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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50권, 선조 27년 4월 17일 을축 2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대신과 비변사 당상이 봉공에 대한 중국 조정의 논의, 왜노 조총의 위력, 납속자의 채용 등의 일을 아뢰다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호대경(胡大經)이 왜영(倭營)에서 어느 날 나왔는가?"

하니,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지난달 27∼28일 경에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경상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 고언백(高彦伯)의 서장을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에게 전하고 이어 병조 판서 이덕형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침 나절 서계(書啓) 이외에 다른 말은 없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별로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호대경이 자기가 호남(湖南)에서 왔는데 그곳 인구가 영남(嶺南)이나 관서(關西)보다 주밀하니, 이들로써 조처를 취한다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인데도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어 다시 진기(振起)할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월 23일 적선(賊船) 1만여 척이 나왔다고 한다. 만약 이 장계의 말대로라면 장계가 성첩(成貼)이 된 것이 4월 4일인데 왜 이때까지 군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가? 그렇게 많은 적이라면 헛되이 10여 일이 지나도록 그냥 눌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니, 성룡은 아뢰기를,

"1만여 척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숫자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진고(進告)한 사람 논송(論松)의 말이니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호대경이 지난달 27일경에 나왔는데 그 사이에 그러한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영남의 일들은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변장(邊將)들이 흔히 우리 나라의 굶주린 백성들의 목을 베어 그것을 대전(大戰)에서 얻은 적의 수급이라고 한다니, 속이는 일들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도원수(都元帥)가 자기 종사관(從事官)을 시켜 각진(各陣)을 순찰하게 한다면 검찰(檢察)할 수가 있을 것이건만, 지난번 이경함(李慶涵)에게 물었더니 지척에 있는 의령(宜寧)에도 가보지 않고 서울에서 보낸 공문마저도 덮어둔 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날 중국군만 믿고 있다가 지금 와서는 또 김덕령(金德齡)에게 의지하고 병사(兵使) 등 모든 장수들은 앉아서 날만 보내고 있으니 나랏일을 다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도원수는 후중(厚重)한 것 같기는 하나 이완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바로 한 도의 주장(主將)인데 부하 병졸들을 멋대로 덕령에게 이속(移屬)시켰으니 될 일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병사를 나눌 때 각 장수에게 배속시켰으니 저들 멋대로 옮겨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고 설사 공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는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김수(金睟)가 들어간 후에 고 시랑(顧侍郞)이 논핵당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대경이 통사(通事) 송업남(宋業南)에게 ‘봉공(封貢)의 일이 정해지지 않은 이때 그대 나라의 고급 사신(告急使臣)이 들어간다면 고야(顧爺)로서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으로 성이 서(徐)인 자가 또 신에게 ‘송 시랑(宋侍郞)은 탄핵을 당해 두문 불출하고 있고 양원(楊元)은 죄를 받아 요동(遼東)으로 전임되어 갔다.’ 하였습니다. 양(楊)이 죄를 입었다면 송(宋)이나 이(李)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욱(許頊)이 장계한 일은 작은 일이 아닌데 왜 서둘러 회계(回啓)하지 않고 있는가? 내 생각은 주문(奏文)의 머릿말을 고쳐서 보내고 싶다."

하니, 심충겸(沈忠謙)이 아뢰기를,

"적이 문정(門庭)을 점거하고 있다는 것을 주문의 서두로 하였더니 고 시랑이 보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아래 또 ‘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는데 그러한 어휘들을 모조리 고치면 종전에 고급(告急)했던 뜻과는 너무 거리가 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적정(賊情)에 대하여 일체 언급을 않는 것이 도리어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군량만 청하는 것이니 고치더라도 무방하다. 저들이 적의 거류(去留)에 대하여 묻는다면 사신이 사실대로 개진하면 되는 것이다."

하니, 김명원·이덕형이 아뢰기를,

"아래서도 서두를 고쳐서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노들이 우리 나라가 저들과 옛날처럼 통호(通好)를 한다면 물러가겠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종전에 듣지 못했던 말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청정(淸正)의 뜻이 그러합니다. 왜노가 우리 나라를 침범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 대마도(對馬島)가 있기 때문인데 대마도는 반드시 우리 나라의 힘을 입어야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니 지금 저들이 이유없이 물러가버리면, 대마도는 틀림없이 무인지경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저렇게 통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매우 옳은 말이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유 총병(劉總兵)도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 때문에 그런가?"

하였는데, 성룡이 아뢰기를,

"제장(諸將)들과 불화한 탓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 유 총병이 철수하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본 바로는 고 시랑(顧侍郞)이 송 시랑(宋侍郞)보다는 나아 보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번거롭거나 시끄럽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척금(戚金)이 언젠가 석 상서(石尙書)의 사람됨을 좋지 않게 여기면서 ‘그 사람은 어질기는 하지만 재예(才藝)가 없다.’ 하였고, 고 시랑에 대하여는 ‘우리 조정에서 걸출한 사람이다.’고 칭찬하였습니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권율(權慄)은 전곤(專閫)의 명을 받고서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군량(軍糧)과 군기(軍器)에 대하여 하나도 조처하지 않고 있고, 조정에서 내려보낸 공문도 모두 상자 속에 넣어 두고 거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수로서 어찌 팔짱끼고 앉아만 있겠는가. 그것은 필시 아래에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였는데, 성룡이 아뢰기를,

"권율은 변통(變通)하는 재주가 적은 편입니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평안도가 중하기는 하나 마땅히 이원익(李元翼)을 도원수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10년이 가도 원익을 체임해서는 안된다. 어디에서 모든 것을 갖춘 인재를 얻어 원수의 자리를 맡길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처음 환도(還都)했을 때는 거리에 사람들이 많더니 지난번 거둥하던 날 보니 도성 안에 사람이 없었고, 혹 있다 하여도 모두 여자들이었다. 근래 겨우 살아 남아서 그러한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군사를 시켜 시체를 모아 묻게 하였는데, 그 수가 이미 1만 7천을 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의용 포수(義勇砲手)와 식량을 운반하는 군대가 아니라면 성 안에는 더욱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큰 난리를 치른 뒤에 염려해야 할 것은 외환(外患)뿐이 아닙니다. 우선 서울이 안정된 형세를 유지해야만 외방도 따라서 진정이 될 것이니, 모름지기 성안에 5영(營)을 설치하여 영마다 2천 명씩을 충원시키고 거기에 오방(五方)의 색으로 각기 표식을 한 다음, 일이 있을 때는 병기를 들게 하고 일이 없을 때는 각둔(各屯)에 나누어 경작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군대 1만 명은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다. 당(唐)나라 때도 좌·우영(左右營)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도 그 제도를 모방하여 좌우 두 영을 두려고 하였으나 5영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그런데 병(兵)과 농(農)을 함께 한다는 것만은 안 될 일이다. 만약 군대를 농사에 종사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농부인데 그들이 어떻게 군사 훈련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도 모두 군대에게 농사짓게 하였었습니다. 법규만 제대로 갖추면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은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조금 변통을 가하여 우선 장정(壯丁)을 뽑아 군대로 쓰다가 10년쯤 후 난리가 평정되었을 때 다시 별도로 조처해야 합니다.

치란(治亂)·성쇠(盛衰)를 마치 사시(四時)·오행(五行)이 순서에 따라 서로 반복되는 것처럼 여기고 확고한 원기(元氣)와 같이 심지(心志)를 바꾸지 않는다면 저절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전교를 보고 사람들이 미안하게 여겼었습니다. 현재 적이 경내에 있지마는 7개 도(道)가 이미 수복이 되었고 민심 역시 주상을 지향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거(莒)와 즉묵(卽墨) 등 두어 고을만 가지고도 전 국토를 수복068) 하였었습니다. 지금 상께서는 마땅히 사람들의 마음을 책려(策勵)하여 스스로 강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계속하소서. 그리하여 부문(浮文)·말절(末節)은 일체 제거하시고 오직 연병(鍊兵)·보민(保民)·어적(禦賊) 세 가지 일만을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은 재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가짐이 절검(節儉)하고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으며 군기(軍器)·군무(軍務)에 있어서도 모두 극진히 조처하느라 밤낮없이 근고(勤苦)하고 있다는데, 팔도(八道)를 전부 그와 같은 사람을 얻어 맡긴다면 힘들이지 않고 성효(成效)가 있게 될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정성스럽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하고, 명원은 아뢰기를,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일을 조처하면서도 성색(聲色)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서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으니 진실로 심복할 만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항복하여 온 왜를 죽이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이러한 나의 뜻을 전에도 이미 말하였거니와 마침 김응서(金應瑞)가 죽이지 않아 이미 8∼9명을 얻었고 김충민(金忠敏)도 6명을 얻었다 하니, 나오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식량을 주어 굶주림에 이르지 않게 하고 또 직책도 제수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안해야 할 것이다. 왜국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저들 자신이 모두 위태롭게 여기고 있으니, 이러한 소식을 듣는다면 나오는 자들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다수를 나오게 만든 자에게도 상을 내려야 할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왜인이 항복하여 온 곳에 이미 공명 고신(空名告身)과 청포(靑布)를 내려보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질지(要叱只)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졸왜(卒倭)는 아닌 것 같다. 우리 나라 도로망을 알아 은복(隱伏)할 곳과 진퇴(進退)에 대하여 그 방략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으로 왜어(倭語)를 아는 자가 들으니, 왜노가 ‘그대 나라 사람들은 어리석다. 성을 낮은 곳에다 쌓았으니 적군이 높은 데 올라가서 내려다보고 쏘는 것을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우리들이 그대 나라에 오래 머물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높은 곳에다 성을 쌓았다면 누가 감히 범하겠는가.’ 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러한 뜻을 이미 이른 바 있다. 성 안을 내려다보게 되면 아무리 금성(金城)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해주성(海州城) 역시 내려다보이는 곳이라서 숨거나 피할 만한 곳이 없다. 적이 대포로 쏘아댄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록 쇠붙이로 방패를 만들더라도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 진중의 정운(鄭雲)이라는 사람이 그 대포를 맞고 죽었는데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도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선장(船藏)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항복한 왜노의 큰 조총(鳥銃)을 꺼내오게 하여 제재(諸宰)들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이 구멍 속에 철환(鐵丸) 20개와 작은 돌 4개를 넣을 수 있는데, 이것을 육전(陸戰)에서 수레에다 싣고 쏘아댄다면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그것이 힘으로는 대포 정도의 위력을 가졌고 명중하는 것은 조총처럼 묘하여 참으로 당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총에는 화약(火藥)이 얼마쯤 들어가게 되어 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호준포(虎蹲砲)에 4냥(兩)이 들어가는데 이 총에도 아마 4냥쯤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 나라 대총(大銃)에다 목전(木箭)을 넣어 쏘는 것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웃으면서 ‘왜 큰 서까래를 넣어 쏘지 않는가?’ 하더랍니다. 평양성(平壤城)을 공략할 때 낙 총병(駱總兵)이 우리 나라 천자총(天字銃)에다 큰 판목(板木)을 넣어 쏘아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싸움에 임하여 필요한 것은 화공(火攻)만한 것이 없다. 항우(項羽)가 지금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화공이 아니면 만인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대포는 왜국에도 많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전선(戰船)에다 많이 싣고서 쏘아대면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 총이 백자총(百子銃)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포(砲)를 보니 매우 좋은데 우리 나라에서도 본떠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것을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다 공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수전(水戰)에는 우리 나라 대총(大銃)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꼭 이것을 써야 할 것이 없겠으나 육전(陸戰)에서는 쓸만하겠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안주성(安州城)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곳은 고성(古城)이 아닌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고성인데 중간에 개축(改築)하면서 더 넓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 진보(鎭堡)는 지나치게 많지만 적들이 보기에는 별로 든든한 것이 못되고 또 들어가 방어할 군대 역시 분배(分排)하기가 어려우니 매우 염려스럽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합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중에서 규모가 작은 보(堡)는 큰 곳으로 합치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습진(習陣)하는 걸 보았는데 상당히 잘하고 있었다. 이는 병판(兵判)이 가르친 효과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신의 이웃 마을에 칼과 창 쓰는 법을 배운 자가 있는데, 그의 말이 ‘느티나무잎이 막 움터 연할 때 그것을 훑어다 주린 창자를 채우고도 힘이 솟아 날뛰었으나 이제는 빈 배에 허기가 져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달 밝은 밤이면 집집마다 총 쏘고 칼과 창쓰는 법을 익히고 있고 애들까지도 모두 그것을 본받아 익히면서, 모두들 ‘지금은 왜노들을 만나더라도 지난날 같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부지런히 교련시키면 왜 못 배울 리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산손(山孫)이 만든 조총을 이덕형에게 내리며 이르기를,

"이것은 산손이 만든 것인데 잘 만들어졌다. 경이 가지고 가도록 하라."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이 제독(李提督)의 평양에서의 전공(戰功)에 대하여 비(碑)를 세우라는 전교가 일찍이 있었으나 근래에 문서(文書)가 번거로와 아직까지 다시 승전(承傳)을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독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전에도 이미 일렀거니와 그의 화상을 그려 간직해 두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에 대한 별장시(別章詩)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사신이 갈 때 부쳐 보내야 합니다. 그 시(詩)는 포장(褒張)하는 내용만 쓸 것이 아니라 끝에다 적이 아직 다 섬멸되지 않았다는 뜻을 넣어야 합니다. 중국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중국 조정에서 과도관(科道官)의 논의가 날카로울 적에 제독(提督)이 우리 나라 가요(歌謠)를 내보이면서 적이 갔다가 다시 온 것이라고 해명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평양(平壤)·송경(松京)의 가요 내용이 모두 적이 이미 가버린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유홍(兪泓)이 써 준 시의 내용 중에 ‘남쪽 지대의 수많은 적들을 마침내 먼지 쓸듯 하였네[南紀連營竟掃塵]’라는 한 귀절이 있었는데, 그는 이 시(詩)까지 내보이면서 ‘이것은 조선의 의정 대신(議政大臣)이 쓴 시이다.’ 하였답니다. 오직 의주(義州)의 시축(詩軸)만은 다행히 신이 보고 고쳤습니다. 그의 공로를 칭송한 끝에다가 적이 아직 다 가기도 전에 지레 철수해 버려 추모(追慕)의 생각이 없지 않다는 뜻을 겸하여 올렸더니, 그 시축만은 내어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그가 반드시 그러한 말들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뽐내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병판(兵判)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러하다. 송 경략(宋經略) 역시 자기에 관한 가요(歌謠)를 금자(金字)로 썼다고 한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이런 위난(危難)한 시기를 당하여 삼공(三公)의 일을 신 혼자서 맡고 있기 때문에 종전부터 일을 그르친다는 기롱이 많으니 너무도 민망하고 안타깝습니다. 신의 어미는 금년 나이 83세로 아침 저녁이 염려되는데 멀리 영남(嶺南)에 있어 오래도록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심사(心思)가 번거로와 나랏일에 전념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호남·영남을 순심(巡審)하고 싶다고 아뢴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물러가고 싶다면 내가 먼저 물러나야 할 것이다. 영상(領相)이 나는 물러나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은 물러가려 하니 그게 될 일인가?"

하였다. 또 최흥원(崔興源)에게 이르기를,

"근일의 나랏일에 대하여 판부사(判府事)도 말할 것이 있는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적정(賊情)은 날이 갈수록 두려워지는데 우리의 군량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어만 갑니다. 서울의 일로 보더라도 진제(賑濟)를 하고는 있지만 굶주린 백성들의 사망이 날로 더 늘고 있어 반드시 다 없어지고야 말 지경입니다. 평상시의 진제는 보리 익기를 한도로 하였었지만 금년에는 밀과 보리가 모두 무성하다고는 하여도 씨 뿌린 곳이 너무 적어서 마침내 구제해 나갈 방법이 없으므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신은 용렬하여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용관(冗官)은 이미 도태하였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자가 있으니 또 태거하여 관용(官用)을 아껴 써서 내년의 전세(田稅) 때까지 대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군이 불시에 나오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이어댈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밀과 보리를 심은 곳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충청도는 심은 곳이 더러 있지만 전라도는 전혀 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납속(納栗)한 사람도 채용할 만한 자가 있으면 채용하는 것이 좋은데 버려두고 채용하지 않아 영직(影職)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평안도(平安道)이춘란(李春蘭) 같은 사람도 지금 위장(衛將)으로 임명하여 서울에 와 시위(侍衛)하게 하면 어떤가? 그것이 좋은 일인데도 유사(有司)가 하지 않고 있으니, 그렇게 하면서 납속하기만 바란다면 어느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하니, 덕형은 아뢰기를,

"전번에 이흥준(李興畯)이 위장이 되었고 윤의남(尹宜男) 역시 위장에 의망(擬望)되었습니다."

하고, 명원은 아뢰기를,

"이춘란은 작은 고을살이 정도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고, 흥원은 아뢰기를,

"거창(居昌)에 사는 박희립(朴希立)의 아들 지우(知遇)도 유학(幼學)으로서 가선(嘉善)이 되어 지난번 위장에 의망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에도 제수할 수는 있으나 이춘란 같은 무리는 위장에 제수하는 것이 좋겠다. 춘란의 인품이 대체로 어떠한가? 수령을 감당할 만한 인물인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감당할 만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고 시랑(顧侍郞)이 주홍모(周弘謨)·호대경(胡大經)을 잇달아 보내고 또 호택(胡澤)·심사현(沈思賢)을 보냈는데 그런 일로 이렇게 몰아보낼 수 있습니까?"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고 시랑이 심유경(沈惟敬)을 꾸짖기를 ‘네가 당당한 중국 조정의 장관(將官)으로서 어찌하여 경솔하게 적의 영문에 들어가 봉공(封貢)을 허락했는가.’ 하고 곤장을 치려다 그만두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통보(通報)를 보면, 중국에 참호(僭號)한 역적이 있어 수길(秀吉)과 서로 통하여 반역을 도모한 사실이 발각, 복주(伏誅)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놀라운 일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또 다른 통보를 보내, 미녀(美女) 1명의 값이 벼 1두(斗)이고 10세 된 자식 값은 떡 2쪽이라고 하여 혹 부자(父子)가 서로 잡아먹기도 한다하니, 천지간에 어찌 이러한 때가 있단 말인가. 지난해에는 큰 홍수가 져서 배가 뭍으로 다닌 지가 이미 반년이 넘었다고 하니 산동(山東)이 그렇고서야 어찌 외국으로 군량을 내보낼 형편이 되겠는가."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이달이 바로 정양(正陽)의 달인 4월인데도 일식(日蝕)이 있었으니 이는 더할 수 없는 천변(天變)입니다. 천하의 난리가 아마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제독이 여기 왔을 때 남몰래 신에게 ‘제일 걱정되는 곳이 중원(中原)이다. 세상이 지금부터 시끄러울 모양인데 왜병이 물러간 후에라도 언제나 군대를 교련하여 중국의 국경지대에다 주둔시켜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제독이 우리 나라에 대하여는 곡진한 생각을 다하여 심지어는 은(銀)을 캐지 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은을 캐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여기 온 장수들은 모두 탐오(貪汚)스러우니 캐려거든 송야(宋爺)가 들어간 뒤에나 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여기 나온 장관(將官)들이 은을 캐 쓰는 것을 보면 너도 나도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져 그 폐단이 끝이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독은 송응창(宋應昌)처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험피(險陂)한 자는 아니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제독은 우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자기 아우 여매(如梅)를 특히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중국에서는 의논이 준엄하여 심지어 제독이 배반할 것이라고까지 한다."

하였는데, 성룡이 아뢰기를,

"옛날에 적청(狄靑)069) 을 일러 배반자라고 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러한 논란이 대체에는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이른바 간신(奸臣)의 마음을 대간(臺諫)이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53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권농(勸農) / 광업-광산(鑛山) / 왕실-국왕(國王) / 구휼(救恤)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

  • [註 068]
    거(莒)와 즉묵(卽墨) 등 두어 고을만 가지고도 전 국토를 수복 : 거(莒)와 즉묵(卽墨)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齊)의 속읍(屬邑). 연(燕)의 장군 악의(樂毅)에 의하여 제의 70여 성읍(城邑)이 모두 함락되고 오직 거와 즉묵 두 읍만 남았었는데, 제의 전단(田單)이 기계(奇計)를 내어 잃었던 70여 성읍을 모두 수복한 고사. 《사기(史記)》 권82 전단 열전(田單列傳).
  • [註 069]
    적청(狄靑) : 송(宋)의 명장임. 조원호(趙元昊)의 난리에 연주 지사(筳州指使)로서 반란을 토평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농지고(儂智高)가 반란했을 때도 전세를 역전시켜 적을 멀리 쫓아버리는 등 적들이 만나면 천신(天神)이 나타났다고 모두 도망치게 하였다.

○上御便殿, 引見大臣及備邊司有司堂上。 上曰: "胡大經, 自營, 幾日出來?" 德馨曰: "去月二十七八日間, 出來云矣。" 上以慶尙左道兵使高彦伯書狀, 傳于領相柳成龍, 仍顧謂兵判李德馨曰: "朝日書啓之外, 無他語乎?" 德馨曰: "別無他語。 但(太經)〔大經〕 來自湖南, 則人民稠於嶺南、關西。 若以此措置, 則何事不成, 而姑息度日, 無復振起云云耳。" 上曰: "三月二十三日, 賊船萬餘艘出來云。 若如此狀之言, 則狀啓成貼, 在四月初四日矣, 何至此而不爲動兵乎? 大勢之賊, 必不空淹十餘日之久也。" 成龍曰: "萬餘艘之船, 豈可的知其數耶? 此出於進告人論松之言, 而不可盡信也。" 德馨曰: "胡大經, 去月二十七日間出來, 其間似無此事矣。" 上曰: "分屯左右道云耳。" 成龍曰: "近來聞之, 則嶺南之事, 無可信者矣。 邊將多斬我國飢民, 以爲大戰斬級云。 欺罔之事, 大抵類此。 都元帥令其從事官, 往巡諸陣, 則可以撿察, 而頃問李慶涵, 則宜寧咫尺之地, 尙不往見, 自京所送公文, 亦皆掩置不省。 頃者, 只恃天兵, 今則又倚於金德齡, 如兵使等諸將, 坐以度日, 國事無復可爲也。 大槪都元帥, 雖似厚重, 而事多弛緩。" 上曰: "兵使, 乃一道主將, 而下卒任意移屬於德齡, 則其可乎?" 成龍曰: "分兵時, 各屬於將, 則必不私自遷徙矣。" 上曰: "如彼而設或成功, 亦非道理也。 且金睟入去之後, 顧侍郞被論云, 然乎?" 德馨曰: "大經言于通事宋業男曰: ‘此時封貢之事未定, 爾國之告急使臣若入去, 則顧爺亦不得自由, 靜而待之可也’ 云。 唐人徐姓者, 又謂臣曰: ‘宋侍郞被參杜門; 楊元以罪出守遼東’ 云。 若被罪, 則亦不能獨免矣。" 上曰: "許頊狀啓之事不小。 何不速爲回啓乎? 予意則欲改奏文頭辭而送之耳。" 沈忠謙曰: "以賊據門庭爲頭辭。 顧侍郞以此爲非云。 其下又有賊未退去之語。 若盡改此等語, 則與前告急之意, 大相不同。 無乃以一不及賊情, 反以爲掩蔽乎?" 上曰: "此只請糧而已, 改之亦無妨矣。 彼若問賊之去留, 則使臣自可據實陳辨矣。" 金命元李德馨曰: "下議, 亦欲改其頭辭而送之矣。" 上曰: "倭奴以爲, 我國若與渠依舊通好, 則退去云, 此前所未聞之言也。" 成龍曰: "淸正之意如是。 倭奴之所以侵犯我國者, 以其有對馬島, 而馬島之生利, 必資於我國矣。 今若無端退去, 則馬島必作無人之地, 以此欲通好如許矣。" 上曰: "此言極是。" 成龍曰: "劉總兵, 亦將被罰云。" 上曰: "何故而然?" 成龍曰: "與諸將不協。" 上曰: "此時劉總兵, 若撤回則可慮也。" 成龍曰: "以臣所見, 顧侍郞似優於宋侍郞也。" 上曰: "何以知其然也?" 成龍曰: "善處事, 而不至煩擾。 戚金嘗短石尙書之爲人曰: ‘其人賢而無才藝。’ 至於顧侍郞則譽之曰: "我朝之傑然者’ 云。" 忠謙曰: "權慄受專閫之命, 無所爲之事。 軍糧、軍器, 一不措置, 自朝廷所下文書, 皆藏篋中, 而不爲擧行云。" 上曰: "元帥豈拱手而坐乎? 必是下無奉行之人耳。" 成龍曰: "權慄少變通之才矣。" 忠謙曰: "平安道雖重, 當以李元翼爲都元帥也。" 上曰: "此不可爲也。 元翼, 雖十年, 不可遞也。 元帥, 何處得具備人任之乎?" 上曰: "予初還都時, 街巷多人焉, 頃於擧動之日見之, 則京城無人, 雖僅有之, 皆是女人也。 近來僅有而然乎?" 德馨曰: "令軍士, 收瘞人尸, 其數已過一萬七千矣。" 上曰: "安有如此事乎?" 成龍曰: "若非義勇砲手、食糧之軍, 則城中尤無人矣。 大亂之後, 所可慮者, 不特外患也。 宜重京師之勢, 然後可以鎭定外方。 須置五營于城中, 每營以二千人屬之, 表以五方之色, 有事則執兵, 無事則分屯耕作, 恒留萬兵則可矣。" 上曰: "此言宜當。 時有左右營。 予亦欲依古制, 置左右兩營, 而五營則未及思之耳。 但兵農合一, 則不可爲也。 若使兵就農, 則是乃農夫也。 豈能坐作擊刺乎?" 成龍曰: "齊桓 , 亦皆兵寓於農矣。 若盡規矩, 則爲之不難, 而今則勢不能爲。 然稍加變通, 擇其丁壯爲兵, 待十年, 亂定之後, 更別處置。 治亂、盛衰, 視如四時、五行之循其序, 而心志不變, 如元氣之確然, 則自可有爲矣。 頃見傳敎, 群情未安。 目今賊雖在境, 七道已恢, 民心亦有向上之意。 古人唯以即墨數邑, 而尙能恢復。 自上當策勵群心, 自强不息, 浮文、末節, 一皆除去, 只以鍊兵、保民、禦賊三事爲務, 而盡其心力則幸矣。" 上曰: "平安監司李元翼, 非但有才, 持身節儉, 爲國盡誠。 至於軍器、軍務, 亦皆極盡措置, 晝夜勤苦云。 若八道盡得如此之人而任之, 則不勞而有成效矣。" 成龍曰: "有誠悃之人也。" 命元曰: "性度寬洪, 措事之間, 不動聲色, 而雖遭不悅之事, 亦不形於辭色, 其爲人誠可服也。" 上曰: "降之殺, 甚無益也。 此意, 予前已言之。 金應瑞適不殺, 而已成八九人; 金忠敏, 亦有六名云。 出來者, 必須給糧, 使不飢餓, 亦當除職, 以慰其心可也。 倭國嗜殺人, 皆自危苦, 聞風則出來者, 必多矣。 多數誘出者, 亦可論賞矣。" 成龍曰: "降處, 空名告身及靑布, 已下送矣。" 上曰: "聞要叱只之言, 則似非卒矣。 能識我國道路, 敎以隱伏、進退之策矣。" 成龍曰: "我國人知語者聞之, 則奴以爲: ‘爾國之人愚矣。 築城於卑處, 敵人登高俯射, 莫能當之。 我輩之久留於爾國, 以此故也。 若於高處築之, 則誰敢犯之?’ 云矣。" 上曰: "此意予已言之矣。 城中俯瞰, 則雖金城, 亦何能防? 海州城, 亦是俯臨處, 而無可隱避之地。 若以賊之大砲放之, 則難當矣。 雖以鐵作防牌, 不可制也。" 忠謙曰: "李舜臣陣中人鄭雲, 逢此大砲而死。 穿過眞木防牌三件, 又過米二石, 而洞貫身, 入於船藏矣云云。" 上命出降大鳥銃, 以示諸宰曰: "此穴中, 容鐵丸二十箇及小石四箇。 若於陸戰, 載車以放, 則不可當也。" 德馨曰: "力則有大砲之勢, 中則有鳥銃之炒, 誠不可當也。" 上曰: "此銃, 應入火藥幾許?" 德馨曰: "虎蹲砲入四兩, 此砲亦可入四兩。 我國大銃, 以木箭放之, 則唐人見而笑之曰: ‘何不納大椽乎?’ 平壤攻城時, 駱總兵, 以我國天字銃, 充以大椽攻城矣。" 上曰: "臨戰之制, 莫如火攻。 脫使項羽再生於此時, 無火攻, 則不得爲萬人敵矣。 此大砲, 於倭國中, 亦不多有。 若以此多載戰船放之, 則不得敵矣。" 德馨曰: "此銃勝於百子銃矣。" 上曰: "觀此砲, 甚好。 我國, 亦可效而爲之。" 德馨曰: "多造而給於戰船, 何如?" 上曰: "水戰有我國大銃之具, 不須爲之。 可用於陸戰也。" 德馨曰: "安州城, 甚不好。" 上曰: "此非古城乎?" 成龍曰: "古城, 而中間改築, 退而廣之。" 上曰: "我國鎭堡過多, 於賊所見, 不足爲固, 而入防軍士, 亦難分排, 甚可慮也。" 成龍曰: "莫如合之。 其中小堡, 幷於大處無妨。" 上曰: "頃見習陣, 則頗善爲之。 此兵判敎訓之效也。" 德馨曰: "臣之隣里, 有學刀(搶)〔槍〕 者曰: ‘槐葉方嫩之時, 拉食充腸, 猶可踴躍爲之, 今則枵腹, 不能運身云矣。’ 然近來月明之夜, 家家皆習砲及刀槍, 兒童亦皆效而習之, 皆言曰: ‘今則雖逢, 不至於曩日之無氣就死’ 云耳。" 上曰: "我國若勤敎鍊, 則亦何有不能學之理哉?" 仍以山孫所造鳥銃, 賜李德馨曰: "此, 山孫之制造, 好矣。 卿宜持去。" 忠謙曰: "李提督 平壤戰功立碑事, 曾有傳敎, 而近來文書煩委, 趁未得更捧承傳, 催督何如?" 上曰: "予前已言之矣。 只畫其像而藏之, 則不可也。 其別章, 亦何以爲之?" 德馨曰: "使臣之行, 當順付以送矣, 其詩不可但爲褒張之辭而已, 末端宜入賊未盡滅之意也。 聞唐人言, 則 朝科道官, 論議崢嶸之時, 提督出示我國歌謠, 以自明其賊已去而再來云。 蓋平壤松京之歌謠軸, 皆已賊去爲辭故耳。 在京城時, 兪泓贈詩有曰: ‘南紀連營竟掃塵’ 云, 則亦出示曰: ‘此朝鮮議政之詩也云云。’ 獨於義州之軸, 臣幸得及見而改之, 頌功末端, 兼言賊未盡去, 而徑爲撤去, 不能無追慕之意而呈之, 故唯此軸, 不爲出示於朝云矣。" 上曰: "予意亦以爲, 必以如此之言, 自矜其功。 今聞兵判之言, 果然矣。 宋經略, 以金字書其歌謠云。" 成龍曰: "當此危難之時, 三公之事, 臣獨當之。 自前亦多誤事之譏, 不勝悶迫。 臣母今年八十有三, 朝夕可慮, 遠在嶺南, 久未得見。 以此心思擾擾, 不得專一於國事。 今所啓達, 欲往湖、嶺而巡審者, 以此故也。" 上曰: "若欲退, 則予當先退。 領相使予不得退, 而欲自退可乎?" 上謂崔興源曰: "近日國事, 判府事, 亦有可言者乎?" 興源曰: "賊情日益可畏, 而軍士、軍糧, 日益竭乏。 以京城之事見之, 雖爲賑濟, 而飢民死亡, 日以益多, 必至於殆盡而後已。 平時賑濟, 則唯以麥熟爲限, 而今年兩麥, 雖曰茂盛, 所付之處至少, 終無接濟之策, 極爲悶慮。" 上曰: "然則奈何?" 興源曰: "臣庸劣, 不知所處。 冗官已汰, 而猶有存者, 似當又汰, 而撙節之, 以繼明年田稅可也, 而兵不時出來, 則無路可繼矣。" 上曰: "兩麥耕種, 幾許?" 興源曰: "忠淸道, 則稍有耕種處, 而全羅道, 則全不爲之云。" 上曰: "納粟人, 如有可用者用之可也, 而棄置不用, 有同影職。 如平安道 李春蘭, 今除衛將, 使之來京侍衛何妨? 此是好事, 而有司不爲。 如是而望其納粟, 人誰肯爲?" 德馨曰: "前者李興畯爲衛將矣, 尹宜男亦擬衛將之望。" 命元曰: "李春蘭願得一小縣云。" 興源曰: "居昌朴希立之子知遇, 以幼學爲嘉善, 頃入衛將望矣。" 上曰: "守令亦可爲之, 如李春蘭輩, 衛將除授可也。 大槪春蘭爲人何如? 可堪爲守令者乎?" 命元曰: "可堪爲之。" 上曰: "然則試之可也。" 成龍曰: "顧侍郞連送周弘謨胡大經, 又送胡澤沈思賢。 以此其可驅送乎?" 德馨曰: "顧侍郞沈惟敬曰: ‘爾以堂堂天朝將官, 何以輕入於賊營, 許封貢乎?’ 欲杖不果云。" 上曰: "見通報, 則中原有僭號逆賊, 與秀吉相通叛逆, 事覺伏誅云。 豈有如此駭愕之事乎? 且見一通報, 則一美女直租一斗, 十歲子直餠二片。 或有父子相食者, 天地間, 安有如此之時乎? 前年大水, 陸地行舟, 已過半歲云。 山東如彼, 豈有出糧於外國之勢乎?" 成龍曰: "今月, 乃正陽之月, 而日有食之, 莫大之天變也。 天下之亂, 恐不得容易止息也。" 德馨曰: "提督來此時, 密謂臣曰: ‘中原, 最可虞也。 天下自此多事。 雖退之後, 可以敎兵, 而留屯於上國境上’ 云。" 成龍曰: "提督爲我國謀曲盡矣。 至言爾國, 勿爲採銀云。上曰: "令勿採銀者, 何意?" 德馨曰: "來此諸將, 皆貪汚, 須待宋爺入去之後, 採之無妨云。 蓋來此將官, 見其採用, 則皆生欲得之心, 其弊無窮故耳。" 上曰: "提督則不至於宋應昌之險陂不可測者耳。" 忠謙曰: "提督, 友愛之人也。" 上曰: "何以知之?" 忠謙曰: "愛少弟如梅特厚云。" 上曰: "中原議論嚴峻, 至以提督爲將叛矣。" 成龍曰: "古者, 以狄靑爲叛者。 如此之論, 於大體極爲好矣。 所謂奸臣之心, 以臺諫折之而有餘者, 此也。"


  •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53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권농(勸農) / 광업-광산(鑛山) / 왕실-국왕(國王) / 구휼(救恤)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