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식량과 군병을 지원받는 문제·흉년으로 백성이 식인하는 문제 등을 대신 등과 의논하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 도사(張都司)의 【이름은 삼외(三畏)임. 】 자문(咨文)을 보니 산동(山東)의 양곡을 지급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무슨 뜻인가?"
하니,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기를,
"호택(胡澤)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바로 산동 사람인데 산동은 바람과 파도가 극히 험난하여 싣고 오기가 어렵다.’고 하였고, 척금(戚金)은 ‘중국 조정 역시 소비가 극히 번다하기 때문에 국가의 비축이 떨어졌다.’고 하였으며, 급사중(給事中)의 제본(題本)에는 ‘국가의 비축이 한 달을 유지할 양식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중국 조정 역시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반드시 군량을 먼저 수송한 다음에야 병사를 발송(發送)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병사를 출동시킬 수 없는 형세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 시랑(顧侍郞)이 만일 주려고만 하면 줄 수도 있는데 반드시 우리 나라 선박으로 실어와야 하니, 마땅히 선박을 먼저 준비하고서 고 시랑에게 다시 자문을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일이 이미 다급한데 고 시랑에게 어찌 자문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주 유격(周遊擊)의 【이름은 홍모(弘謨)임. 】 말을 들으니 올바르게 말하였다. 이 사람도 본래 심유경(沈惟敬)과 일반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중국의 공론(公論)이 발의된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하니, 공조 판서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조만간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려고는 하는데 다만 양초(糧草)가 준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은 아뢰기를,
"허진(許晉)을 보고 물었더니 ‘석 상서(石尙書)는 【이름은 성(星)임. 】 이미 환히 알고 있으나 다만 송응창(宋應昌)과 교분이 두텁기 때문에 사정(私情)에 이끌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이 제독(李提督)과 【여송(如松). 】 송 경략(宋經略)이 【응창(應昌). 】 아직 복명(復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항표(降表)도 고 시랑에게 있으나 상주(上奏)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주홍모가 가져온 방문(榜文)도 꼭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방문으로 보여준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나친 생각이다. 굳이 다른 방문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아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심충겸이 아뢰기를,
"중국 장수들이 슬쩍 상대방의 낯빛을 살피고 나서 거짓으로 그럴 듯한 말을 해놓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상투적인 태도이니, 주홍모의 말인들 어떻게 모두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오가는 문서를 전일에는 등서하여 보여주지 아니하였는데 이번에는 유독 등서하여 보여주니 이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굶주린 백성들이 요즘 들어 더욱 많이 죽고 있는데 그 시체의 살점을 모두 베어 먹어버리므로 단지 백골(白骨)만 남아 성(城)밖에 쌓인 것이 성과 높이가 같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비단 죽은 사람의 살점만 먹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 먹는데 포도군(捕盜軍)이 적어서 제대로 금지하지를 못합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부자 형제도 서로 잡아 먹고 있으며 양주(楊州)의 백성은 서로 뭉쳐 도적이 되어 사람을 잡아 먹고 있습니다. 반드시 조치를 취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뒤에라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금지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심충겸이 아뢰기를,
"가등청정이 경주(慶州)에 서신을 보낸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곡절이 있어서였을 텐데 유 총병(劉總兵)이 임기응변하려고는 하지 않고 호남(湖南)으로 진을 옮겼으며 주홍모는 심유경의 화친하는 것을 반대하는 일로 적진에 들어갔으니,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청정이 반드시 한차례 위협하고 약탈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깊이 염려됩니다. 또 청정의 마음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유 총병이 관백(關白)을 도모하라는 말로써 글을 써서 들여보냈으니 그들로서는 크게 성을 내어야 마땅할 텐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두 왜적이 【행장(行長)과 청정(淸正). 】 공적을 다투어 화목하지 못하다는 말은 전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천리 밖에서 단지 문서(文書)만 근거로 하여 어떻게 그 곡절을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유 총병이 남원(南原)으로 옮겨 주둔한 것은 반드시 적이 병사를 출동(出動)할 낌새가 있음을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니 심충겸의 염려가 그럴 만한 이치가 없지도 않습니다. 유 총병이 진지를 옮긴 후로는 대구(大丘) 이북의 직로(直路)가 이미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되어버려 아무런 장애물도 없습니다. 평소부터 보리가 익을 철에는 왜적이 반드시 침범하여 올 것이라고 여겼는데 밀과 보리가 성숙한 뒤에 왜적이 만일 침입해 온다면 백성들은 더욱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굶주림이 너무도 심한데 저 왜적들이 여러모로 진제(賑濟)한다고 하니 굶주린 백성으로서 적에게 빌붙는 이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고, 심충겸이 아뢰기를,
"청정은 북도(北道)에 있으면서 공을 세운 것이 많은데 행장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것에만 힘을 썼으니 이러한 정리로 미루어 본다면 두 도적이 다툴 것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도적이 소강상태로 오늘에까지 이른 것은 반드시 심유경의 일을 기다린 것일 텐데 주홍모가 또 그것을 뒤집어 놓았으니 왜적이 반드시 격노할 것이다. 그 방문(榜文)이 만일 가차(假借)하여 우리 나라에 보인 것일 뿐이라면 오히려 모면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실제로 그러하다면 반드시 노여움을 유발할 것이니, 한차례 공격하여 오는 것을 아마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주홍모가 만일 실지로 그 방문을 가지고 간다면 무척 무모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방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러한 일을 전일에는 하지 않더니 지금에 처음하였고 또 다른 방문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지난번에 보여준 것은 가짜인 듯합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이 역시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전부터 중국 장수들이 말은 간혹 거짓으로 한 때가 있었으나 문서만은 일찍이 거짓으로 한 때가 없었습니다. 척금(戚金)도 말하기를 ‘고 시랑이 만일 온다면 송경략이 하던 것과는 반드시 같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번의 이 방문을 필시 가짜일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될 때 외지의 군사가 많이 들어가 호령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패망하게 된 것입니다. 인력으로 해야 할 일을 다하였더라면 진주는 대읍(大邑)이니 필시 함락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사가 많이 죽었는데 이것만이 애석한 것이 아니라 이 뒤로부터는 모두가 성(城)을 지키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더욱 불행한 일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진주성이 함락된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이었다. 병력의 강약이 전후가 현격하게 달랐으니, 전에는 【김시민(金時敏)이 목사로 있을 때 영남을 지키던 왜적이 두 번이나 침범해 왔으나 모두 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 왜적이 일개 부대의 병사로 와서 포위하였기 때문에 보전할 수 있었지만 후에는 대부대의 적이 쳐들어와서 기어이 함락시킬 작정을 하고는 성밖의 해자(垓子)를 터서 마르게 한 뒤에 구덩이를 채워 성에 닿도록 쌓고서 타고 올라왔다고 하였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김천일(金千鎰)의 군사는 모두 시정(市井)의 무리들이었으니 그런 군병으로 어떻게 수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천일이 강화(江華)에 있을 때 병사를 훈련시키지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어느 겨를에 병사를 훈련시켰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성질이 또한 실로 오활하고 옹졸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천일의 마음은 고귀하지마는 성품은 과연 오활한 사람이었다.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병판은 해득해 보았는가?"
사신은 논한다.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한 자가 없다고 했는데 상이 김천일을 논한 것은 김천일의 사람됨을 명확하게 알았다고 할 수 있겠다. 김천일은 도량이 편협하고 재략이 천단(淺短)하니 어떻게 난을 평정하고 시대를 구제할 재목이었겠는가. 그러나 그 마음만은 진실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처음 난이 일어났을 때 한산(閑散)한 신분으로 전라도 나주촌(羅州村)에 있었는데 적병이 경성(京城)에 들어가고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강개하여 향정(鄕井)에서 모집한 의사(義士) 겨우 3백여 명을 이끌고 경성으로 곧바로 향하였다. 그때 전라 순찰사 이광(李洸)이 용인(龍仁) 지방에서 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쫓겨 도망을 하였는데, 김천일의 외로운 군사들은 저들의 패배를 보고도 조금도 동요되지 아니하고 마치 낙토(樂土)로 달려가듯 하였으니 그가 사졸의 마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강화(江華)를 보존하여 지킬 때에는 3∼4천의 군사를 모집하여 전진(全陣)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불리하자 경강(京江) 근처에 복병을 설치하여 전후에 참괵(斬馘)한 것이 거의 4백여 급(級)이나 되었고, 또 서울에서 적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유인해 내어 자기에게 소속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강화가 보존되어 위로는 행조(行朝)와 통하고 아래로는 양호(兩湖)와 연결될 수 있었으니 그 공로 역시 작지 않았다. 그러나 기운이 매우 잔약하고 몸마저 병이 많은 데다 오래도록 군중에 있으면서 근심과 피로로 병이 생겨 낮이면 미음을 마시고 밤이면 앉아서 졸았지만 한덩어리 성심(誠心)만은 일찍이 조금도 게으른 적이 없었고, 사람을 만나 행조(行朝)의 어려운 형편에 말이 미치면 반드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소년 시절부터 정철(鄭澈)과 벗이 되었고 정철의 아들은 또한 그의 여서(女壻)가 되었으므로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으나 사실은 일마다 모순이 있었다. 정철이 체찰사가 되어 행조에서 강화부를 들렀을 때에 김천일이 적을 토벌할 계책을 자문받으려고 방문했는데 정철은 때마침 찾아온 손님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김천일이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이렇게 하는가!’ 하니 정철이 불쾌히 여기며 그만두었는데, 항상 남들과 말할 때 반드시 김천일을 조롱하여 ‘조선의 몽기(蒙倛)061) 로 내가 알고 있는 이가 일곱 명인데 김천일이 바로 첫번째이다.’고 하였다. 왜적을 영남(嶺南)에서 추격할 때에 미쳐, 심유경(沈惟敬)이 우리 나라 장사(將士)에게 서신을 보내어 ‘왜적이 진일 전주에서 불리했던 것에 분개하여 반드시 함락시키려고 하니 여러 장수는 우선 성을 비우고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권율(權慄) 및 고언백(高彦伯) 등은 모두 멀리 피하였으나 김천일은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등 여러 장수와 함께 뜻을 더욱 굳게 가다듬고 향불을 피워 군중과 죽음으로 지킬 것을 맹서하고는 8일 밤 9일 낮을 쉬지 않고 전쟁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늘에서 비가 연일 퍼부어 성대(城臺)가 무너져 내리고, 효건(驍健)한 장수로서 온 군사가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던 황진이 또 탄환을 맞아 죽었으며, 적병이 더욱 급하게 성을 타고 올라오니 혈전을 벌인 지 9일째 되는 날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김천일이 군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죽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니 반드시 한 놈의 적이라도 죽이고 죽어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싸우다 죽는 것은 영광스럽고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욕이 된다. 우리들이 지금에야 죽는 것도 너무 늦은 것이다. 다만 나는 의리상 흉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그의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矗石樓) 아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당시에 그를 애도하는 사람이 ‘살아서는 의로운 장수가 되었고 죽어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으랴.’ 하였는데 행조(行朝)에서는 창의사(倡義使)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 김천일은 평생동안 충의의 마음을 지켜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으니 어려운 일이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모두 해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척계광(戚繼光)은 심지(心智)가 출중한 사람인데 이 사람의 문집(文集)이 있는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지지당집(止止堂集)》이 있는데 아직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병서(兵書)로는 또 《무경총요(武經總要)》가 있습니다."
하고, 김명원이 아뢰기를,
"《무경총요》에는 병가(兵家)의 모든 법이 실려 있는데 망기점법(望氣占法) 같은 것도 모두 있습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킬 때 보니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池)라 하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기구로 함락시키던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불랑기(佛狼器)·호준포(虎蹲砲)·멸로포(滅虜砲) 등의 기구를 사용하였습니다. 성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서 여러 포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는 것 같았는데 이윽고 불빛이 하늘에 치솟으며 모든 왜적들이 붉고 흰 깃발을 들고 나오다가 모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중국 병사들이 우르르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시간이나 서로 대치하였는가?"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진시(辰時)에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사시(巳時) 초에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군병은 결코 믿고 의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후세에는 화공(火功)이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군사의 수효가 3만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많은 것이 아닌데 평소에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잘 싸웠던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처음에 진주(晉州)의 백성으로서 살아 남은 자가 없다고 여겼었는데, 지금 듣건대 생존자가 많이 있다고 하니 내가 매우 놀랍고 기쁘다. 옛날에, 죽은 자를 조문하고 살아 있는 이를 위문한 일이 있었으니, 교서(敎書)를 내려 긍휼히 여기는 뜻으로 위유하고 은택을 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사자에게 처자(妻子)가 있으면 복호(復戶)를 해주고 사절자(死節者)는 탐문(探問)하여 정표(旌表)하고 또 씨앗을 주어 농사를 짓게 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감사하며 기뻐할 것이니 이러한 곡절을 교서에 아울러 기입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領相)이 말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49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3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농업-권농(勸農) / 왕실-국왕(國王) / 군사-병참(兵站) / 군사-병법(兵法) /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풍속-풍속(風俗) / 인물(人物)
- [註 061]몽기(蒙倛) : 도깨비.
○戊戌/上御便殿, 引見大臣及備邊司有司堂上。 上曰: "見張都司 【名三畏。】 咨文, 則山東糧不給云, 何意耶?" 領議政柳成龍曰: "問諸胡澤, 則答曰: ‘吾是山東人, 山東風濤極險, 難可輸來’ 云。 戚金曰: ‘中朝亦因糜費極繁, 國儲匱乏’ 云。 給事中題本曰: ‘國儲, 無逾月之糧’ 云。 以此觀之, 中朝亦患軍食之不裕矣。 大槪必須先輸軍糧, 然後發兵出來, 而今則不然, 似無發兵之勢矣。" 上曰: "顧侍郞若欲給之, 則可給, 而必以我國船隻輸來矣。 船隻宜先整齊, 顧侍郞處, 更爲移咨何如?" 兵曹判書李德馨曰: "事已急矣, 顧侍郞處, 何不移咨?" 上曰: "頃者聽周遊擊 【名弘謨。】 言, 則以正言之, 此人本與沈惟敬一樣, 而今乃不同。 中原公論之發, 以此可知矣。" 工曹判書(余命元)〔金命元〕 曰: "發兵則早晩必欲爲之, 但緣糧草不備, 爲此不得已權宜之事矣。" 兵曹參判沈忠謙曰: "見許晋問之, 則石尙書 【名星。】 旣已洞知, 而但與宋應昌分厚, 故未免牽制之私矣。" 命元曰: "李提督 【如松。】 宋經略 【應昌。】 , 時未復命云。" 上曰: "降表在顧侍郞處, 而不爲進奏云。" 成龍曰: "周弘謨齎來榜文, 未可必信。 恐以他榜文, 示之也。" 上曰: "過慮也。 不必强爲他榜文, 以阿諛於我國也。" 忠謙曰: "天將乍見人顔色, 詐爲說辭以待之, 乃其常態也。 弘謨之言, 亦豈可盡信乎?" 成龍曰: "往來文書, 前則不書示, 而今獨書示, 此亦可疑。" 興源曰: "飢民死亡, 近來尤多, 盡割食其肉, 只是白骨, 而積于城外, 高與城齊矣。" 成龍曰: "非但食其死人之肉, 生者亦相殺食, 而捕盜軍少, 不能禁戢。" 德馨曰: "父子兄弟, 亦相殺食, 而楊州民, 相聚爲盜, 捉人食之。 必須措置, 開可生之路然後, 庶不相殺。 不然, 難禁矣。" 忠謙曰: "淸正通書於慶州, 必有所以然也, 而劉摠兵不爲應變, 移陣湖南, 周弘謨亦背沈惟敬之事, 而入去賊中, 行長、淸正, 必有一番刦掠之事, 深可慮也。 且淸正之心, 未能詳知, 而劉總兵以圖關白之言入送, 則宜發大怒, 而今乃不然者, 未知其由矣。" 上曰: "於卿等諸意何如?" 成龍曰: "兩賊 【行長、淸正】 爭功不睦之語, 則自前聞之矣。 然千里之外, 只據文書, 豈能盡知其曲折乎? 總兵移駐南原, 必恐賊有動兵之漸故耳。 忠謙之慮, 不無其理。 總兵移陣之後, 大丘以北直路, 已爲無人之境, 無復梗礙矣。 常時以爲麥秋, 倭必來犯云。 兩麥成熟之後, 賊若侵突, 則人民尤不能堪矣。 我國飢餓已甚, 而彼賊多般賑濟云, 飢民附賊者必多矣。" 忠謙曰: "淸正在北道, 立功多, 而行長(而)〔以〕 邀天使爲務。 以情理推之, 則兩賊之牴牾, 可想矣。" 上曰: "此賊相持至今者, 必待沈惟敬之事, 而周弘謨又反其所爲, 倭賊必激怒矣。 其榜文, 若假借爲之, 以示我國而已, 則猶可免, 若實然則必發怒矣。 一來攻刦, 恐不得免也。" 成龍曰: "周弘謨, 若實持其榜文以去, 則其無謀甚矣。" 上曰: "其榜文眞假, 何以知之乎?" 成龍曰: "此事非前日所爲者, 而今始爲之, 又有他榜文云。 以此見之, 頃日所示者, 似是假件也。" 德馨曰: "此亦未可謂之必然也。 自前天將輩, 言則或有詐僞之時, 文書則曾無假爲之時, 而戚金亦言, 顧侍郞若來, 則與(宋總略)〔宋經略〕 所爲, 必不同矣。 今此榜文, 不可必其假爲矣。" 成龍曰: "晋州城陷時, 客軍多入, 號令不一, 故至於失敗。 人事若盡, 則晋州, 大邑也, 必不至於陷沒。" 上曰: "將士多死。 非惟此爲可惜, 自此之後, 皆以守城爲戒, 是尤不幸也。 予意晋州陷城, 勢所必至。 前後兵力, 强弱懸殊, 前則 【金時敏爲牧使時, 守嶺南倭賊, 再來侵犯, 皆得全城。】 倭賊以一枝之兵來圍, 故得保, 後則以大勢之賊來迫, 而期於必陷, 城外垓子, 賊兵決之使乾, 因以塡坑而迫城登之云矣。" 成龍曰: "金千鎰軍, 皆市井之人也。 以如此之軍, 其能守之乎?" 上曰: "金千鎰在江華時, 不爲鍊兵乎?" 成龍曰: "奚暇鍊兵? 且性實迂拙矣。" 上曰: "金千鎰心則貴矣, 性果迂疎人也。"
【史臣曰: "知臣莫如君。 自上論千鎰, 可謂明知千鎰爲人矣。 千鎰器量褊隘, 才略短(涉)〔淺〕 , 豈是撥亂濟時之材乎? 但其心, 誠可貴, 亂初以閑散, 在全羅道 羅州村, 聞賊兵入京城, 車駕西遷, 涕泣慷慨, 募聚鄕井義士, 僅三百餘名, 直向京城。 其時全羅巡察使李洸, 敗軍於龍仁地, 累萬之兵, 一時退遁, 千鎰孤軍, 見彼敗北, 亦不搖動, 如赴樂土, 其得士卒心, 可知矣。 及其保守江華也, 聚兵三四千, 攻勦全陣之賊, 皆不利, 而設伏於京江近處, 前後斬馘幾四百餘級, 又誘出京中附賊之民, 使屬於己。 以此江華一島, 賴以得保, 上通行朝, 下達兩湖, 功亦不少矣。 氣甚孱弱, 身且多病, 久在軍中, 憂勞成疾, 日中啜粥, 夜分坐睡, 而一團誠心, 未嘗少懈, 見人語及行朝間關之狀, 則必嗚咽流涕。 自少與鄭澈友, 澈之子, 又爲其女壻, 故交道特厚, 而實則每事矛盾。 澈爲體察使, 自行朝過江華府, 千鎰就訪討賊之策, 則澈方與其客飮酒, 千鎰失聲痛哭曰: ‘此何等時, 而乃敢如是?’ 澈不悅而止。 常與人語, 必嘲千鎰曰: ‘朝鮮蒙倛, 吾所知者七人, 而金千鎰乃第一’ 云。 逮其追擊嶺南之時, 沈惟敬通書我國將士曰: ‘倭衆憤前日不利於晋州, 必欲陷之, 諸將姑宜空城以避’ 云, 則權慄及高彦伯等, 皆遠避, 千鎰與慶尙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復讐將高從厚等諸將, 勵志益堅, 焚香誓衆, 以死守之, 八夜九晝, 督戰不休, 而不幸天雨, 連日暴注, 城臺頹落, 而黃進以驍健之將, 一軍倚以爲重者, 又中丸而死, 賊兵登城益急, 血戰第九日, 城遂陷。 千鎰謂其衆曰: ‘爾輩等死, 須殺一敵而死, 當此時, 戰死爲榮, 偸生爲辱。 我輩今日之死, 亦已後矣。 但我則義不死兇賊之手。’ 遂與其子象乾, 投矗石下南江而死。 時人有哀之者曰: ‘生爲義將, 死爲忠臣, 有何憾焉?’ 行朝賜號曰倡義使。 千鎰平生所守, 忠義之心, 始終不(諭)〔渝〕 , 可謂難矣。"】
《紀效新書》, 兵判解見乎?" 德馨曰: "未盡解。" 上曰: "戚繼光, 心智出衆之人也。 此人文集有之乎?" 德馨曰: "有《止止堂集》, 而未得見之矣。 兵書則又有《武經總要》矣。" 命元曰: "《武經總要》, 備載兵家諸法, 如望氣占法, 亦皆有之矣。" 德馨曰: "平壤陷城時見之, 則雖金城湯池, 亦無奈何。" 上曰: "以何器, 陷之乎?" 德馨曰: "以佛狼器、虎蹲砲、滅虜砲等器爲之。 距城五里許, 諸砲一時齊發, 則聲如天動, 俄而火光觸天, 諸倭持紅白旗出來者, 盡僵仆, 而 天兵駢闐入城矣。" 上曰: "相持幾時乎?" 德馨曰: "辰時接戰, 巳初陷城矣。" 上曰: "以我軍決不可憑仗矣。 且後世非火攻, 不能成功矣。 軍數三萬云, 此不多, 而素所節制者, 故能戰矣。" 上曰: "晋州之民, 初以爲無噍類, 今聞多有遺存者, 予甚驚喜。 古有弔死問生之事。 若下敎書, 諭以矜恤之意, 而有恩澤之事, 則何如?" 柳成龍曰: "戰死者之有妻子者, 復之, 死節者, 訪問旌表, 且給種子, 使之耕種, 則人皆感悅。 此等曲折, 竝入於敎書中爲當。" 上曰: "依領相言爲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49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3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농업-권농(勸農) / 왕실-국왕(國王) / 군사-병참(兵站) / 군사-병법(兵法) /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풍속-풍속(風俗)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