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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49권, 선조 27년 3월 18일 병신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왜적의 상황을 중국 장수 주홍모에게 알리다

상이 승문원에 명하여 근일의 적정을 써서 유격 주홍모에게 보이라고 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금년 정월 28일 별장 한명련(韓明璉)이 비직(卑職)에게 보내온 정문(呈文)에 의하면 ‘정예(精銳)를 영솔하고 도로 가에 매복하여 있다가 적병 1명을 생포하여 왔는데 통사가 조사한 결과 신은질이(信隱叱已)라는 자임을 알았다. 그의 공초(供招)에 「본영(本營)의 군병은 아직 바다를 건널 확실한 기약이 없으며, 12월에 중국 장수 1명이 강화(講和)를 논의하러 와서 대명(大明)의 아름다운 소녀를 일본 왕자에게 시집 보낼 것을 허락하는 약속을 했다. 」고 하였다. 또 「본국에 있을 때 듣기로는 관백이 군사를 일으킨 원인은 먼저 조선을 정벌하고 중국을 침범하여 천하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이었다. 중국 장수 심 참장(沈參將)060)평양에 나와서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에게,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이처럼 서로 싸우는 것은 매우 옳지 않은 일이라고 정성껏 설명하면서 많은 은냥(銀兩)을 뇌물로 주며 강화를 청하므로 이 때문에 군병을 경성(京城)으로 퇴각시켰고 심 참장이 또 휴전을 청하므로 군사를 거두었다. 이번에 심 참장이 또 행장의 진영에 들어와서 혼인의 일을 서로 의논하여 5월로 기약하였는데, 만일 약속이 이행되면 회군(回軍)할 것이지만 약속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신병(新兵)을 더 뽑아 전라도를 거쳐 점차 중국까지 침략할 것이며 또 남만국(南蠻國)에 병사를 청하여 절강(浙江) 등의 곳에 군사를 상륙(上陸)시켜 남과 북에서 협공한다면 중국은 쉽게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러 우두머리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서생포(西生浦)에 5천, 임랑포(林郞浦)에 3천, 기장(機張)에 3천, 동래(東萊)에 1천, 부산포(釜山浦)에 1만, 양산(梁山)구법곡(仇法谷)에 3천, 좌수영(左水營)에 3백, 김해(金海)에 1만 8천, 안골포(安骨浦)에 2천, 가덕(加德)에 7백, 웅천(熊川)·제포(薺浦)에 4천, 거제(巨濟)에 7천여 명인데 귀국에서 만일 2∼3월 이전에 기회를 타서 거사하면 다행히 초멸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시기를 놓치고 일본의 정병 예졸이 4∼5월 사이에 모두 나오면 조선의 병마가 비록 천만이라 하더라도 아마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국인으로서 적의 포로가 되었던 오경희(吳景禧)의 공초에 의하면 ‘적에게 포로가 되어 왜국의 산강 고수마(山江古水麻)라는 곳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대명(大明)의 객상(客商)들이 많이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대명의 상관(上官) 한 사람은 나이가 약 50여세 되었다. 그가 나를 보고 측은히 여겨 밥을 지어 먹여주기에 내가 글을 써서 상관에게 묻기를 「이미 대명의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 성명 및 관향을 듣고 싶다. 」고 하였더니, 상관이 회답하기를 「나는 대명강서(江西) 길안부(吉安府) 만안현(萬安縣)에 살던 허의후(許儀後)란 사람으로 융경(隆慶) 4년에 포로로 여기에 오게 되었는데 지금 이미 24년이 지났다. 」고 써 주었다. 11월 중에 나는 허의후와 함께 군량 수송선을 타고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는데 깊숙한 지역을 살펴보니 왜적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고, 한창 성곽을 수축하고 집을 지으면서 대명의 병마를 추격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금년 5월에 또 앞서 말한 허의후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본국의 영등포(永登浦) 언덕에 올랐는데 허의후는 그대로 영등포에 머물면서 약을 짓는 것으로 업을 삼았고 나는 기회를 틈타 도망쳐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49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38면
  •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註 060]
    심 참장(沈參將) : 심유경.

○上命承文院, 以近日賊情, 書示遊擊弘謀。 其略曰:

本年正月卄八日, 據別將韓明璉呈, "卑職率領精銳, 按伏路邊, 生擒一賊, 前來譯審得信隱叱已。 供稱: ‘本營兵衆, 時無渡海的期, 十二月內, 有天將一員, 前來講和, 約以大明美少女, 許嫁日本王子。’ 又稱: ‘在本國時, 聽得關白起兵根因, 先伐朝鮮, 侵犯中原, 要亂天下。 有天將沈參將, 出來平壤, 向平行長, 懇說生于一天之下, 如是交爭, 甚是不宜, 多賂銀兩請和, 以此退兵京城, 參將又請成故捲兵。 今者參將, 又入行長營裏, 相議婚姻事, 定期五月, 如約就行回軍, 不如約, 添調新兵, 由全羅道, 順搶中原, 又請兵於南蠻國, 渡軍於浙江等處, 南北挾攻, 則中原指期可圖, 衆酋所言如此。 日本軍兵見住之數, 西生浦五千, 林郞浦三千, 機張三千, 東萊一千, 釜山浦一萬, 梁山仇法谷三千, 左水營三百, 金海一萬八千, 安骨浦二千, 加德七百, 熊川薺浦四千, 巨濟七千餘名。 貴國若於二三月前, 乘機擧事, 庶可勦滅, 如失其時, 日本精兵銳卒, 四五月間, 掃盡出來, 朝鮮兵馬雖千萬, 恐難抵敵。’" 本國被擄人吳景禧供稱: "被賊搶擄, 前到倭山江古水麻地面, 本地多有大明客商來住。 有大明上官一人, 年約五十餘歲。 見俺惻然, 炊飯以饋, 俺寫問上官, ‘旣係大明人, 爲因甚事, 來到這裏? 願聞姓名及貫籍。’ 上官回寫, ‘俺是大明 江西 吉安府 萬安縣許儀後, 隆慶四年, 被搶來此。 今已經二十四歲。’ 寫罷。 十一月內, 俺與許儀後, 同坐運糧船隻, 還到對馬島, 看覷有深處, 倭賊不記其數, 方修城蓋房, 說稱要截追擊大明兵馬。 本年五月內, 又與前項許儀後, 同船過海, 於本國永登浦登岸, 儀後仍留本浦, 劑藥爲業, 俺竢便逃出。"


  • 【태백산사고본】 29책 49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38면
  •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