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좌병사 고언백이 왜 장수 가등청정이 화친을 요구했음을 알리자 비변사에서 처리방법을 지시하다
경상 좌병사 고언백(高彦伯)의 장계(狀啓)에,
"서생포(西生浦)의 피로인(被擄人) 정연복(鄭連福) 등이, 왜장이 보낸 문서를 가져온 것에 대하여 도원수(都元帥)에게 나아가 보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와 회답하는 내용을 통의(通議)하여 의정(議定)하되, 중국 장수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 가부(可否)를 알고 난 다음에 처치할 일로써 일찍이 장계를 올렸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일본 장관(將官) 진영에 회답하기를 ‘우리 조선이 건국한지 2백여 년 동안에 일본과는 조금도 혐원(嫌怨)이 없었는데 일본이 명분도 없이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 종묘와 사직을 허물고 우리 생령(生靈)을 살해했으며 병사를 주둔한 지 3년인데도 아직 거두어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보내온 서찰에 도서(圖書)도 없고 또 착서(着署)도 안 되어 있으니 몹시 의심스럽다. 만약 특별한 뜻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는 것이야 어찌 어렵겠는가. 조선 총병 고(高)가 서명(署名)하는 것도 무방하다 했으므로 이에 의하여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5일 만인 오늘, 전에 왔던 정연복이 또 왜장의 회답서 2통을 받아 왔는데 1통은 두 왕자에게 보내는 것이고 1통은 신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자에게 보내는 것은 굳게 봉하였는데, 다섯 군데에 보내는 서계(書契)와 아울러 도원수 권율에게 보냈습니다. 왜장의 문서는 뒤에 적어 올리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상의하여 선처케 하소서."
하고, 같은 날 성첩(成貼)한 접반사 김찬(金瓚)과 도원수 권율의 장계에,
"지난날 왜추(倭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보낸 문서에 대해서는 좌병사 고언백(高彦伯)의 치보(馳報)를 통하여 신 율이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독부(督府)에서 그 글을 보고 ‘이 일은 매우 좋다. 급히 병사에게 분부하여 답하게 하기를 「갑자기 그대가 글을 보내왔는데 그대의 서신을 기다린지 오래이다. 다만 도독부(都督府) 대장(大將)인 유(劉)가 조선의 원수와 더불어 진영 안에 머물러 있으므로 결코 나의 임의대로 회답할 수 없다. 마땅히 품의(稟議)하여 회보할 것이니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 하는 뜻으로 개유(開諭)하되, 나온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먼저 보내면서 그 가운데 영리한 사람에게 급히 기마(騎馬)를 주어 내보낼 일로 전언(傳言)케 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언백에게 비밀히 통지하니, 청정(淸正)이 내보낼 때에 5일을 기한으로 하였다고 하기에, 세 사람과 울산(蔚山)의 교생(校生) 장희춘(蔣希春)을 시켜 신 율이 지휘한 말을 가지고 곧 돌아가게 하였는데 미처 전하고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부(督府)에서는 또 곧 글을 바꾸어 봉하고 병사로 하여금 차인(差人)을 들여보내도록 하면서 말하게 하기를 ‘지난번 차인을 들여보냈을 때 회답한 것은 신실(信實)하나 5일을 기한으로 했기 때문에 그 기일에 맞추지 못할까 하여 먼저 대강대강 써서 회답하였다. 지금 천조의 대장 유야(劉爺)가 족하(足下)의 편지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긴요한 말을 하려 하나 서찰로는 뜻을 전하기가 어려우므로 한두 명 적당한 사람을 보내오면 긴요한 말을 해서 보내리라 한다. 족하는 절대 의심하지 말고 속히 차송(差送)하라. 만약 의심된다면 지금 보낸 사람을 잠시 억류하여 볼모로 삼아 족하가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안 될 것이 없다. 심 유격이 족하의 편지가 왔다는 것을 알고 행장에게 밀통하였으니 행장은 반드시 족하에게 통지할 것이다. 심 유격이 족하 편지의 진본을 본 것이 아니고 전해 들었을 뿐이니 행장이 비록 편지를 보내더라도 절대 믿지 말라.’는 내용을 병사의 뜻인 것처럼 말해 보내게 하면서, 만일 청정이 사람을 뽑아 보내면 왜의(倭衣)를 벗어버리고 중국 옷으로 갈아 입혀 대동해 오게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관(軍官)을 병사에게 보냈더니 이 편지를 미처 들여보내기도 전에, 전날 고언백이 보낸 문서를 가지고 간 세 사람과 장희춘(蔣希春)이 청정의 답서와 임해군(臨海君) 및 순화군(順和君)에게 보내는 봉서(封書)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독부(督府)에 고하니 독부에서 중국인 1명을 뽑아 장희춘 등과 같이보내고 또 적당한 사람을 차송하여 몰래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으므로 병사로 하여금 군관 가운데 신실한 한 사람을 따로 가려 보내도록 했습니다.
독부에서 청정에게 전후로 타이른 글과 청정이 고언백에 보낸 답서 및 임해·순화 두 군(君)에게 올리는 글, 그리고 신 율(慄)이 고언백에게 지휘한 말을 아울러 감봉(監封)해 올립니다. 청정의 두 편지를 계달(啓達)하오니 예람(睿覽)하신 다음 즉시 돌려보내는 일과, 청정의 화압(花押)047) 을 왕자에게 물어 진가(眞假)를 알아보고 통유(通諭)할 일을 분부하도록 하소서.
신 율이 독부에 고하기를 ‘저들에게 화평할 뜻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로서야 어떻게 이 적들과 이 일을 차마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니, 독부에서 ‘그대 나라 군신(君臣)의 원통한 마음이야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바다에서 배를 운행하는 자가 비록 동쪽으로 향하려 하나 풍세가 순탄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노질을 하다가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니 풍세를 좇아 순리대로 운행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대개 행장과 청정은 서로 불화한 듯하니 심 유격이 행장에게 왕래하는 것을 청정은 필시 못마땅하게 여길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 화친을 요구하는 그 교활하고 거짓된 꾀야 예측할 수 없지만 실정에서 나왔을 수도 있으니 천천히 회보(回報)를 기다렸다가 다시 치계(馳啓)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적추(賊酋) 청정이 서신을 보낸 뜻을 일단은 헤아릴 수 없고 총병의 처치도 어떤 뜻인지 모르겠으나 다만 기틀에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은 듯합니다. 전후로 보낸 왜적의 편지에 모두 천정(天正)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이번에는 문록(文錄) 3년으로 고쳐 썼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서명한 것은, 전에 청정이 쓴 것을 보았는데 이것과 다름이 없으니, 분명히 청정에게서나온 것으로 중간에서 거짓 지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 청정이 행장과 틈이 생겨 공을 다투느라 불목하는 뜻에서 나왔다면, 이간을 많이 하여 그 당(黨)으로 하여금 서로 어그러지게 하도록 틈탈 수 있는 기회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옛사람의 이른바 ‘약속이 없이 화친을 청하는 것은 모략이다.’라는 것이니, 우리로서는 더욱 엄중히 방비하고 시시 각각 새로운 변란에 대비함으로써 충돌의 변에 대응해야 할 것이요,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간악한 꾀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왕래하며 계책을 쓰고 회답할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모두 유 총병의 처치에 달려 있으니 도원수(都元帥)로 하여금 십분 비밀을 지켜 상의하여 선처하게 하고, 아울러 여러 장수를 단속하여 군기(軍機)가 조금이라도 누설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4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26면
- 【분류】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 [註 047]화압(花押) : 수결(手訣).
○慶尙左兵使高彦伯狀啓: "西生浦被擄鄭連福等, 持來倭將所送文書, 都元帥處通議出見便否, 修答辭說議定, 天將一一指示, 得知可否, 然後處置事, 曾已狀啓矣。 都元帥權慄, 回答日本將官陣下, ‘我朝鮮建國二百餘年, 與日本小無嫌怨, 而日本無名動衆, 毁我廟社, 殺我生靈, 屯兵三載, 尙不捲歸, 未知是何故也? 且來札無圖書, 又不着署, 可疑可疑。 如有別情, 一見何難? 朝鮮總兵高着名無妨云, 故依此成送。’ 第五日今者, 前日出來鄭連福, 又受倭將回答書二封, 一封則兩王子前所送, 一封則臣處所送云。 王子前所送, 則封不動, 竝五處所送書契, 輸送于都元帥權慄處。 倭將文書則後錄上送, 令該曹商確善處。" 同日成貼, 接伴使金瓚、都元帥權慄等狀啓: "前日倭酋淸正所送文書, 因左兵使高彦伯馳報, 臣慄已爲馳啓矣。 督府得見其書曰: ‘此事極好, 卽卽分付兵使回答曰: 「據汝來書, 望汝之信久矣。 但天將都督大將劉, 與本國元帥, 留陣內面, 決不可擅答。 當稟議回報, 愼勿致疑。」 以此意開諭, 出來三人中, 二人爲先入送, 其中伶俐一人, 急速給騎馬出送事, 使之傳言。’ 密通于高彦伯, 則淸正出送之時, 以五日爲限, 故三人乃蔚山校生蔣希春, 將臣慄指揮之辭, 卽卽入歸, 未及傳而來。 督府又卽換書封, 令兵使差人入送, 且曰: ‘頃者差人入送之時, 所答實信, 而限以五日, 故或不及其期, 先自草草回答矣。 今者天朝大將劉爺, 聞足下有書, 要說眞話, 而難以書札傳意, 望足下差一二的當人來, 說了眞話以送。 足下千萬勿疑, 作速差送。 如或遲疑, 今送差人, 姑留爲質, 以待其回, 亦無不可。 沈遊擊知足下之書來, 密通於行長, 行長必通於足下矣。 沈遊擊非得見足下書眞本, 出於傳聞, 行長雖或通書, 千萬勿信。’ 以兵使之意言送, 萬一淸正差人出送, 則脫去倭衣, 變着我國衣帶來, 勿令他人知之云。 故委遣軍官于兵使處, 而此書未及入送之際, 前日高彦伯所送文書持去三人及蔣希春, 持淸正答書臨海、順和君處, 封書出來, 則告于督府, 則督府, 委差唐人一名, 蔣希春等一同起送。 又令差送的當人, 陰察形勢, 故令兵使別擇軍官中信實一人, 入送矣。 督府前後諭淸正書及淸正答高彦伯與呈臨海、順和兩君處書, 臣慄指揮高彦伯之辭, 竝爲監封上送。 淸正兩書則啓達, 睿覽後, 卽卽還送事, 淸正花押, 問于王子處, 比對眞假, 通諭事分付矣。 臣慄告督府曰: ‘渠雖有請和之意, 俺等豈可忍與此賊論此事乎?’ 督府曰: ‘該國君臣, 怨痛之心, 何可涯極? 行船海上者, 雖欲指東, 風勢不順而强掉, 則必敗矣, 不若因勢而利導之也云云。’ 大槪行長、淸正, 互相不和, 而沈遊擊往來行長處, 淸正意必以此持難。 差人要和, 狡詐之謀, 雖不可測, 而亦恐或出於實情, 徐待回報, 當更馳報。" 啓下備邊司, 備邊司回啓曰: "賊酋淸正, 投書之情, 旣爲叵測, 而總兵處置, 亦未知何意, 但機關所係, 則似爲非輕。 賊書前後年號, 皆稱天正, 而今此改書(文錄)〔文祿〕 三年, 其所着署, 則曾見淸正所書, 與此無異, 其出於此賊, 而非中間假作則明矣。 萬一淸正與行長有隙, 出於爭功不睦之意, 則多爲之間使其黨, 自相携貳, 不無可乘之機。 不然則古人所謂, ‘無約而請和者, 謀也。’ 在我尤當嚴設防備, 刻新待變, 以應衝突之變, 切不可少有懈怠, 陷於奸計。 至於往來行計報答與否, 都在劉總兵處置, 令都元帥, 十分秘密, 商議善處, 兼且約束(謀)〔諸〕 將, 無使軍機少有透漏。"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28책 4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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