《회남자(淮南子)》 수무훈(修務訓). - [註 071]
○顧侍郞接伴使知中樞府事沈喜壽、副使上護軍許筬, 在義州馳啓曰: "李廷馨, 今日還越江。 見其所齎遼東都司咨文, 則顧總督處心橫慮, 甚於宋經略。 大抵金睟等, 吐盡前後事情, 明白痛快, 而觸發機牙, 增彼狼怒。 雖科道諸官, 發言盈庭, 斥絶邪議, 而皇上許令兩存勿辨, 至於請遣査勘科道官, 以助附會之計, 尤爲可駭。 卽今西南一路, 物力蕩竭, 有此天使出來之報, 驚惶罔措。 雖欲流血刻骨, 以及於司行人支待三四分之一, 亦所不能, 悶慮罔涯。" 竝下備邊司。 都司咨文, 略曰:
遼東都指揮使司, 爲遵奉明旨, 宣諭屬國, 早見事機, 以自圖存事, 蒙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兼理糧餉及防海禦倭事務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顧 【讓謙。】 憲帖。 先準兵部題爲東事, 奉聖旨。 國家多事, 言者自言, 斷者自斷, 要在從長計處, 原不相妨。 卿受朕委托, 擔住軍國重務, 旣實見得, 一力主張, 朕自當虛心聽從事。 成功有所歸, 不成責, 亦難諉。 今後但有爭論奏疏, 宜兩存勿辯, 以觀日後效驗何如? 毋論倭情順逆, 自宜着實修擧。 還說與顧, 撤兵大計, 斷之宜早, 仍令朝鮮, 急自修備。 朝廷之待屬國, 恩義止此。 從來未有自備糧餉, 而代外國戌守者。 本內請遣査勘科道官, 已有旨了, 欽此欽遵。 備咨本部院, 準此照得。 皇上以爾告急, 赫怒興師, 以救爾國。 一戰而破平壤, 再進而得開城, 倭奴竟遯王京, 送還王子、陪臣, 復地二千餘里。 皇上字小之仁, 伐暴之義, 千古爲烈。 所費帑金不貲, 士、馬物故亦不少, 器械壞棄無算, 非獨所謂舍己耘人也。 皇上罔極之恩, 亦已過矣。 今者餉已不可再運矣, 兵已不可再用矣。 倭奴, 亦畏威請降, 天朝正宜許之。 今爾陪臣金睟等, 不識時務, 不效蠡、種之忠, 而徒爲包 胥之泣, 動輒虛張倭奴聲勢, 曰將犯天朝, 曰新增城寨, 以爲請兵請餉之計。 蓋我山東、河南及大江以北, 歲飢人相食。 皇上勑有司, 多方救荒不給, 安得復有糧運之爾國? 又安得辟穀之兵, 而發之爾國乎, 朝中之議紛然, 上疏請絶封貢者接踵。 吾輩當事之臣, 方履危道, 而無可奈何, 爾國安可不早自爲計也? 本部院始代事也, 蒿目而憂, 苦心而畫, 食不下咽, 身不帖席, 而爾陪臣, 數擧去年事, 以溷天聽, 動皇上之疑, 反欲中傷本部院, 而以怨報德也。 可謂有人心天理乎? 爲今之計, 爾國君臣, 如以倭漸退留釜山等, 聽候明旨, 不敢復肆侵犯, 悉入章奏, 聞之朝廷, 爲倭懇請封貢, 以速其去。 倭必反德爾, 而去且不復來矣。 昔句踐之困於會稽, 身請爲臣, 妻請爲妾。 況爲倭奴請, 而爲臣妾乎? 爲倭奴請爲臣妾於中國, 以自寬而徐爲之圖, 是猶愈於句踐君臣之謀也。 本部院, 必遣人往諭倭將行長, 無毁釜山諸處城寨, 且留未盡糧芻, 以報爾德, 倭必不敢不從, 而倭貢道, 則出浙江、寧波, 不令由釜山, 以遺禍於將來。 劉總兵兵可速撤, 五千人之供, 稍節約之, 可活爾國二萬人之命。 是乃所以爲爾賑也, 爾國君臣, 其急圖之。 仰陪臣尹斗壽、李德馨等, 持此歸國, 啓爾國王從事焉。
-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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