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대 도감에서 왜적에 인질로 잡혀 있는 중국 장수 담종인의 상황 등을 보고하다
접대 도감(接待都監)이 아뢰기를,
"상공(相公) 담종인(譚宗仁)의 사촌 담풍시(譚馮時)가 적진으로부터 나와 어제 밤에 서울에 들어왔는데, 대략 물어보니 담종인의 교대를 재촉하는 일로 서쪽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감으로 하여금 술자리를 마련하여 오래도록 적진 중에 있었던 괴로움을 위로하고 적진의 소식을 자세히 질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접대 도감 당상인 형조 판서 신점(申點)과 호조 참판 성영(成泳)이 아뢰기를,
"신들이 담풍시를 접대 도감으로 맞아들여 다주(茶酒)를 접대하고 조용히 담화하면서 먼저 담 유격(譚遊擊)의 침소와 식사가 편안한지를 물은 다음 ‘무슨 일로 고 군문(顧軍門)에게 가느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왜적이 바다를 건너갈 기약이 없으므로 총독(總督)에게 보고하여 「자주 차인(差人)을 보내 왜적이 돌아갈 것을 재촉하라」고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습니다. 또 현재 왜적이 얼마나 되며 군량 비축은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군병의 수는 곳곳에 진을 치고 웅거하여 있으니 제대로 확실하게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4만이며, 군량은 그들의 나라로부터 계속 운반하여 많이 쌓아 두었으며, 또한 집과 방을 극히 정결하게 꾸며놓고 이 나라의 사람들과 해물(海物)을 팔고 사서 편안히 앉아 잘 먹고 있다. 그들에게 별다른 번요와 해로운 일이 없으니, 어찌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또한 심유경(沈惟敬)은 왜인과 마음을 같이하여 모든 논의가 있을 때마다 현소(玄蘇)와 소서행장(小西行長) 및 부통사(符通事)라고 이름하는 사람과만 비밀히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는데, 그 말하는 것은 필시 이 나라의 3도를 잘라 준다는 의논일 것이다. 우리 담야(譚爺)는 이치에 의거하여 곧바로 배척하기를 「너희들이 반드시 속히 바다를 건너간 다음에야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하였는데, 이때문에 왜인들이 심유경에게는 후한 뇌물을 주고 담공(譚公)은 박대하였다. 심유경은 은냥과 보물을 많이 받아 왔고 담야는 구류한 채 내보내지 아니하여 그 고통이 막심하니, 이는 반드시 심유경이 이간질을 하여 그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우리 나라의 포로로 잡힌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포로된 사람이 비록 많았으나 나이 젊고 쓸 만한 사람은 그 나라로 들여보내고 그 나머지는 돌아가며 사환으로 사고 팔았는데 굶주려 죽은 이가 많다고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심유경은 돌아가는데 담야만 혼자 남아 있게 되었으므로 우리들이 칼을 뽑아 모욕을 주니 심유경이 굴복하고 사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심공이 나오면 왜적이 돌아갈 것인가?’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봉작(封爵)과 조공 바칠 것을 청한 것이 모두 허락된다면 돌아갈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심공이 비록 온다 해도 반드시 돌아갈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대개 그 말을 들어보면 심유경과는 화목하지 못한 듯하니 심유경을 허물하는 말 역시 다 믿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행장이 가등청정과 친밀한지를 물었더니 ‘행장은 관백의 사위를 잘 섬겨서 청정의 병권을 모두 빼앗았으므로 청정이 유감을 품어 둘 사이가 마침내 불화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행주(行酒)를 마치고 통사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도원수의 군사가 땔감이나 하는 자질구레한 적군을 죽일 때마다 왜적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분통해 하며 행장에게 고하여 반드시 보복하려고 하는데, 행장은 화친을 청하는 대사(大事)가 앞에 닥쳐 있으므로 우선은 놔두고 허락하지 않고 있다. 또 유 총병의 군사는 근래에 전혀 토벌에는 뜻이 없고 다만 물건의 매매만을 일삼고 있으므로 왜적들이 적국(敵國)으로 대하지 않고 있는데, 유 총병이 호남으로 진(陣)을 옮긴다면 원수는 반드시 적에게 환란을 당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소소한 적이 죽임을 당하면 행장은 그때마다 화를 내며 「우리 군병이 조선 사람을 죽이는 것이냐, 조선 사람이 우리 군병을 죽이는 것이냐?」 하며 매번 담야에게 따져 질책하니, 이 다음부터는 소소한 도적들을 구태여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 의도를 살피건대, 담공이 매우 곤욕스러우므로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계사(啓辭)를 비변사에 내리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4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34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외교-왜(倭)
○接待都監啓曰: "譚相公宗仁四寸譚馮時, 自賊中出來, 昨夕入京。 大槪問之, 則以宗仁交代催促事, 西歸云。" 傳曰: "令都監設酌, 以慰久在賊中之意, 賊中奇別, 仔細問啓。" 接待都監堂上刑曹判書申點、戶曹參判成泳啓曰: "臣等邀致(憑時)〔馮時〕 于都監, 饋以茶酒, 從容談話, 先問譚遊擊眠食安否, 次問因何事, 前往顧軍門, 則答曰: ‘倭賊渡海無期, 故(搪)〔塘〕 報于總督, 屢遣差人, 催督入歸矣。’ 且問賊徒見在幾何, 軍餉儲置幾何, 則答曰: ‘軍數則處處屯據, 未能的知其幾何, 大約三四萬矣。 軍糧則自其國陸續搬運, 多數積峙, 且修治房舍, 極其精潔, 而與此國人買賣海物, 安坐好食。 其於渠等, 別無擾害之事, 安有退還之理乎? 且沈惟敬則與倭同心, 凡論議之時, 只以玄蘇、行長及符通事稱名人密語, 不許他人聞知, 其所言, 必是割給此國三道之議也。 吾譚爺, 則據理直斥曰: 「爾等必須速爲渡海然後, 凡事可成矣。」 以此倭人厚賂惟敬, 而薄待譚公矣。 惟敬多受銀兩寶物而來, 譚爺則拘留, 不許出送, 其苦莫甚。 此必惟敬之行間。’ 且問我國被據人幾何, 則答曰: ‘當初被擄者雖多, 年少可用人, 則入送于其國, 其餘則轉輾買賣使喚, 而多有餓死者’ 云。 且曰: ‘沈惟敬出來, 譚爺獨留, 俺等拔劍致辱, 惟敬屈而謝罪。’ 問曰: ‘沈公出來, 則倭賊入歸乎?’ 答曰: ‘請封請貢, 皆準則入歸, 不然則沈公雖來, 必無入歸之理。’ 大槪聽其言辭, 則與沈不和, 其咎沈之言, 亦不足盡信。 且問: ‘行長與淸正親密乎?’ 答曰: ‘行長善事關白之壻, 盡奪淸正兵權, 淸正憾恨, 兩間遂不相和矣。’ 行酒畢, 潛語通事曰: ‘都元帥之軍, 每殺薪草零賊, 賊中諸將, 皆含憤告于行長, 必欲報復, 行長以請和大事當前, 姑置不許。 且劉摠兵軍, 近來專無致討之意, 只事買賣, 故倭賊等, 不以敵國待之矣。 劉將若移陣湖南, 則元帥必被賊患。’ 且言曰: ‘零賊見殺, 則行長輒怒曰: 「我軍殺朝鮮人乎? 朝鮮人殺我軍乎?」 每致詰責於譚爺, 此後零賊, 不須厮殺。’ 云。 其意思, 似是譚公不勝困辱, 而有此說也。" 傳曰: "此啓辭下于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29책 4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34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